Mag-log in같은 밤, 유진희는 거실 통창 앞에 서 있었다.
강남의 불빛이 차갑게 펼쳐져 있었다. 새 병원으로 옮긴 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진료와
회의, VIP 고객 관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병원이 아니었다.
멈춘 엘리베이터.
제 품으로 무너진 여자.
가느다란 허리와 떨리던 숨.
진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사라졌어야 할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왜 잊히지 않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름도 몰랐다. 다시 만날 가능성조차 희박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그날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이유가 정말 엘리베이터 때문뿐이었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여자 역시 같은 밤, 남편 곁에서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며칠 뒤.
서윤을 학원 앞에 내려준 미래는 집 앞 파리크라상에 들렀다.
오후의 베이커리는 한산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른한 온기와 함께 매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미래가 트레이를 들고 진열대 앞에 섰을 때 익숙한 호칭이 들렸다.
“어머, 진원 어머니.”
같은 동, 같은 반 학부모 두 사람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만 나누는 사이. 딱
그만큼의 거리만 유지하는 관계였다.
“이번에 6학년이 13반까지 늘었다면서요?”
“우리 반에도 전학생이 둘이나 왔대요. 분당에서 온 쌍둥이라던데.”
그때 미래의 휴대폰이 연달아 진동했다. 새로 만들어진 6학년 1반 학부모 단톡방이었다.
회장 어머니의 긴 인사가 올라오자 답장이 순식간에 줄을 이었다.
[△△ 엄마입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 엄마입니다. 반갑습니다.^^]
[◇◇ 맘입니다.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았다. 짧게, 신속하게, 절대로 튀지 않게. 미래도 두 줄짜리 인사를 남겼다.
[안미래: 안녕하세요. 진원 엄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바로 그때, 단톡방의 흐름을 깨뜨리는 장문이 올라왔다.
[지호·지원 어머니: 안녕하세요.^^ 분당에서 이사 온 쌍둥이 엄마입니다. 아직 대치동 생활이 많이 서툴고 낯설어요. 저는 워킹맘이고 남편과 강남역 근처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시거나 한약이 궁금하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많이 지도해 주세요.^^]
요란하던 단톡방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읽음 31. 답장 0.]
옆의 엄마가 혀를 찼다.
“이것 봐. 단톡방에 자기소개서를 투고했네.”
“누가 저렇게 개인 SNS처럼 써?”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죠.
미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도 ‘분당에서 온 눈치 없는 엄마’의 편으로 묶일 터였다.
하지만 미래는 휴대폰을 들었다.
[안미래: 지호·지원 어머니, 반갑습니다.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얼어붙었던 단톡방이 다시 움직였다.
[△△ 엄마: 반갑습니다.^^]
[□□ 맘: 환영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미래의 한마디가 안전하다는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인사가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옆의 두 엄마가 미래를 힐끗 봤다. 왜 굳이 위험을 감수했느냐는 눈빛이었다.
미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답장 하나 없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유리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딸랑―.
화사한 인상의 여자가 들어왔다. 빵을 들었다 놓으며 이방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여기 어떤 빵이 제일 유명해요?”
미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조금 전 단톡방을 얼어붙게 만든 바로 그 여자였다.
“몽블랑하고 베이글이 인기 많아요.”
“정말 감사해요.”
여자는 베이글을 집다 미래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아까 제일 먼저 댓글 달아주신 진원 어머니세요?”
“네, 맞아요.”
“세상에. 저 정말 구원받은 기분이었어요. 아무도 답을 안 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거든요.”
최수진은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조금의 계산도 없이 감탄했다.
“프로필 사진도 아름다우셨는데 실제로 보니까 훨씬 더 예쁘세요.”
예상하지 못한 노골적인 찬사에 미래가 수줍게 웃었다.
미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손을 내민 이 해맑은 여자가, 훗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침묵을 함께 지켜줄 사람이 된다는 것을.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미래는 침대 한쪽 끝에 모로 누워 있었다. 욕실에서는 성웅이 샤워하는 물소리가 쏴아 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이불 속에서 미래는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켰다 껐다. 메시지 창에는 진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진희 씨, 내일 오전 11시에 우리 엄마가]거기까지 쓰고, 미래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엄마가 당신을 만나러 간다고. 당신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그때, 욕실의 물소리가 뚝 그쳤다.미래는 황급히 쓰던 글자를 하나하나 지웠다. 그리고 휴대폰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은 채 눈을 감았다.딸깍, 욕실 문이 열리고 축축한 수증기와 함께 성웅이 걸어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낸 성웅은,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미래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위스키 가져와."언제나처럼 명령조였다. 부탁도, 질문도 아닌.미래는 잠시 그대로 누워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안방 거실 홈바에서 위스키를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미래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왜 내 말을 안 믿어요. 수아랑 통화했어요. 수아가…… 서윤이 미국 들어갈 때 같이 햄튼 집에 가자고 전화한 거예요."성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래에게로 걸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성웅의 눈빛이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두 손으로 미래의 양어깨를 꽉 움켜쥐었다."햄튼?"성웅이 미래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꿰뚫을 듯한 눈빛이었다."햄튼 놀러 가자고 했는데, 눈물 짜내면서 얘기해?""…….""말해 봐. 내가 너한테 못 해 준 게 뭔데."어깨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통증에 미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성웅 씨…&hellip
끊긴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도 못한 채, 미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내일 오전 열한 시. 유진희 원장님한테.엄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진희를 빤히 쳐다볼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자, 손끝부터 싸늘하게 식어 갔다.그때, 손 안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미래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또 엄마일까. 떨리는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본 미래는, 그제야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화면에 찍힌 이름은 제시카(수아)였다."미래야…… 너 진도가 어떻게 된 거야? 말 좀 해 봐, 궁금해 미치겠는데……. 내가 시차가 완전 꼬여서 정신 못 차리다가 이제야 좀 잡혔어. 중간에 파리 다녀왔었거든. 그래서, 지금은 대체 어떤 상태인 거야?"수아의 밝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래의 목울대가 뜨겁게 막혀 왔다.미래는 안방 문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문 너머 어딘가에 정례 이모가 있었다. 미래는 휴대폰을 든 채 안방 욕실로 걸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샤워 부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참아 왔던 눈물이 툭툭 터져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에서 정례 이모가 고개를 내밀었다."아이고, 사모님 오셨어요.""네, 이모. 다녀왔어요."평소 같으면 "점심은 드셨어요?" 하며 따라 나왔을 정례 이모가, 오늘따라 행주를 쥔 채 미래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미래는 그 어색함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안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침대 끝에 걸터앉은 미래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보았다. 부재중 전화 세 통. 그리고 짧은 메시지 하나.[엄마: 전화 받아.]미래는 긴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채 두 번도 가기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야. 너 그놈, 월드베스트피부과 유진희 원장 맞지?"인사도 없었다. 다짜고짜 날아든 그 이름에, 미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엄마가 그걸, 어떻게……."
미래의 몸이 굳은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다.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엄마'라는 두 글자가, 서늘한 손처럼 미래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재산 증여 소송, 절대 헤어질 생각도 하지 말라던 차가운 목소리, 숨 막히는 그 집의 공기까지. 잊고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진희가 숨을 고르며 미래를 올려다보았다. 받으라고도, 받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래의 허리를 감싼 손에 가만히 힘을 줄 뿐이었다.지이잉—. 지이잉—.미래가 진희의 두 뺨을 감싸 쥐고 내려다보았다. 젖은 눈동자 속에 처음 보는 단단한 빛이 서려 있었다.미래가 진희의 입술을 삼키듯 입을 맞추었다. 엎어진 휴대폰이 몇 번 더 웅웅 울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 소리마저 두 사람의 거친 숨결에 묻혀 사라졌다.진희는 미래를 끌어안은 채 몸을 돌려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그리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깊이 미래 안으로 파고들었다."아…… 진희 씨…… 아……!"더 이상 아무것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엄마도, 남편도, 세상의 시선도. 미래는 진희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 리듬에 온몸을 맡겼고, 진희는 미래의 이름을 부르며 점점 더 깊고 뜨겁게 미래를 채워 나갔다.마침내 정점의 순간, 미래의 등이 활처럼 휘어 올랐다."하아…… 아아……!"억눌렸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는 듯한 신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진희 역시 미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낮고 깊은 숨을 토해 냈다.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떨리며, 하나로 녹아내렸다.격렬했던 숨결이 천천히 잦아들었다.진희는 땀에 젖은 미래를 품에 깊숙이 끌어안은 채, 오래도록 그 등을 토닥였다. 아까 미래가 잠들기 전 하지 못했던 말이, 이제야 목울대를 넘어 올라왔다."미래 씨가 내 시간을 빼앗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진희의 손끝이 미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오히려 그동안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내 삶에, 미래 씨가 들어와서……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줬어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가족 말고
진희의 손끝이 풀어진 블라우스 자락을 어깨 너머로 천천히 밀어냈다. 실크가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며, 하얀 어깨선과 매끄러운 팔이 오후의 햇살 아래 드러났다.진희는 서두르지 않았다. 드러난 어깨에 한 번, 쇄골에 한 번, 입술을 꾹꾹 눌러 새기듯 입을 맞추고 나서야, 미래의 등 뒤로 손을 돌려 레이스 속옷의 후크를 풀었다.가느다란 끈이 어깨를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그 순간, 진희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미래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머금은 뽀얀 살결 위로, 둥글고 탐스러운 가슴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진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 끝은 이미 꽃봉오리처럼 발갛게 피어올라 있었다."……미래 씨, 진짜 예뻐요."낮게 가라앉은 진희의 목소리에, 미래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진희는 미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때보다도 깊이,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그건 단순한 애무가 아니었다. 15년 동안 홀로 얼어붙어 있던 그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듯, 상처 입은 마음 위에 향기를 한 겹 한 겹 덧입히듯. 진희의 손바닥이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감싸 쥐었다가 놓아주고, 그 위로 따스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혀끝이 꽃봉오리를 천천히 맴돌다 머금을 때마다, 미래의 몸이 저도 모르게 활처럼 휘었다.평소보다 더 느리게, 더 부드럽게, 더 소중하게.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아…… 아……."미래의 입술 사이로 녹아내리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진희 씨…… 너무 좋아요……."그 목소리에 진희가 애무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발갛게 달아오른 미래의 얼굴. 진희의 입가에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미소가 번졌다.진희는 몸을 일으켜 미래의 입술에 촉, 입을 맞추었다.그러자 미래가 진희의 뒷머리를 감싸 쥐더니, 살며시 자신의 가슴께로 다시 끌어내렸다. 멈추지 말라는 듯, 더 해 달라는 듯. 그리고 부끄러움에 젖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진희 씨…… 깨물어 주세요."진희의 눈썹이 장난스럽게 올라갔다."우리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