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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정산의 밤, 12분 뒤에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3 12:03:23

11시 48분.

문서고의 스탠드 불빛이 서윤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초침 소리가 방 안을 천천히 갉아 먹었다. 세아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재촉하는 눈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 나와도 받아 내겠다는 눈이었다.

"서준."

"응."

"저, 오늘 아침에 거짓말했어요."

도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계약서에 새로 나온 건 없다고 했는데, 있었어요. 새벽에 혼자 거실에 나가서 읽었어요. 어머니가 강태성의 서재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문장이요. 그게 이 사람이라는 걸, 저는 이 문을 열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요."

"……."

"말하지 못한 건, 당신이 또 혼자 감당하려 할까 봐서예요. 당신 삼촌의 핏줄이 얽힌 일이니까. 제가 먼저 정리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게 잘못인 줄 알면서도."

말을 끝내자 가슴이 텅 비었다. 도헌은 한참 그녀를 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난 숨이 아니었다. 오래 참았던 것이 빠져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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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2화. 갑이 된 비서

    언덕 위 저택의 거실에는 장작 난로가 타고 있었다.세아는 현관을 지나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소파와 의자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서윤, 최 이사, 서린, 민재, 그리고 한쪽 벽에 기대 서 있는 박지윤까지. 지금까지 세아의 곁에서 의심과 도움이 번갈아 오가던 얼굴들이 한 방 안에 다 모여 있었다. 모두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다들 알고 있었어요?""아니요."서윤이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었다."저는 오늘 오후에야 여기로 불려 왔어요. 언니가 밴에 타기 직전에 녹음을 틀어 달라는 부탁만 받았고요. 이유는 못 들었어요.""저도요."서린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저는 대표님 약혼자 역할이나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저도 판 위의 한 조각이었네요."은서가 난로 옆 의자에 앉았다.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도헌이 세아 앞으로 반 걸음 나서며 물었다."어머님. 이제 설명해 주세요. 왜 이렇게까지.""앉아라. 길지 않을 거다."세아와 도헌이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은서가 가죽 계약서를 무릎 위에 올렸다."강태성은 지금 구치소에 있지만, 닷새 뒤 보석 심문이 열려. 그의 변호사는 28년 전의 계약서를 법정에 낼 거야. 거기 제0조가 있으니까. 서윤은 그 조항에 따라 강태성의 소유가 된다는 주장이지.""그건 말이 안 되는 조항이잖아요.""법은 말이 안 되는 계약도 서명이 있으면 한동안은 효력이 있다고 본단다. 그래서 그 효력을 없앨 방법을 20년 동안 찾았어."은서가 계약서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낡은 종이가 아니라 새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문장의 형식은 오래전 서류와 똑같았다.[제99조. 본 계약의 갑은 을의 딸이 선택한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다.]세아의 눈이 커졌다."그건.""내가 28년 전에 몰래 넣은 조항이야. 강태성은 이 계약서의 모든 장을 읽지 않았어. 읽은 사람은 자기 비서가 이렇게까지 준비할 줄 몰랐으니까. 그의 서재 금고 속 원본에도 이 조항이 남아 있을 거다.""그럼 제가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1화. 제5조, 서로를 가장 먼저 의심하라

    세아는 밴 쪽으로 반 걸음을 내딛다가 멈췄다."세아 언니. 빨리 타요. 시간 없어요."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흘러나왔다. 억양도, 숨을 들이켜는 간격도 조금 전과 똑같았다. 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은 같은 말을 같은 숨으로 두 번 하지 못한다."……녹음이네."그녀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 구두 소리가 대리석을 찢듯이 달려왔다. 회전문이 거칠게 돌았다. 도헌이었다. 재킷은 풀어헤쳐지고 넥타이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로비에서 보여 준 얼음 같은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세아!""서준, 연기는.""끝났어. 연기는 끝났다고."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밴 뒷문이 완전히 열리고 두 개의 팔이 튀어나왔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세아의 코트 자락을 낚아챘다. 도헌이 그 손목을 비틀어 쳐 냈지만, 다른 손이 그의 어깨를 밀었다. 두 사람은 엉킨 채 밴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문이 쾅 닫히고 잠금 소리가 울렸다. 밴이 급발진했다.어둠이었다. 창문은 검게 칠해져 있었고, 천장에서 푸른 비상등 하나만 희미하게 번졌다. 세아는 도헌의 가슴 위에 엎어진 채였다. 그의 팔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다친 데 없어?""없어요. 서준은.""없어. 팔이 조금.""조금이요?""조금 많이."도헌이 낮게 웃다가 숨을 삼켰다. 세아가 그의 소매를 걷자 팔뚝에 길게 쓸린 자국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을 쥐었다. 밴은 어딘가로 계속 달렸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는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그때 천장 한쪽에서 작은 화면이 켜졌다. 얼굴은 없었다. 검은 화면 위에 흰 글씨만 떠올랐다.[환영합니다. 제5조를 읽을 시간입니다.]글씨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계로 한 번 거른,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소리였다."두 분의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로비에서 계약서를 찢던 순간, 대표님의 눈이 흔들리는 것까지. 그래서 제5조를 먼저 알려 드립니다."화면에 문장이 떠올랐다.[제5조. 연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0화. 놓은 척, 놓지 않은 손

    세아는 종이를 등 뒤로 숨기지 못했다.도헌이 문틀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맨발이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세아는 한참 망설이다가 계약서를 건넸다. 새벽 4시의 거실에는 스탠드 불빛 하나뿐이었다. 그가 글씨를 읽는 동안 그녀는 그의 턱 근육이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제4조. 계약자 한 사람은 내일 해가 지기 전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놓아야 한다.""……서준.""놓지 않으면 발신인이 대신 놓는다."도헌이 마지막 줄까지 읽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화를 내거나 흔들리지 않는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네. 해가 지기까지 열두 시간쯤 남았어.""그 아래 적힌 이름 봤죠. 아버지 이름이요.""봤어.""저는 안 믿어요. 아버지가 이런 조항을 쓸 이유가 없어요.""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어."도헌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어두웠다. 화난 눈이 아니라, 이미 어떤 결심을 내린 사람의 눈이었다."나는 당신을 놓지 않을 거야. 해가 져도, 발신인이 누구든. 그걸 먼저 말해 두려고.""서준, 그러면 발신인이.""대신 놓겠지. 그 방식이 뭔지 모르니까 더 조심해야 하고. 그래도 내 손으로는 안 놓아."세아의 가슴이 낮게 울렸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았다. 맨살에 닿는 체온이 따뜻했다."그럼 열두 시간을 어떻게 쓸 거예요.""당신 옆에서.""병원에 먼저 가야 해요. 아버지한테 직접 물어봐야죠.""그건 해 뜨면.""지금은요."도헌이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마가 맞닿았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숨만 따뜻했다."지금은 두 시간쯤, 이 열두 시간이 정말 열두 시간인지 확인하고 싶어.""어떻게요.""당신이 내 곁에서 놓이지 않는 걸로."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처음에는 가볍게 스쳤다. 세아가 숨을 들이켜자 그가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29화. 링거를 바꾼 손

    사진 속 여자의 입꼬리는 세아가 매일 거울에서 보던 각도였다."……이 사진, 어디서 찍은 거예요.""병실 천장 모서리에 달려 있던 구형 카메라예요. 3년 동안 아무도 열어 보지 않은 저장 장치에서 제가 꺼냈어요."서윤은 아침 일찍 안가 거실에 와 있었다. 최 이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고 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도헌은 세아 옆에 앉아 말없이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세아의 손을 감싸 쥔 채 놓지 않았다."그날 저는 스물여덟 살 간호사였어요. 최 이사님이 넣어 준 자리였고요. 맡은 일은 하나였어요. 한도식 회장님 곁에서 이상한 일이 생기면 막는 것.""그래서 막았어요?""반만요."서윤이 사진 속 링거대를 손끝으로 짚었다."쓰러지신 직후 회장님 링거에는 이미 약이 들어 있었어요. 홍기범의 사촌이 처방한 거였고, 오래 투여하면 심장이 멈추는 종류였어요. 저는 그걸 알아챘고, 밤 2시에 병실 불을 껐어요. 그런데."그녀가 말을 멈추고 세아를 보았다."그 어둠 속에서 회장님이 제 손목을 잡으셨어요."세아의 숨이 얕아졌다."의식이 있으셨어요. 말은 못 하셨고요. 눈으로, 손가락 힘으로 저한테 신호를 보내셨어요. 약을 빼지 말라고. 빼면 홍기범이 알아챈다고. 대신 심장을 멈추지 않을 만큼만, 수치를 낮춰서 계속 흘려 보내라고.""……왜요.""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판단하셨으니까요. 강태성이 한진정밀을 삼키는 동안 딸이 먼저 위험해지지 않도록, 가장 약한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고."도헌이 낮게 숨을 삼켰다. 세아의 손이 그의 손 안에서 떨렸다."그러니까 아버지가 직접.""링거를 바꾸라고 시킨 사람은 한도식 회장님이에요. 저는 3년 동안 그 약의 양을 조절하면서, 회장님이 깨어날 날을 기다렸어요.""그 3년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거죠. 은서 어머니도요.""은서 여사님은 알고 계셨어요. 제가 아니라 회장님께 직접 들으셨대요. 눈을 뜨고 처음 하신 말씀이, 세아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라는 거였고요."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28화. 정산의 밤, 12분 뒤에

    11시 48분.문서고의 스탠드 불빛이 서윤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초침 소리가 방 안을 천천히 갉아 먹었다. 세아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재촉하는 눈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 나와도 받아 내겠다는 눈이었다."서준.""응.""저, 오늘 아침에 거짓말했어요."도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계약서에 새로 나온 건 없다고 했는데, 있었어요. 새벽에 혼자 거실에 나가서 읽었어요. 어머니가 강태성의 서재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문장이요. 그게 이 사람이라는 걸, 저는 이 문을 열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요.""…….""말하지 못한 건, 당신이 또 혼자 감당하려 할까 봐서예요. 당신 삼촌의 핏줄이 얽힌 일이니까. 제가 먼저 정리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게 잘못인 줄 알면서도."말을 끝내자 가슴이 텅 비었다. 도헌은 한참 그녀를 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난 숨이 아니었다. 오래 참았던 것이 빠져나가는 소리였다."고마워.""……네?""말해 줘서. 그리고 나를 지키려고 거짓말했다는 거, 알아. 그래도 다음엔 같이 정리하자. 나는 당신이 혼자 짊어지는 게 제일 무서워.""그럼 서준 차례예요."세아가 그의 소매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서윤 씨가 그랬잖아요. 당신이 먼저 말할 비밀이 있다고."도헌이 시선을 내렸다. 시계는 11시 55분을 가리켰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3년 동안 잠을 못 잤다는 말, 사실이야. 그런데 한 가지를 빼고 말했어. 당신이 입사하기 전 3년 동안, 나는 한 달에 두세 번 당신 집 앞에 차를 세웠어."세아의 숨이 멎었다."가까이 가진 않았어. 올려다보기만 했어. 4층 창문에 불이 켜져 있다가 꺼지면, 그때서야 눈을 조금 붙일 수 있었어. 당신이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버지를 되찾으려고 어떤 얼굴로 3년을 버텼는지, 전부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나는 당신 앞에 나서지 못했어.""……그럼 처음 만난 날 저를 알아본 게.""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27화. 제3조, 먼저 거짓말하는 사람

    아침 햇살이 침실 커튼 틈으로 가늘게 들어왔다.세아는 눈을 뜬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에 거실에서 읽은 문장들이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올랐다. 언니. 엄마. 강태성의 서재에서 낳은 아이.옆에서 도헌이 몸을 뒤척였다. 팔이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시트 아래 맨살에 닿는 체온이 어젯밤 그대로라서, 세아는 숨이 조금 아팠다. 그의 가슴이 등에 맞닿아 있었다. 심장이 천천히 뛰는 것이 피부로 전해졌다."……깼어?"잠긴 목소리가 목덜미 위로 떨어졌다. 낮고 느린 진동이 살갗 위에서 울려, 세아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방금요.""거짓말.""네?""당신 숨이 안 잔 사람 숨이야. 새벽 3시에 한 번 일어났고."세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도헌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척추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그녀의 숨이 얕아졌다. 허리 끝에서 멈춘 손이 한 번 머뭇거리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계약서 봤지.""……네. 다시 한번 읽었어요. 새로 나온 건 없었고요."반은 사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입안이 썼다. 세아가 도헌에게 직접 거짓을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말해야 해. 하지만 동생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하면 이 사람은.'도헌이 눈을 떴다.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아주 느리게, 도장을 찍듯이. 그 입술이 어깨선을 따라 목으로 올라왔다."서준, 아침부터.""아침이라서.""출근해야 하는데.""알아. 그래서 5분만.""5분이 5분으로 끝난 적 있어요?""없지."그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돌려 마주 보게 했다. 아침 빛이 그의 어깨와 가슴 위를 길게 가르고 있었다. 세아의 시선이 그 위에 머물렀다. 어젯밤 자신의 손톱이 남긴 가느다란 붉은 줄이 어깨뼈 쪽에 남아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보지 마요.""당신이 남긴 거잖아.""그러니까요.""자랑스러운데."도헌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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