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수를 못 봤네요. 할아버지, 봐주셔서 감사드려요.”조백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서정후는 한껏 뿌듯한 얼굴이었다.“내가 봐주지 않았으면, 너 벌써 장기 말 하나도 못 남기고 전멸했겠지!”백림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님처럼 장기 잘 두시는 분, 처음 봤어요.”서정후는 찻잔을 들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장기는 전쟁터와 같아서, 수싸움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파놓은 함정을 꿰뚫어 보는 눈도 있어야 하지.”그때 욕실에서 내려온 유정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잠깐 머리 감고 올라갔다 왔을 뿐인데, 두 사람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진전이 한두 걸음이 아닌 듯했다.백림은 유정을 바라보며, 여자의 뽀얀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럽게 말했다.“머리 다 말려. 감기 걸려.”유정은 서정후 옆에 앉으며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괜찮아, 금방 마를 거야.”“안 돼. 너 원래 몸에 냉기 많은 체질이잖아.”백림은 이마를 찌푸리고는 서정후에게 말했다.“할아버님, 잠깐만요. 유정의 머리 좀 말려주고 올게요.”서정후는 백림의 세심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녀와.”백림은 유정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백림은 여자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그리고 유정의 허리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며 몸을 기울여 입을 맞췄다.유정은 눈을 감고 백림의 입맞춤에 응했다.뜨겁고 강렬한 백림의 입술이 여기저기 파고들자, 유정의 다리에 힘이 풀려 점점 서 있기도 힘들어졌다.유정은 백림의 셔츠를 움켜쥐고 숨을 헐떡이다가, 눈가가 촉촉하게 물든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머리 말려주는 게 목적은 아니었구나?”백림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계속 장기 뒀다간 할아버님이 나 멍청한 줄 알고 너 안 주실까 봐.”유정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장기 두는 거, 그렇게 재미없었어?”백림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할아버님이랑 두는 거 은근히 재밌어. 근데 네가 오면,
집에 돌아오니 서정후는 마당에 나와 있었는데 어지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툭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게, 아직도 철 안 든 애냐?”유정은 웃으며 말했다.“누가 집을 나갔다 그래요? 진짜 가출이면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보내고, 걱정되게 만들어야죠!”말을 마친 유정은 성큼 다가가 서정후의 팔짱을 끼었다.“조백림이 일부러 돌아가면서까지 개현거리 회운방에서 오리구이 사 왔어요. 이거 드시고 인제 그만 화 푸세요, 네?”서정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오리 한 마리 사 왔다고 나를 매수할 수 있을 것 같아?”“할아버지 화해 신청을 이렇게 하는 데 더 튕기지 마시고 화해하시죠!”유정이 눈짓을 하며 말하자, 서정후는 비웃듯이 웃었다.“화해 싫으면 이대로 끝내시던지요. 그리고 장기판 다 풀었잖아요. 약속하신 말은 지키셔야죠?”“풀었다고? 그깟 장기 말 하나 더 얹었다고 그러는 거야?”유정은 눈을 크게 떴다.“그거 알아보셨어요?”서정후는 당당하게 말했다.“너 그 꼼수로 날 속이려고 했냐?”“맞아요, 맞아. 우리 할아버지는 제갈량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명석하신데, 제가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떠들었네요.”유정은 서정후의 팔을 꼭 안고 장난스럽게 웃었다.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백림이 차를 주차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할아버님.”백림이 공손히 인사하자, 서정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그래.”태도는 미적지근했지만, 일단 응답했다는 건 백림을 손주사위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짐은 위층에 올려놓을게요.”백림이 말하자, 유정은 그에게서 오리구이를 받아 들었다.“이건 제가 주방에 두고 올게요.”서정후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얼굴빛은 한결 부드러워졌다.서정후도 유정이 백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가 막으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바라는 건 단 하나 백림이 유정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 그거 하나
고효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백림을 바라봤다.“권한진 일로 꼭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네요.”이에 백림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효석 씨 잘못은 아니에요.”그러나 효석은 고개를 저었다.“경성처럼 편한 데서 오래 살다 보니, 바깥세상이 어떤지도 잊게 되네요.”효석은 백림에게 앉으라 손짓하고는 조심스레 화제를 옮겼다.“사실 유정이 일로도 한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서정후 할아버지 성격이 좀, 말씀은 독하게 하셔도 속은 여려서요.”“무슨 말씀하셨다 해도 꼭 오해 없이 받아주셨으면 해요.”그 말에 백림은 미간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당연하죠. 유정의 할아버지면 제 할아버지기도 하죠. 손주 혼 좀 낸다는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효석은 미소 지으며 백림에게 차를 따라주자, 백림은 잔을 받으며 눈을 들었다.“혹시 유정을 좋아하나요?”차라리 애매하게 돌려 말하느니, 똑 부러지게 물어보는 게 나았다. 효석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유정이 이번에 경성에 올라왔을 때, 서정후 할아버지께서 저한테 연락하셨어요.”“그때는 둘이 정말 헤어진 줄 알고 솔직히 약간의 기대는 했죠.”효석 또한 백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오늘 보니 완전히 마음 접었어요. 유정이가 얼마나 조백림 씨를 좋아하는지 보였어요.”“그리고 저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저는 유정이와 그냥 어릴 때부터 친구였을 뿐, 앞으로도 그 이상은 없을 거라고요.”백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이에 효석은 호쾌하게 웃었다.“유정이 참 맑고 솔직한 사람이니까, 백림 씨 꼭 잘 대해줘야 해요.”백림도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죠.”식사를 마친 뒤, 일행은 식당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이때, 효석은 유정에게 다가와 말했다.“원래는 백림 씨께 감사 인사드리려고 자리를 만든 건데, 괜히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결국 네 탓이야.”유정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괜찮아. 우리 둘 다 아무렇지도 않아요.”효석은 백림에게도 인사를 건넸다.“경성에
권한진은 문득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얼굴이 굳었다.권씨 집안과 조씨 그룹은 경성에서 몇 가지 협력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 중이었다.그런데 자신이 그 조씨 그룹의 대표를 건드린 셈이라니. 이게 잘못되면 사업에도 타격이 클 게 뻔했다.아버지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제명은 물론 뼈도 못 추릴 일이었다.“형님?”옆에서 함께 온 친구 하나가 조심스럽게 눈짓을 보냈다. 이는 계속 밀어붙일까 하는 의미였다.남자가 입을 떼는 순간, 식당 안에 있던 보안 인력들이 백림의 앞에 일제히 나서며 벽처럼 섰다. 그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랭하게 한진 무리와 대치했다.누가 이곳 주인인지, 누가 월급 주는 사람인지 다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한진은 잽싸게 태도를 바꿨다.“이런, 이런. 사장님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조씨 그룹이랑 저희 집이랑도 오래된 사이인데, 제가 눈이 어두워서 그만...”한진은 효석을 향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효석아, 너도 말을 좀 해주지. 사장님 오신다고 했으면, 내가 그냥 문 앞에 나가서 기다리지 않겠냐?”효석은 그 입에 발린 소리를 듣고도 냉소를 숨기지 못했다.“그냥, 오해가 풀리면 다행이지.”한진은 황급히 자기편 애들에게 말했다.“오해였어, 오해! 저분은 우리 식구야.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다 같이 사장님께 한잔 올리자고.”그러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우리 아버지한테도 전화 드려야겠네. 사장님 경성 오시면, 예전부터 많이 배워오라고 하셨는데...”“전화 안 하셔도 돼요.”백림은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이번엔 사적인 일로 온 거라 굳이 귀찮게 할 필요 없어요.”이에 한진은 빠르게 눈치를 챘다.“그럼, 사적인 모임으로 생각하고 즐기겠습니다. 괜한 말 꺼내서 죄송하네요.”남자는 곧 무리를 이끌고 다시 룸으로 들어갔다.식당 매니저는 보안팀을 해산시키고, 이만형은 백림을 직접 에스코트했다.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식탁 위에 놓인 2천만 원짜리 술과 20만 원짜리 푸아그라가 그 어느 때보다 웃기게 보였다.
“고효석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권한진, 너 이대로 못 참겠으면 법적으로 해결해. 여기서 사람 모아놓고 모욕 주지 말고!”한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고효석, 우리 관계야 원래 좋았지. 근데 오늘은 내가 네 체면 못 봐준다.”“내가 경성에서 이런 꼴 당했는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고개 숙이고 지나가라고? 내가 그렇게 살진 못해.”남자는 눈을 좁히며 덧붙였다.“이 일은 이 일이고, 나중에 네 체면은 내가 챙겨줄게. 지금은 저 자식이 내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사과해야 끝나. 그걸로 정리해.”이때 강리나가 화가 나 소리쳤다.“권한진, 백림 씨는 외지에서 와서 우리 도와준 사람이야. 너 진짜 그 정도도 못 참아?”“내가 외지인한테 이 꼴 났는데도 참으라고?”한진은 화분대 위에 있던 도자기 화병을 들고 바닥에 내리쳤다.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동시에 복도는 정적에 잠겼다.한진 옆에 있던 무리 중 누군가가 나섰다.“형님, 화내지 마세요. 직접 손 안 쓰셔도 돼요. 우리가 처리할게요.”그 말과 동시에 그 무리는 백림을 둘러싸듯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진은 호텔 매니저를 향해 노려보며 말했다.“당신들 손대면 이 가게도 박살 나니까 알아서 해!”유정은 반사적으로 백림 앞을 막아섰고 낮게 말했다.“할아버지께 전화할게.”“괜찮아. 그럴 일 아냐.”백림은 담담한 표정으로 유정의 손을 감싸 쥐고, 식당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렸다.“지금 당장 이 인간들 전부 내쫓으세요.”식당 매니저는 난처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그게 혹시 손님께서 먼저 사과해 주시면, 오늘 식사는 저희가 전부...”권한진은 연간 수억 원을 쓰는 VIP 고객이었기에, 그를 무시하긴 어려운 입장이었다.백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당신이 책임 못 지는 입장이면, 윗사람 부르세요. 이 식당 총괄이 이만형 본부장이죠?”“그분을 아시나요?”매니저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아니까 당장 부르세요.”백림이 단호하게 지시했다.매니저는 곧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조백림은 앞으로 더 나아가려 했지만, 유정이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됐어. 그만해.”잠시 뒤, 고효석과 다른 일행들이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가 얼어붙었고, 김제일은 다급히 응급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서비스 직원에게는 약상자를 가져오라며 지시했다.효석이 물었다.“무슨 일이야?”한진은 욕설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렸다. 이에 백림이 다시 앞으로 다가서자, 한진은 겁을 먹고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유정이 백림을 막아섰고, 효석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권한진 씨가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 했어. 내 남자친구는 그걸 듣고 참지 못한 거고.”효석은 순간 멍해졌다. 돈으로 유정을 매수한다니?“뭐라고?”효석은 곧장 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너 뭐라고 했어?”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묻은 피를 보다가, 주변에 있던 직원에게 명령했다.“여기 매니저 데려와. 보안팀도 전부 불러. 당장!”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말투는 노골적으로 백림을 위협하는 어투였다.“오늘은 아무도 못 나가. 다 끝장 보는 거야.”효석은 화를 억누른 채 소리쳤다.“권한진, 너 지금 뭐하는 거야?”한진은 자기 이마를 가리키며 효석에게 소리쳤다.“권한진, 여긴 경성이야. 내 구역에서 내가 맞았는데, 네가 아무 일 없던 척하라고? 난 살면서 이렇게 모욕당한 적 없어!”한진은 이를 악물고 직원을 향해 소리 질렀다.“뭘 멍하니 서 있어? 아까 부르라던 사람들은 어딨어!”잠시 뒤, 식당 매니저와 보안팀이 뛰어들듯 도착했고, 매니저는 한진을 알아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권한진 대표님,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병원은 무슨 놈의 병원!”한진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소리쳤다.“오늘 이 가게 문 닫아. 파리 한 마리도 못 나가게 해!”매니저는 당황한 얼굴로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저희 매장엔 파리 없어요.”“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한진의 얼굴이 뒤틀렸다.“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