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소희는 강씨 노인, 오 씨와 작별을 고했다. 강씨 가문 운전사가 그녀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9시 정각, 소희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VIP 통로를 빠져나오는 임구택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늘씬한 몸매에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못 본 지 며칠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임구택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두 팔을 뻗고 그녀를 품에 꽉 껴안고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소희는 힐끔 두 사람 쪽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더니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언제 가요?”“원래 10시 비행기였는데 지금은 못 가요." 임구택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 그 호텔로 갈까요?”그의 말에 소희는 귓불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녀는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그의 눈에 비친 절박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져 거절할 수가 없었다.지난번 호텔의 스위트룸. 문을 닫자마자 임구택은 현관 벽에 소희를 밀쳤다. 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조용히 물었다. “제가 보고 싶었나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소희의 이마에 키스했다.소희는 그의 키스에 말문이 막혀 두 팔을 그의 목덜미에 걸쳤다. 임구택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소희 씨가 없는 동안 전 잠을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자도 꿈에는 온통 소희 씨뿐이었어요. 소희 씨, 진짜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소희는 촉촉한 눈망울을 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임구택을 꽉 감싸 안고 끊임없이 키스를 했다.••••••소희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시간은 오후 1시였고 임구택은 어디로 갔는지 방에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몸이 나른하여 다시 자리에 누웠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베이지색 얇은 셔츠를 입은 임구택 들어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소희 씨, 이제 일어나요.”얇은 담요를 뒤집어쓴
임구택은 그녀를 데리고 3층 침실로 갔다. 침실에는 커다란 발코니가 있었고, 발코니에 서면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과 멀리에서 로마사 건축 양식의 대성당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샤워하러 갈래요?”임구택이 소희에게 백허그를 하며 물었다. 소희는 몸을 돌려 임구택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발뒷꿈치를 들고 임구택에게 입을 맞추었다.임구택은 곧 그녀를 끌어안고 욕실로 향했다.욕실에서 침대까지, 소희는 어렴풋이 자신이 아직 운성의 스위트룸에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장장 열 몇 시간 동안 지구의 반을 건너 파리로 왔는데 단지 장소만 바뀐 채 두 사람은 서로를 쟁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임구택은 그런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왜 웃어요?”소희는 그를 빤히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말해줘요. 같이 웃자고요.”임구택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농담을 하며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자신을 설레게 한 소희의 보조개도 한 입술에 삼켰다.*둘은 파리에서 하루를 보낸 뒤, 노르웨이로 날아가 오로라를 함께 봤다. 눈 속을 달리고, 한밤중에 순록 썰매를 탔다. 도심에서 멀어지니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해 보였다. 두 사람은 이곳에 온 다른 연인들처럼 포옹하고 키스하며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바빴다.노르웨이를 떠난 임구택은 소희에게 도박의 통쾌함을 맛보게 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두 사람은 오후 내내 도박장에 머물렀고, 저녁 무렵 소희는 고급 VIP룸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려고 중간 복도를 지나갔다. 한 독일 남자가 복도 창가에 서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는 소희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온몸이 팽팽해지며 소희의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Bach.”그의 옆에 있던 금발의 한 여자가 소희 쪽을 바라보았다. 예쁜 여자한테 자연스럽게 적대적인 감정이 들었다.독일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희가 사
남자는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천천히 설명했다.“이 여자는 제 여자친구예요. 저는 이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소희는 금발의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 여자가 당황하고 긴장한 채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이미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빛이 반짝였다. ‘남자 눈치를 많이 보는가 보군.’소희는 예전에는 불곰 곁에 있는 그 누구도 절대 봐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Susan.”남자는 그녀를 비밀 요원 시절 때의 이름으로 불렀다.“전 이미 불곰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저를 제발 믿어주세요.”소희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마찬가지로 영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여기서 나를 본 건 다 잊어버려. 그렇지 않으면.”그녀는 남자 뒤에 있는 금발 여인을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저 여자와 함께 여기에서 흔적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게 할 거야.”Bach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습니다.”그의 말에 소희는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Bach는 즉시 길을 양보하고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소희가 가고 나서야 금발의 여자가 남자에게로 달려와 그의 팔짱을 끼며 한껏 당황해하며 물었다.“누구야?”남자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 “아주 무서운 사람.”불곰 세력은 작은 나라 정도는 가볍게 없앨 수 있었다. 소희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길거리의 개들처럼 여기저기 널려있었다.그녀는 확실히 무서운 사람이다.••••••고급 VIP 홀.임구택은 베란다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돌아와 보니 소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막 그녀를 찾으러 가는데 문밖에서 종업원이 들어와 영어로 속삭였다.“대표님, 조금 전 대표님 여자 친구분께서 화장실에 갔는데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따라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람을 보낼까요?”그의 말에 임구택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 그는 빠른
아파트는 위아래 2층으로 되어있었는데 노인은 1층에서 살고 청아는 2층에 산다.청아는 중국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는 재간이 있었기 때문에 노인은 특별히 그녀의 집세를 면제해 주었고 청아는 그 노인과 함께 생활에서 서로 보살펴 주며 잘 지내고 있다.소희와 임구택이 도착했을 때 노인은 상냥하게 그들을 맞아들였고, 이 나라의 설 풍습에 따라 갖가지 사탕을 준비해 주기도 했다.창아는 소희와 임구택을 보고 감격해하며 소희의 손을 잡고 좀처럼 놓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소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밤에 둘이 함께 자고 임구택더러 옆방에서 혼자 자게 했다.청아는 소희에게 여기에서 겪었던 사정을 얘기했다.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언어가 안 통해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혼자 타국살이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적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다 견뎌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적응했다. 그녀는 수업하고, 집에 가고, 또다시 수업하러 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 간단하지만 충실한 하루를 보내며 살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생활에 매우 만족했다.“나중에 너랑 둘째 삼촌이 내 카드에 그렇게 많은 돈을 줬다는 걸 알았어. 다행히 그 돈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고.”청아가 웃으며 말했다.“힘든 시절은 다 지나갔어.”소희가 말했다.“그래, 다 지나갔어.”청아는 소희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배 위에 그녀의 손을 올려놓았다. “며칠 전에 갑자기 태동을 느꼈어. 의사가 말하길, 태동이 매우 빨랐다고 해. 뱃속의 녀석은 분명 활발하고 활동적인 아이임이 틀림없어. 내가 가장 힘들 때 견딜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 아이가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야.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난 흥분해서 하룻밤을 잘 못 잤어. 아이를 남겨둬서 정말 다행이야. 소희야, 너한테도 많이 고마워. 애초에 네가 내게 아이를 남길 용기를 줬잖아.”소희는 손을 그녀의 배에 살짝 얹었다. 태동이 소희의 손에 전해졌을 때, 그녀는 가슴이 뛰며 색다른 감
강성. 설 연휴인데도 디저트 가게는 여전히 문을 열었다. 아직 연차 휴가 중이라 그런지 디저트 가게는 매일 사람들로 꽉 차서 간미연은 밤 10시가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바빴다.그날 밤, 집에 돌아오니 벌써 11시가 넘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의 불이 켜져 있었다.외투를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장명원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순백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고 깔끔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건달티가 났다.간미연이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도 장명원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채소를 계속 썰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기 일만 열심히 했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기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샤워를 마친 후, 간미연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주방으로 나왔다. 나와보니 테이블 위에는 야식이 가득 놓여 있었고 장명원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따뜻한 우유 한 잔, 새우 계란찜 한 그릇, 야채전 등등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간미연은 하루 종일 바빴던 지라 저녁에는 디저트 몇 조각밖에 먹지 못했었다. 정말 배가 고팠던 그녀는 식탁 앞에 앉아 혼자서 모든 야식을 다 먹었다.장명원은 이후 며칠 동안 간미연이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야식을 꼬박꼬박 만들어 주었고, 이따금 부엌을 깨끗이 치운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장명원은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며 간미연이 야식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그날, 집으로 일찍 돌아온 간미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밖에 서 있는 장명원을 발견했다.그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집 비밀번호 바꿨어?”장명원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응.”간미연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왜?”장명원이 물었다.“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마.”간미연은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장명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문을 닫으려 했다.문이 반쯤 닫히자, 장명원은 갑자기 팔을
간미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등을 벽에 갖다 대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난 이런 정략결혼은 싫다고.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로 부족해?”장명원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네가 바쁘다는 것도 알고, 밥도 잘 못 챙겨 먹는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네가 잘 먹지 못할까 봐 매일 저녁 너에게 와서 밥을 해 주는데, 너는 정말 내가 그렇게 한가하다고 생각해?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뭔데?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말만 하면 내가 뭐든 다 해줄 테니까.”간미연은 고개를 들고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뭐야, 지금 고백하는 거야?’“솔직하게 말할게. 우리 연애는 가짜지만 내 맘은 진짜였어. 난 너랑 묵언이 같이 있는 것만 봐도 짜증 나고 참을 수 없어. 하루라도 널 안 보면 미칠 거 같다고.”장명원의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그의 눈도 약간 붉어졌다. 마치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난 다른 사람과 키스해 본 적이 없어. 네가 처음이야. 그날 밤도 내 첫 경험이었다고. 네가 지금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한번 시도해보면 되지 않을까?”“어떻게?”장명원은 벽에 팔을 기대고 몸을 기울여 간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진짜 연인들처럼 함께 지내보자. 넌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해.”간미연은 묵묵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이 마치 한창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장명원은 그녀가 거절할까 봐 조마조마했다.“3개월만 시도해 보자.”그의 말에 간미연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밀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어디 인턴 체험하러 가? 3개월은 무슨 3개월?”“그러면 얼마?”간미연은 고개를 들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내가 어디가 좋아? 난 재미없는 여자야.”그녀도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차가운 여자를 좋아하는
“가만히 앉아있어.”간미연은 얼굴을 찌푸렸다.장명원은 그녀의 말에 따라 얌전히 옆에 앉아 큰 눈을 반짝이며 간미연을 바라보았다.간미연은 그런 그의 눈빛에 심란해져서, 미간을 더 찡그렸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고 물었다. "우리, 진짜 연애할까?”“정말?”장명원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간미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깊은 밤빛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재미없는 여자야. 나랑 하는 연애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를 거야, 그래도 나랑 연애할래?”간미연은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다른 연인들이 함께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로맨틱한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돈 버는 것과 게임이었다.그녀와 함께 있으면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장명원이 자신을 질려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응. 너랑 연애할래.”장명원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우리 둘이 함께 있는 한, 난 네가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아도 절대 질리지 않을 거야.”“하고 싶은 말 또 있어.”“말해봐.”“진짜 연애를 하면 예전과는 달리 서로에게 충성해야 해. 나랑 사귈 때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지 않을 자신 있어?”장명원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못 해?”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무슨 뜻이야? 넌 나랑 사귀면서 여전히 묵언이랑 잘해볼 생각이야?”“아니.”간미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이미 여러 번 너한테 말했어.”그녀의 말에 장명원은 콧방귀를 뀌었다.“언제? 섣달그믐날 밤, 한밤중에 걔가 너를 찾아온 걸 내가 직접 봤다고. 둘이 포옹까지 했잖아.”장명원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그건 그냥 작별 인사야.”간미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뭐?”“묵언이는 곧 강성을 떠날
그의 아름다운 두 눈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명원은 입술을 오므리고 천천히 간미연에게 다가갔다.“간미연, 키스해 줘.”간미연은 원래 거절하려고 했지만, 장명원의 요염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절로 철렁 내려앉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침묵은 장명원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장명원은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다. 간미연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소파에 그녀를 밀쳤다.“장명원.”간미연이 막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장명원은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간미연은 요새 인터넷에서 “멍뭉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장명원이 멍뭉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애교를 부릴 땐 언제든지 애교를 부리고, 하지만 험악할 땐 누구보다 험악한 멍뭉이 말이다.특히 그는 쾌락의 맛을 보기만 하면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간미연은 장명원 어깨에 양팔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장명원에게 입술과 혀를 모두 빼앗긴 채 잠시 동안 남성 특유의 숨결과 강한 호르몬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을 느꼈다.예전에 키스를 할 때와는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관계가 바뀐 탓인지 오늘 키스는 유난히 달랐다. 숨결이 어우러져 몸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떨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장명원은 키스를 멈추고 간미연의 목덜미에 고개를 푹 묻은 채 숨을 헐떡였다. “미연아, 나 집에 가기 싫어졌어.”단맛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참을 수 있지만, 일단 한 번 맛보고 나면 완전히 넋을 잃고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된다.간미연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안 돼.”“그날 밤에는 허락했잖아. 이젠 우리 사귀는 사이인데 왜 안 된다는 거야?”장명원이 말했다.간미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그냥 내 맘이야.”“••••••”장명원은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그럼 언제 허락해 줄 거야?”장명원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해도 된다고 할 때.”그녀의 말에 장명원은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