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숨결이 너무 익숙했다. 배정우였다. 임슬기는 눈을 뜨려 했지만 시야는 뿌옇고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배정우는 쓰러진 임슬기를 품에 안은 채 눈빛에 살기를 띠며 말했다.“죽고 싶어?”김서우는 그 기세에 질려 다리가 풀리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배정우 씨, 그게 아니에요. 아까 보신 그건... 이 여자가 먼저...”하지만 배정우는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꺼져.”그 말에 김서우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휘청이며 병실을 빠져나갔다.배정우는 조심스레
차희라는 이 모든 걸 전혀 몰랐던 듯 임슬기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그게 우리 서우가 한 거라고요?”임슬기는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끄덕였다.“네.”“말도 안 돼... 그럴 리가...”차희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술까지 떨고 있었다.“김서우 씨가 말로만 저를 험담했으면 그냥 넘겼을 거예요. 그런데 저를 진심으로 미워하더라고요.”임슬기는 알고 있었다. 김서우의 적의에는 진승윤이 한몫하고 있다는걸.하지만 어제 그녀가 목을 조르던 순간 언급했던 건 그 남자 하나만이 아니었
모녀는 부둥켜안고 울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세상에, 나이도 어린 애가 얼마나 독하면 어른한테 무릎 꿇게 해?”“무릎 꿇은 사람 김씨 가문 사모님이라며? 저 여자가 대체 뭘 했길래 김씨 가문에서 고개를 숙이는 거야?”“듣기로 저 여자 내연녀라던데...”소문은 점점 더 황당하게 부풀어갔다. 결국 참다못한 임슬기가 주변을 싸늘하게 훑어보며 말했다.“입이라는 게 있으면 책임도 있어야죠. 함부로 거짓 퍼뜨리는 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어요?”그 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움찔하며 한 발씩 뒤로
임슬기는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어떻게 왔어?”진승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어제도 왔었어. 근데 네가 자고 있길래, 무사한 거 확인하고 그냥 갔지.”그러다 이내 표정이 굳으며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런데 넌 이런 큰일이 생겼는데도 나한텐 말도 안 해? 나를 남으로 생각하나 보지?”그 말에 임슬기의 마음이 따뜻해지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별일도 아니었고.”“별일이 아니라고? 임슬기, 다음부턴 거짓말하려거든 대본이라도 써놔.”할 말이 없어진 임슬기는 고개를
“또 다른 딸이 있다고요?”김현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러자 임슬기는 계단 입구에서 우연히 듣게 된 대화까지 포함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놨다.이야기를 다 들은 김현정은 곧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혹시 김서우가 진짜 김씨 집안 딸이 아닌 거 아닐까요?”‘김서우가 친딸이 아니라고?’임슬기는 그 말에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설마... 그럴 리 없잖아. 명인시에서 다 아는 일이잖아. 김진국 차희라 부부가 얼마나 김서우를 아끼는지. 진짜 딸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이건...”순식간에 또 다른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치고 올라왔다.[최악의 불륜녀 연다인. 상류층 입성을 위해 자작 교통사고. 본처에게 죄 뒤집어씌워]임슬기의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요동치며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그녀는 기사 제목을 눌러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심지어 의사의 증언까지 실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연다인은 정말 끝이었다.댓글은 하나같이 연다인을 향한 비난으로 가득했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도 많았다. 보다 못한 임슬기는 결국 화면을 닫아버렸다.“현정아...”눈물이 저절로 흐르기 시작했다. 임슬기
“임슬기 씨?”임슬기가 고개를 들자 위용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안쪽을 가리켰다.“현정이... 빨리! 현정이 좀 살려줘요!”둘이 병실 문 앞까지 달려갔을 때 안에서 김현정의 비명이 들려왔다.“아악!”위용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 남자를 제압했고 임슬기는 쓰러진 김현정을 얼른 안았다.그때 임슬기의 눈에 들어온 건 김현정의 가슴에 깊이 꽂힌 칼과 피였다.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김현정의 가슴팍은 피로 뒤덮였고 선홍빛이 임슬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현정아!”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은 김현
지금 이 순간 임슬기는 배정우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당장 놔!”“말해!”하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손에 힘을 더 주며 움켜잡았다.“왜? 그렇게 다인이가 죽길 바라는 거야?”“아파, 이거 놔!”“하, 아프다고? 다인이가 죽으려고 손목 그었어. 너 알고나 있어?”그 말에 임슬기는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곧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래, 난 걔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걔는 집사님이랑 우리 엄마를 죽였고, 아빠도 죽게 만들었어. 게다가 이제 너까지 빼앗아 갔어. 그런 인간은 죽어 마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