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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Author: 라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7:08:33

#13 현생의 내 남자를 위해

토요일 오전.

알람도 없이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윤은 살짝 몽롱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전날 그렇게 심리적 압박을 받았음에도, 제 연하 남친 건우가 옆에서 술 마시는 걸 맹렬하게 통제한 덕분에 과음을 피해서인지 몸이 찌뿌둥하진 않았다.

습관적으로 베개 맡의 핸드폰을 집어 들자, 화면에 떠 있는 건우의 카톡 알림이 보였다.

[ 나 오늘 도서관 가. 일어나면 전화해. ]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3학년 로스쿨생들을 합법적 지옥으로 이끄는, 세 번의 ‘변호사 시험 모의고사’ 준비로 바쁜 나날들. 거기에다 내년 1월에는 살인적인 변호사 시험을 치러야 하는 예비 법조인, 차건우였다.

태생부터 다이아 수저에 지독하게 좋은 머리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제 목표를 향한 노력 역시 미친 듯이 갈아 넣는 녀석이었다.

"하, 진짜... 섹시한 새끼.“

저런 미친 듯한 성실함과 지적인 텐션. 안하무인 폭군 같으면서도 제 영역에 있어서 만큼은 완벽주의자인 차건우의 그 숨 막히는 매력에 그녀는, 한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런 놈이 10년 동안 자신만 보고 직진하며 발정이 나 있을까 생각하면, 새삼 아랫배가 찌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한 하윤은, 건우가 콘솔박스에서 꺼내 자신의 가방 안에 넣어주었던 '게보린'을 꺼내 생수와 함께 꿀꺽 삼켰다. 그녀의 지랄 맞은 생리통은 생리가 시작된 다음 날, 단 하루만 극심하게 아프고, 약을 먹고 잘 버티면 금세 가라앉는 편이었다. 이 사실을 본인보다 더 잘 아는 건우는 항상 하윤의 집에 게보린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세심하게 신경 썼다.

하윤은 이내 욕실로 들어가 가볍게 샤워를 마쳤다.

‘오늘은 오랜만에 건우랑 영화나 한 편 볼까?’

이틀 동안 지은 죄(?)가 워낙 크고 무겁다 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잔뜩 뿔이 났을 자신의 연하 남친의 비위를 완벽하게 맞춰주며 기분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살짝 더워지는 날씨 탓에 긴 머리카락이 뒷목에 걸리적거리는 게 싫어, 집게 핀으로 틀어 올릴 생각으로 대충 물기만 털어내듯 드라이를 마치고는 옷장의 문을 열어 입을 옷을 단박에 골랐다. 주말에 학교 도서관으로 향할 때면 건우는 늘 캐주얼한 차림을 고수했기에 하윤 역시 그의 스타일에 맞춰 오늘의 OOTD를 정했다.

몸선이 예쁘게 드러나는 타이트한 골지 민소매 티 위에, 속살이 은근하게 비치는 화이트 시스루 셔츠를 걸치고 밑에는 핏이 딱 떨어지는 블랙 슬랙스를 매치했다. 발끝엔 가벼운 스니커즈. 평소 명품 가방을 수집하거나 요란하게 들고 다니는 걸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앙증맞은 샤넬 미니백을 포인트로 들어주기로 했다.

로스쿨 도서관은 주말 오후 2시쯤 문을 닫는다. 지금 출발해서 1시 30분이나 40분쯤 도착해, 학생 전용 주차장에 세워진 건우의 차를 찾아 그 근처에 숨어 기다리면 시간이 딱 맞을 것이다. 10년의 세월. 그녀 역시 이제 차건우라는 남자의 모든 성격, 생활 패턴, 루틴,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오후 1시 45분.

주말 치고는 학교 주차장엔 차가 꽤 많았지만, 건우의 육중한 외제 SUV는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하윤은 그 차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여유롭게 핸드폰을 넘겼다.

굳이 건우에게 미리 도착했다고 언질을 주진 않았다. 이틀 전부터 내내 심기가 바닥을 치고 있을 그를 위해, 오늘은 완벽한 서프라이즈를 시작으로 하루 종일 여우처럼 내조와 헌신을 다할 생각이었다.

특히나 지금 당장은 침대 위에서의 끈적한 텐션을 함께 해 줄 수 없었기에 다른 방향으로라도 그가 자신에게 잔뜩 사랑 받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요리조리 스텝을 밟으며 차 주변을 서성이던 하윤의 시야에, 저 멀리서 걸어오는 차건우의 모습이 훅 잡혔다. 확실히 저 새끼는 사람이 득실거리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특유의 날티 나면서도 고급스러운 비주얼 덕에 눈에 확 꽂혔다. 하윤의 예상대로 오늘 건우는 핏이 떨어지는 편한 슬랙스에 검은색 무지 티셔츠, 그리고 넓은 어깨를 강조하는 묵직한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아무 옷이나 대충 걸쳐도 명품 화보로 소화해 버리는 피지컬에 패션 감각까지 미치게 뛰어난 수컷이었다.

건우의 매끈한 걸음걸이를 끈적한 눈길로 감상하던 하윤은, 이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걷는 한 여자에게로 날 선 시선을 옮겼다. 건우의 옆에 있는 여자는 이유경. 건우의 대학 동창이자, 현재 같은 로스쿨에 재학 중인 동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1위 로펌이라 할 수 있는 ‘해오름 로펌’의 대표였다.

머리도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데 흠잡을 데 없이 예쁘장한 얼굴, 거기다 타고난 볼륨감 넘치는 몸매까지. 그야말로 속물적인 수컷들이 환장하고 침을 질질 흘릴 완벽한 스펙의 결정체였다.

하윤은 저 이유경이라는 여자가 제 남자인 차건우에게 노골적으로 흑심을 품고 있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윤의 심기는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차건우라는 사내가 오직 '이하윤'이라는 암컷 외에는, 세상 어떤 여자도 시야에 담지 않는다는 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에게 완벽하게 길들여진 맹수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속이 타들어가고 조바심이 나는 건 저 이유경 쪽일 것이다. 확실히 이하윤도 어딜 가나 매력이 철철 넘치고 시선을 쓸어 담는 여자이긴 하지만, 이유경 본인이 판단하기엔 자신이 가진 배경이나, 예비 법조인이라는 동등한 능력, 매일 얼굴을 맞대는 로스쿨이라는 접점을 봤을 때 자신이 차건우의 옆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실'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테니까.

하윤은 픽, 여우 같은 실소를 흘리며 제 몸보다 훨씬 거대한 건우의 SUV 차량 뒤쪽으로 몸을 스윽 숨겼다. 아직 제 차 앞에 서 있는 하윤을 건우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윤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기왕 오늘 하루 그의 기분을 맞춰 주기로 마음먹었으니 오늘 하루는 컨셉의 여왕이 되어보기로 했다.

지금의 컨셉은,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집착 여친 버전이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구둣발 소리.

이유경의 인위적으로 톤을 높인 교태 섞인 목소리가 꽤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하자, 하윤은 숨겼던 몸을 사뿐히 드러내며 건우의 차량 보닛에 나른한 자세로 엉덩이를 걸쳐 기댔다.

자신의 차량 쪽에서 낯선 인기척과 움직임을 감지한 건우의 서늘한 눈빛이 홱, 하고 전방을 향했다.

그리고 제 차에 기대어 요염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하윤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방금 전까지 유경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건우의 표정이 일순간 무너져 내렸다. 세상 그 어떤 여자에게도 지어주지 않는, 오직 이하윤을 볼 때만 입술 끝에 매달리는 그 맹목적이고 다정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나갔다.

제 옆의 차건우의 시선이 어디에 꽂혔는지 단박에 알아챈 이유경 역시 하윤을 발견했다. 유경의 화려한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 아니 명백하게 불쾌하고 재수 없다는 듯 굳어지는 기분 나쁜 낯빛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 왔어?"

건우의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주차장을 울려 퍼졌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그 어떤 말을 걸어도 건조하게 단답만 뱉어내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평상시에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그의 끈적하고 다정한 톤에, 이유경이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건우는 성큼성큼 긴 다리로 걸어와 단숨에 하윤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던 찰나, 하윤이 그의 가슴팍을 작은 두 손으로 탁탁 밀어내며 입술을 살짝 비죽였다.

"나는 여기서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건우는… 옆에 예쁜 여학우 분이랑 아주 다정하게 세월을 즐기면서 오시네?“

하윤이 요망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건우의 단단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살짝살짝 찌르며 속삭였다. 곁에 선 이유경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했지만, 건우의 이성을 긁어대기엔 충분한, '질투심 폭발한 여우 여친' 버전의 앙칼진 목소리였다.

순간, 건우의 표정에 피식- 하는 바람 빠진 웃음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평소 하윤이, 에테르 딴따라 새끼들에게 쏟는 관심에 질투가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는데, 그녀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 제 옆의 여자 사람을 견제하며 앙탈을 부리다니! 어젯밤 룸에서 분노로 포효하던 통제광 짐승의 모습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랫도리가 빳빳해질 만큼 완벽한 쾌감이었다.

"아, 지하철역 입구까지만 태워 달래서."

"그래서?"

"타. 가자."

건우는 즉각 스마트키로 차 잠금을 해제하고,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 젖히며 하윤이 사뿐히 올라탈 수 있게 에스코트했다. 부드럽게 조수석 문을 닫아준 그는 무심히 운전석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제야 뻘쭘하게 서 있던 이유경을 향해 건조하게 툭 내뱉었다.

"역까지 못 데려다 주겠다. 내 여친님이 친히 오셔서."

건우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일말의 미련도 없이 홱 차에 올라타 버렸다.

주차장에 홀로 남겨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유경.

조수석에 앉은 하윤은 아주 찰나의 순간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 하루 만큼은 어떻게든 뿔이 난 제 남자의 기분을 하늘 끝까지 올려놓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이유경은, 두 사람의 사랑놀음을 위한 완벽한 희생양일지도 몰랐다.

'미안해요, 유경 씨.'

하윤은 속으로 가벼운 위로를 던졌지만, 이내 앙큼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주인 있는 남의 남자한테 함부로 꼬리는 치지 말았어야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포식자를 길들인 유일한 암컷. 하윤은 이유경의 굴욕적인 모습을 은근하게 감상하며, 온몸을 휘감는 짜릿하고도 서늘한 카타르시스를 즐겼다. 제 현생의 남친 위해 변모한, 참으로 영악하고 기막힌 여우, 이하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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