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은, 평소보다 안개가 더 짙었다.
산 입구에서 낯선 차 한 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두 여자가 내렸다. 한 명은 마치 화면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했다.도시의 공기 대신 향수를 두른 듯한 여인.긴 다리, 완벽한 비율, 그리고 어디서든 시선을 잡아끄는 도도한 분위기. 그녀의 이름은 강지희.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이자, 대기업의 자녀로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여자였다. 그 뒤를 따라 내리는 또 한 사람, 조심스럽게 안경을 고쳐쓰며 뒤따르는 매니저 이지아.작고 말랐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그녀들은 차에서 내린후 천천히 산길을 따라 걸었다. 산 안쪽으로 이어진 길은 커다란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서 어두컴컴하고, 곳곳에 무덤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지아야, 아직 멀었어? 이거 진짜 시간 낭비인거 같은데?" "언니, 거의 다 왔어요. 곧 이쪽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을 만날수 있어요.” “지아야, 미안한데 난 이런거 안믿는다니까." "아쫌! 기껏 시간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반응이 어쩜 그래요? 제가 예약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휴, 그래. 얼른 가보자." 그녀들은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길이 거의 끝나는 곳은 돌담이었다.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안에서 한옥의 지붕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와 위로 낙엽이 내려앉고, 처마 끝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대문 앞에 도착한 그녀들은 '이리 오너라.'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대문을 두드려야 할지, 대문에 매달린 줄을 잡아 당겨야 할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하지만 결론이 나기전에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문 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자, 산새들이 동시에 푸드덕 하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대문 안쪽에서는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한복 상의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옷이 마치 그에게 붙은 그림자처럼 자연스러웠다.그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맑고, 동시에 깊었다. 그는 잠시 두 여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예약 하셨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묵직했다. “이지아 이름으로 예약했어요!” 지아가 당당하게 대답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그의 발걸음을 따라 두 여자가 한옥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세상은 조용해졌다.바람도, 새소리도, 낙엽도 멈춘 듯.그 고요 속에서, 마당의 공기만이 빛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옥 안채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안에는 오랜된 종이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았고, 햇살 대신 푸른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허리가 굽고, 손마디가 퉁퉁 부은 늙은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눈은 흐릿했고, 얼굴에 주름 많아 한눈에 봐도 굉장히 늙은 사람이었다. “먼 길 왔구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여기로 와서 앉거라.” 지희와 지아는 공손히 허리숙여 인사후 자리에 마주 앉았다. “할머니가 명옥이라는 분 맞으시죠? 혹시 저희가 여기 무슨일로 왔는지 맞추실수 있나요? ” 지아가 앉자마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명옥은 대답 대신 지희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허공을 스치자,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아이를 품었구나.” 지희의 표정이 굳었다. "네? 뭐라구요? 저한테 하는 말씀이세요?” “네 뱃속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다.” 그 말이 끝나자 지아가 숨을 삼켰다. “잠깐만요… 저희 언니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말씀이에요?” 명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웃겨 진짜. 할머니, 저 아직 결혼도 안했거든요? 그리고 남자랑 관계 가진적도 없는데 임신? 저 혼자 임신했다는 거에요? 제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에요?” 명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쇠한 눈빛으로 조용히 지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오히려 지희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희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손을 내저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내가 이래서 이런데 오기 싫다 했지? 가자, 지아야. 더 들어줄 필요도 없어.” “언니, 잠깐만요. 그냥 좀만 더 들어봐요. 뭔가… 좀 이상하잖아요. 할머니, 아까 말씀하신게 혹시... ” “지아야!” 지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만가자. 시간 낭비야.” 명옥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묘하게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 아이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였느니. 계속해서 네 속을 찌를게야.” 그 순간, 지희는 더이상 참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하세요. 되도 않는 소리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거 아니거든요? 큰일날 소리 하지 마세요!” 지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확 열었다. 이지아가 뒤따르며 “잠깐만요, 언니-” 하고 외쳤지만, 지희는 듣지 않았다.--- 대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길. 바람이 불자 낙엽이 흩날렸다. 마당 한가운데서 독고춘이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시선을 맞췄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보였다. 지희의 몸 배쪽에서 희미한 검은 연기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작고 서늘한 아지랑이처럼, 마치 뱃속의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듯. 독고춘은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어렸을적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그 검은 연기였다. 그는 놀람, 슬픔, 그리고 묘한 연민이 섞인 눈으로 지희를 바라보았다. 지희는 그 시선을 느끼고 인상을 구겼다. “뭘봐요? 연예인 처음봐요?” 가시돋친 지희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손에 쥔 빗자루 끝이 조금이지만 떨리고 있었다. “…별일 없으시길.” 지희는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미친 사람들만 모여 있네.”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대문을 나섰다. 지아는 뒤를 따라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독고춘의 시선은 끝까지 지희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대문이 닫히는 순간, 마당의 바람이 잠시 멈췄다.그는 명옥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겠습니까?” 안채 안에서 명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늙은 노파의 목소리가 아닌, 맑고 젊은 여인의 목소리로. “아직은 괜찮을게다. 조만간 다시 찾아 오겠지.” 마당 위에서 푸른 불빛이 피어올랐다.독고춘은 그 불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무너져 있던 주미의 얼굴엔 어느새 날 선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다. “...은정이를...본 적 있어요?” 그 물음에 독고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본 것 같군.” 그 순간, 지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낯익은 감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갑자기 뭐지?’ 지희는 무심코 배를 한 번 쓸어내렸다. 그 묘한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봤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그 애는...이미 죽었는다고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지희는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급히 끼어들었다. “아니, 그러니까...너무 놀라지 말아요. 이 사람이 원래 좀... 그런 걸 봐요. 귀신 같은 거?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하,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말을 하던 지희가 괜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작게 흘렸다. 그 사이 독고춘은 여전히 말없이 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 사이, 그녀 어깨 위를 짙게 감싼 검은 기운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주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독고춘을 노려보았다. “...귀신을 본다고요? 하!” 주미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대낮에 공원 벤치에서 귀신 타령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며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터였다. 하지만 지희의 횡설수설하는 변명에도 주미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저 놀리는 거죠?” 그 말에 지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저도 처음엔 안 믿었어요. 근데... 고은정씨가 누구에요?” 지희의 물음에 독고춘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도윤과 깊게 얽혀 있던 것 같더군.” 순간 주미의 호흡이 거칠게 흔들렸다
주미는 호텔 로비를 빠져나온 뒤에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겉으로 보기엔 흐트러짐 없는 상류층 여자의 걸음이었다.고개는 곧게 세워져 있었고, 어깨선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하지만 그 모습에선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오래전부터 몸에 밴 습관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처럼.햇살이 비치는 호텔 정문을 지나 바깥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눈 밑엔 여전히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는 자꾸만 허공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지희는 선글라스를 코끝까지 슬쩍 끌어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저 여자, 병원부터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괜히 따라 나온 건가 싶다가도, 저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독고춘은 대답 대신 묵묵히 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주미의 외견에 닿아 있지 않았다.정확히는,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를 감싸듯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머물러 있었다.실오라기처럼 가늘게 흩날리던 아지랑이는 점점 더 짙게 피어 올랐다.그 안엔 사람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무거운 한이 엉겨 붙어 있었다.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주미의 발걸음이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호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췄지만, 이상하게 그녀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붉은 신호등이 선명하게 켜진 채였는데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 채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뒤쫓아가던 지희는 화들짝 놀라 크게 소리쳤다.“뭐하는 거에요! 빨간불인데!”휙—그 순간, 독고춘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차도로 발을 내딛으려던 박주미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읏—!”균형을 잃은 주미는 그대로 독고춘의 품에 안겼다.부우우우웅—!그와 동시에, 눈앞을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바람이 옷자락을 세게 흔들었고,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놀란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아니, 빨간불인
지희는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슬쩍 내리며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화장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끔했지만, 그 아래 숨겨진 피로까지 감추진 못한 얼굴. 지희는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흠, 저기요~” 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다크서클 아래, 날카롭지만 지친 눈동자, 경계심이 먼저 스친 얼굴이었다. “누구세요?” 지희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슬쩍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돼요?” 햇빛 아래 드러난 지희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분명 놀란 기색은 있었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곧바로 피곤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 다시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세요.” 지희는 허락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옆에는 독고춘이 말없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작 다가오긴 했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네? 아, 그게 그러니까..." 그쪽 몸에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미치고 환장하겠네. 진짜. 지희가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와 독고춘 사이를 오갔다. 정확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과 분위기를 훑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둘이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예요.” “네?” 그 말에 지희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박주미는 피곤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안 그러면...우리 오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서늘했다. 마치 경고 같기도, 체념 같기도 한 목소리. 지희가 무언가 되묻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말했다. “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여자는 테이블 위에 얹은 손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박주미예요. 그쪽...
“하, 열받아 죽겠네.”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독고춘을 노려보던 지희가 작게 중얼거렸다.분명 어젯밤.남의 볼에 입술이나 찍어 놓고, 아침이 되자마자 하는 소리가 뭐?"그럴 리가 없지? 하, 참나."생각할수록 얄미웠다.속이 부글부글 끓는 지희와 달리 독고춘은 오늘도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태연하게 엘리베이터 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뻔뻔한 태도에 지희의 속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꼬춘씨, 진짜 기억 안 나요? 어젯밤에 술 취해서—”“...그렇다고 해두지.”“하아?”덤덤한 그의 대답에 지희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뭐라구요? 그렇다고 해둬?”독고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그 모습이 더 얄미웠다.바로 그때,띵—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춰 섰다.문이 열리고, 한 젊은 여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길게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절제된 화려함이 느껴지는 트위드 재킷과 눈에 익은 명품 백.누가 봐도 상류층 자제라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화려한 차림새였다.지희는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재빨리 주머니 속 선글라스를 꺼내 슬쩍 얼굴 위로 걸쳤다.그녀는 지희를 힐끗 보는가 싶더니, 별다른 관심 없이 조용히 한쪽에 섰다.분명 그녀의 얼굴은 눈길이 갈 만큼 아름다웠다.하지만 눈 밑엔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창백한 안색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마치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그 순간, 말없이 서 있던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여자의 어깨와 목덜미 주변.보통 사람 눈엔 보이지 않을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실오라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1층에 가까워질 무렵, 지희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읏...”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낯익은 고통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왔다.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이 아랫배를 움켜쥐었다.방금 전까지 씩씩대며 독고춘에
30분 후,과실주가 남긴 붉은 열기가 독고춘의 뺨을 따라 천천히 타고 올라갔다.언제나 단단히 잠겨 있던 돌부처의 입꼬리가, 지희의 눈앞에서 서서히 헐겁게 풀리기 시작했다.“...푸, 푸후후.”독고춘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평소의 그 무뚝뚝하고 날 선 기색은 어디 가고, 눈까지 반쯤 감은 채 헤실헤실 웃는 얼굴.처음 보는 그의 무방비한 모습에 지희는 순간 멍하니 멈춰 섰다.‘됐다! 드디어 취했네, 이 곰탱이!’속으로는 저번에 동요 주정으로 자신을 놀려댔던 독고춘에게 완벽하게 한 방 먹였다며 쾌재를 불렀다.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붉어진 얼굴로 바보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는 독고춘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희의 심장이 묘하게 간지러워졌다.수트를 입었을 때의 그 치명적인 아우라는 어디 가고, 대책 없이 순해진 얼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하, 이 와중에도 귀여우시겠다?’지희가 혼자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툭.“...꼬춘씨?”독고춘의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꺾이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로 쓰러져 버렸다.완전히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아우, 진짜! 꼬춘씨, 침대 가서 누워요!”지희는 비틀거리는 독고춘의 거대한 몸을 제 어깨 위로 간신히 걸쳐 멨다.온천과 마사지를 받아 나른해진 몸체에 가뜩이나 무거운 남자의 몸뚱이가 더해지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발에 힘 좀 줘 봐요! 와, 나 진짜 허리 부러지겠네!”가까스로 침대 가장자리에 도착한 지희는 독고춘을 매트리스 위로 툭 쓰러뜨렸다.“헉, 헉. 됐다.”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휙—!“어... 앗!”순식간에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몸이 붕 떴다.독고춘의 큼지막한 두 팔이 지희의 허리를 밧줄처럼 감싸 안은 채, 그대로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지희의 얼굴이 독고춘의 단단한 가슴팍에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밀착됐다.
뜨끈한 온천물 위로 하얀 김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독고춘은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곳에 익숙했던 사람처럼, 지나치게 평온했다.눈 감고 있는 얼굴.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태연한 표정.지희는 저 혼자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얄미울 정도였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손끝으로 물을 툭 건드렸다.찰박.“...”독고춘 얼굴에 물방울이 조금 튀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설마 못 느꼈나?지희는 괜히 입꼬리를 올리며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물을 튕겼다.촤악.얼굴에 제법 물을 맞은 독고춘의 눈꺼풀이 그제야 천천히 열렸다.“...뭐 하는 거지?”“풉. 아니, 여기 벌레가 있어서요.”지희는 들킨 아이처럼 웃음을 참으며 딴청을 피웠다.독고춘의 시선이 잠시 그녀 얼굴에 머물렀다.그러더니 아주 태연하게 손으로 물을 한 움큼 떠올려 지희 얼굴에 뿌렸다.촤아악.“꺄악! 아, 진짜! 뭐 하는 거예요?”“...모기가 있군.”"한겨울에 무슨 모기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촤아악."아씨, 지금 해보자는 거죠?"둘이 서로 물을 뿌려대고 있을 때였다."크, 크흠."등 뒤에서 들려온 아주 정중하고도 민망한 헛기침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홱 돌아갔다.“실례하겠습니다. 고객님, 아로마 케어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마사지 베드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 네..."지희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탕에서 벌떡 일어났다.독고춘은 젖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남긴 채 천천히 그녀 뒤를 따랐다.직원이 안내한 곳에는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마사지 베드가 있었다.“두 분, 편하게 누워 계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번지는 가운데, 지희는 어느새 베드에 누워 눈을 감았다.---“손님, 끝났습니다.”"...음? 아, 수고하셨어요."지희가 마사지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어느새 어둑한 저녁이 내려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