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는 앞으로 다가가 유강후의 허리를 껴안으며 얼굴을 유강후의 몸에 댄 채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무서워요.”더 가까이 다가오자 진영천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여자의 정교하고 섬세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진영천처럼 오랜 세월 풍류를 즐긴 사람은 예쁜 여자를 지겹게 봐왔지만 이렇게 깨끗하고 여린 사람은 처음 보았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여자는 심플한 흰색 티셔츠와 잠옷 바지를 입어 무척 연약해 보이며 저도 모르게 연민을 품게 했다.먹물처럼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목에 달라붙어 하얀 피부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얼굴만 예쁜 것도 아니고 손도 작고, 밖으로 드러난 발도 작아서 매우 여린 모습이 저도 모르게 마음껏 유린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그가 잠깐 두어번 봤을 뿐인데 문득 서늘한 기운이 무섭게 압박해 오고 있었다.시선을 돌리니 경원의 도련님이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고 눈가에 명백히 드러나는 경고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자신이 순간 자제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진영천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유강후도 시선을 거두며 온다연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집 안이 따뜻해도 신발을 신어야지. 안 그러면 열 나.”그렇게 말하며 그는 집사가 건네준 분홍색 털 슬리퍼를 온다연에게 직접 신겨주고 그녀의 손에 감긴 거즈를 확인했다.위에 피가 배어 나온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주성원 불러서 거즈 바꾸라고 하고 오후와 저녁 모두 여기서 지켜보라고 해.”온다연이 오후나 저녁에 열이 날 것을 대비하란 소리였다.집사는 대답을 마치고 곧장 물러났다.그제야 온다연은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려 서둘러 나지막이 말했다.“아저씨, 일 봐요. 전 이제 괜찮아요.”말하며 가려는데 유강후는 누가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온다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외부인이 자리에 있자 온다연은 유강후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가 그가 안고 밖으로 나가서야
진영천은 문득 깨달았는지 머리를 탁 치며 웃었다.“내 머리가 이렇게 안 돌아간다니까, 그동안 괜한 사람에게 선물을 보냈네. 알려줘서 고마워!”이권이 말했다.“오늘 일 잘 처리하면 도련님이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 겁니다.”진영천은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딜 감히, 도련님을 돕는 것만으로 영광인데 뭘 더 바라겠어? 참, 아까 봤던 아가씨가 어느 댁 따님인지 알려줄 수 있어?”이권은 돌고 돌아 결국엔 그가 온다연에게 접근하려 한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다.“캐묻지 마세요, 도련님이 싫어하시니까. 오늘 일만 잘하면 도련님께서 눈여겨보실 거고 그게 선물을 수백번 갖다 바치는 것보다 더 먹혀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덧붙였다.“아까 참 대담했어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다니.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안 그럼 나조차도 못 지켜드려요.”진영천은 덜컥 놀라며 조금 전 유강후의 경고하는 표정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을 흘렸다.그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도련님은 언제 오셔?”이권은 문 쪽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아마 안 돌아올 것 같으니 서둘러 처리하러 가세요.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알아내야 하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요”.“그래그래, 최대한 빨리하도록 노력할게!”진영천이 말하며 서재를 나왔고 오후 내내 온다연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여전히 해바라기와 배경은 두 소년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었다.하지만 오늘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지 작은 그림 하나 완성하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계속 그림을 그렸다.그녀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유강후는 서재에서 일 처리를 하며 둘은 서로 방해하지 않았다.날이 곧 어두워질 무렵 온다연은 일어나서 유강후의 서재로 갔다.유강후는 회의 중이었고 화면 건너편에는 담당자들이 시장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유강후가 회의 중일 때 온다연은 절대 들어가서 방해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켜진 컴퓨터 화
차는 야생성을 띠는 맹수처럼 재빠르게 낡은 골목길로 들어갔다.어두운 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 속에 사람의 비명 소리도 섞여 있었다.차는 여전히 질주하고 있었다. 진영천이 공손한 태도로 마중을 나왔다.“도련님,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련님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온다연을 품에 안은 유강후는 진영천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수고했어요.”진영천은 그가 품에 안은 온다연에게 눈길을 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도련님을 위해 일하는 건 제겐 영광이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진영천은 바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은 본채와 3개의 별채로 이루어진 전원주택이었다. 비록 유강후의 주택보단 크지 않았지만, 건축물과 인테리어는 더 고풍스러웠고 아름다웠다.빠르게 진영천은 유강후를 다소 어두운 방으로 데리고 왔다.안에는 침향목과 고풍스러운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벽에는 어두운색의 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커튼이 스르륵 열리며 커다란 유리 벽이 나타났다.유리 벽 뒤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그곳엔 각종 기이한 고문 도구가 있었고 파충류 케이지가 벽을 가득 채웠다.온다연은 그 공간을 보았다. 뭔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몸이 굳어버렸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곤 자신의 허벅지에 앉히며 나직하게 물었다.“무서워? 소리라도 들어볼래?”온다연은 그 방을 빤히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유강후의 옷을 꽉 잡고 있었다.“네, 들을래요.”유강후는 문 쪽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손짓했다.“소리 들리게 해요. 너무 높게는 말고요.”그 사람은 아주 깍듯하게 대답했다.“네, 도련님.”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방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세 명의 젊은 남자가 갇혀 있었다.온다연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안색도 창백해졌다.이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동물이 인간에 대한 반서기도 했다.인간이 동물의 자유를
진영천은 유강후가 품에 안고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조금 전 유강후가 떠나기 전에 힐끗 품에 있던 여자를 보았었다.차갑고, 냉정하고, 인간미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청순하게 생긴 그녀의 외모와 정반대 분위기였다.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순간 자신이 오랜 시간 단련해 온 안목이 전부 헛수고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온다연은 더는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그녀는 잠을 자지 않고 그렇게 꽃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먼저 오후에 그리다가 만 그림부터 완성한 뒤 이번엔 동물과 연관된 그림을 그렸다.드넓은 초원 위에 세 마리의 사자가 한 소녀를 쫓고 있는 다소 처참한 상황의 그림이었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세 마리의 사자 머리는 해골이었다. 소녀도 공포에 휩싸인 표정이 아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잠도 자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그저 묵묵히 서재에 쌓아둔 일거리를 꽃방으로 가져와 곁에 있어 주었다.두 사람은 낮처럼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온다연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림 한 장을 유강후 앞에 내밀었다.행여나 자신의 행동으로 일하고 있는 유강후를 방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다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저씨, 업무는 다 마치신 거예요?”유강후는 그림을 들고 내민 그녀의 손을 보았다. 하얀 손에 빨간 물감이 묻어있는 그녀의 손을 본 그는 이상하게도 유혹적인 기분을 느꼈다.그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얼른 손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날이 밝아오고 있어요. 이젠 들어가서 쉬어야죠.”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지만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더는 낮처럼 영혼이 사라진 듯한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왠지 끌리는 목소리기도 했다.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노트북을 닫은 뒤 바로 온다연을 휙 끌어안아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이 그림은 나한테 주려고 그린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보여주었다.“보세요.”청량감이 느껴지는 그림이었
집사가 우유를 들고 꽃방으로 오고 있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문이 꽉 닫히지 않았던지라 벌어진 문틈으로 꽃방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온다연의 몸은 작은 쪽배가 파도를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가느다란 목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고통스러워 보였고 파도 같은 그를 감당하기 벅차 보였다.흐느끼는 소리와 애원하는 소리가 섞여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듣는 사람마저 마음 아프게 말이다.집사는 일관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곤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유강후는 자신의 옷으로 온다연을 꽁꽁 감싼 뒤 안아 올려 안방으로 갔다.끝내 끓어오르는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고 심하게 대해버린 것이다.지난번에 방문했었던 의사가 온다연의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난번에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조심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왜 또 이런 상태가 된 거죠?”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보았다.“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절제할 줄 알아야죠. 온다연 씨 몸이 이렇게나 허약한데 번마다 과하게 이러시면 매일 통증을 달고 살지 않겠어요?”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앞으론 조심하죠.”이 말을 끝으로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연고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연고를 발라주려 할 때 온다연은 거칠게 반항했다. 아마 다시 그가 두려워진 듯했다.하지만 이번에 유강후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를 제압한 뒤 강제로 약을 발라주었다.빨갛게 부어버린 그곳과 온몸 가득한 키스 마크에 유강후는 다소 후회되었다.그러나 그 후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사라지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그녀는 반드시 그에게 적응해야 한다. 그에겐 매일 자신을 피하는 그녀를 기다려줄 인내심이 없으니까.약을 바른 뒤 그는 온다연을 살살 달래며 알약과 우유를 마시게 한 뒤 재웠다. 그는 그제야 안방에서 나와 서재로 왔다.서
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고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나은별 씨 것을 빼앗을 생각해 본 적 없어. 내 목적만 이루면 알아서 떠날 거야.”임혜린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유강후가 널 놓아줄 것 같아?”온다연이 말했다.“응, 놓아줄 거야. 내가 질리면 당연히 버릴 거야. 나은별 씨와 아저씨는 서로 운명의 상대니까 무조건 결혼할 거고.”이 말을 꺼냈을 때 온다연은 가슴이 저리면서 답답해졌다.그녀는 꼭 혼잣말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아저씨는 그냥 내가 재밌으니까, 궁금하니까 호기심 때문에 날 곁에 두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날 버리게 될 거야.”임혜린은 미련이 가득 남은 그녀의 모습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뭐가 어찌 되었든 나은별을 조심해. 그 여자는 지금 유강후가 그저 널 데려다 키우는 거로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아직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거야. 그 여자가 만약 너랑 유강후 사이를 알게 된다면 그땐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그녀는 이내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다연아, 난 네가 너무 걱정돼. 차라리 여기서 벗어나. 내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줄게. 다연아, 주한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니, 주한을 괴롭혔던 사람 전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복수할 거야!”그녀의 모습에 임혜린은 자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원한이 가득하네. 유강후가 네가 주한의 복수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가 되면 유강후가 널 죽일까 봐 무섭단 말이야!”온다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시선을 내리깔며 나직하게 말했다.“괜찮아, 난 상관 안 해.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아저씨가 날 죽여도 괜찮아.”두 사람을 침묵했다.한참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혜린아, 나 대신 주희를 잘 챙겨줘. 난 앞으로 주희를 챙겨줄 수 없을 것 같으니까.”임혜린이 말했다.“알았어.”온다연은 뭔가 떠오른
한이준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기에 유강후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유강후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심사가 조금이라도 뒤틀린다면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그가 서재에 발을 들인 뒤로 유강후의 손에선 담배가 끊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한이준도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곤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말해 봐, 무슨 일인데. 왜 네 손에서 담배가 끊이지 않는 거지?”유강후의 표정은 아주 담담해 속을 알 수 없었다.“그냥 사소한 일이야.”한이준은 그의 소매를 보았다.소매 사이로 전에 온다연이 깨물었던 흔적이 보였다.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는 듯했지만 유강후는 마치 전리품이라도 되듯 대놓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한이준은 이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놀려댔다.“온다연 성격이 만만치 않은가 보네. 네 팔을 흉이 날 때까지 깨물다니 말이야. 혼내기는 했어?”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모금 빨고 나니 담배는 어느새 꽁초만 남아 버렸다.꽁초를 재떨이에 버린 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랑 임혜린 체격 차이가 아주 크던데. 궁합이 맞긴 하냐?”한이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예전부터 과묵하고 남녀 사이의 일에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던 냉담한 친구가 지금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으니 말이다.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그는 꾹 참았다.“꽤 괜찮아. 왜, 너랑 온다연은 궁합이 잘 안 맞나 봐?”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방금보다 더 싸늘해졌고 또 담배를 꺼내 피워댔다.한이준은 특수 부대에서 그와 함께 훈련하던 때가 떠올랐다. 유강후와 함께 샤워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것을 본 적이 있었다.그때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유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몸도 아주 훌륭했다.그의 시선은 어느새 유강후의 바지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한이준은 웃으며 말했
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혜린을 보았다.그는 매일 도망만 치는 임혜린이 온다연의 곁에 오래 붙어 있으면 온다연에게 안 좋은 것을 알려주리라 생각했다.온다연의 친구이지 않았다면, 한이준의 여자친구이지 않았다면 임혜린을 이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한이준, 네 여자나 잘 관리해.”한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하려던 순간 온다연이 왔다.온다연은 임혜린의 팔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혜린아, 이러지 마. 난 괜찮아. 아저씨는 나한테 아주 잘해줘.”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임혜린은 그녀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온다연의 팔을 뿌리치며 바로 서재 안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두어 걸음 만에 바닥에 넘어진 온다연을 발견했다. 온다연은 어딘가에 부딪힌 듯 이마를 붙잡고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얼른 성큼성큼 다다다 온다연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물었다.“부딪혔어?”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확인했다.온다연의 하얀 이마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조금 까진 것 같기도 했다.그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서서히 고개를 돌려 임혜린을 보았다.한기가 느껴지는 유강후의 시선을 받은 임혜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며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속 가득 들어찬 공포를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발을 뻗은 순간 한이준이 그녀를 붙잡았다.“가자, 집에.”임혜린은 유강후를 노려보았다.“왜 다연이를 그렇게 대하는 건데! 왜 범죄자 취급하면서 집안에 가둬두느냐고! 넌 꼭 천벌을 받을 거야!”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의 눈동자엔 한기가 서려 있었다.한이준은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친구의 모습에 얼른 임혜린은 둘러업고 나가버렸다.임혜린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업은 한이준을 때렸지만 건장한 한이준에게 그녀의 주먹은 그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온다연은 임혜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다시 고개를 돌려 유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