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화

작가: 별빛찬란
‘내가 눈이 멀었던 게 틀림없어.’

서다윤은 그 말을 곱씹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지승현의 앞으로 걸어간 서다윤은 자신의 속마음을 대신 말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지승현을 질타하는 대신 덤덤히 말했다.

“후회돼서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혼할래? 하고 싶으면 얘기해. 언제든 이혼해 줄 테니까.”

지승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서다윤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말했다.

“내 옷장 안에 있는 웨딩드레스 좀 가져다줘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가정부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가정부가 프랑스에서 맞춤 제작했던 값비싼 웨딩드레스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거실로 왔다.

가정부는 웨딩드레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서다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서다윤이 그 웨딩드레스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지승현을 비롯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서다윤에게 그 드레스는 두 사람의 오랜 사랑을 증명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드레스는 두 사람의 과거가 어떻게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지를 증명하는 물건이 될 것이다.

서다윤은 웨딩드레스를 예전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고 마치 헌신짝처럼 바라보며 가정부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은 뒤 곧장 마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팔을 들어 힘껏 집어던졌다.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잿더미 위로 떨어지는 순간,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가 순식간에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청춘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뒤따라 나온 지승현은 그 광경을 본 순간 깜짝 놀라 동공이 심하게 떨렸고 곧이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서다윤, 미쳤어?”

웨딩드레스가 이미 새까만 재로 변하지 않았다면 지승현은 바로 달려 나갔을 것이다.

서다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평온한 눈빛에는 한 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눈이 멀어서 나를 선택한 거라고. 그런데 내가 왜 이 같잖은 물건을 간직해야 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을 마친 뒤에는 태연한 표정으로 떠났다.

지승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이 지승현의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순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안효민도 따라 나왔다. 지승현의 앞으로 걸어간 안효민은 그의 힘껏 움켜쥔 주먹을 감싸 쥐며 말했다.

“승현 씨, 너무 화내지 마. 나도 다윤 씨가 이렇게 극단적인 데다가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어.”

안효민은 천천히 발꿈치를 들어 지승현에게 입을 맞추며 격해진 감정을 달래려 했다. 안효민의 빨간 입술이 지승현의 귓가로 향했다.

“다윤 씨는 승현 씨가 자기랑 이혼할 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정말 이혼하는 건 어때? 다윤 씨가 승현 씨한테 줄 수 있는 건 나도 다 줄 수 있어. 그리고 다윤 씨가 줄 수 없는 것까지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지승현이 안효민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지승현의 눈동자에는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네 신분을 잊지 마. 너는 그저 내 병을 치료해 주는 심리상담가일 뿐이야. 감히 서다윤의 자리를 넘볼 생각은 하지 마.”

경고를 남긴 후 지승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지승현이 위층 침실로 올라갔을 때, 서다윤은 창문 앞에 서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승현은 곧장 서다윤에게 다가갔고 팔을 뻗어 뒤에서 서다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 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어. 사실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회사 주가는 갑자기 하한가를 기록했고, 이사회에서는 계속 나한테 압박을 넣고 있어. 게다가 하루 종일 회사 일 때문에 정신없이 시달리다 보니 순간 참지 못하고 너한테 화풀이를 했어. 미안해.”

지승현은 끊임없이 사과를 하며 서다윤을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서다윤을 잃을까 봐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서다윤이 지승현을 사랑하게 되었을 당시, 지승현은 막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겪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지승현은 매우 힘들어했다.

그 힘든 시기에 곁을 지켜준 사람이 바로 서다윤이었다. 서다윤은 지승현을 위로해 주었고, 옆에 있어 주었으며, 따뜻한 온기로 지승현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만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승현은 어쩌면 정말로 서다윤을 사랑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반신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서다윤은 이미 지승현을 속여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게 했고, 한 달 뒤 두 사람은 완전히 남남이 될 예정이다.

당장은 이혼 숙려 기간을 무사히 보내야 했고, 한 달 뒤 참가할 조향 대회에도 지장이 생겨서는 안 됐다.

서다윤은 더 이상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다 이해해.”

“그러면 이제 화 풀린 거야?”

“응.”

지승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서다윤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럼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밤 서다윤이 보인 행동은 지승현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당장 서다윤에게서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마음을 놓고 싶었다.

“물론이지.”

지승현은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서다윤은 지승현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일찍 가서 쉬어.”

두 사람은 평소 각방을 썼다. 지승현은 병 때문에 한밤중에 자주 잠에서 깼고, 그때마다 서다윤이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마음속 두려움이 더 커졌다.

예전에 서다윤은 그 점이 아쉬웠으나 지금은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승현과 한 번도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이 행한 결혼 생활 중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

다음 날, 서다윤이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데 안효민이 딸을 데리고 왔다.

안지아는 서다윤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식탁에 앉더니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물었다.

“엄마, 아빠는 왜 아침을 먹으러 오지 않는 거예요?”

안효민은 딸의 입을 손으로 가볍게 때리며 나무랐다.

“그렇게 부르지 마. 아저씨는 네 아빠가 아니야.”

그러고는 미안한 듯이 웃는 얼굴로 서다윤에게 해명했다.

“다윤 씨, 지아는 살면서 한 번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승현 씨를 아빠로 여기는 거예요. 부디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다윤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괜찮아요. 아빠 없는 아이니까 예의가 없는 것도 정상이죠.”

안효민은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효민이 뭐라 하기도 전에 지승현이 다가왔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건지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서다윤은 당연히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지승현은 안효민을 흘끗 바라보았다.

“안 선생님, 대체 언제쯤 저한테 제이를 소개해 줄 겁니까?”

안효민은 곧바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승현 씨, 제이한테는 이미 얘기해 뒀어요. 그런데 제이가 요즘에는 주식 쪽 일은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대요. 제이가 괜찮다고 할 때쯤에 제가 소개해 줄게요.”

“안 선생님, 제이를 아세요?”

서다윤은 일부러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안효민의 눈빛에 의기양양함이 어려 있었다.

“그럼요. 저는 유명한 심리상담가라 인맥이 넓어요. 제이는 제 절친이에요. 아마 제 부탁은 다 들어주려고 할 거예요.”

지승현의 눈빛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러면 빨리 돌아올 수는 없는지 한 번 물어봐 줘요. 지금 저한테 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겨서 당장 제이와 협력해야 할 것 같거든요.”

“알겠어요. 한 번 얘기해 볼게요.”

안효민은 흔쾌히 승낙했다.

곧이어 안효민은 서다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윤 씨, 솔직히 말할게요. 다윤 씨도 앞으로 향수 만드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사람도 좀 만나고 인맥도 넓혀요. 나중에 승현 씨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에요.”

“저야 안 선생님과는 비교도 안 되죠. 제이처럼 엄청난 분과 아는 사이라니 정말 부럽네요. 다른 사람들은 얼굴조차 본 적 없고 여자라는 것만 아는데, 안 선생님은 절친까지 됐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안효민은 코웃음을 쳤다.

“저야말로 다윤 씨가 부러운걸요. 하루 종일 한가한 재벌가 사모님이잖아요. 먹고살 걱정할 필요도 없고, 큰 꿈을 가질 필요도 없으니 사는 게 얼마나 편하겠어요? 혼자 아이까지 키우면서 모든 걸 제힘으로 해내야 하는 저랑은 다르게 말이에요.”

“그만하고 밥 먹죠.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 법이잖아요. 다윤이는 뛰어난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아요.”

지승현이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서다윤은 인간 말종인 안효민, 지승현과 함께 식사할 생각이 없었기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이닝룸에서 나갔다.

지승현은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안효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젯밤에 내가 한 말 잊지 마. 내 아내는 오직 서다윤뿐이야.”

안효민은 자신이 서다윤을 비꼰 사실을 지승현이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안효민은 초조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승현 씨, 나한테 다윤 씨 자리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할 시간에 어떻게 해야 우리 관계를 잘 숨길 수 있을지나 고민해 봐. 승현 씨는 그걸 단순한 치료로 여기지만, 다윤 씨 생각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젯밤 다윤 씨가 웨딩드레스를 불태웠던 걸 잊은 건 아니지? 승현 씨를 향한 다윤 씨의 애정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효민은 그렇게 말한 뒤 딸을 향해 눈치를 줬다.

안지아는 곧바로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지승현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지승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서재에서 제 장난감 차를 잃어버렸어요. 저랑 같이 가서 찾아줘요.”

지승현은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안지아와 함께 서재로 향했다.

“어떤 장난감 차야? 너희 엄마는 안 찾아봤대?”

지승현은 서재에서 장난감 차를 찾으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 회사 주가는 또다시 하한가를 기록할 것이다. 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걸까?

바로 그때, 지승현의 시선이 책장 한쪽 구석에 숨겨져 있던 검은색 단추처럼 생긴 물건에 꽂혔다.

손을 뻗어서 집어 든 뒤 자세히 살펴보는 순간, 지승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건... 초소형 카메라잖아?’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30화

    서다윤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그녀는 속으로 나지막이 독한 년이라고 욕설을 내뱉고는 김선영에게로 급히 다가갔다.김선영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가녀린 두 손은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고 있었다.서다윤은 얼른 김선영의 손을 꼭 쥐며 긴장된 목소리로 불렀다.“어머니...”하지만 안효민은 개판이 된 현장을 수습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어차피 자신이 남아 있어 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라는 계산이었다.그녀는 지난밤 잠을 설친 터라 딸을 데리고 낮잠이나 잘 생각으로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김선영의 손끝은 빙판처럼 서늘했다. 마치 시신의 살결을 만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서다윤은 그녀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을 직감했다. 심신이 미약한 김선영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해 철저히 함구해 왔던 치부가 결국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김선영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은 미안함을 품고 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 지승현에게는 그런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었다.과거 김선영은 지승현이 감히 다윤을 배신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대노하셨던 적이 있었다.서다윤은 시어머니의 힘을 빌려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승현의 이 더러운 짓거리가 그녀의 건강을 해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어머니, 일단 저기 소파에 가서 앉으세요.”서다윤은 김선영을 부축해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어머니, 방금 들으신 거예요?”그녀는 가슴을 졸이며 물었다. 김선영이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소파에 겨우 신체를 맡긴 김선영은 눈물이 차올라 고통스러운 듯 목이 메어 도무지 입을 열지 못했다.“어머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눈앞의 김선영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서다윤은 애써 덤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달랬다.“다... 다윤아. 방금 한 말이 대체 무슨 소리야? 승현이가... 안 선생이랑 바람을 피웠다고? 그게 정말이야? 승현이가 안 선생이랑은..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9화

    서다윤은 입꼬리를 비틀며 냉소하더니, 아주 시원스럽게 응낙했다.“그래.”가방 하나뿐이겠는가. 그동안 그가 선물해 준 모든 물건을 싹 다 비워내라고 해도 기꺼이 동의할 터였다. 귀찮게 일일이 정리할 필요 없이 한 번에 치울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가 선물한 물건들은 그저 집구석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했으니까.안효민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짐짓 미안해하는 척 가식을 떨었다.“승현 씨, 그건 예의가 아니죠. 다윤 씨에게 주신 선물인데 어떻게 제게 주라고 하세요. 저도 가방 많으니까 괜찮아요. 진짜 안 주셔도 돼요...”“괜찮아요. 그거 전 세계에 딱 세 개밖에 없는 초고가 한정판 백인데, 다윤이는 어차피 격식 있는 자리에 갈 일도 없으니 갖고 있어 봐야 낭비예요. 안 선생님이 들고 다니는 게 격에 훨씬 잘 맞을 겁니다.”“맞아요, 안 선생님.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요. 그 가방 안 선생님 이미지랑 아주 찰떡이니까 이따가 챙겨줄게요.”쓰레기 같은 여자에게는 쓰레기가 딱이었다.서다윤은 원래 아침을 먹으려던 참이었으나, 눈앞의 역겨운 꼴을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안효민의 몸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자신이 직접 조향한 시그니처 향수였다.이게 무슨 뜻이겠는가.친딸이 계단에서 굴러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두 남녀는 병원 구석에서 틈을 타 뜨거운 정사라도 나누었다는 방증이었다.참으로 대단한 정성이었다.위장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밀려오자, 그녀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2층으로 향했다.다시 계단을 내려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그 한정판 핸드백이 들려 있었다. 지승현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고 안지아 역시 보이지 않았다.오직 안효민 혼자 거실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오만한 자태는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진짜 안주인이라도 된 듯 기세등등했다.서다윤은 그녀의 앞에 다가가 손에 든 백을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8화

    지승현은 깜짝 놀란 눈으로 서다윤을 꾸짖었다.“다윤아, 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다윤은 안효민의 가증스러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매섭게 몰아붙였다.“이 여자 입으로 직접 말하게 해봐. 정말 제이를 알기는 하는지. 그렇게 잘 아는 대단한 인맥이면서 고작 다리 하나 놓아주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리겠어? 매번 차일피일 미루는 꼴을 보니 그냥 거짓말로 사기 친 게 분명한데!”“다윤 씨, 말을 왜 그렇게 함부로 해요? 내가 승현 씨를 속여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요? 정말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안효민은 앙칼진 기세로 쏘아붙였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켕기는 기색이 역력했다.“좋아요. 사기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나와 승현 씨가 보는 앞에서 제이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 관계를 증명해 보세요.”안효민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난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분은 지금 외부와 연락을 끊고 수행 중이라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요.”“그러면서 어떻게 그분과 소통한다는 거죠?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도 안 연결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연락한다는 말인가요? 초능력으로 텔레파시라도 보내시게요?”서다윤의 집요한 압박에 안효민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자 결국 배수진을 치듯 질러버렸다.“나름대로 연락할 방법이 있어요. 늦어도 사흘 안에 그분과 승현 씨가 직접 대면하게 해드릴게요!”“정말요?”지승현의 눈에 기대와 기쁨이 서렸다.그가 이토록 제이와의 협력에 목을 매는 이유는 금융계에서 이 거물의 평판이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주식시장에 날고 기는 큰손들은 널렸지만, 대부분이 돈만 밝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주의자들뿐이었다.물론 그것이 금융계의 철저한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하지만 제이는 달랐다. 그녀는 의리가 있었고 거시적인 판을 볼 줄 알았으며 절대 개미들의 고혈을 짜내거나 악의적으로 주가를 폭락시키지 않았다.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수천만 원 남짓한 종잣돈으로 시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7화

    한참 뒤에야 조세혁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어디 살아?”“녹턴 별장이요.”그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다시 무겁고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원래라면 감히 앉지도 못할 뒷좌석 상석에 구겨지듯 앉아 있던 진현우는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라 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점차 긴장이 풀렸는지, 속으로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대표님이 사랑에 눈이 머니 엉뚱하게 비서인 내가 다 호강을 누리네.'차가 녹턴 별장 앞에 멈춰 서자, 서다윤은 차에서 내리기 전 정중히 뒷좌석을 향해 목례를 건넸다.“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 대표님.”진현우는 화들짝 놀라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휘휘 저었다.“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서다윤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넘겨주며, 운전석의 조세혁에게도 나지막이 감사를 전했다.“고마웠어요.”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별장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세혁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 뒤를 쫓았다.진현우는 멍하니 앞을 주시하는 대표와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며 헛기침을 삼켰다.“에헴, 에헴...”조세혁은 그제야 복잡한 눈빛을 거두고 밀려드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옮겨 탔다.운전석으로 돌아간 진현우는 입을 꾹 다물고 참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오지랖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표님, 서다윤 씨는 엄연히 가정이 있는 몸입니다...”“네가 왜 설쳐? 내가 남의 가정이라도 파탄 낼까 봐 겁나?”“대표님이 걷잡을 수 없이 깊이 빠지실까 걱정돼서 그러죠. 잘나가는 대표님이 남편 있는 유부녀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이미지에...”조세혁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에 매서운 그늘이 번졌다.“입방정 한 번 상스럽게 떠는군. 상처 입은 여자가 비 오는 밤거리를 얇은 드레스 한 장 걸치고 걷고 있는데, 사람 탈을 쓰고 어떻게 그냥 지나쳐?”완벽한 논리에 진현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이래저래 자기 혼자만 모진 놈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6화

    그제야 지승현은 전화를 받았다.안효민의 전화였다. 그녀는 다급하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울먹였다.“승현 씨, 지아가 다쳤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머리가 찢어졌어. 지금 병원이야.”안지아가 다쳤다는 말에 지승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차 세워요!”“지금 어느 병원이야? 얼른 위치 보내줘!”지승현은 바로 곁에 자신의 진짜 아내가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듯했다.전화를 끊은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다윤아, 지아가 다쳐서 병원에 있대. 나 당장 가봐야 하니까 넌 그냥 택시 타고 들어가. 시간도 늦었으니 어차피 너도 나랑 같이 가고 싶진 않을 거 아냐.”‘그 아이가 너랑 무슨 상관인데?'서다윤은 비아냥거리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어차피 이제 27일만 지나면 완전히 남남이 될 사이인데 이제 와서 그와 이런 구차한 일로 입씨름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내렸다.차는 단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 흔한 걱정이나 당부의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홀로 버려두고 쏜살같이 멀어져 갔다.서다윤은 텅 빈 도로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이미 마음은 재가 되어 부스러진 지 오래였건만, 바짝 메마른 심장 깊은 곳에서 차가운 통증이 울컥 밀려왔다.그는 그녀에게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곧 비가 쏟아질 거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상간녀의 아이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팽개쳐 버렸다.가느다란 드레스 한 장만 걸친 그녀가 이 어둡고 바람 부는 밤길에 어떤 위험에 처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허허, 이게 정녕 내가 과거에 온 힘을 다해 결혼하려 했던 남자란 말인가?’차가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서다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내리는 편이 나았다.헛된 미련에 홀려 이성을 잃었던 제 어리석은 머릿속을 깨끗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5화

    서다윤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시선을 옮기니, 대략 스물넷 남짓으로 보이는 앳된 아가씨가 서 있었다.귀티 나는 딥그린 벨벳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목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았지만 귓가에는 앙증맞은 진주 귀걸이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첫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볼수록 은은한 매력이 풍기는 얼굴이었다.부드러운 눈썹 아래로 크진 않지만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입꼬리를 올릴 때 살짝 지어지는 호선이 인상적이었다.“안목이 없으신 게 아니라, 애초에 이 브랜드를 알아볼 수준이 안되시는 것 같네요. 아틀리에 자크는 주로 유럽 왕실 전용으로 옷을 짓는 브랜드인데, 이곳 의상을 두고 저렴하다고 깎아내리시다니. 풋...”강하린이 입을 가리며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제가 보기엔 드레스가 저렴한 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으스대는 그쪽 안목이 참 저렴해 보이네요.”청천벽력 같은 노골적인 독설에, 잔뜩 치장한 영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럼에도 감히 말 한마디 받아치지 못한 채 입술만 바르르 떨 따름이었다.눈앞의 아가씨가 다름 아닌 조세혁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기에 결국 여자는 무안함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트집을 잡던 여자가 사라지자 서다윤은 강하린을 향해 고마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아니에요. 저도 쥐뿔도 없으면서 남 깎아내리며 우월감 느끼는 부류들이 제일 꼴불견이더라고요.”서다윤은 그녀의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강하린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와, 언니. 몸에서 나는 향이 진짜 좋네요. 무슨 향수 쓰세요?”“이건 정말 대중적이지 않은 건데... 브랜드제품은 아니고, 제가 직접 조향해서 쓰는 거예요.”서다윤이 멋쩍은 듯 대답했다.“언니가 직접 향수를 만드신다고요?”강하린이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였다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