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탈출 서바이벌 클럽

리얼 탈출 서바이벌 클럽

By:  동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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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이미 죽었지만 나는 살고 싶다. 이 시대는 기이한 것들의 낙원이자 인간들의 지옥이다. 나는 클럽을 유일한 희망의 등대로 여겼으나 그 뒤에 숨은 계산과 배신은 보지 못했다. 부활하는 기이 생물체들, 핏빛으로 물든 생사 금지구역, 인륜을 저버린 잔혹한 실험... 생과 사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사람과 기이한 것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시쳇더미 위에 서서 비통하게 울부짖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쓸쓸하게 중얼거린다. “마지막 탈출 테스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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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최근 방사능으로 인한 오염 변이 구역에서 오염 지수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중도 오염 구역인 해윤학교에서 교사들의 자해와 자살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고 현재로서는 기이 금지 구역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학교는 폐쇄되었고 주변 지역의 영업이 전면 중단되었으며 격리 조치가 진행 중입니다. 이상 기이 조사국에서 전해드렸습니다.”

조용한 진료실 안, 방송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박효섭이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폐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숨 막히는 느낌을 참으면서 검사 기기의 강한 불빛을 빤히 쳐다보다가 누군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방호복 차림의 의사 장지숙이 검사 장비를 끄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수치를 보면 이미 내성이 생겼어. 약을 바꿔야 해. 바꾸지 않으면 석 달도 못 버틸 거야.”

박효섭은 몸을 일으켜 낡은 후드티를 대충 정리하고는 옆에 앉아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새 약이면 엄청 비싸겠죠?”

장지숙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두 눈에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쳤다.

“한 병에 천만 원 정도야. 이렇게 하자. 내가 석 달 치 약값 먼저 내줄게.”

박효섭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모님. 엄마 아빠가 그러셨어요. 너무 큰 빚은 지지 않는 게 낫다고요. 이모님은 그냥 엄마 동료시잖아요.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장지숙이 더 말하려 하자 박효섭이 말을 가로챘다.

“제 만화가 지금 심사 단계에 들어갔어요. 통과만 되면 원고료로 약값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장지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효섭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내성이 생겼다면 그냥 안 먹는 게 낫겠네요. 그 약 진짜 쓰거든요.”

말하면서 장지숙의 책상 위에 놓인 사탕 하나를 집어 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모님, 나중에 이모님네 집에 밥 얻어먹으러 갈게요.”

장지숙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박효섭을 배웅한 뒤 특별히 준비했던 영양 사탕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병원 안, 박효섭이 응급실 근처를 둘러봤다. 방사능 병변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시신이 하나둘씩 서둘러 실려 나갔고 가끔 채 가리지 못한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묵묵히 사탕을 입에 넣고는 씁쓸한 눈빛으로 장지숙의 사무실 쪽을 쳐다봤다.

“석 달? 괜찮아. 나 꼭 살아남을 거야.”

...

비가 내렸다.

박효섭은 방사능비가 몸에 닿지 않도록 낡은 우산을 펴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젖은 거리를 가로질러 온갖 금속 조각으로 여기저기 보수된 건물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눈 부신 네온사인조차 사람들의 활력을 되살리지 못했다.

방사능으로 인한 신체 손상, 개인 가치에 따라 서로 다른 등급의 오염 구역으로 강제 배치,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들...

중도 오염 구역의 사람들에게는 입에 겨우 풀칠하고 몸이 버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운이었다.

대부분은 무감각해진 후에 싸구려 담배와 술에 잠시 의지하다가 덧없는 인생을 끝내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

박효섭이 월세방으로 돌아왔다.

“엄마, 아빠, 나 왔어요.”

그는 웃으며 문을 닫고 먼저 촛대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영정사진 두 장과 유골함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말라비틀어진 사과 하나를 사진 앞에 놓고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운 좋게 사과 하나 샀어요. 그런데 진짜 비싸더라고요. 오염 등급이 좀 낮은 사과가 하나에 20만 원이에요. 지숙 이모님이 그러는데 나 약을 바꿔야 한대요.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렸다.

“박효섭, 너 뭐 하는 거야? 이번 만화는 특정 요구사항이 있다고 했잖아. 주인공이 반드시 고객님 본인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왜 또 틀렸어? 이 고객님은 비오염 구역 분이야.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박효섭이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웃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사장님. 그런데 전에 요구사항은 그게 아니었어요. 전 어제 보내주신 버전대로...”

“고객님 쪽에서 버전을 바꿨어.”

사장이 박효섭의 설명을 가로챘다.

“세 시간 전에 새로 수정한 계획을 보냈는데 못 봤어?”

박효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 시간 전에? 사장님은 만화 한 권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시나?’

“사장님, 저 어제 병가 냈어요. 업무용 컴퓨터는 집에 가져가지 말라고 하셔서 가져오지 않았는데. 저 진짜 몰랐어요... 그리고 세 시간 전에 수정 계획을 보내시면 어떡해요? 30페이지나 돼서 알았다 해도 제시간에 완성하지 못해요.”

사장도 약간 찔렸는지 되레 언성을 높였다.

“잘 들어. 우린 고객님의 요구를 절대적으로 들어드려야 해. 수정해달라고 하면 수정해드려야 한다고. 내가 언제 새 버전을 보냈는지는 신경 쓰지 말고 수정하기나 해.”

박효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사장님. 수정할게요. 그 전에 이번 출판 원고료 좀 먼저...”

돈 얘기가 나오자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꺼져. 이 지경으로 망쳐놓고 돈을 달라고? 꿈도 꾸지 마. 빨리 수정이나 해. 안 그러면 바로 잘라버릴 거야.”

휴대폰 너머로 끊긴 신호음만 들려왔다.

박효섭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도 무급 초과 근무구나.”

...

박효섭은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기운 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만화가 퇴짜 맞은 순간 애써 짓던 가짜 미소도 더는 유지하지 못했다.

“만화도 퇴짜 맞고... 돈을 어디서 구하지? 하... 젠장.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비참한 거야?”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박효섭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핏발 선 눈으로 부모님의 영정사진을 쳐다봤다.

“아빠, 엄마, 나 진짜 돈이 필요해. 병 치료하고 싶어. 죽기 싫단 말이야...”

말하다가 목이 점점 멨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서 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어요?”

박효섭이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누가 살기... 어? 뭐야? 누구야?”

그는 재빨리 옆에 있던 과도를 뽑아 들고 갑자기 불이 켜진 주방 쪽을 경계했다.

지금처럼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에 쳐들어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이젠 법도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판이었다.

“빨리 대답해. 누구야?”

그러나 대답 대신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누군가가 창밖의 핏빛 불빛을 뚫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효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서 있는 건 사람만큼이나 큰 토끼였다.

연미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몸통의 반이 검고 반이 하얬다. 그리고 머리부터 배까지 톱니 모양의 꿰맨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흡사 기괴한 봉제 인형 같았다.

“박효섭 씨, 전 토끼 머리예요. 토끼 머리 매니저라고 부르면 됩니다. 잘 부탁해요.”

토끼 머리 매니저가 모자를 벗더니 통통한 배를 살짝 들어 올리면서 우아하게 인사했다.

“토끼 머리... 매니저?”

박효섭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해졌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토끼 머리 매니저가 손을 내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박효섭 씨가 살고 싶냐는 거죠. 살고 싶다면 방사능 때문에 변이된 몸을 완전히 치료해주고 기이 사건으로 순직하신 부모님께 제대로 된 영구 묘지를 사 드릴 수 있게 돈을 충분히 벌게 해줄게요. 지금처럼 오염된 사과 하나로 차가운 유골함을 모시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어요?”

박효섭이 바로 핵심을 짚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짧은 순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이 기괴한 토끼가 노릴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장기를 노리나? 방사능에 오염된 장기라 팔지도 못 할 텐데.’

그야말로 미친놈이거나 진짜 방법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박효섭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걸 본 토끼 머리 매니저가 품속에서 골든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바로 그때 피처럼 붉은 글씨가 천천히 떠올랐다.

[가입 신청서. 리얼 탈출 서바이벌 클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안전한 곳 같지 않았다.

입꼬리를 파르르 떠는 박효섭을 본 토끼 머리 매니저가 설명했다.

“지금 사인하고 30분 후에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기다리시면 특별 대형 버스가 올 거예요. 그 버스가 목적지로 데려다줄 겁니다. 회원들은 특정 장소에서 특별한 기이 탈출 테스트를 치르게 되는데 통과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통과하지 못하면...”

상대의 뜻을 알아차린 박효섭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죽는 거겠죠.”

토끼 머리 매니저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더욱 환하게 웃었다.

“역시 똑똑하시네요. 인사 담당 매니저로서 박효섭 씨처럼 머리가 좋은 분이 가입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네요. 그럼... 사인하시겠어요?”

박효섭은 한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변이된 몸,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노동, 부모님에게 제물 하나 변변히 마련하지 못하는 비참한 삶...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가입 신청서에 사인했다.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아서인지 글씨가 조금씩 번져 나갔다. 핏빛 글씨가 피로 그려진 듯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함을 띠고 있었다.

토끼 머리 매니저는 그의 사인을 내려다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자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입회식에서 살아있는 박효섭 씨를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박효섭이 불쑥 물었다.

“왜 하필 나인가요?”

토끼 머리 매니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 묘한 장난기가 스쳤다.

“다른 회원들은 저희가 조건에 맞춰 선별했지만 박효섭 씨는 달라요. 돈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효섭 씨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강렬하더라고요. 효섭 씨의 욕망이 저를 끌어당겼어요. 사실 효섭 씨는 15년 동안 유일하게 골든 가입 신청서를 받은 분이에요.”

토끼 머리 매니저가 떠난 뒤 박효섭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가 간단히 짐을 챙기고 배낭을 멨다.

마지막으로 촛대 위의 유골함을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늘 남에게 보여주던 가식적인 미소를 다시 지었다.

“아빠, 엄마, 절 지켜주세요. 정말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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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최근 방사능으로 인한 오염 변이 구역에서 오염 지수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중도 오염 구역인 해윤학교에서 교사들의 자해와 자살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고 현재로서는 기이 금지 구역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학교는 폐쇄되었고 주변 지역의 영업이 전면 중단되었으며 격리 조치가 진행 중입니다. 이상 기이 조사국에서 전해드렸습니다.”조용한 진료실 안, 방송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박효섭이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폐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숨 막히는 느낌을 참으면서 검사 기기의 강한 불빛을 빤히 쳐다보다가 누군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잠시 후 방호복 차림의 의사 장지숙이 검사 장비를 끄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수치를 보면 이미 내성이 생겼어. 약을 바꿔야 해. 바꾸지 않으면 석 달도 못 버틸 거야.”박효섭은 몸을 일으켜 낡은 후드티를 대충 정리하고는 옆에 앉아 웃으며 중얼거렸다.“네... 새 약이면 엄청 비싸겠죠?”장지숙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두 눈에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쳤다.“한 병에 천만 원 정도야. 이렇게 하자. 내가 석 달 치 약값 먼저 내줄게.”박효섭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괜찮아요, 이모님. 엄마 아빠가 그러셨어요. 너무 큰 빚은 지지 않는 게 낫다고요. 이모님은 그냥 엄마 동료시잖아요.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장지숙이 더 말하려 하자 박효섭이 말을 가로챘다.“제 만화가 지금 심사 단계에 들어갔어요. 통과만 되면 원고료로 약값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달리 방법이 없었던 장지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박효섭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내성이 생겼다면 그냥 안 먹는 게 낫겠네요. 그 약 진짜 쓰거든요.”말하면서 장지숙의 책상 위에 놓인 사탕 하나를 집어 들고 환하게 웃었다.“이모님, 나중에 이모님네 집에 밥 얻어먹으러 갈게요.”장지숙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안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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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30분 후 박효섭이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서 있었다.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공기 속에 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건물에 붙은 네온사인이 짙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갑자기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박효섭의 주의를 끌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 냄새가 나던 단지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토끼 머리 로고가 새겨진 대형 버스가 안개를 뚫고 박효섭의 앞에 멈췄다.쉬익.문이 거칠게 열린 동시에 박효섭이 화들짝 놀랐다.박효섭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과도를 꽉 쥔 채 조심스럽게 버스에 올랐다.운전기사가 색이 바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 금속 마스크를 써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다.바로 그때 뒤에 있던 문이 쾅 닫혔다.박효섭은 재빨리 안을 훑어보았다. 그를 포함해 도합 다섯 명이었다.그중 양복 차림의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점잖게 웃었다.“그쪽도 서바이벌은 처음인가 봐요? 얼른 와서 앉아요. 버스가 엄청 빠르게 달리더라고요.”박효섭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인사한 뒤 서둘러 맨 뒷자리로 갔다.곧 버스가 출발했다.그는 그제야 앞에 앉은 네 명의 승객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점잖아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 조금 전 탈출 서바이벌이 처음이냐고 묻던 그 사람이었다.겁에 질린 표정의 후드티 차림의 남자. 30대 정도 돼 보였고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몸에서 달콤한 사탕 냄새가 났다.화려하게 차려입은 예쁜 여자.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는데 중도 오염 구역 사람이라면 꿈도 못 꿀 명품 옷을 입고 있었다.그리고 일곱, 여덟 살쯤 되는 아이. 반팔에 책가방을 메고 이어폰을 낀 채 게임기로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겉보기엔 모두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박효섭은 한시도 경계를 풀 수 없었다.지금 사회에서 법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거주하는 오염 구역의 등급에 따라 복지, 신분, 배경이 천지 차이였고 올라갈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모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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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도교사 선생님들, 이건 아직 개별 지도를 받지 못한 학생들의 자료예요. 먼저 저를 따라오세요.”교감의 미소는 겉보기엔 아주 자애로웠다. 하지만 박효섭은 그 자애로움 뒤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색함이 스며있는 걸 느꼈다.같이 온 네 명 중의 양복 남자가 제일 먼저 발걸음을 뗐다.게임을 하던 아이는 주위를 한 번 쓱 훑더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따라갔다.화장하던 여자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화장 거울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손이 살짝 떨렸다. 말처럼 그렇게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후드티 남자는 겁에 질린 채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노려봤다.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조차 두려운 듯했다....걸어가면서 교감이 계속 설명했다.이 학교는 모든 아이를 교장이 좋아하는 ‘완벽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학생마다 지도교사를 붙여준다고 했다.지도교사는 성적, 체력, 식습관 등 아이의 모든 면을 관리해야 했다. 하지만 관리 방법은 전적으로 자유였고 학교는 간섭하지 않았다.다시 말해 결과만 중요했는데 교장이 만족하면 그만이었다.박효섭은 문득 15년 전에 그도 겨우 여덟 살이었다는 게 떠올랐다.그때 어른들에게서 애들 공부가 참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교감이 말하는 이런 자유식 교육 방법은 15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잠시 후 그들은 본관에 도착했다.“지금은 중학교 1학년 1반의 몇 명 학생만 지도교사가 필요해요.”교감이 웃으며 앞에 있는 교실을 가리키자 박효섭을 포함한 다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창문에 햇살이 번쩍 반사됐다. 안을 제대로 본 순간 모두의 안색이 일그러졌다.서류에 붙은 사진 속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눈앞의 아이들은 이목구비가 없었다. 그 대신 꽃봉오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어떤 아이의 꽃봉오리는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고 또 어떤 건 이제 막 피어나려는 듯했다. 아무튼 생기 넘치는 것도 있었고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더 기괴한 건 그들의 몸에서 색이 완전히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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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박효섭 인턴 회원님, 한 명의 지도 학생과 성공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개별 메인 퀘스트는 곧 시들어가는 꽃입니다.][주빈 학생에게 가장 적합한 학습 방식을 찾아내어 꽃이 시드는 것을 막아주세요.][퀘스트 실패 시 테스트도 실패 처리됩니다.]차가운 기계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강단에 선 선생님이 뒤에서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지도교사님, 교실에서 수업하실 건가요?”박효섭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주빈의 상태를 봐선 교실 수업이 오히려 독이었다. 교실에서 수업했기에 꽃이 시들어갔던 것이었다.‘계속 여기에 있으면 상황이 더 안 좋을 수가 있어.’그 생각에 박효섭이 주빈의 손을 잡았다. 바로 그때 찰나였지만 주빈이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고통이 섞여 있었다.“방해해서 죄송해요, 선생님. 지금 데리고 나갈게요.”...교실을 나오자 양복 남자, 화장한 여자, 후드티 남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양복 남자가 재빨리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이 아이를 고른 이유가 뭔가요?”박효섭이 눈을 깜빡였다. 양복 남자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뚜렷한 단서도 없고 가벼운 추측 하나쯤 공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뭔가 얻을지도 모르니까.“전 현실에서 만화가예요. 이 아이를 고른 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점 때문이에요.”머리가 좋은 양복 남자가 바로 핵심을 찔렀다.“그러니까 취미부터 파고든다는 거군요?”박효섭은 웃기만 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화장한 여자가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뭐야? 가난뱅이 그림쟁이 주제에 만화가는 무슨.”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일 안 하고 돈 버는 특수 직업군보다는 훨씬 깨끗하겠죠.”화장한 여자가 당장이라도 분노를 터뜨리려던 그때 양복 남자가 말렸다.“그럼 저녁에 봐요, 효섭 씨.”박효섭은 고개를 끄덕인 후 주빈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후드티 남자를 스쳐 지나가다가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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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형, 저 아저씨가 흰 옷을 입은 아저씨예요.”주빈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박효섭은 재빨리 주빈을 끌어안고 앞으로 내달렸다.복도 양쪽으로 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퀘스트에서도 문 하나를 선택하라고 아주 똑똑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단순히 30분 동안 숨어있는 것뿐이라면 굳이 문을 선택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즉 이 문들 자체가 핵심이라는 뜻이었다.뒤에서 흰 옷을 입은 아저씨의 발소리가 무섭게 빨라졌다.길고 좁은 복도가 순식간에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느껴졌고 앞으로 뻗은 문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문득 박효섭의 눈에 번호가 들어왔다. 붉은색도 있고 검은색도 있었는데 아무런 규칙 없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서둘러 품 안의 주빈에게 물었다.“주빈아, 문에 적힌 번호들을 본 적이 있어?”주빈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그냥... 휴게실의 번호예요.”“그럼 색깔은? 뭘 의미하는지 알아?”박효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숨결이 닿았다.순간 머리가 쭈뼛 선 박효섭은 본능적으로 주빈을 꼭 안은 채 흰 옷을 입은 아저씨의 등 뒤로 굴러갔다.쾅.거의 동시에 곤충 괴물이 선이 엉켜 있는 전기봉 같은 손으로 조금 전 그들이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바닥이 쩍 갈라지며 귀청을 째는 듯한 날카로운 전류 소리가 울려 퍼졌다.썩어 문드러진 곤충 같은 등이 눈에 들어왔고 흰 가운 위로 알 수 없는 액체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박효섭은 몸을 일으켜 복도 끝을 향해 달렸다.뒤에서 노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젊은이, 도망칠 필요 없어. 품에 안고 있는 그 아이만 내게 넘겨주면 돼.”주빈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형, 나 버리지 말아요, 제발...”박효섭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피비린내를 참으며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형은 절...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박효섭의 거절 때문에 자극받았는지 흰 옷을 입은 아저씨가 갑자기 분노를 터뜨렸다.“그 아이를... 이리... 줘.”복도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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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흰 옷을 입은 아저씨가 좁고 긴 복도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쾅, 쾅, 쾅.전기봉이 거대한 망치처럼 휘둘러질 때마다 양쪽 문들이 찌그러지고 떨어져 나갔다.앞서 달리던 박효섭은 그 광경을 보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새삼 깨달았다.만약 주빈과 함께 방 안에 숨어있었다면 문이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착한 아이야, 도망치지 마...”뒤에서 들리는 다정한 웃음소리와 잔인한 공격이 괴이한 대비를 이루었다.흰 옷을 입은 아저씨가 공격할 때마다 벽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겼다. 박효섭은 폐의 통증을 참으며 출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싸우는 동안 절대 주빈이 있는 방에 피해가 가서는 안 되었다.복도가 좁아 몸을 피하기 어려웠다. 반드시 입구 쪽의 더 넓은 공간으로 가야 했다.박효섭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끔찍한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겹눈이 위아래,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고 찢어진 입에서 노인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도망치지 마... 아이야.”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저씨... 말 들어... 아저씨한테... 영양분이 되어줘.”흰 옷을 입은 아저씨가 갑자기 전기봉을 높이 치켜들더니 힘껏 내리찍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박효섭은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전기봉이 떨어지는 지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쾅.바닥 타일이 산산조각이 나며 먼지가 흩날렸다.먼지 속에서 박효섭은 숨을 죽였다. 발끝에서 불과 1, 2cm 떨어진 곳에 전기봉이 박혀 있었고 바닥이 산산이 부서졌다.동시에 이상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저 아저씨한테서 나는 냄새인가?’[경고. 현재 붕괴율 8%.]‘붕괴율이 또 상승했어. 움직여. 움직여야 해.’박효섭은 떨리는 몸을 애써 다스리며 주사기를 든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다.전기봉이 폐허 속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흰 옷을 입은 아저씨가 통제를 벗어나면 박효섭은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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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후우... 후우...”박효섭의 숨소리가 몹시 거칠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졌다. 그는 폐를 찌르는 고통을 억누르며 양은수를 진지하게 쳐다봤다.“너를 끌어들여서 미안해. 아까 그 꽃잎은 주빈이가 자기 얼굴에서 뜯어낸 건데 저절로 발동됐어.”양은수는 아무 말 없이 한쪽으로 걸어가 바닥에 버려둔 이어폰을 주운 다음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그 사이 박효섭은 흰 옷을 입은 아저씨를 처치하지 않았다.지금의 최선은 이 짧은 평화를 유지하고 가능하다면 함께 싸우는 것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양은수가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양은수를 죽이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클럽의 테스트에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목숨을 쉽게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박효섭의 전투력으로는 흰 옷을 입은 아저씨도 처치할 수 없었다. 뒤에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양은수는 이어폰을 목에 걸고는 박효섭을 돌아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방금 왜 안 죽였어? 흰 옷을 입은 아저씨가 바로 형 옆에 있었는데.”박효섭은 고통스럽게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믿었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양은수가 물었다.“궁금한 게 있어. 그 꽃잎 말이야. 주빈이가 준 거라고? 스스로 뜯어서 줬어?”박효섭은 눈을 깜빡이며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한 번 떠보자.’“응. 나랑 주빈이 호감도가 꽤 높아. 그래서 이런 보험 하나 준 거지.”양은수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호감도가 몇인데?”“20%.”박효섭은 솔직하게 대답하며 양은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상대방의 얼굴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충격의 기색이 스쳤다.찰나에 사라졌지만 놓치지 않고 포착한 박효섭은 속으로 확신했다. 이런 기이한 테스트에서 인물들의 호감도를 올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그렇다면 호감도가 높은 게 그의 강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양은수 같은 사람들은 호감도가 상승해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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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보건실 냉장고 안에 배양액이 두 개밖에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에 박효섭은 살짝 놀랐다.냉장고 내부 온도가 아주 낮아서 배양액을 꺼내는 순간 바늘과 유리관에 순식간에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이건 네 거야.”박효섭이 그중 하나를 양은수에게 건넸다.“그런데 아직은 주사하지 마.”양은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놀란 얼굴로 말했다.“형도 퀘스트 알림을 받았구나.”박효섭은 몸을 낮춰 주빈에게 말했다.“주빈아, 형이 배양액을 주사해줄까?”그런데 주빈은 배양액을 맞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떨면서 거부했다.운동장에서 배양액 얘기를 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형, 나 주사 맞기 싫어요.”주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말했다. 박효섭이 화낼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무서워하지 마.”박효섭이 웃으며 달랬다.“왜 맞기 싫은지 형한테 이유를 얘기해줄 수 있어?”주빈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이었다.반면 서원은 배양액에 그렇게 큰 거부감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원 역시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가 올까 봐 겁먹은 표정이었다.양은수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서원을 내려다보았다.“뭐야? 배양액을 달라고 조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안 맞겠다고?”“양은수.”박효섭이 차분하게 양은수의 이름을 부르며 진정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주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주빈이가 싫다면 안 놓을게.”[클럽 알림. 박효섭 님은 배양액 주사를 거부했습니다. 박효섭 님에 대한 주빈의 호감도가 35%로 상승했습니다.]박효섭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정답이 주사를 놓지 않는 거였어?’주빈이 그제야 안심하면서 입을 열었다.“운동장에서 형이 배양액을 찾겠다고 했잖아요. 학교 규칙에 따르면 알면서 얘기하지 않는 건 거짓말을 한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형을 여기로 데려와야 했어요.”박효섭은 순간 멍해졌다.‘그래. 그때 먼저 배양액을 찾자고 한 건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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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박효섭이 긴장하기 시작했다.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턱 끝까지 흘러내렸는데 침을 삼킬 때마다 옷에 스며들었다.주빈이 고개를 돌리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형, 왜 그래요?”박효섭은 재빨리 입술에 검지를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시선이 여전히 자고 있는 기숙사 사감에게 고정된 채 속으로 심리 초상화 능력을 발동했다.마음속에 백지가 펼쳐지자마자 선이 빽빽하게 나타났다. 지우개로 미친 듯이 지우고 나서야 거대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박효섭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본능적으로 주빈을 등 뒤로 숨기고 백지 위의 형상이 완전히 선명해질 때까지 기다렸다.흰 옷 차림에 얼굴 여기저기에 수많은 조각이 붙어 있었다.‘흰 옷을 입은 아저씨.’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얼굴, 옷차림, 체형은 같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보건실 복도에서 만난 괴물은 전기봉을 들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이 괴물은 양손이 낫이었다.박효섭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주빈아, 소리 내지 말고 곧장 기숙사로 가자.”주빈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형, 우리 방은 4층 404호예요.”주빈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폴짝폴짝 계단을 올라갔다.“잠깐...”박효섭이 쫓아가려던 그때 뒤에서 기계적이고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 너?”그는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 경비실이 텅 비어 있었다.“뭐지?”의아함을 품고 다시 돌아선 순간 창백한 노인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경고. 현재 붕괴율 14%.]박효섭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오늘 새로 입사한 지도교사예요. 제가 맡은 학생이 이미 올라가서 빨리 따라가야 해요.”기숙사 사감이 박효섭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냥 지나갔다.그 익숙한 향기 속에 축축한 흙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기숙사 건물이 뭔가 이상했다.일반적으로 건물의 계단은 1층 끝에 있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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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박효섭은 장민석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지금은 서로를 떠보는, 서로 단서를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는 건 본인의 임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컸다.다만 유정금과 한 팀이 되라고 한 건 예상치 못했다.박효섭은 마지못해 따라오는 유정금을 힐끔 보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장민석 팀에서 유정금의 가치가 가장 낮은 게 틀림없었다.장민석은 처세술이 뛰어나고 사교적인 사람이지, 색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었다. 유정금의 멍청함을 이용하여 박효섭의 허점을 더 깊이 떠볼 생각이었다.설령 유정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장민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재미있는 건 먼저 거절한 쪽이 유정금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민석이 내민 이유가 겉보기엔 흠잡을 데가 없었다.유정금이 지도하는 학생이 여학생이고 그 여학생의 방이 정확히 5층에 있기 때문이었다....창밖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기숙사 복도에 차가운 백색 형광등들이 하나둘씩 켜졌다. 어두운 빛 아래 길고 어지러운 복도는 먹잇감을 기다리는 거미줄처럼 보였다.박효섭은 주빈과 함께 기숙사를 나섰고 유정금이 바로 뒤따랐다.복도 한가운데 우뚝 선 계단을 보며 유정금이 거만하게 박효섭을 밀쳤다.“내 발목 잡지 마. 알았어?”그는 화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학생을 내려다봤다.유정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꽃술 부분이 검은색과 하얀색이어야 하는 여학생이 지금 희미하게나마 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주빈의 색과는 다른, 핏빛 같은 붉은색이었다....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했다. 난간에 먼지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박효섭이 걸음을 멈추자 유정금이 짜증 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또 왜?”그는 대꾸하지 않고 계단 전체를 둘러봤다.기숙사 건물에 들어선 순간부터 건물이 참 새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층부터 4층까지 아무리 구조가 복잡해도 바닥은 깨끗했다.유정금의 학생이 5층 방에 머문다고 했다. 즉 5층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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