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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에 잠식된 대공
마기에 잠식된 대공
Author: 유월

황태자 전하, 또 지셨습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3 08:23:08

“전하.”

“…….”

“황태자 전하.”

“…….”

“테오도르.”

“들려.”

풀밭에 대자로 누워 있던 소년이 마침내 대답했다.

엘라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따뜻한 봄이었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았고, 황궁 정원을 가득 채운 벚나무에서는 연분홍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

부드러운 햇살.

향긋한 꽃내음.

그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엘라는 손에 든 목검으로 테오도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살아 계십니까?”

“죽었어.”

“말씀하셨으니 살아 계십니다.”

“방금 죽었어.”

“죽은 사람은 두 번이나 대답하지 않습니다.”

테오도르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

엘라는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쿡.

“일어나십시오.”

“싫어.”

쿡.

“일어나십시오.”

“엘라.”

쿡.

“그거 그만해.”

“일어나시면요.”

테오도르는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는 황태자한테 겁도 없이 이래?”

엘라는 목검을 거두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프셨습니까?”

“아팠어.”

“죄송합니다.”

너무도 순순한 사과였다.

테오도르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끝이야?”

“네.”

“변명은?”

“제가 찔렀는데 무슨 변명을 합니까?”

“보통은 실수였다거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하잖아.”

엘라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찔렀습니다.”

“…….”

“안 일어나셔서요.”

테오도르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상한 애였다.

펠리시아 공작가의 둘째 영애.

엘라 펠리시아.

열 살.

황태자와 동갑.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귀족 영애답지 않았다.

보통 또래의 귀족 아이들은 테오도르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

‘제국의 작은 태양.’

‘미래의 황제 폐하.’

듣기만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엘라는 달랐다.

첫 만남에서 황태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작으십니다.’

물론 바로 옆에 있던 펠리시아 공작이 딸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리고 오늘.

엘라는 그 황태자를 열세 번이나 풀밭에 넘어뜨렸다.

테오도르는 저 멀리 떨어진 자신의 목검을 바라보았다.

“열세 번.”

“네.”

“열세 번이나 졌어.”

“그렇습니다.”

“조금은 위로해 줄 수도 있잖아.”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열두 번만 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게 위로야?”

“한 번 줄었습니다.”

“엘라.”

“네.”

“넌 위로하지 마.”

엘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엘라는 정말로 자신을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못한 것은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보다 나아진 부분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엘라는 떨어진 목검을 주워 테오도르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괜찮았습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처음에는 세 번 만에 검을 놓치셨습니다.”

“그걸 꼭 말해야 해?”

“하지만 마지막에는 열여섯 번이나 막으셨습니다.”

테오도르가 입을 다물었다.

엘라는 목검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제보다 잘하셨습니다.”

잘했다.

테오도르는 그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검술 선생도.

제왕학 교수도.

궁정 예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늘 잘했다고 했다.

황태자이니 훌륭하다고.

역시 황실의 후계자답다고.

하지만 이상했다.

지금 엘라에게 들은 한마디가 그 모든 칭찬보다 더 기분 좋았다.

아마 엘라는 못했을 때 정말로 못했다고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잘했다는 말도 믿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지.”

엘라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귀가 빨갛습니다.”

“더워서 그래.”

“봄인데요.”

“오늘은 더워.”

“아까는 춥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엘라.”

“네.”

“가끔은 모르는 척해.”

엘라는 고민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진심으로 노력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테오도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엘라도 따라 웃었다.

두 아이의 웃음이 봄날의 정원 위로 번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잘 웃지 않는 아이였다.

정확히는 사람들 앞에서 웃는 법을 너무 일찍 잊은 아이였다.

그가 웃으면 모두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가 인상을 쓰면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찾았다.

그가 피곤해하면 교육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왔고.

그가 실수하면 후계자의 자질이 거론되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 테오도르는 점점 표정을 감추는 법부터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풀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자신을 황태자가 아니라 그저 대련에서 진 친구로 대하는 소녀 앞에서.

정원 가장자리에 선 커다란 벚나무 아래.

두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황제.

그리고 맞은편에는 그의 오랜 친구인 펠리시아 공작이 있었다.

황제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열세 번이라.”

공작의 손이 멈췄다.

“보고 계셨습니까?”

“처음부터.”

“그럼 왜 나무 뒤에 숨어 계셨습니까?”

“숨어 있다니. 황궁 정원에서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지.”

“나무 줄기 뒤로 의자를 옮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늘이 좋아서.”

공작은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친구.”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저렇게 부르실 때는 대부분 안 되는 부탁입니다.”

황제가 소리 내 웃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

황제가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공작이 가문을 잇기 전부터.

그래서 공작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저렇게 눈을 반짝일 때면 대개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요즘 테오도르가 많이 웃더군.”

황제가 말했다.

공작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원으로 향했다.

엘라가 목검을 쥔 자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대로 따라 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좋은 일이지.”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리네.”

“무엇이 말입니까?”

“내 아들이 원래 저렇게 웃는 아이였나 싶어서.”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너무 일찍 황태자가 되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황태자였으니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자리가 너무 무거웠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군주가 될 사람으로 평가받았고.

처음 검을 쥔 날부터 제국의 미래와 비교되었다.

“엘라는 그런 것을 모르니까요.”

공작이 말했다.

“황태자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도,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그래서 좋은 것 같네.”

“폐하.”

“저 아이는 테오도르를 그냥 테오도르로 보는 것 같거든.”

공작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목이 날아갈까 걱정입니다.”

“내가 있는 동안은 괜찮네.”

“그 뒤가 걱정이라는 말입니다.”

황제가 다시 웃었다.

그때 시종 하나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 점심 준비가 끝났습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도 데려오게.”

“예.”

시종이 정원으로 향했다.

황제는 멀리 있는 두 아이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욕심이 나는군.”

공작은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시종의 말을 들은 테오도르의 표정이 굳었다.

“왜?”

“점심을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테오도르는 곧장 엘라를 바라보았다.

“오늘 몇 번 졌는지 말하지 마.”

엘라는 눈을 깜빡였다.

“왜요?”

“아버지가 물어볼 거야.”

“그러면 대답하면 되지 않습니까?”

“열세 번 졌다고?”

“네.”

“엘라.”

“거짓말은 나쁩니다.”

“거짓말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말하지 말라는 거지.”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비슷한 것 아닙니까?”

“전혀 달라.”

“어떻게 다릅니까?”

테오도르는 설명하려다가 포기했다.

“됐다.”

두 아이는 시종을 따라 궁으로 향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엘라가 문득 물었다.

“많이 혼나십니까?”

“뭐가?”

“대련에서 지면요.”

테오도르는 잠시 망설였다.

“황태자는 져서는 안 된대.”

“누가 그랬습니까?”

“다들.”

“황제 폐하도요?”

“아버지는…….”

테오도르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길 때까지 다시 하라고 해.”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입니다.”

“내 편 좀 들어주면 안 돼?”

“전하의 편입니다.”

“어디가?”

“그래서 다시 하자는 겁니다.”

“그건 내 적이 하는 말이야.”

테오도르는 투덜거렸지만, 엘라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뭐가?”

“오늘은 지셨지만 어제보다는 나아졌으니까요.”

“그래서?”

“내일은 또 달라질 수 있잖아요.”

테오도르는 걸음을 늦췄다.

“내일도 와?”

엘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버지가 오신다면요.”

“네 아버지가 안 오면?”

“그럼 저도 못 옵니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엘라는 그 표정을 바라보다 덧붙였다.

“하지만 오고 싶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아직 전하를 열 번도 못 이겨 봤으니까요.”

“오늘 열세 번 이겼잖아!”

“연속으로 열 번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테오도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 어두워졌던 표정은 사라져 있었다.

봄 응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했다.

황제와 공작은 이미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두 아이가 들어오자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왔느냐.”

테오도르는 얌전히 허리를 숙였다.

“폐하.”

엘라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테오도르.”

“예.”

“오늘은 몇 번 졌느냐?”

역시 물었다.

테오도르는 엘라를 흘끗 바라보았다.

엘라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황제가 엘라에게 물었다.

“엘라가 대신 말해 보겠느냐?”

“열세 번입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엘라!”

“물어보셨습니다.”

“조금 망설이기라도 해!”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열세 번이라.”

황제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어깨를 움츠렸다.

“처음에는 몸이 덜 풀렸고요.”

“그래.”

“중간에는 바람이 눈에 들어왔고.”

“그래.”

“마지막에는 배가 고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유들이구나.”

테오도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모두 패배의 이유로는 훌륭하지.”

“…….”

“승리의 이유는 아니지만.”

테오도르는 고개를 숙였다.

엘라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처음보다 오래 버티셨습니다.”

황제가 그녀를 보았다.

“얼마나?”

“처음에는 세 번 만에 검을 놓치셨고, 마지막에는 열여섯 번 막으셨습니다.”

“그랬느냐?”

“네.”

엘라는 덧붙였다.

“오늘도 지셨지만 어제보다는 잘하셨습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잠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했구나.”

테오도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황제가 결과가 아닌 과정을 칭찬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일은 스무 번을 막아 보거라.”

“……예.”

“그리고 엘라.”

“네, 폐하.”

“조금은 봐주면 안 되겠느냐?”

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

“봐주면 전하께서 얼마나 나아졌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친구가 속상해할 수 있지 않느냐?”

“속상하다고 거짓말을 해도 됩니까?”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진 것을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테오도르가 황태자라서 더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냐?”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친구라서요.”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엘라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친구라면 잘못한 것을 알려줘야 하잖아요.”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말할 것이냐?”

엘라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싫어하지 않게 하려고 모르는 척하면.”

엘라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똑같이 잘못할 테니까요.”

테오도르는 말없이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자신이 특별한 말을 했다는 생각도 없는 듯 앞에 놓인 과자를 하나 집었다.

“하지만 저도 틀릴 수 있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네가?”

“네.”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엘라는 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잠시 오물거리던 아이가 대답했다.

“제가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죠.”

“그게 끝이냐?”

“다음에는 다르게 해야 하고요.”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황제는 가만히 엘라를 바라보았다.

완벽해서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아이였다.

그것이 황제에게는 더 낯설었다.

황제 주변의 어른들은 좀처럼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약점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잘못한 뒤에도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황제가 물었다.

“엘라.”

“네, 폐하.”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엘라는 손에 든 과자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좋은 사람.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유모도 좋은 사람이었다.

테오도르는…… 가끔 얄미웠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좋을 수 있을까?

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꼭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까?”

황제가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사람은 계속 좋을 수 없잖아요.”

“…….”

“화낼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엘라는 테오도르가 숨겨두었던 마지막 과자를 발견해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남의 과자를 훔쳐 먹을 때도 있고요.”

“그건 내 거야!”

“아직 안 드셨습니다.”

“그래도 내 거야!”

황제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냐?”

엘라는 테오도르에게 과자를 반으로 나누어 돌려주었다.

“굳이 먼저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빨랐다.

“같이 걸어갈 사람이요.”

“같이 걸어갈 사람?”

“네.”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넘어지면 기다려 주고.”

“…….”

“그 사람이 넘어지면 제가 기다려 주고.”

엘라는 반쪽짜리 과자를 한입에 넣었다.

“길을 잘못 들면 알려 주면 되잖아요.”

황제가 물었다.

“둘 다 잘못된 길로 갔다면?”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같이 돌아오면 됩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지?”

엘라는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의 반대가 꼭 나쁜 사람입니까?”

황제가 처음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엘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오래 봐야죠.”

응접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엘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황제는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좋은 신하.

좋은 군주.

좋은 황태자비.

앞으로 테오도르의 곁에는 수많은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그런 이름으로 먼저 불리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황제의 시선이 엘라에게 머물렀다.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해 주고.

나아지면 알아봐 주며.

자신도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

혼자 앞서가거나 뒤에서 따르기보다.

그저 옆에서 함께 걸을 사람.

황제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친구.”

펠리시아 공작의 눈빛이 즉시 경계로 물들었다.

“안 됩니다.”

“아직 말하지 않았네.”

“이제 말씀하시겠지요.”

황제는 웃으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자네 딸을 한 달만 빌려주게.”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엘라가 즉시 끼어들었다.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구나. 그러면 부탁하마.”

“무엇을요?”

“내일부터 테오도르와 함께 수업을 받아 보겠느냐?”

테오도르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엘라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검술 수업입니까?”

“제왕학과 역사, 정치와 예법 수업까지 전부.”

엘라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아침에 일찍 시작합니까?”

“해가 뜨기 전에.”

“숙제도 있습니까?”

“아주 많지.”

엘라는 천천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공작은 팔짱을 낀 채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태자 교육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은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이미 기대에 찬 얼굴로 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하자.”

“전하께서 수업 중에 주무시면요?”

“안 잘게.”

“어제도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말했어?”

“시종장님이요.”

“그 사람은 왜 그런 것까지 말해?”

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제가 깨워도 됩니까?”

“어떻게?”

“옆구리를 찌르면 됩니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굳었다.

“손으로?”

엘라는 목검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요.”

“아버지, 다시 생각해 보세요.”

테오도르가 황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웃고 있었다.

그날.

황제는 어린 엘라를 아들의 첫 번째 친구이자 수업 동무로 받아들였다.

그 선택이 훗날 제국과 북부의 운명까지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황태자의 첫 번째 합동 수업에서.

엘라는 황실 최고의 노교수에게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교실 전체를 조용하게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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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여섯 번의 반복 시험은 이틀에 걸쳐 끝났다.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네 번째에서 자동 제어석이 갈색 마력석의 내부 통로를 잘못 읽어 분배량을 6퍼센트 높이는 바람에 진동 수치가 기준선 가까이 올라갔고, 다섯 번째에서는 오염 마기의 점도가 예상보다 높아 세척 시간이 스물세 분까지 늘어났다. 여섯 번째에는 회수석의 흡수 속도가 세척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중간에 한 차례 정지해야 했고, 마지막 일곱 번째 시험에서는 일부러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일반석을 섞었다.완벽하게 같은 결과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대신 일곱 번 모두 사람의 마력이나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백은샘을 포함한 자연 지맥에서도 힘을 끌어오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시험은 미리 정한 기준에서 멈췄고, 멈춘 뒤에도 마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자동 제어석은 시험을 거칠 때마다 조금씩 수정되어, 마지막에는 각 전달석의 상태를 먼저 읽고 그 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흐름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일곱 번째 시험이 끝난 직후 아르센은 결과표를 테이블 한가운데 내려놓았다.“연구실 단계는 여기까지 가도 되겠습니다.”단테가 마지막 수치를 읽었다.“마지막 돌.”“잔류 오염 0.8퍼센트. 추가 균열 없습니다.”“제일 약한 거였다며.”“네. 현장 본선에 넣기에는 등급이 낮은 돌입니다.”단테는 갈색 마력석을 바라봤다. 처음 시험했을 때 진동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원래 방식대로라면 품질 미달 판정을 받고 창고 한쪽으로 밀려났을 돌이었다. 그런데 흐름을 돌에 맞춰 조정하고 나자 다른 돌보다 조금 느릴 뿐 제 역할을 했다.“그러면 이 정도 돌까지 현장에서 쓸 수 있다는 건가.”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주 전달석으로는 권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하가 낮은 구간이나 임시 교체석으로는 충분합니다.”“고급석 없다고 바로 멈추지는 않겠네.”“그렇습니다.”단테가 자료를 내려놓았다. “그게 좋군.”아르센은 곧바로 다음 설계도를 꺼냈다. 연구실 시험을

  • 마기에 잠식된 대공   빌리지 않아도 되는 힘

    백은샘의 흐름을 본떠 만든 세척 구조는 다음 날 아침부터 다섯 번의 반복 시험에 들어갔다. 전날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바로 현장 설계에 넣지 않기로 한 결정 때문이었다. 아르센은 같은 크기의 일반 마력석 세 개를 새로 준비했고, 에른은 각각 다른 산지에서 가져온 돌을 섞었다. 하나는 북부에서 흔히 쓰는 회색 마력석, 하나는 황실 기술단이 수도에서 가져온 표준석, 마지막 하나는 품질이 조금 떨어져 보조 장치에나 쓰던 갈색 마력석이었다.단테가 실험대 위 세 돌을 보고 물었다.“일부러 다른 걸 쓴 거야?”“네. 좋은 돌에서만 되는 구조면 북부 전체에 쓰기 어렵습니다.”아르센이 갈색 돌을 들어 보였다.“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실제 방어선에는 항상 최상급 마력석만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전쟁이 길어지거나 보급이 끊기면 이런 돌도 써야 합니다.”단테는 잠시 돌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재료가 있을 때만 안전한 체계는 결국 물자가 부족해지는 순간 누군가의 몸으로 부족분을 메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북부가 몇 번이나 그래왔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엘라는 안전선 밖에서 자료판을 받아들며 물었다.“오늘도 백은샘에서 가져오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죠?”에른이 답했다.“없습니다. 어제 기록한 흐름 비율만 사용합니다. 7 대 3, 4 대 6, 5 대 5로 순차 변환하고 합류점에서 압력을 한번 낮춥니다.”“그 비율이 꼭 저 숫자여야 합니까?”아르센이 웃었다.“그걸 확인하는 게 오늘 시험 중 하나입니다.”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성공한 모양을 그대로 신앙처럼 반복하는 순간, 또 다른 고정된 답이 된다. 정말 중요한 건 백은샘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잔류 마기를 움직이게 했는지 찾는 일이었다.⸻첫 번째 반복 시험은 전날과 거의 같은 조건이었다.손상률 14퍼센트의 폐기 예정 전달석 안에 남은 오염을 3.6퍼센트까지 맞춘 뒤, 일반 마력을 세 갈래 흐름으로 흘렸다. 백은샘의 실제 마력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신성력을

  • 마기에 잠식된 대공   흐름을 가져오지 않아도 됩니다

    백은샘을 직접 확인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오전 회의가 끝나기 직전이었다.처음에는 현장 조사를 나갈 계획이 없었다. 옛 남서 온실 아래 막힌 배수 지맥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확인했고, 그 끝에 현재도 남아 있는 백은샘이 있다는 것까지 찾았으니 다음 순서는 기록 조사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날 단테가 먼저 ‘이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 뒤라, 서쪽의 맑은 지맥을 세척용으로 사용할 계획도 일단 보류된 상태였다.그런데 에른이 오래된 대공성 원예 기록 한 장을 가져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백은샘 주변 식생 기록입니다.”단테가 문서를 받아들었다. 봄철 개화 시기, 야생동물 관찰 기록, 샘물 온도. 얼핏 보면 마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마법사가 아니라 백여 년 전 대공성의 정원 관리인이었다.엘라는 단테 옆에서 복제본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을 멈췄다.백은샘의 물은 한겨울에도 완전히 얼지 않으며, 샘 주변의 흰풀은 성내 서쪽 정원보다 보름가량 먼저 꽃을 피운다. 단, 샘물을 옮겨 심은 흰풀에는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물을 가져와도 안 됐네요.”엘라가 말하자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단테가 물었다. “무엇을.”“따뜻한 물이 원인인지, 지맥 자체의 흐름이 원인인지요.”아르센이 지도 위 백은샘을 가리켰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가 필요한 건 샘의 마력을 가져오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흐름의 형태만 분석할 수 있다면요.”그 말에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선대 대공의 우회 마력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선대의 마력을 계속 꺼내 쓰는 대신, 그들이 마기를 오래 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겼던 흐름의 패턴을 일반 마력석에 복사했다. 그렇다면 맑은 지맥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지맥을 세척수처럼 끌어다 쓰지 않고, 그것이 잔류 마기를 밀어내는 방식만 배울 수 있다면 백은샘을 건드릴 이유가 없어진다.단테도 같은 데까지 생각이 닿은 듯 문서를 다시 봤다.“현장에서

  • 마기에 잠식된 대공   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시험은 중단됐다.전달석 잔류 오염이 예상보다 빠르게 줄었다는 결과만 놓고 보면, 원래라면 연구실 분위기가 들떠도 이상하지 않았다. 3.8퍼센트까지 낮춘 뒤 밤새 자연 방출을 거쳤고, 다음 날 아침 0.9퍼센트. 숫자만 보면 효율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줄어든 마기가 회수석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부터 누구도 그 수치를 성과라고 부르지 않았다.에른은 연구실 바닥 전체에 측정침을 박았고, 아르센은 서쪽 정원 지맥과 대공성 지하 지맥을 각각 따로 표시했다. 기존 지도에는 두 흐름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실제 측정값은 달랐다. 아주 가느다란 지맥 하나가 연구실 아래를 지나 남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약해서 평소에는 감지하기 어려웠고, 서쪽의 맑은 흐름이 세척 시험으로 조금 활성화되면서 그제야 반응이 선명해진 것이다.단테는 지도 위에 새로 그어진 얇은 선을 한동안 내려다봤다.“끝은?”“아직 못 찾았습니다.”에른이 대답했다.“방향은.”“남서쪽입니다. 대공성 밖으로 나갑니다.”“거리.”“현재 확인한 건 약 600미터. 그 뒤로는 흐름이 너무 약해집니다.”단테는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여기까지?”에른이 잠시 멈췄다.예전 같으면 대공이 직접 더 확인하자고 했을 질문이었다.오늘은 의미가 달랐다.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우선 성 안 구간만 더 확인하고, 외부 추적은 기사단 지형 담당과 마렌 님 기록을 같이 보겠습니다.”“좋아.”단테는 더 말하지 않았다.엘라는 연구실 바닥에 표시된 가느다란 선을 보며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검은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과 같은 방향감이 남아 있었다. 남서쪽. 희미하지만 분명한 감각.단테가 알아챘다.“아직 느껴져?”“조금요.”“아파?”“아닙니다.”“그럼.”그가 아주 짧게 말했다.“느낌 따라가지는 마.”엘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안 갑니다.”“바로 대답하네.”“저도 이제 압니다.”단테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뭘.”“궁금한

  • 마기에 잠식된 대공   맑은 길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북부 지맥에서 ‘맑은 가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오염된 지맥은 오히려 찾기 쉬웠다. 마기가 오래 머문 곳은 토양의 마력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방어선과 연결된 지점에는 검은 침식 흔적이 남았다. 반면 깨끗한 지맥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물이 새는 곳은 수리 기록이 남지만, 잘 흐르는 수로는 굳이 장부 한쪽을 차지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에른과 아르센은 아침부터 북부 전역의 지맥 지도를 겹쳐놓고 오염도가 낮은 구간을 추렸지만, 낮다는 것과 실제로 세척에 사용할 만큼 안정적인 흐름이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후보는 일곱 곳입니다.”에른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북부 대공성 회의실에는 단테와 엘라, 아르센, 마렌, 휴고, 세리아가 모여 있었다. 최근에는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사람 수부터 늘리지 않았다. 누가 필요한지를 먼저 정했고, 오늘은 지맥과 민간 수원, 단테와 엘라의 상태를 함께 봐야 했기 때문에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했다.아르센이 일곱 개의 점 가운데 세 곳에 표시를 그었다. “이 셋은 곧바로 제외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르덴 지하수와 너무 가깝고, 다른 하나는 여름 목초지 아래를 지나며, 마지막 하나는 현재 북부 기사단 보급로와 겹칩니다.”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넷.”“두 곳은 흐름이 너무 약합니다. 전달석 세척에는 쓸 수 있겠지만 실제 분산로 전체를 관리하기에는 부족합니다.”엘라가 물었다. “그럼 두 곳 남네요.”에른이 지도 서쪽과 북동쪽을 각각 짚었다. “하나는 대공성 서쪽 지맥. 다른 하나는 북동쪽 산림 아래를 흐르는 자연 지맥입니다.”단테의 시선이 서쪽에 멈췄다.엘라도 금방 알아봤다.“설화초.”“네.”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서쪽 정원 아래에서 발견했던 흐름과 같은 계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며칠 전, 눈 아래에서 가장 먼저 설화초가 올라오게 만들었던 따뜻한 지맥. 북문 계통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오염 반응은 거의 없었고, 대공성에서

  • 마기에 잠식된 대공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길을 택했습니다

    실제 오염 마기를 사용하는 첫 현장 시험은 설화초가 완전히 핀 날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대공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단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했고, 전날보다 잠을 조금 덜 잤다는 사실까지 먼저 알렸다. 두통과 감각 이상은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최근 평균 범위 안이었다. 엘라는 그 옆에서 듣기만 했다. 이제 단테가 자기 상태를 말할 때마다 의미를 붙이거나 변화라고 짚어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면 멈추는 것도 어느새 현장 준비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사용하는 오염 마기는 제9방어선에서 회수된 마력석에서 추출한 극소량이었다. 이전에 오염도 78퍼센트였던 돌을 제3감시탑의 기존 순환에 잠깐 연결해 31퍼센트까지 낮췄던 것과는 방식부터 달랐다. 그때는 이미 살아 있는 고대 흐름에 작은 돌 하나를 맡겨보는 시험이었다면, 오늘은 자신들이 새로 만든 네 개의 전달석과 두 개의 교대선을 거쳐 실제 오염 마기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처음 확인하는 자리였다.그래서 사람들은 어제보다 훨씬 말이 적었다.회백 능선 초입에는 길이 120미터의 시험 구간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눈을 걷어낸 암반 사이로 네 개의 전달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설되어 있었고, 각 전달석 사이에는 두 줄의 얇은 마력선이 번갈아 주선 역할을 맡도록 연결돼 있었다. 그 끝에는 방출 장치 대신 밀폐형 회수석이 놓였다. 오늘은 환경으로 마기를 내보내지 않는다. 전달만 확인한 뒤 마지막에 다시 회수한다. 실제 분산 방출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아르센이 마지막 봉인을 확인하며 말했다.“오늘 목표는 세 개뿐입니다. 실제 오염 마기가 전달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지, 이동 과정에서 전달석에 얼마나 남는지, 한쪽 선을 중간에 끊었을 때 보조선으로 전환되는지. 그 이상은 보지 않습니다.”단테가 물었다.“끝까지 안정적이어도?”“끝냅니다.”이번에는 아르센이 먼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단테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에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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