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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은 대본을 다 읽었다 (3)

Author: 리사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7 18:25:38

몇 달 뒤, 빈 네모가 안쪽부터 잉크처럼 차올랐다.

□ 균열 감지 표준 채택

검은색이 마지막 모서리까지 번지고,

■ 균열 감지 표준 채택

가온다인 기술이 나라에서 쓸 기준 후보에 오른 날이었다. 남들이 곧 문 닫을 회사로 읽은 걸 나는 다음 시대의 기준으로 읽었고, 그 한 칸이 채워지던 날 내 계좌 자릿수도 조용히 한 칸 늘었다.

내가 세운 첫 번째 플래그.

그 뒤론 빨랐다. 문 닫기 직전인 연구소를 줍고, 퇴짜 맞은 논문 쓴 연구자한테 돈을 넣고, 아무도 안 보는 제조사 몫이랑 길도 안 난 외곽 땅을 주웠다.

검은 네모 피하고 빈 네모 채우는 단순 작업을 천 일 동안 반복하면서 돈으로 회사 몫을 사고 그 몫으로 사람을 얻었고, 그렇게 얻은 사람들이 내 이름 없이 움직이는 힘이 됐다.

그렇게 겨울이 세 번 지났다.

물론 열여섯짜리가 이 계약을 다 혼자 뛸 순 없다. 나 대신 나설 어른을 세우고 이름 안 나오게 회사를 몇 겹 겹쳐 놓은 다음, 도장 가진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투자사 대표, 엔터 대표, 국가급 길드장.

근데 하필 상당수가 나보다 열 살은 많은 여자였고, 교복 입은 애가 호텔 라운지에서 연상 여자들이랑 위스키 놓고 마주 앉은 그림은 설명이 쏙 빠진 채로 학교에 흘러들었다.

"한도윤? 걔 학교도 거의 안 나온다며."

"호텔에서 봤대. 웬 나이 많은 여자랑."

"재벌가에서 쫓겨나더니 결국 저러고 사네."

해명? 안 했다.

해명은 아쉬운 쪽이 하는 거고 나는 아쉬울 게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내가 여자랑 술에 돈 쓴다고 믿는 동안 그 돈은 회사랑 사람이랑 미래를 샀다.

공짜 연막이었다. 안 쓸 이유가 없지.

* * *

그리고 천 일째 되는 날.

주작 길드장 홍세라의 차가 아카데미 정문 앞에 섰다. 검은 세단인데 유리에 필름을 얼마나 진하게 발랐는지, 밖에서 보면 사람이 탔는지도 모를 물건이었다.

"안 내리세요?"

운전대를 쥔 홍세라가 턱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차 안엔 향수 냄새가 얇게 깔려 있었고, 대시보드엔 웬 곰 인형이 하나 굴러다녔다. 국가급 길드장 차에 곰 인형이라니.

"내릴게. 그러니까 창문 좀 올리고."

"싫은데요."

"거기 지금 신입생 사백 명 있어."

"알아요. 그러니까 내리시는 거 보고 갈게요."

"보고만 가."

"그 인형 건드리지 마세요. 애들이 준 거예요."

"안 건드렸어. 쳐다만 봤지."

"쳐다보시는 것도 하지 마세요."

내가 문을 여는 순간, 홍세라는 기어이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 손까지 흔들었다. 전국에 얼굴 팔린 여자가, 그것도 아주 활짝.

"공부 열심히 하시고요. 밥도 드시고."

"길드장이 애 학교 데려다주는 것도 일이야?"

"오늘은 취미예요, 대표님."

"취미가 참 값비싸네."

"내리세요."

덕분에 3년 묵힌 소문은 입학 첫날부터 아주 성대하게 터졌다.

"저게 걔야? 진짜 길드장이랑?"

"쉿. 눈 마주치지 마."

완벽하네.

그날, 처음으로 원작의 주인공을 만났다. 그리고 원작에 없는 대사를 들었다.

* * *

"네 손이 이 학교 누구한테든 닿는 순간, 내가 먼저 꺾는다."

강현우의 경고가 끝났고, 그 머리 위로 시야가 여태 본 적 없는 글줄을 띄웠다.

━━━━━━━━━━━━━━

[강현우 — 플래그: 다수]

[숨은 플래그: ??? (7)]

━━━━━━━━━━━━━━

물음표가 일곱 개.

기업 총수에 국가급 길드장까지, 어른이란 어른은 다 훑고 다녔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남들은 많아야 한두 개인데 이 자식은 읽히지도 않는 게 일곱 개.

저놈이 왜 원작에도 없는 첫날부터 나를 콕 집어 찾아왔는지.

회귀 전의 한도윤.

그 세계에서 이 몸은 원작대로 여자 괴롭히고 돈으로 사람 부수고 끝내 강현우 손에 죽었다. 저놈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죄를 기억하는 거다. 내가 천 일 동안 뭘 바꿨는지는 하나도 모른 채.

기가 막히지.

3년을 들여 원작의 퇴장 플래그를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제일 크고 제일 위험한 플래그가 원작 밖의 기억을 들고 제 발로 먼저 찾아왔다.

"할 말 없나."

강현우가 내 대답을 기다렸다. 주변엔 입학식보다 재밌는 구경거리를 찾은 얼굴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중 몇은 아예 폰을 들고 있었으니, 여기서 쫄아서 물러나면 소문은 첫날부터 확정이다. 강현우한테 찍혀 숨도 못 쉬는 망나니.

그건 내 대본이 아닌데.

"기대할게."

"뭐?"

"꺾는 거. 기대한다고."

어깨를 한 번 돌렸다.

"근데 그 전에 오리엔테이션부터 가야 되지 않냐. 늦으면 둘 다 벌점이래."

"지금 그 소리가 나와?"

"나오지. 나 벌점 처음이야."

강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등 뒤로 시선이 칼처럼 따라붙었지만 걸음은 안 늦췄다. 늦추면 지는 거니까.

원작의 첫 장면은 이미 바뀌었다. 대본을 다 읽은 빌런과, 그 대본의 실패를 기억하는 주인공. 둘 중에 누가 이번 이야기를 가져갈지는 아직 안 정해졌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정하면 된다.

'곤란한데. 주인공이 생각보다 빡세네.'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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