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리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방석도 제대로 없어 얇은 러그 위에 그대로 앉자 바닥의 찬 기운이 무릎으로 올라왔다. 내 무릎이 태윤의 긴 다리에 가볍게 부딪혔다.“미안.” 발을 빼려 했지만 그가 장난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도망갈 틈을 막았다.“……뭐 해?” 고개를 들자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 안에 예전과 다른 잔잔한 열이 있었다.“먹자.” 태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달걀말이 한 조각을 먹고 몇 번 씹더니 말했다.“안 탔네.”“그러니까.” 괜히 뿌듯해져 웃음이 났다. 오늘 오후 변호사와 회사 쪽에서 연락이 왔다. 현강의 일부 자산에 걸렸던우리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방석도 제대로 없어 얇은 러그 위에 그대로 앉자 바닥의 찬 기운이 무릎으로 올라왔다. 내 무릎이 태윤의 긴 다리에 가볍게 부딪혔다.“미안.” 발을 빼려 했지만 그가 장난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도망갈 틈을 막았다.“……뭐 해?” 고개를 들자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 안에 예전과 다른 잔잔한 열이 있었다.“먹자.” 태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달걀말이 한 조각을 먹고 몇 번 씹더니 말했다.“안 탔네.”“그러니까.” 괜히 뿌듯해져 웃음이 났다. 오늘 오후 변호사와 회사 쪽에서 연락이 왔다. 현강의 일부 자산에 걸렸던 보전조치와 담보 관련 제한이 해소되기 시작했고, 공사가 멈췄던 새 집도 다시 진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일이면 차량이 이 건물 앞에 올 것이다. 바람이 새고 옆집 TV 소리가 들리는 이 원룸 생활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런데 눈앞의 값싼 플라스틱 그릇과 모양이 삐뚤한 달걀말이가 묘하게 아깝게 느껴졌다. 고급 러그와 넓은 식탁보다, 무릎이 부딪힐 만큼 좁은 이 테이블이 더 우리 것처럼 느껴졌다. 식사하는 동안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 태윤은 말없이 내 반찬 그릇을 한 번 살피고, 내가 싫어하는 파 조각을 자기 쪽으로 옮겼다. 아주 작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방에 들어온 뒤 우리는 그런 작은 일들을 수없이 배웠다. 상대가 얼마나 먹는지. 어느 쪽으로 자는 게 편한지. 언제 혼자 있게 두어야 하는지. 무엇을 묻고, 무엇은 기다려야 하는지.
접견 종료를 알리는 표시등이 켜졌다. 직원이 문 가까이 다가섰다. 태윤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강태윤.』 불려서 손을 멈췄다. 지후는 차단벽 너머에서 지독하게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태윤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도 같은 종류의 잘못을 여러 번 반복했다.“모르겠어.” 지후가 희미하게 눈을 크게 떴다.“다만…… 상대를 위한 거라고 확신할수록, 먼저 본인한테 물었어야 했겠지.” 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의 절반 이상은 태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태윤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려 하자 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서린이한테……』 지후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전언은 안 받아.” 태윤이 조용히 끊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변호인을 통해 보내. 받을지 읽을지도 서린이 정하게 해.” 지후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작게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 접견동을 나오자 창밖에는 비가 그친 뒤의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태윤은 복도를 걸으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서린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오는 길에 우유 사 와. 그리고 오늘은 회사 다시 가지 마.』 태윤의 입가가 저절로 풀렸다. 복수보다 이 지시가 훨씬 거스르기 어려웠다.『우유 알겠어. 저녁은 뭐 먹고 싶어?』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오므라이스.』『내가 만드는 거야?』『당연하지.』
지후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사건 때 생긴 상처가 얼굴에 남아 있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의자에 앉아 태윤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가 굳었다. 둘은 한동안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먼저 손을 뻗은 건 지후였다.『……왜 왔어.』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태윤도 수화기를 들었다.“네가 불렀잖아.”『내 꼴을 보러 왔나.』“그 목적이면 안 왔어.” 지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잠시 뒤,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서린이는……』 태윤의 손가락이 수화기를 세게 감쌌다.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후가 서린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무사해.” 지후가 눈을 감았다. 몇 초뿐이었지만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한 번만 만나게 해 줘.』 그 말에 속이 다시 거칠어졌다. 예전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내 여자야’라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태윤은 한 번 숨을 내쉬었다.“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야.” 지후가 눈을 들었다.“만날지 말지는 서린이 정해.”『……네가 그런 말을 해?』“나도 이상하긴 해.” 태윤이 씁쓸하게 웃었다.“나도 네가 했던 잘못과 닮은 짓을 한 적이 있으니까.” 지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나랑 같은 취급 하지 마.』“같다고 한 적 없어.”
결과가 화면에 뜬 순간, 숨을 참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다. 강태윤 사내이사 해임안은 부결됐다. 잠시 뒤 여기저기서 박수가 시작됐다.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이겼다. 그 말을 마음속으로 떠올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먼저 빠졌다. 구로구 원룸에서 관리비 고지서를 펼쳐 놓고 한참 계산하던 밤. 태윤이 아무 말 없이 편의점 도시락의 고기 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 주던 모습. 예전에 함께 일했던 가사관리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작은 협력업체들을 하나씩 찾아가던 날들. 그 모든 장면이 뒤늦게 가슴으로 돌아왔다.“서린.” 태윤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도 잊은 듯 무릎을 굽혀 내 손을 감쌌다.“몸은 괜찮아?”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이제 와서?”“지금이니까.”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고마워.”“나 혼자 한 거 아니야.”“알아.” 태윤은 뒤쪽에 앉은 협력사 대표들과 베르트랑 측 인사, 법률자문단을 바라봤다.“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나는 중간에 다 부숴 버렸을지도 몰라.”“그러면 곤란하지.”“그래서 이제는 안 그러려고.” 놀랄 만큼 순순한 대답이었다. 태윤은 다시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갔다.“오늘 의결 결과에 감사드립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현강은 아직 정상화 과정에 있습니다. 자금 문제도, 내부조사도, 오늘 하
박수가 멈추자 한명 측 주주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외부 조사자료의 진위와 법적 의미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동의합니다.” 태윤이 내 휠체어 옆에서 일어나 말했다.“그리고 오늘 안건도 그 조사 결과를 미리 단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는 앞쪽 화면으로 돌아갔다.“오늘 판단해야 할 건 제 이사직 유지가 현강에 이익인지, 그리고 회사가 계속 운영될 수 있는지입니다.” 베르트랑 측 문서가 화면에 표시됐다.“단기 브리지 한도는 최종 계약조건 확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중장기 지원은 텀시트 단계이고 추가 실사가 남아 있습니다.” 태윤은 일부러 ‘해결됐다’고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내일 바로 유동성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전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어 협력사 목록이 나타났다. 거래를 유지하겠다고 회신한 회사들. 일부 발주에 선급금 조건을 검토하는 곳. 보유 지분은 작지만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러 온 주주들. 태윤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현강이 흔들리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이어 가겠다고 해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명 측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소액 거래 몇 건으로 전체 유동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압니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액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도 거래를 계속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그 신뢰를 숫자보다 작게 취급하지 않겠습니다.” 회의장은 다시
한명 측 주주 대표가 즉시 반박했다.“아직 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텀시트입니다. 외국계 파트너의 지원 의사만으로 현강의 리스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맞습니다.” 베르트랑 이사는 담담했다.“그래서 승인 조건과 추가 절차를 명확히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저희는 현강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의 전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당장 자금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단순한 그림으로 해임안을 밀어붙이기 어려워졌다. 그때 뒤쪽에서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서린아.” 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두꺼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최만호가 휠체어를 밀고, 정미숙과 세명의료원 간호사가 옆에 있었다. 태윤이 자리에서 내려왔다.“왔네.” 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섞인 얼굴이었다.“메시지 봤어?”“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못 막을 거 알아서 박 실장한테 동선부터 확인했어.” 나는 작게 웃었다.“많이 배웠네.” 태윤은 간호사를 봤다.“조건이 어떻게 됩니까?”“90분 이내, 휠체어 유지, 증상 생기면 즉시 이동입니다.” 그제야 태윤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무리하러 온 거 아니야. 자료만 전달하고 앉아 있을게.”“알아.” 한명 측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