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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비가 시야를 하얗게 지워 버렸다.
온몸이 젖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크 원피스가 피부에 달라붙어 체온을 빼앗고, 신발 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손끝이 굳어 갔다. 떨림이 멎지 않는 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보내는 시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말했을 텐데.” 빗소리에 묻힐 듯 낮은 목소리. 우산도 쓰지 않은 강태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미칠 만큼 좋아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가슴 한가운데가 거칠게 짓눌렸다. 매달리듯 뻗으려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비를 잔뜩 먹어 축 늘어진 그의 싸구려 티셔츠 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정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부감뿐이었다. “태윤아…… 미안해. 나…….” “이름 부르지 마.” 날이 선 목소리가 잘라 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잠시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밝혔다. 햇볕처럼 따뜻했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모든 걸 태우고도 남을 만큼 차가운 분노가 있었다. “너 같은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혀. ……꺼져.” 낡고 녹슨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울리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스물두 번째 생일 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방식으로, 나 윤서린의 첫사랑은 죽었다.◇
“윤서린 씨. 듣고 있어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사물함 거울과 가사서비스 업체의 낡은 휴게실 벽이 눈앞에 들어왔다. “아, 죄송해요…….” “정신 차려요. 오늘 현장은 갑자기 빠진 사람 대신 들어가는 거예요. 이용자가 굉장히 깔끔한 분이라니까.” 코디네이터 김미정 씨가 코웃음 치듯 업무 지시서를 내밀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상류층 집안의 딸이 아니었다. 여러 번 빨아 색이 빠진 셔츠와 검은 바지, 실용성밖에 없는 베이지색 앞치마. 화장기 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주소는 여기. 특히 사적인 공간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요. 괜한 문제 생기면 곤란하니까.”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성북동. 예전에 살았던 동네의 한복판, 그것도 우리 집이 있던 곳 바로 옆이었다. “왜 그래요?” 미정 씨가 눈치를 살피는 목소리로 묻자 얼른 앞치마 끈을 세게 쥐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7년이나 지났어. 그 사람도 이제는 거기 살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윤성홀딩스가 무너지고, 어머니까지 중병으로 쓰러진 뒤 모든 것을 잃은 지도 7년. 살아남으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손에 먼지를 묻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이용자라도 오늘 벌 돈과 내일 이어질 어머니의 치료비가 더 중요했다. “그냥 없는 사람처럼 일하고, 먼지 하나 안 남기고 나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뒤 청소도구가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멨다. 좁은 출입문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성북동 언덕 위에 내렸을 때는 공기마저 달라진 듯했다. 잘 손질된 가로수, 쓰레기 하나 없는 도로, 높은 담 너머로 보이는 정원수.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가 희미한 동네였다. 대신 조용하고 압도적인 부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가방 끈을 움켜쥐고 예전에 걷던 언덕길을 올랐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보도, 등하교 차량을 기다리던 회차로. 그 끝에는 예전 우리 집, 윤성가 저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 가난했던 태윤이 살던 낡은 다세대주택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주변을 압도하는 현대식 저택이 솟아 있었다. “……여기라고?”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노출 콘크리트와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거대한 유리창. 높게 둘러친 담은 안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요새처럼 보였다. 예전, 바로 옆에 살던 가난한 소년을 떠올릴 뻔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임신 후기가 되자 몸을 굽히는 일도 힘들었다. 어느 아침, 떨어뜨린 숟가락을 주우려는데 해준이가 식탁 밑으로 들어가 먼저 꺼냈다.“엄마, 내가 할게. 나 다 컸잖아.”“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나는 의자에 앉아 아이의 뺨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 주었다.“해준이도 엄마한테 해 달라는 거 있으면 말해. 앉아서 안아 주는 건 할 수 있어.”“다 컸는데도?” 양팔을 벌리자 아이는 잠깐 복도를 보더니 내 무릎에 옆으로 올라앉았다. 배를 누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커피를 들고 들어온 태윤이 말했다.“나도 안아 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말하면 되잖아.”“그럼 말하면 해 줘?” 해준이가 깔깔 웃었다. 그날 밤에는 아이가 잠들기 전 갑자기 울었다.“나 아기 싫어. 엄마 아빠가 아기만 좋아하잖아.” 태윤이 말하려는 걸 내가 소매를 잡아 막았다. 해준이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무릎으로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는 동안 아이는 한참 울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내 배를 한 번 만졌다.“그래도 조금은 와도 돼.”“응.” 나는 웃거나 더 설득하지 않았다. 다음 날 해준이는 어제 일을 잊은 듯 시리얼을 먹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둘이 쿠키를 만들자고 하니 곧장 좋다고 했다. 반죽을 만지느라 손과 옷이 밀가루투성이가 됐지만, 첫 번째로 구운 건 아빠 접시에 올려놓았다. 귀가한 태윤이 별 모양인지 알아보기 힘든 쿠키를 오래 바라봤다.“안 먹
계절이 한 번 바뀌고 배가 제법 불렀을 무렵, 해준이가 부쩍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혼자 하던 옷 갈아입기도 해 달라고 했고, 밥을 떠먹여 달라며 입을 벌렸다. 밤에는 자기 베개를 안고 우리 침실로 왔다. 욕실에서 태윤과 함께 씻던 어느 날, 작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아기 오면 엄마, 나 필요 없어?” 수건을 접던 손이 멈췄다.“누가 그런 말을 했어?”“아무도. 엄마가 자꾸 아기 얘기만 해.” 진료 일정이나 몸 상태를 말하는 횟수가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나에겐 준비할 일이었지만 해준이에겐 빼앗기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몰랐다. 목욕을 마친 아이가 내 무릎에 올라왔다. 예전보다 무거워진 몸을 안고 젖은 머리카락에 뺨을 댔다.“동생이 와도 해준이가 필요 없어진다는 일은 없어.”“진짜?”“진짜.” 태윤도 옆에 앉았다.“난 네가 없으면 곤란한데. 아기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든. 네가 나보다 선배야.”“아빠 아기 무서워?”“응, 무서워.”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해준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태윤은 젖은 앞머리를 넘기는 척하며 잠시 눈가를 가렸다.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뒤, 나는 해준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고 했다. 태윤도 그랬다고 답했다. 가족이 늘면 지킬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고만 생각했단다. 하지만 해준이에게는 내 무릎과 잠들기 전의 시간, 아빠의 시선을 나눌 누군가가 오는 일이었다. 다음 날 태윤은 출근 전에 아이 방 바닥에 앉아 블록을 쌓았다. 해준이가 회사에 늦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해준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블록을 쌓고 있었다. 세 층쯤 올리면 무너졌고, 그때마다 소리까지 내며 아쉬워했다. 설거지를 마친 태윤이 문가에서 나를 봤다. 나는 해준이 옆에 앉았다.“해준아. 엄마 배에 아주 작은 아기가 있어.” 아이는 내 배와 태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어디?”“아직 너무 작아서 안 보여.” 해준이가 내 옷자락을 들어 올리려 하자 태윤이 옆으로 와 앉았다.“네 동생이야.”“내 거야?”“네 동생이지. 해준이가 먼저 태어났고.” 해준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록 뒤에 있던 빨간 소방차를 찾아 두 손으로 안고 왔다. 잘 때도 머리맡에 두는 차였다.“아기한테 빌려줄게.”“아직 가지고 놀진 못해.”“그럼 여기 놔둘래. 조금은 망가뜨려도 돼.” 태윤은 떨어지려는 사다리를 바로 세워 주다가 코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나는 해준이를 끌어안았다. 밤이 되자 아이는 내 배 앞에 차를 다시 두고 “잘 자”라고 인사했다. 그 뒤로 아침마다 “아기 아직 있어?” 하고 물었다. 태윤은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화면 한쪽에 내 헝클어진 머리까지 들어가 항의했지만, 자른다던 그는 그대로 저장했다.“나중에 아기한테 보여 주려고. 태어나기 전부터 해준이가 기다렸다는 걸.” 며칠 뒤 밤에는 소방차를 해준이 베개 곁으로 돌려놓았다. 내일 아침 아기가 가져갔다고 화낼지 모른다는 태윤의 말에 웃음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태윤이 팔꿈치를 베개에 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밑이 어두웠다. 침대 옆 종이봉투에는 어제 쓴 테스트기가 들어 있었다.“밤새 안 잤어?”“속은 괜찮아? 어지럽진 않고?” 인사보다 질문이 먼저였다. 일어나려 하자 등 뒤로 손이 들어왔다.“난 괜찮아. 오히려 잠 못 자서 쓰러질 것 같은데.” 아침 식탁에서는 내가 커피잔을 집자마자 태윤의 눈썹이 움직였다. 카페인을 마셔도 되는지 병원에 묻겠다고 했다. 이미 휴대전화에는 산부인과 예약 화면이 떠 있었다. 해준이가 식빵을 먹다 말고 우리 얼굴을 번갈아 봤다.“아빠 오늘 이상해.”“원래 좀 그래.” 내 말에 해준이가 웃었다. 태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도 예약 버튼을 눌렀다. 차 안에서는 그가 창밖을 보는 시간이 길었다. 무릎 위 손이 몇 번이고 폈다 쥐어졌다. 내가 그 손에 손가락을 끼우자 그제야 돌아봤다.“어제처럼 웃어 줘.”“지금도 기뻐.” 태윤이 내 손을 들어 손가락 마디에 입을 맞췄다. 긴장한 얼굴로 그러는 게 우스워 보일까 봐 놀리는 말은 삼켰다. 대기실에는 산모수첩을 펼친 여자가 있었다. 옆자리 남자가 종이컵에 물을 받아 건넸다. 태윤도 그쪽을 봤다. 우리에게도 곧 그런 날들이 올까.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속에서 번호표를 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해준이한테 말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자기보다 작은 애가 온다니까 꽤 떠들겠지.”“태윤도 그럴
태윤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가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네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텅 빈 괴물이었을 거야.”“괴물이라고 하지 마.”“사실이야. 네가 날 다시 사람답게 살게 했어.”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해준이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태윤은 목소리도 낮췄다.“나를 아빠로 만들어 줘서 고마워.”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늘 낮부터 언제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일이 떠올랐다. 계속 나른하고 생리가 늦어져, 해준이가 낮잠 든 사이 사 온 임신 테스트기를 써 봤다. 작은 창에 선명한 줄이 두 개 나타났다. 병원에서 확인한 다음 말할까 싶었지만, 지금이라면 그와 함께 기뻐하고 싶었다. 해준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안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잠든 아들을 능숙하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다. 둘째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할지, 내 몸부터 걱정할지. 종이봉투에 넣어 둔 테스트기를 꺼내 보여 주지 않아도, 막상 입을 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태윤.”“왜?”“해준이 요즘 말이 부쩍 늘었지? 어린애들 만나면 장난감도 빌려 주고.” 며칠 전 공원에서도 해준이는 저보다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을 내밀었다. 자기 것은 꼭 쥐고 놓지 않던 아이가 어느새 그렇게 하고 있었다. 태윤은 영문을 모른 채 잠든 아들 쪽을 한 번 봤다.“말대꾸도 늘었어.”“그 연습을 해 볼 일이 생길지도 몰라.” 태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봤다.
“해준이가 가운데 있잖아.”“안 깨게 할게. 나도 오늘은 좀 기대야겠어.” 태윤이 손을 당기자 나는 아이를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기울였다.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샤워를 마친 몸에서 비누 향이 났다. 등을 천천히 쓸어 주자 한껏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씩 풀렸다.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들을 몰아붙이면서, 방에 돌아와서는 내게 기대는 날이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목덜미에 닿는 숨이 처음에는 빠르더니, 몇 번 등을 쓸어 주는 사이 차츰 고르게 바뀌었다.“서린.”“응?”“가끔은 이상해. 예전엔 손에 쥔 게 돈이나 남을 이길 정보뿐이었거든. 누구도 믿지 않고 버티는 것밖엔 몰랐어.”“사람을 믿기 시작하면 그만큼 약해질 거라고 생각했지.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고 편히 잠드는 날이 내게 올 줄은 몰랐어.” 태윤의 손이 내 등에 멈췄다. 우리 사이에서 해준이가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잤다.“지금은 네가 있고, 옆엔 저 녀석이 있어. 아침마다 떠들고 뛰어다니는 애가 정말 내 아들이라는 게.” 태윤은 말을 멈추고 해준이의 잠든 얼굴을 살폈다. 아이는 부모가 자기 얘기를 하는 것도 모르고 한쪽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며칠 전만 해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식탁까지 끌고 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걱정하는 건 이 작은 손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야간등의 희미한 빛 아래서도 아이를 보는 그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해준이는 작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잤다. 태윤의 팔은 내 등 뒤에 있었고, 시트 위로는 아들이 남긴 미지근한 온기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