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 J&J 앞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여름은 가게 밖에 내놓은 화분에 물을 주다가 길 건너편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할머니가 긁었잖아요!” 중년 남자가 인도 가장자리에 세워둔 차 옆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손수레를 끌던 할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여름은 처음에는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연신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물조리개를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내가 못 보고…….” “미안하면 끝이에요? 이거 얼마짜리 차인지 알아요?” 남자가 차 문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머니는 겁먹은 얼굴로 그곳을 들여다봤지만 여름의 자리에서는 흠집이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보험도 없죠? 이거 다 물어내셔야 돼요.” “얼마나…….” “몇백 깨져요. 이런 차는.” 할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름은 결국 가게 앞으로 나왔다. “저기요.” 남자가 돌아봤다. 여름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가까이 갔다. 누가 잘못했는지 보지도 않고 할머니 편부터 들 생각은 없었다. “혹시 어디가 긁힌 거예요?” “아가씨는 뭔데?” “바로 앞 가게 직원인데요. 큰소리가 나서요.” 여름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차를 살폈다.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얇은 자국 하나가 있었다. 여름은 손수레도 봤다. 높이가 맞지 않았다. “할머니 손수레가 여기 닿은 거 맞아요?” “맞다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확 커졌다. 여름은 움찔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저한테 화내실 필요는 없고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봤어? 못 봤잖아.” “네. 못 봤어요.” 여름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확인해보자는 거예요. 저희 가게 앞에 CCTV 있어요.”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여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확인하면 되겠네요.” “뭘 그렇게까지 해. 할머니가 자기가 그랬다고 하잖아.” 할머니가 당황해 손을 저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다가 이 사람이 갑자기 차를 세워서…… 내가 부딪힌 줄 알고…….” 여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할머니가 직접 긁는 걸 보신 건 아니네요?”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두드렸다. “아니, 지나간 사람이 저 할머니밖에 없었다고!” “그럼 더 확인해보면 되잖아요.” “아가씨가 뭔 상관인데 자꾸 끼어들어?” “상관없죠.” 여름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근데 할머니가 하지도 않은 일로 몇백만 원 물어내게 생겼으면 확인 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요.” “하지도 않은 일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CCTV 보자고요.” 같은 자리만 맴돌던 남자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린 게 진짜 말 많네.” 여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도 목소리는 낮았다. “어린 거랑 지금 일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가게나 봐. 괜히 남 일에 끼어들어서 귀찮게 하지 말고.” 남자가 할머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 연락처 줘요. 수리하고 연락할 테니까.” 할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여름이 그 앞을 막았다. “잠깐만요.” “아, 이 아가씨가 진짜!” “CCTV 먼저 확인한다고요.” 남자가 손을 뻗어 여름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여름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놀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순간까지도 참고 있던 성질이 확 치밀었다. “손대지 마세요!” 거리 전체에 여름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도 움찔했다. 여름의 얼굴에는 이제 웃음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좋게 말씀드렸잖아요. CCTV 확인하면 끝나는 일을 왜 자꾸 할머니한테 돈부터 달라고 하세요?” “야!” “그리고 저한테 반말하지 마세요!” “너 몇 살이야!” “스무 살이요! 그래서요?” 여름의 목소리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스무 살이면 눈도 없고 생각도 없어요? 손수레 높이랑 흠집 난 데 높이부터 다르잖아요!” 가게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재희가 급히 밖으로 나왔다. “여름아.” “사장님, CCTV 좀 보여주세요.” “알았어. 일단 진정하고.” “저 진정했어요.” 전혀 아니었다. 재희가 여름의 팔을 잡았다. 남자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쳐다보기 시작하자 더 불쾌한 얼굴이 됐다. “됐어. 재수 없어서 그냥 간다.” 차 문을 열려는 순간 여름이 다시 말했다. “잠깐만요.” 남자가 홱 돌아봤다. 여름은 할머니 옆에 섰다. “사과하고 가세요.” “뭐?” “할머니한테요.” “내가 왜!” “하지도 않은 일로 돈 물어내라고 소리 지르셨잖아요.” “아직 CCTV도 안 봤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남자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같이 확인해요.” “…….” “아저씨 말이 맞으면 할머니가 사과하시고, 아니면 아저씨가 사과하세요. 그게 맞잖아요.” 재희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흥분해서 바락거리다가도 논리는 정확했다. 결국 남자는 차 문을 거칠게 닫고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CCTV를 확인하는 데는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화면 속 손수레는 차에서 한참 떨어져 지나갔다. 흠집은 할머니가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다.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여름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 남자를 봤다. “사과하세요.”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여름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백만 원이 별거 아니에요?” “…….” “할머니한테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남자는 결국 밖으로 나가 할머니 앞에 섰다. 마지못해 떨어진 짧은 사과를 들은 뒤에야 여름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할머니가 몇 번이나 고맙다며 여름의 손을 잡았다. “학생, 정말 고마워요.” 여름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다시 웃었다. “아니에요. 할머니도 다음부터는 모르는 일에 먼저 죄송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래요, 그래.” 할머니가 떠난 뒤 재희가 팔짱을 끼고 여름을 바라봤다. 여름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왜요?” “저 진정했어요?” 여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마지막에는 했잖아요.” “동네가 떠나가던데?” “그 아저씨가 먼저 손대려고 했잖아요.” 재희가 한숨을 쉬며 여름의 머리를 한번 헝클었다. “그러다 진짜 위험한 사람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여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무섭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손이 올라왔을 때는 진짜 겁이 났다. 그래도 겁난다는 이유로 모르는 할머니에게 하지도 않은 일의 수리비를 물게 두는 건 더 싫었다. “다음에는 사장님부터 부를게요.” “꼭 그래.” “네.” 여름은 얌전히 대답하고 물조리개를 다시 들었다. 그때 도로 건너편 신호가 바뀌었다. 차량 사이로 익숙한 검은 차 한 대가 지나갔지만, 여름은 보지 못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덕배 역시 전화를 받느라 꽃집 쪽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쳤다.덕배는 여름과 민우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J&J 안에 서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두 사람의 뒷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또 거절당한 다이아 반지가 든 쇼핑백이 남아 있었다. “배 이사님.” 재희의 목소리에 덕배가 돌아봤다. “왜요.” “안 가세요?” “갑니다.” 대답은 했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재희는 작업대 위 꽃을 정리하며 슬쩍 그를 봤다. 가방부터 시작해서 구두, 팔찌, 오늘은 다이아 반지까지. 가격을 몰라도 비싼 물건이라는 건 포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은 단 한 번도 상자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덕배는 거절당하면서도 다음 날 또 뭔가를 사왔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뭡니까.” “여름이가 왜 안 받는지 아직도 모르세요?” 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 “비싼 거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재희의 손이 멈췄다. 잠시 뒤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모르시네.” “뭘요.” “비싼 게 싫은 게 아니라 이유 없이 받는 게 싫은 거예요.” 덕배가 쇼핑백을 한번 내려다봤다. “내가 주고 싶다는데.” “그게 배 이사님 이유고요.” 재희는 꽃 줄기를 정리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름이는 자기 이유가 없잖아요.” 덕배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선물 받는 데 걔 이유까지 있어야 합니까?” “여름이는 그래요.” 재희가 웃었다. “그러니까 그만 사오세요. 저러다 진짜 화내요.” 덕배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맨날 화내는데요.” “그건 그렇네요.” 재희도 웃었다. 덕배는 결국 쇼핑백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차에 올라타 뒷좌석 문을 열자 기가 막힌 광경이 보였다. 가방. 구두. 팔찌. 그리고 반지. 나란히 쌓인 쇼핑백을 보던 덕배가 혀를 찼다. “씨발, 매장 하나 차리겠네.” 운전석에 올라탔지만 바로 시동을 걸지는 않았다. 재희가 한 말이 걸렸다. 여름이 왜 안 받는지는 알았다. 이제는.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바로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덕배가 현장에서 빠져나온 건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 예정보다 일이 길어졌다. 오전부터 붙잡고 있던 협력업체 문제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나서야 현장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차에 올라탄 덕배는 안전모를 뒷좌석에 던졌다. 그 옆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반지였다. 가방도 안 받았다. 구두도 안 받았다. 팔찌도 안 받았다. 그런데 덕배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디까지 안 받나 보자는 오기가 붙었다. 오늘 고른 건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매장 직원이 선물 받는 사람과 무슨 관계냐고 물었을 때는 대충 얼버무렸다.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 조절과 교환이 가능한 제품으로 골랐고, 이번에도 가격은 가장 높은 쪽이었다. 덕배는 시계를 확인했다. J&J 영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아직 있겠지.” 차를 출발시켰다. 꽃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일곱 시 이십 분이 넘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덕배는 쇼핑백을 집어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아저씨?” 여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덕배는 안으로 들어서다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 달랐다. 앞치마도 없었다. 무릎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밝은색 원피스를 입었고, 늘 풀어놓거나 낮게 묶던 긴 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 묶었다. 목선과 작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옅게 화장까지 한 것 같았다. 덕배의 시선이 말없이 위에서 아래로 한번 내려갔다. 여름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왜요?” 덕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전 민우와 첫 데이트를 한다던 날에는 선크림만 바르고 갔다고 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달랐다. “너 어디 가냐.” 여름이 거울을 보며 귀 옆 잔머리를 정리했다. “데이트요.” 덕배의 턱이 바로 굳었다. 알면서 물은 셈이었다. “그 새끼랑?” 여름이 돌아봤다. “민우 씨요?” “어.” “네.” 대답도 시원했다. 덕배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
다음 날 아침, 덕배는 침실 한쪽에 놓인 쇼핑백 두 개를 보며 셔츠 단추를 채웠다. 가방. 구두. 둘 다 실패였다. 어젯밤 검색창에 "스무 살 여자 선물"을 쳐본 뒤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결과는 죄다 비슷했다. 가방, 향수, 주얼리, 화장품. 향수는 마음에 안 들었다. 여름에게서는 원래 꽃향기가 났다. 굳이 다른 냄새를 덮을 이유가 없었다. 덕배는 시계를 채우다 손을 멈췄다. 주얼리. “그래.” 가방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다. 몸에 하고 다니는 건 다를 수 있었다. 어제 분명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점심 무렵 덕배는 주얼리 매장에 들어섰다. “선물 찾으세요?” “예.” “연령대가 어떻게 되실까요?” “스물.” 직원은 익숙하게 몇 가지 제품을 꺼냈다. 가느다란 목걸이와 귀걸이, 작은 펜던트가 달린 팔찌까지 차례로 놓였다. 덕배의 시선은 팔찌에서 멈췄다. 여름의 손목이 떠올랐다. 자기 팔에 붕대를 감아주던 작은 손. 꽃 줄기를 잡고 가위를 움직이던 가느다란 손목. 덕배는 팔찌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얼마입니까.” 직원이 가격을 설명했다. 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거.” “조금 더 높은 라인으로 보여드릴까요?” “제일 좋은 걸로.” 잠시 뒤 다이아몬드가 작게 세팅된 팔찌가 나왔다. 화려하게 크지는 않았지만 가격은 앞서 본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덕배는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손목 사이즈는 아실까요?” 이번에는 덕배도 멈췄다. 발 사이즈는 물어봤다. 손목 둘레까지 물어보면 여름이 바로 눈치챌 게 뻔했다. “제일 작은 걸로 하면 안 됩니까?” “조절 가능한 제품이라 크게 문제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로.” 결제는 또 빨랐다. 오후 세 시. J&J 문이 열렸다. 여름은 꽃바구니를 만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했다. 그다음 그의 손을 봤다. 작은 쇼핑백. 여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덕배는 아무
다음 날 오전, 덕배는 현장으로 향하다 백화점 앞에서 차를 돌렸다. 어제 산 가방은 여전히 뒷좌석에 있었다. 상자조차 열어보지 않고 거절당한 물건이었다. 보통이라면 다시 매장에 보내든 누구에게 줘버리든 했겠지만 아직 그대로였다. 덕배는 가방이 아니라 다른 게 문제였다고 결론 내렸다. 취향. 서여름이 가방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걸 사면 됐다. 덕배에게는 단순한 문제였다. 백화점에 들어선 그는 어제와 다른 층으로 올라갔다. 여성 구두 매장이 이어진 곳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문제는 이번에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덕배는 매장 직원에게 곧장 물었다. “스무 살 여자들이 뭐 신습니까?” 직원이 잠시 당황했다가 웃었다. “찾으시는 스타일이 있으실까요?” “예쁜 거.” “평소 스타일은요?” 덕배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름이 뭘 입었더라. 청바지. 운동화. 꽃집 앞치마. 양로원에 갔던 날도 운동화였다. “편하게 입습니다.” “그럼 로퍼나 플랫도 괜찮고요. 조금 꾸밀 때 신을 거라면 이런 펌프스도—” 덕배는 직원이 보여주는 구두를 훑었다. 그러다 가장 비싼 쪽에 시선이 멈췄다. “이건.” “시그니처 라인입니다.” “이걸로.”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덕배가 멈췄다. “……사이즈?” “네.”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덕배는 잠시 서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배덕배: 야.] 답장은 잠시 뒤 왔다. [서여름: 왜요?] [배덕배: 발 몇이냐.] 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서여름: 제 발이요?] [배덕배: 그럼 내 발 물어봤겠냐.] [서여름: 235요. 근데 왜요?] 덕배는 화면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말했다. “235.” 결제까지 끝낸 뒤에야 여름의 마지막 질문에 답했다. [배덕배: 그냥.] 쇼핑백을 들고 나온 덕배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는 가방이 아니었다. 신발은 누구나 신는다. 게다가 예뻤다. 가격도 충분히 비쌌다. 이 정도면
회의를 끝내고 CH건설을 나온 덕배는 곧장 J&J로 향했다. 같은 날 오후였다. 뒷좌석에는 백화점에서 산 가방이 든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한 번씩 눈에 들어왔지만 덕배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여자에게 선물을 고르는 데 오래 고민한 적도 없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사줬고, 직접 고르기 귀찮으면 가장 비싸거나 좋은 걸 골랐다. 상대는 좋아했고 덕배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J&J 앞에 도착한 그는 익숙하게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쇼핑백을 들고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작업대에서 꽃을 정리하던 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한 얼굴에 의아함이 먼저 떠올랐다. “아저씨?” “어.” “아까 갔잖아요.” “알아.” 점심 무렵 진 꽃을 맡기고 돌아간 사람이 몇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이상할 만했다. 여름의 시선이 덕배 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내려갔다. “그건 뭐예요?” 덕배는 작업대 앞으로 걸어가 쇼핑백을 올려놨다. “너.” 여름이 눈을 깜빡였다. “저요?” “어.” “뭐가요?” “선물.” 덕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턱짓했다. “열어봐.” 여름은 쇼핑백과 덕배를 번갈아봤다. 익숙한 명품 브랜드 로고였다. 표정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왜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다. “뭐가 왜야.” “왜 저한테 선물을 줘요?” “주고 싶으니까.” “갑자기요?” “어.” 여름은 쇼핑백에 손도 대지 않았다. 덕배가 답답한 듯 직접 상자를 꺼냈다. “일단 봐.” “아저씨.” “왜.” “저 이거 안 받아요.” 덕배의 손이 멈췄다. “뭐?” 여름은 장난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안 받을래요.” “열어보지도 않았잖아.” “뭔지 대충 알 것 같은데요.” “가방이야.” “그러니까요.” 덕배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가방 싫어
J&J를 나온 덕배는 차에 올라탄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본 장면만 계속 걸렸다. 덮밥 두 개. 뮤지컬 티켓 두 장. 그리고 그걸 받아 들고 웃던 여름. 덕배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씨발.” 질투하는 건 이미 인정했다. 다른 새끼가 여름에게 들이대는 게 싫었다. 둘이 매일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이제는 뮤지컬까지 같이 보러 간다고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 있을 배덕배가 아니었다. 민우가 꽃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공연을 보여주면서 점수를 따고 있다면 자신도 뭔가 하면 됐다. 덕배에게 여자 마음을 얻는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수도 없이 봤다. 가방. 주얼리. 비싼 레스토랑. 갖고 싶다는 게 있으면 사줬고, 대부분 좋아했다. 돈은 많았고 그 정도 지출에 의미를 둔 적도 없었다. 신호에 걸린 순간 덕배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내리다가 여자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 함께 밤을 보낸 적 있는 여자였다. - 오빠? “어.” - 웬일이야? 먼저 전화도 하고. “물어볼 거 있어.” - 뭔데? 덕배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요즘 여자들 무슨 가방 좋아하냐?”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 갑자기 가방? “어.” - 누구 사주게? “그건 알 거 없고. 요즘 제일 핫한 거.” 여자가 웃었다. - 나 사주려고? “너 말고.” - 너무하네. “빨리 말해.” 몇 가지 브랜드와 모델명이 줄줄이 나왔다. 덕배에게는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뭐가 제일 좋아.” -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데? 덕배가 잠깐 멈췄다. “스물.”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가 더 오래 조용했다. - 오빠 양심 어디 갔어? 덕배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가방이나 처말해.” 여자가 한참 웃었다. - 알았어. 요즘 많이 찾는 게 있기는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