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아연의 심드렁한 태도를 지켜보던 주현우는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다.문제는 그런데도 자꾸 마음이 쓰이고 허아연에게 감정이 휘둘린다는 거였다.허아연은 주현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돌리며 제 처지가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렸다.그러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허아연은 돌아왔고 이렇게 얼굴을 보며 티격태격 말다툼까지 할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주현우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허아연이 곁에 있고 무사히 살아 있기만 하면 그보다 좋은 건 없었다.주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아연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돌아와서 다행이야. 무사하면 그걸로 됐어."갑자기 누그러진 주현우의 태도에 허아연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두 손을 잠시 멈춘 뒤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이번에 돌아온 뒤 주현우는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허아연에게 져주고 있었다.사실 허아연도 주현우와 말다툼을 하거나 일부러 약을 올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주현우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고 이제는 주고 싶지도 않았다.두 사람은 바라는 게 애초에 달랐다.허아연이 더는 말하지 않자 주현우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그럼 일해. 난 거실에 있을게."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답했다."그래요."주현우가 감정 얘기를 꺼내거나 묘한 분위기를 만들지만 않는다면 허아연도 날을 세우며 일부러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거실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자 전서진이 말했다."현우야, 아연이 어렵게 돌아왔는데 네가 좀 져줘. 자꾸 싸우지 말고 아연이가 싫어하는 소리도 좀 하지 마."전서진의 충고에 주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내가 이제 무슨 수로 아연이와 싸워? 안 져줄 수가 있겠어, 듣기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있겠어?"사과하고 보고 싶었다는 말 외에는 다른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고 겁나서 맞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잔뜩 억울한 주현
볼을 물려 아팠던 허아연이 몸을 돌려 미간을 찌푸린 채 낮고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주현우 씨, 자꾸 선 넘지 마요. 오늘 사람이 많다고 내가 정색도 못 할 줄 알아요?"허아연이 발끈하자 주현우는 뒤에서 끌어안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아연아, 정말 보고 싶었어."허아연이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오랫동안 눌러온 감정을 오늘은 끝내 참지 못한 것이다. 쌓인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마침내 허아연을 끌어안고 보고 싶었던 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뒤에서 끌어안은 주현우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허아연이 경고했다."주현우 씨, 계속 이러면 다시 호텔로 들어가거나 안서준 씨와 같이 살 거예요."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주현우의 얼굴이 굳더니 으름장을 놓았다."그러기만 해봐."허아연이 고개를 돌리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왜 못 해요? 강성시에서도 안서준 씨와 같이 살았는데."강성시에서 안서준과 함께 산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족이라 한집에서 지낸 것이었다. 잠시 말없이 눈싸움을 벌이던 주현우는 이내 허아연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오른손으로 커튼을 젖히고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던 주현우는 뒤에 허아연이 있다는 걸 깨닫고 옆 수납장 위로 도로 던져놓았다.주현우가 허아연을 돌아보며 말했다."아연아, 이제 날 쥐고 흔드는 법도, 화나게 하는 법도 다 안다는 거네."주현우는 이제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허아연은 이제 주현우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언제든 마음을 뒤흔들 수 있었다.주현우가 불만을 드러내자 허아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누가 당신을 쥐고 흔들었다고 그래요? 누가 화나게 했어요? 내가 전화해서 오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나았을 텐데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는 또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눈도 깜빡이지 않고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 했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주현우가 쳐다보기만 하자 허아연
주현우가 말했다."이제는 사람하고 얘기할 때 눈도 안 마주치네?"주현우가 턱을 들어 억지로 자신을 보게 하자 허아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떼어내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경고했다."주현우 씨, 말과 행동 조심해요. 괜히 남들이 오해하겠어요."허아연이 정색하자 주현우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뭘 오해하게 했는데?""아연아, 오해도 다 풀었으니 우리도 화해하자."애초에 오해랄 것도 없었다. 허아연이 느낀 미묘한 기류는 모두 주현우가 의도하고 마음을 흔들려 한 것이었다. 허아연은 컴퓨터로 시선을 돌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당신을 오해한 적 없어요. 그러니 화해할 일도 없고요."주현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아연이 덧붙였다."주현우 씨, 난 오늘 당신을 부를 생각이 없었어요. 전서진 씨가 부른 거고 나도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혼자 의미 부여하거나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요.""우리 사이는 완전히 끝났어요. 다시 어떠한 가능성도 없고요."허아연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주현우는 속이 뒤집힐 만큼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허아연에게 화를 쏟아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책상에 기대 한동안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속이 터질 듯 답답했다.결국 몸을 일으켜 책상 뒤로 돌아간 주현우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허리를 숙이더니 허아연을 품 안에 가두듯 감싸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아연아, 설마 예전 일을 정말 다 잊은 건 아니겠지? 우리 사이에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는 마."주현우는 허아연을 유혹하듯 덧붙였다."기억나는 일이 많잖아."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자 키보드를 두드리던 허아연의 두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주현우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도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몇 번 있었던 미묘한 순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허공에 손을 한참 멈추고 있던 허아연은 고개를 돌려 주현우를 바라봤다.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었다.하지만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도, 설레지도 않았다.꼼짝 않고
허아연의 표정을 보니 주현우를 별로 반기지 않는 듯했다.문 앞에 선 채 허아연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주현우는 집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이사 왔어?"허아연의 언짢은 표정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현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주현우의 인사에 허아연은 자연스레 문을 열어주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네, 오전에 막 왔어요.""서진 씨와 유환 씨가 요리하고 있어요, 들어와서 앉아요."이미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예의상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오라는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도 사양하지 않았다.거실에서 게임하던 주민경은 주현우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며 물었다."현우 오빠는 여기 왜 왔어?"주현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민경이 쏘아붙였다."서진 오빠가 부른 거지? 진짜 눈치 없다, 아연이가 오빠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굳이 불러서 분위기 망치네."주민경의 말이 끝나자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굳은 얼굴로 입 좀 다물라며 발로 툭 찼다. 허아연은 옆에서 남매의 실랑이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발을 거두던 주현우의 시선이 옆에 있는 소파에 닿는 순간 문득 옛 기억이 밀려왔다.전에 허아연을 보러 왔을 때 두 사람은 이 소파에서 꽤 다정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만 해도 허아연은 여전히 주현우를 소중히 여겼고 기회도 줬었다.기회를 잡지 못한 건 주현우 자신이었다.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현우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허아연도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주현우와 몇 번 없었던 다정한 순간들이 떠올랐다.끝까지 간 건 아니지만 꽤 묘하고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었다. 민망해진 허아연은 시선을 피했다.살짝 발그레해진 허아연의 귓불을 본 주현우는 두 사람이 같은 기억을 떠올렸다는 걸 알고 웃음이 났다. 허아연에게서 시선을 거둔 주현우는 주방으로 가서 전서진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전서진이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현우야, 우리도 할 만큼 했어. 너와 아연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이제 네가 하기 나름
주현우만 쏙 빼놓는 건 주민경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그때 심유환이 발코니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통화를 마친 심유환이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전서진이 도와달라며 다시 주방으로 불렀다. 셋 중에서 진짜 요리를 할 줄 아는 건 심유환뿐이었고 나머지 둘은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다.심유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들어가고 세 남자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 허아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어릴 때도 이렇게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놀던 기억이 났다.그 시절 허아연이 매년 가장 기다린 건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었다. 유서희가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면 모두 한데 모여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고 뭐든 함께했다.밤낮없이 몰려다니며 마음껏 뛰어놀던 시절이었다.주방을 바라보던 허아연은 역시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현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주현우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예전과 같은 사이일지도 몰랐다.한참 주방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 허아연은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안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서진 씨와 심유환 씨와 아파트에 왔어요. 오빠도 이따 와서 밥 먹어요."허아연의 초대에 안서준이 물었다."주현우도 왔어?"그 중에서도 안서준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은 언제나 주현우였다.안서준의 물음에 허아연이 답했다."민경이가 안 불렀어요. 지금은 전서진 씨네만 와 있어요."그 말을 듣고서야 안서준이 말했다."나 지금 근처 도시 가는 길이라 이따 좀 늦게 들를게."주현우가 와 있다면 아마 차를 돌려서라도 갔을 것이다.허아연이 흔쾌히 답했다."그래요, 그럼 일 끝나고 와요."안서준이 당부의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전화를 끊었다.그때 주방에 있던 전서진은 주현우에게 전화해 태연히 말했다."현우야, 나와 유환이, 준서 지금 아연이네 집에 있어. 유환이가 요리하고 있으니까 너도 이따 와서 밥 먹어."주현우는 전서진의 전화를 받고서야 허아연이 오늘 호텔에서 아파트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전서진 일행에게는 이사
정성이 가득한 환영식이었다.문을 열고 주민경이 아늑하고 정성스럽게 꾸며 놓은 집을 본 순간, 허아연은 감동이 밀려왔다.금세 눈시울까지 붉어졌다.그때 주민경이 방 안에서 허아연을 향해 색종이 폭죽을 터뜨리며 외쳤다."아연아,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정성스러운 준비에 허아연은 캐리어를 내려놓고 주민경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꼭 안았다."민경아, 고마워."예전에도 지금도 주민경은 허아연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허아연을 안은 주민경이 해맑게 웃었다."바보같이,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왜 필요해?"주민경은 허아연의 어깨에 턱을 얹고 등을 토닥이며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연아, 나는 네가 돌아올 줄 알았어. 꼭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지난 2년 넘는 시간 동안 주민경은 허아연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 리 없다는 믿음만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기다리던 허아연이 돌아왔다.허아연도 뭉클해하며 말했다."민경아,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주민경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당연하지, 이 세상에 나만큼 좋은 사람 없을걸."허아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이 짐을 정리하고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주민경이 채소를 썰고 있었기에 허아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열러 갔다.인터넷 택배가 온 줄 알았는데 문을 열어보니 전서진과 심유환, 하준서가 저마다 손에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아연아, 집에 돌아온 거 환영해.""아연아, 집에 돌아온 거 환영해.""아연아, 이사하는 중요한 일은 미리 말을 해줘야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자 허아연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십중팔구 주민경이 무심코 말을 흘린 게 뻔했다. 주민경은 어릴 때부터 워낙 해맑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곤 했다. 그것도 여유로운 주씨 가문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굳이 남의 눈치를 보거나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보던 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