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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찢어진 드레스

Author: 8489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8 15:41:29

"우리, 어디서 뵌 적 있던가요?"

상견례 날 유라가 던진 그 한마디는, 그 뒤로도 오래 서하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강씨 집안에서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

3주 뒤. 재벌가 결혼으로는 말도 안 되게 빠른 일정이었다.

"아버지가 서두르시네요."

통보를 전하는 도현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아들 마음 바뀌기 전에 도장 찍고 싶으신가 봐요."

"도현 씨 마음은 안 바뀌어요?"

"계약서에 1년이라고 써 놨잖아요. 나 계약은 잘 지켜요."

그렇게 서하의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준비를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선 사람은 신유라였다.


청담동, 한 달 전에 예약해도 자리가 없다는 웨딩드레스 숍.

"동서, 이거 입어 봐요. 이 라인이 요즘 제일 인기래요."

유라는 마치 친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서하의 팔짱을 끼고 숍 안을 누볐다. 직원들은 강진그룹 장남의 며느리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형님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어요."

서하는 거울 앞에서 순백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 유라는 그녀에게 '형님'이었다. 입에 올릴 때마다 혀끝이 썼다.

"당연하죠. 이 집에 며느리라고는 우리 둘뿐인데. 서로 챙겨야죠."

유라가 거울 너머로 서하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 이름도 서하였다? 윤서하."

지퍼를 올리던 직원의 손이 서하의 등 뒤에서 잠깐 멈췄다. 서하는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았다.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요? 흔한 이름이죠."

"걔네 아빠가 건설회사 회장이었는데, 회사가 망하면서 아빠도 돌아가셨어. 그 뒤로 연락이 끊겼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살아는 있는지."

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슬퍼하는 얼굴이었다. 아주 잘 만들어진.

"불쌍한 애였어. 그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어."

"형님은 그 친구분 장례식에 가셨어요?"

유라의 얼굴이 아주 짧게 굳었다.

"……응?"

"친한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면서요. 당연히 가셨겠죠?"

서하는 거울 속 유라를 향해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유라는 대답하지 않고 옆에 걸린 드레스로 시선을 돌렸다.

"동서는 이게 더 잘 어울리겠다. 이걸로 하자. 다음 주 신부 소개 파티 때 입을 드레스는 내가 따로 맞춰 줄게."


신부 소개 파티.

결혼식 일주일 전, 강진그룹과 친분 있는 재계 부인들을 초대해 새 며느리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호스트는 유라가 자처했다.

"이 집안 며느리가 되려면 이 사모님들 눈에 먼저 들어야 해요. 결혼식보다 이 자리가 더 중요할걸요?"

그리고 파티 당일 오후, 호텔 신부 대기실.

유라의 개인 비서가 들고 온 드레스 상자를 열었을 때, 서하는 한동안 말없이 그 안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보리색 실크 드레스. 우아하고 단정한, 서하의 취향을 정확히 짚은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그 등 뒤쪽 솔기가, 허리부터 목덜미까지 일직선으로 갈라져 있었다.

서하는 드레스를 들어 올려 잘린 면을 손끝으로 쓸었다. 실밥이 삐져나오지 않았다. 올이 풀린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가위로 단번에 자른 자국이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대기실 문이 열리며 유라가 들어섰다. 그녀 역시 샴페인색 드레스를 입고 완벽하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배송 중에 뭐가 걸렸나 봐. 어떡해, 파티 30분 남았는데."

유라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고는 뒤에 선 비서에게 손짓했다.

"다행히 내가 여벌을 하나 챙겨 왔어. 동서, 이거라도 입어요."

비서가 내민 드레스를 보는 순간, 서하는 모든 걸 이해했다.

샴페인색 드레스. 지금 유라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나가 망신을 당하거나. 파티에 나가지 않아 재계 부인들 앞에서 강씨 집안의 체면을 구기거나. 아니면 형님과 똑같은 옷을 입고 나가, '형님 옷까지 따라 입는 주제넘은 신부'가 되거나.

어느 쪽을 골라도, 오늘 밤 사모님들의 입에 오르는 이름은 한서하였다.

"고마워요, 형님."

서하는 여벌 드레스를 받아 들었다. 유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건 형님이 입으셔야 더 예쁠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어떻게든?"

"가위 좀 빌려주시겠어요? 그리고 저 꽃 장식에 달린 리본도요."


7년 전, 모든 것을 잃은 뒤.

서하의 어머니는 군산의 작은 시장 골목에 옷 수선집을 차렸다. 평생 사모님 소리를 듣던 사람이, 남의 바짓단을 줄이고 해진 소매를 기우며 딸의 학비를 벌었다.

서하는 대학을 다니는 틈틈이 그 옆에서 가위를 잡았다. 실을 꿰고, 솔기를 뜯고, 다시 박았다.

— 옷은 말이야, 서하야. 찢어진 자리를 감추려고 하면 더 티가 나. 차라리 그 자리를 제일 예쁘게 만들어야 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하는 가위를 들었다.


호텔 가든 테라스. 재계의 이름난 사모님 스무 명이 샴페인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둘째 며느리가 회계사라면서요?"

"그 집 둘째가 드디어 장가를 간다니. 어떤 아가씨인지 궁금하네."

유라는 사모님들 사이를 오가며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연신 테라스 입구를 향했다.

그리고 입구가 조용해졌다.

한서하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실크 드레스. 앞에서 보면 목까지 단정하게 여민, 조금 전 상자 안의 그 드레스였다.

그런데 서하가 사모님들 사이를 지나 몸을 돌리는 순간,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드레스의 등이 깊게 파여 있었다. 잘린 솔기를 따라 대칭으로 도려낸 선이 허리 위에서 V자로 모였고, 그 끝을 꽃 장식에서 떼어 낸 아이보리색 실크 리본이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서하가 늘 하고 다니던 진주 목걸이를 뒤로 돌려 늘어뜨렸다.

단정함 속에 감춰진, 대담한 등.

"어머, 드레스 너무 예쁘다. 어디 거예요?"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국내 최대 백화점 그룹의 안주인, 서 여사였다. 이 자리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형님이 골라 주신 드레스예요."

서하가 수줍게 웃으며 유라 쪽을 가리켰다.

"형님 안목 덕분이에요. 저는 이런 거 하나도 몰라서요."

모든 시선이 유라에게 쏠렸다. 유라는 잔을 쥔 채 굳은 미소를 지었다.

"……동서가 드레스를 좀 손봤나 봐요? 원래 디자인이랑 다른 것 같은데."

사모님들 앞에서 던진 말이었다. 비싼 드레스를 제멋대로 망가뜨린 철없는 신부라는 뜻이었다.

서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자를 열어 보니까 누가 등 쪽 솔기를 가위로 잘라 놨더라고요."

테라스가 조용해졌다.

"숍에 전화해 보니까 어제 저녁 가봉 때까지는 멀쩡했대요. 그러면 오늘 옮기는 도중에 그렇게 된 건데……."

서하는 난처한 얼굴로 유라를 보았다.

"드레스 가져다주신 분이 형님 비서분이셨잖아요.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 있었는지, 형님이 한번 여쭤봐 주시겠어요? 형님이 저를 위해서 이렇게 신경 써서 맞춰 주신 드레스인데,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너무 속상해서요."

서 여사가 천천히 유라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모님들도 하나둘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자리에 오래 몸담아 온 여자들이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봐도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게. 내가 꼭 알아볼게, 동서."

유라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건, 오로지 그녀의 오랜 연기력 덕분이었다.

"형님도 참."

서 여사가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랫사람 단속은 잘하셔야지. 이런 집안일수록."


"그거, 누가 했어요?"

파티가 끝날 무렵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도현이 테라스 난간에 기대선 서하의 뒤에 서 있었다.

서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뭘요?"

"그 등."

"제가요."

"직접?"

"어머니가 수선 일을 하셔서요. 옆에서 좀 배웠어요."

말을 하고 나서야 서하는 흠칫했다. 어머니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 남자 앞에서는 자꾸 말이 먼저 나왔다.

도현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서하의 목덜미에 늘어진 진주 목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바로잡았다.

"예쁘네."

"……드레스가요?"

"갑은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재킷을 벗어 서하의 드러난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밤바람 차요. 가요."


그날 밤, 평창동 저택 서재.

정 실장이 얇은 서류철을 강태식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서하. 스물여덟. 개명 기록이 있습니다. 원래 성은 박씨고, 부친 사망 후 어머니 성을 따랐습니다. 부친 박정호는 인천에서 소규모 건설 하청업을 하다 7년 전 병으로 사망. 모친은 군산에서 수선집을 운영 중입니다."

강 회장은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학적, 금융 기록, 병원 기록, 회계법인 인사 기록.

흠잡을 데가 없었다.

"깨끗하군."

강 회장은 서류를 덮었다.

"너무 깨끗해."


같은 시각. 서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 회장 쪽에서 뒷조사 들어왔을 거야. 괜찮을까?]

답장은 금방 왔다.

[걱정 마. 기록은 내가 다 막아 뒀어. 너 찾을 방법 없어.]

서하는 휴대폰을 가슴에 대고 눈을 감았다. 긴 하루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성수동 사무실.

"회장님 비서실로 넘어간 보고서, 말씀하신 대로 바꿔 넣었습니다."

백 실장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개명 전 성은 박씨로, 부친은 인천의 하청업자로. 차민재 변호사가 막아 둔 건 학적 기록뿐이라, 개명 원본 기록까지 파고들면 윤씨라는 게 바로 나왔을 겁니다."

도현은 창가에 서서 대답 없이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사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해 봐."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 여자가 윤서하라는 걸 아시면서."

도현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백 실장."

"네."

"오늘 그 여자 등 봤어?"

"……네?"

"찢어진 자리를 제일 예쁘게 만들었더라."

도현은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낮게 웃었다.

"7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거야. 찢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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