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흘 뒤, 성수동.
강도현이 약속 장소로 보낸 주소는 호텔도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오래된 공장 건물을 개조한 빌딩의 꼭대기 층, 간판 하나 없는 사무실이었다.
"들어와요. 문 열려 있어요."
서하는 문을 밀고 들어서다 잠깐 멈칫했다.
예상과 달랐다. 술병이 굴러다니거나, 요란한 그림이 걸려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사무실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넓은 원목 책상, 모니터 세 대.
그리고 책상 위 서류들은 하나같이 뒤집혀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소파에 늘어져 있던 도현이 고개만 돌렸다.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헤친, 기사 사진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정리가 잘 돼 있어서요."
"청소하는 분이 부지런하시거든요."
도현은 하품을 하며 일어나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요. 계약서 가져왔죠?"
서하는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지난번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서류를, 이번에 도현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조금 전까지 하품하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제1조. 계약 기간은 혼인신고일로부터 1년으로 하며, 만료 시 양측은 조용히 합의 이혼한다.]
[제2조. 공식 석상에서 양측은 금슬 좋은 부부를 연기한다.]
[제3조. 양측은 서로의 사생활과 과거를 묻지 않는다.]
[제4조. 양측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3조."
도현이 손가락으로 종이를 톡 두드렸다.
"과거를 묻지 않는다. 이건 누굴 위한 조항이에요?"
"양쪽 모두를 위한 거죠. 도현 씨도 묻는 거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기사 보니까 과거가 꽤 화려하시던데."
"아, 그거."
도현이 웃었다.
"좋아요. 그럼 4조.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문제 있나요?"
"아니, 굳이 쓸 필요가 있나 싶어서. 한서하 씨가 날 사랑할 리는 없잖아요."
"제가 걱정하는 건 제 쪽이 아니에요."
서하는 담담하게 말했다.
"도현 씨가 저를 사랑하게 될까 봐 넣은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도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자신감 좋네."
"계약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거니까요."
"맞는 말이에요."
도현은 탁자 위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4조 아래 여백에, 반듯한 손글씨로 한 줄을 적어 넣었다.
[제5조. 을은 갑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서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갑이 누군데요?"
"돈 내는 쪽."
"그럼 을은 저고요."
"정답."
"그럼 갑은 거짓말해도 된다는 건가요?"
"갑은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죠."
도현은 펜 뚜껑을 딸깍 닫았다.
"한서하 씨는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3조가 있으니까. 그런데 대답을 할 거면, 거짓말은 하지 마요. 그거 하나예요."
"위반하면요?"
"계약 즉시 파기."
서하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살짝 굳었다.
계약 파기. 그 말은 곧 강씨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힌다는 뜻이었다. 7년의 준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거짓말 위에 서 있었다. 이름도, 사연도, 이 결혼을 원하는 이유도.
'침착해.'
서하는 속으로 조항을 다시 곱씹었다. 대답하지 않을 권리. 3조. 묻지 않는 한, 거짓말할 일도 없다.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으면 된다.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왜 이런 조항을 넣는지 물어봐도 돼요?"
"거짓말하는 여자랑 한집에 사는 건 피곤하거든요."
도현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느긋하게 덧붙였다.
"내가 거짓말을 좀 잘 알아봐서."
서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내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을 : 한서하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현이 그 옆에 서명을 휘갈겼다.
갑 : 강도현
"자, 그럼."
도현이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계약 성립 기념으로 첫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뭔데요."
"어머니 병원비, 얼마나 필요해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서하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질문은 예상했던 것이다. 숫자까지 외워 두었다.
"3조가 있잖아요. 대답 안 하겠습니다."
"아, 그렇지."
도현이 턱을 괴고 서하를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잘 빠져나가네."
그 눈빛에 서하는 이유 없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상견례가 이번 주 토요일이라고?"
그날 밤, 차민재의 법률사무소.
민재는 서하가 건넨 계약서 사본을 들여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빨라. 계약서 사인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강 회장이 서두르는 거겠지. 둘째 아들이 드디어 결혼한다니까."
"이 5조는 뭐야. 이건 네가 쓴 거 아니잖아."
"강도현이 추가했어."
민재가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서하야. 이 남자, 뭔가 이상해. 생각 없는 한량이 이런 조항을 넣을 리가 없어."
"알아."
서하는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었다.
"그래도 가야 돼. 강태식이 사는 집 안으로 들어갈 기회는 이번뿐이야."
민재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서류철 하나를 서하에게 내밀었다.
"네 신분 관련해서 한 번 더 정리해 뒀어. 개명은 합법이라 문제없고, 고등학교 졸업앨범이랑 학적 기록은 최대한 막아 뒀어. 그래도 너를 직접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방법이 없다."
"강씨 집안에 나를 아는 사람은 없어."
서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강재현도 강 회장도 날 기억할 이유가 없으니까. 장례식장에서 한 번 본 게 전부야."
"……장남 강재현 부인은?"
"석 달 전에 해외에서 비공개로 결혼했대. 얼굴도 이름도 공개된 적 없어. 재벌가 사교 모임에도 아직 안 나왔고."
민재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조심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응."
사무실을 나서는 서하의 뒷모습을, 민재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토요일, 평창동.
높은 담장을 따라 한참을 달린 차가 거대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잘 가꾼 정원 너머로 하얀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진그룹 회장 강태식의 집.
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7년 동안 수백 번 사진으로만 보던 곳이었다. 위성 지도로 구조를 외우고, 드나드는 차량 번호까지 적어 두었던 곳.
그곳에, 지금 그녀가 며느리가 되기 위해 들어서고 있었다.
"긴장했어요?"
옆자리의 도현이 물었다. 오늘은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짙은 남색 정장 차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전혀 달라 보였다.
"아뇨."
"그럼 손 줘 봐요."
"네?"
"금슬 좋은 부부. 2조."
도현이 먼저 서하의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얼음장이네."
"원래 손이 차요."
"5조."
서하의 입이 다물어졌다.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3조를 들이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에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요."
작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도현이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나도요."
"도현 씨가 왜요? 자기 집인데."
"그러니까요."
도현은 창밖의 저택을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웃음기 없는 웃음이었다.
"자기 집인데."
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 도현이 먼저 내려 서하 쪽 문을 열어 주었다. 서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심호흡을 한 번. 표정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부터 그녀는 강도현의 사랑스러운 약혼녀, 한서하였다.
현관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맑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크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두 사람을 맞이하며 환하게 웃었다.
"도련님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온다길래, 제가 제일 먼저 보고 싶어서 나왔지 뭐예요."
서하의 발이 그 자리에 붙어 버렸다.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열일곱 살, 교복 치마를 입고 매일 같이 등교하던 얼굴. 아버지 회사가 무너지던 날 밤, 울면서 건 전화를 받던 목소리.
— 서하야. 미안한데,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자. 엄마가 너랑 어울리지 말래.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단 하나뿐이던 친구.
"처음 뵙겠습니다. 강재현 씨 아내, 신유라예요."
유라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
"그런데……."
유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우리, 어디서 뵌 적 있던가요?"
— 이 밤중에, 현장에서 뭘 하고 있느냐.서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텅 빈 거푸집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도망칠 수 없다면, 먼저 들어가면 된다."마침 잘됐어요, 아버님."서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지금 보고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직접 보고드리기로 한 조건, 기억하시죠?"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말해 보거라."신도시 현장 실사 결과입니다. 장부상 공정률은 43퍼센트, 실제 공정률은 19퍼센트예요. 사진과 시각 기록 전부 확보했습니다."도현이 옆에서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밤, 누군가 발주 문서도 감리 검측도 없이 레미콘 서른 대를 불러 야간 타설을 시도했어요. 공정률을 장부에 맞추려고요."서하는 한 박자 쉬었다."아버님께서 모르시는 일이라고 믿어요. 아셨다면 이런 불법을 허락하셨을 리 없으니까요."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빠져나갈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인정하면 불법 지시의 주인이 되고, 부정하면 지시한 누군가를 스스로 잘라야 한다. 어느 쪽이든 강 회장은 서하가 판 자리에 서야 했다.긴 침묵 끝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 잘했다, 새아기.역시였다. 먼저 안아 주는 사람.—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내가 알아보마. 그래서, 금요일엔 어쩔 생각이냐."진짜 숫자를 올리겠습니다. 미청구공사 2,400억 중 최소 1,300억은 감액해야 해요."— 그러면 강진건설 신용등급이 떨어진다. 채권단이 돈을 거둬들이기 시작하면 회사가 흔들려."알아요."— 흔들리는 정도가 아닐 수도 있다. 무너질 수도 있어.서하는 눈을 감았다."7년 전 서하건설처럼요?"이번에는 강 회장이 대답하지 않았다."아버님. 저는 제 서명을 진짜 숫자에만 넣을 거예요. 그 책임을 지라고 하셨잖아요. 지겠습니다. 가짜 숫자의 책임이 아니라, 진짜 숫자의 책임을요."바람이 불었다. 투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좋다.강 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다.
새벽 1시 20분. 신도시 강진건설 현장.멀리서부터 불빛이 보였다. 투광등 수십 개가 공사장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고, 진입로를 따라 레미콘 트럭이 줄지어 서 있었다. 거대한 드럼이 느릿느릿 돌아가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벌써 시작했어요."도현이 차를 세웠다. 가장 앞쪽 동의 거푸집 위로 펌프카 붐대가 뻗어 있었고, 회색 콘크리트가 쏟아지고 있었다.서하는 차에서 뛰어내렸다."누구십니까! 여긴 관계자 외……."안전모를 쓴 50대 남자가 막아섰다. 가슴팍에 '현장소장 박근철'이라고 적힌 명찰이 달려 있었다."강진건설 재무 총괄 윤서하입니다."박 소장의 얼굴이 굳었다."……총괄님께서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타설 멈춰 주세요.""그건 못 합니다. 본사 지시입니다. 공정이 밀려서 야간 타설로…….""누구 지시요? 문서로 주세요."박 소장이 입을 다물었다. 문서가 있을 리 없었다.서하는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옆 동으로 걸어갔다. 아직 콘크리트가 들어가지 않은 거푸집 안쪽이 드러났다. 철근이 절반도 채 엮여 있지 않았다."도현 씨. 찍어 줘요. 시간 나오게."도현이 이미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찰칵, 찰칵. 텅 빈 거푸집, 듬성듬성한 철근, 화면 구석에 찍히는 날짜와 시각."총괄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박 소장이 따라붙었다. 뒤로 인부 몇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저희도 먹고살자고 하는 겁니다. 오늘 밤 안에 못 부으면 본사에서…….""소장님."서하가 돌아섰다."철근 배근도 안 끝난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으면, 감리 검측 없이 타설하는 거예요. 불법이에요. 나중에 이 건물이 무너지면 누가 책임지죠? 본사요? 아니면 오늘 밤 여기 서명한 소장님이요?"박 소장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펌프카는 멈추지 않았다. 트럭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현장소장 하나 설득해서 멈출 판이 아니었다.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트럭 옆면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대성레미콘]서하는 휴대폰을 꺼내 민수아에게 전
손전등 불빛이 서하의 얼굴에서 수레 위 상자로 옮겨 갔다. 빨간 테이프 위의 '폐기' 두 글자가 번들거렸다."총괄님. 대답을 안 하시네요."오 상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쥔 손이 보였다. 버튼 하나면 정 실장에게 연결될 것이다.서하가 입을 열기 전에 도현이 먼저 움직였다. 수레 앞을 막아서듯 한 걸음 나섰다."오 상무님. 형님 기자회견, 보셨죠?"오 상무의 눈썹이 꿈틀했다."……그게 무슨 상관입니까.""입찰은 아버지가 따 오라고 했어요. 형은 시킨 대로 했고요. 그리고 사흘 만에 버려졌어요. 기자회견장에 아버지 얼굴은 없었죠."도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들도 사흘인데, 상무님은 며칠일 것 같아요?"불빛이 흔들렸다.서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떨리던 목소리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회의실에서 숫자를 말할 때의 목소리였다."상무님. 미청구공사 2,400억 장부, 작성자가 누구죠?""…….""재무본부장 오기택. 결재란에 상무님 서명이 세 군데 들어가 있어요. 저는 아직 한 군데도 안 했고요."서하가 상자에 손을 얹은 채 오 상무를 똑바로 보았다."분식이 터지면 1순위는 장부를 만든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회사는 7년 전에도, 사흘 전에도 똑같이 했어요. 위에서 시키고, 아래를 잘랐죠."서하는 상자를 톡 두드렸다."이 안에 그 증거가 있어요. 7년 전에 정 실장님이 도장 찍고, 실무자들이 뒤집어쓴 기록이요."엘리베이터 안이 조용해졌다. 문이 닫히려다 오 상무의 구두에 걸려 다시 열렸다."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아뇨."서하가 고개를 저었다."보험을 권해 드리는 거예요. 금요일에 제가 서명을 거부하면, 그 장부엔 상무님 이름만 남아요. 그때 상무님 편에 서서 '위에서 지시했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하실 거예요."오 상무는 한참 동안 서하를 바라보았다.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손전등이 천천히 내려갔다."……저는 오늘 밤 이 층에 오지 않았습니다."그가
목요일 밤 11시 40분. 강진건설 본사 지하 3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다. 형광등 절반은 꺼져 있었고, 복도 끝에 철문 하나가 보였다.[문서고 — 관계자 외 출입 금지]"CCTV는 민 대리가 20분 동안 녹화 화면으로 돌려놨어요."도현이 손목시계를 보았다."지금부터 18분."서하는 열쇠를 꽂았다. 손이 떨려서 한 번 헛돌았다. 도현이 말없이 그 손을 감싸 쥐고 함께 돌렸다.철컥.문서고 안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천장까지 닿는 철제 선반마다 누렇게 바랜 상자들이 빼곡했다."연도별로 정리돼 있을 거예요. 7년 전, 하도급 거래."두 사람은 휴대폰 불빛으로 선반 이름표를 훑으며 달렸다. 3년 전, 5년 전, 6년 전.7년 전.서하가 걸음을 멈췄다.선반이 비어 있었다. 상자가 있던 자리에 먼지 자국만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옮겼어요."심장이 내려앉았다. 늦었다. 폐기는 내일 아침이라고 했는데. 이미 가져갔다면."서하 씨. 저기."도현이 문서고 안쪽을 가리켰다. 화물용 출입문 앞에 바퀴 달린 철제 수레 세 대가 서 있었다. 수레마다 상자가 가득 실려 있었고, 상자마다 빨간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폐기]서하는 가장 가까운 상자의 테이프를 손톱으로 뜯었다. 서류 뭉치가 쏟아졌다.[서하건설 하도급 대금 지급 보류 결재]맨 위 서류의 결재란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정명수.서하는 숨을 들이켰다. 원본이었다. 복사본이 아닌, 7년 전 그날 이 회사가 아버지의 목을 조르며 찍은 도장.결재 서류 뒤에 누렇게 바랜 팩스 한 장이 스테이플러로 붙어 있었다. 손글씨였다.[대금 지급을 다시 한번 요청드립니다. 협력 업체 직원들 월급날이 모레입니다. 부탁드립니다. — 서하건설 윤정호]서하는 그 글씨를 알았다. 받침을 유난히 크게 쓰는 버릇. 어린 서하의 알림장에 사인해 주던 글씨.그 팩스 위에도 정명수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보류.'서하의 시야가 흐려졌다. 도현이 옆에서 조용히 휴대폰 불빛을 낮춰
"네가 한번 고쳐 보거라, 서하야."식탁 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서하는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선물인지, 덫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식탁 아래에서 도현의 발끝이 서하의 발끝에 닿았다. 이번에는 톡 건드리지 않았다. 가만히 닿아 있기만 했다. 네가 정하라는 뜻이었다."하겠습니다, 아버님."서하가 말했다."대신 조건이 있어요."강 회장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올라갔다."말해 보거라.""첫째, 강진건설의 모든 재무 자료에 대한 전면 접근 권한이요. 과거 자료까지 전부요.""당연하지. 재무 총괄이니까.""둘째, 보고는 아버님께 직접 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누구도 거치지 않고요."강 회장이 잠깐 서하를 보았다. 그의 등 뒤에 선 정 실장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것도 좋다."강 회장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대신 나도 조건이 하나 있다.""……네.""네가 서명한 장부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도 네 몫이다. 재무 총괄이란 그런 자리야."그는 웃었다."이번 주 금요일에 채권단에 올라가는 분기 보고서가 있다. 네 첫 서명이 되겠구나.""폭탄이에요."그날 밤, 별채 욕실. 물소리가 쏴아아 쏟아지는 가운데 도현이 낮게 말했다."강진건설 재무가 멀쩡할 리 없어요. 형이 입찰을 따려고 무리했고, 그 구멍을 장부로 덮었을 거예요. 그 장부에 당신이 서명하는 순간, 나중에 터지면 당신 책임이 돼요.""알아요.""알면서 받았어요?""네."서하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폭탄은 어디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만 해체할 수 있어요. 밖에서는 절대 못 찾아요."도현이 서하를 내려다보았다."그리고 강진건설이에요."서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7년 전 서하건설 하도급 대금을 반년 넘게 묶어 둔 회사. 그 지급 기록이 강진건설 재무팀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USB에 있는 건 사본이에요. 원본이 있어야 법정에서 이겨요."도현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숨처럼 웃었다."블루하버
빨간 불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서하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자기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되감겼다.— USB 비밀번호가 1204라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USB 연 것도 눈치챈 거면…….전부 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듣고 있었다.도현이 서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끄지 말라는 뜻이었다.그는 책상 위의 메모지를 끌어당겨 빠르게 적었다.[지금 끄면 들킨 걸 인정하는 거예요.] [이어서 말해요. 내가 맞출게요.]서하는 메모지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었다.도현이 만년필을 다시 조립하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1204? 아, 형 노트북 비밀번호요?"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메모지에 또 적고 있었다.[신도시 수주 발표일 = 12월 4일]"그러니까요."서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긴장한 새댁의 목소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차 변호사님이 비밀번호 얘기하시는데 찔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날 형님 노트북 비밀번호 풀던 게 생각나서요.""그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연이지.""우연이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USB 연 거, 아버님이 눈치채시면 어떡해요? 강진건설 파일을 복사했다는 거 들키면…….""안 들켜요. 형 노트북은 인터넷 선도 안 꽂혀 있었잖아요. 복사 기록 같은 거 안 남아요."도현이 메모지를 넘겼다.[미끼를 던져요. 날짜랑 장소.]서하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23억이에요. 심사위원 일곱 명. 이거 터뜨리면 형님은 끝이에요.""알아요.""언제 할 거예요?""다음 주 월요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직접 가져갈 거예요. 아는 기자 한 명이랑 같이."도현이 서하 옆에 앉았다. 메모지에는 [다음 주 월요일 = 가짜]라고 적혀 있었다."그런데 도현 씨."서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에는 진짜로 목이 메었다."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