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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수산월
사준영의 말에, 무릎 위에 포개진 그녀의 두 손이 아주 떨려왔지만 얼굴은 평온을 가장했다.

“오라버니는 무엇을 걱정하는 겁니까? 제가 가면 그 댁 아가씨가 오해할까 봐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정혼할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겁니까?”

사준영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구나.”

“비밀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육씨 가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곤란한 내 처지를 반드시 이해해 주리라 믿어도 되겠느냐?”

하진은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평소 그리 현명하시던 오라버니가, 어찌 지금 혼미해졌습니까? 저를 숨긴다면 육씨 가문에서 더욱 수상히 여길 것이고,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사준영은 하진의 말에 뼈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하진은 미소 지으며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이미 고모님께 타이름을 받았고, 그 가르침을 깊이 새겼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 우리 두 집안이 인척으로 이어져 있지요. 사씨 가문이 잘 되어야 대씨 가문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사준영은 하진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내려 했으나,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것이 너의 진심이더냐?”

“진심입니다. 저는 질투나 부리고 사리 분별 못 하는 이가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라버니와 한배를 탔고, 오라버니가 잘 되어야만 저도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준영은 가슴 한쪽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인지 번민인지 모를 복잡한 심경이 감돌았다.

하진이 보여준 너그러움과 이해심을 생각하면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이 원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확고한 약속을 요구했어야 했다.

그는 필시 그녀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여겼다. 중간에 몇 년을 떨어져 지냈더라도, 그는 늘 그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영원히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 약속했었다.

그녀를 평곡에서 데려온 것 역시, 그가 모친께 간청한 일이었다.

“네 마음 씀씀이가 이리 헤아림이 깊으니, 내 마음이 편치 않구나.”

사준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진은 사준영의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손가락 끝을 꼬집으며, 본심과는 다른 말을 뱉었다.

“당면에 처한 상황보다 그저 오라버니과 오래도록 백년해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진심이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준영은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

“염려하지 마라. 육완아와 혼인하는 것은 오직 벼슬길을 위함이지, 다른 뜻은 없다. 훗날 내가 조정에 발판을 단단히 세우면, 너를 정실 부인으로 올릴 것이다.”

하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낯익은 그의 말 때문에 역겨움이 치솟았고, 그저 사준영이 빨리 자리를 뜨기를 바랄 뿐이었다.

“근심하지 마세요. 내일 고모님의 뜻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저는 사씨 가문에 의지하러 온 외가 친척일 뿐, 오라버니과 혼약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진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우리만 인정하지 않으면, 혼약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고, 육씨 가문도 자연히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대연 왕조에서는 민간의 혼약은 사적인 약속에 불과하여, 분쟁이 생겨야만 관아에서 개입한다.

사준영은 하진 곁으로 다가와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를 스치는 잔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하진아, 네가 이리 마음을 써주는데, 내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

하진은 불편함을 애써 참고 몇 마디 정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어 사준영을 보냈다.

하늘은 개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음침해졌다.

규안은 하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저잣거리로 갑니까?”

“가야지.”

하진은 이 집에 잠시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계속 있다가는 스스로 우물에 독약을 풀어 모두를 죽일까 봐 두려웠다.

내일, 내일 하루만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

마차 한 대가 문을 빠져나와 곧장 옷 가게로 향했다.

옷 두 벌을 장만한 하진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마부에게 복흥 주점으로 가라고 했다.

그녀는 신분이 높지 않지만, 가진 재물은 넉넉하여 의식주를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복흥 주점은 그리 큰 곳은 아니었고, 경성에서도 최고라 할 만한 주점은 아니었으며, 위아래로 겨우 두 층뿐이었다. 그러나 이 주점의 술과 요리가 유난히 맛이 좋아, 입맛이 까다롭고 좋은 음식에 익숙한 하진은 복흥 주점의 음식만이 입에 맞았다.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날씨 탓인지 1층은 다소 쓸쓸했고, 서너 상에 손님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주점 안의 빛은 바깥보다 더욱 어두웠고, 창 처마 위의 가림막이 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점원은 두 여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마중 나섰다.

“아이고, 하늘이 캄캄하고 빗방울까지 섞여 부는데, 아가씨께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이따가 빗발이 거세지면 돌아가시는 길이 막힐까 염려됩니다.”

하진은 웃으며 말했다.

“기억력이 참 좋구나. 몇 번 왔을 뿐인데 벌써 기억하였구나.”

점원은 재빨리 아첨했다.

“아가씨께서는 다른 분들과 다릅니다. 인품도 좋으시고, 돈도 후하게 쓰시어, 보살님을 모시는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규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눈에는 우리 아가씨가 보살이 아니라 필시 재물을 가져다주는 신처럼 보이겠구나.”

서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동안, 점원은 두 사람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아가씨를 2층으로 모셔야 하나, 오늘은 운수가 맞지 않아 2층은 다른 손님께 통째로 내어주었습니다.”

“괜찮다. 어느 곳에 앉든 같으니, 늘 시키던 것으로 몇 가지로 올려다오.”

하진이 말했다.

점원은 찻물을 따라 올리고는 대답하고 물러갔다.

하진은 고개를 돌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행인들은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려는지 발걸음이 빨랐다.

잠시 후, 밥상이 차려지고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맹렬하게 떨어졌고, 땅 위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진은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이대로 계속 내린다면 내일 외출 길이 틀어질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넋 놓은 시선이 창틀을 넘어 2층의 돌출된 난간이 보였다.

이 주점은 두 개의 점포를 터서 만들었는데, 그 두 점포가 마침 모퉁이에 있어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2층에서 뻗어 나온 난간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끝이 올라간 조화에 푸른빛이 도는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빗물이 바람을 타고 날아 들어와 옷자락이 젖은 탓에 먹빛 푸른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진은 무의식중에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지만, 시야가 가려 더는 볼 수 없었고 결국 시선을 다시 빗줄기로 돌렸다.

바로 그때, 하진은 창문 아래에 한 아낙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낙은 머리와 몸이 절반 이상 젖었고, 머리카락은 기름때가 묻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에는 불룩한 보자기를 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보자기에 잠든 어린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아낙은 땅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구부리고, 품속의 아이를 보호하려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녀의 옆에는 대나무 광주리가 있었는데, 광주리 안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동그랗고 단단한 갈색 덩어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하진은 이 모자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지나 아낙 곁으로 가서 치마를 여미고 쪼그리고 앉았다.

“자네는 경성에 사는가?”

아낙은 문득 눈앞에 나타난 귀티 나는 여인을 보고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성 사람입니다.”

말을 마친 아낙은 하진에게 물었다.

“아가씨의 어투를 들으니 이곳 분 같지는 않으신데요.”

하진은 목소리가 맑고 고왔으며, 비록 경성의 사투리를 쓰고 있었으나, 어딘가 다른 억양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나긋해서 장난기 섞인 속삭임처럼 들렸다.

“외지에서 왔네.”

하진이 말했다.

“고향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마차로도 한참을 와야 하지.”

“그럼 경성에서 꽤 멀겠군요!”

하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바닥에 고인 물을 흘끗 보고 물었다.

“경성은 이 계절에 비가 자주 내리는가? 언제쯤 그치는지?”

아낙은 되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실 계획이신가요?”

“내일 성 밖의 청산사에 가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한 축원을 하려 했는데, 비가 이렇게 오면 가지 못할 듯하오.”

아낙은 웃으며 말했다.

“이 계절에 비가 오더라도 잠깐일 뿐, 거세게 내릴수록 더 빨리 그칩니다. 아가씨께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반 시진 후면 채 빗발이 잦아들 것입니다.”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은 필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맑은 날일 것입니다.”

하진은 마음속의 근심을 털어내고 미소 지었다.

“자네 말처럼 되길 바라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옆의 대나무 광주리를 보았다. 그 안에는 동그랗고 실한 갈색 덩어리들이 담겨 있었다.

“무슨 과일인가?”

“양젖 과일이라 합니다. 껍질은 볼품없어 보여도 속살은 아주 달고 맛이 있지요.”

아낙은 한 손을 움직여 몸에 쓱 문지르고는 광주리에서 하나를 꺼내 쪼개어 하진에게 내밀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한번 맛보시겠어요?”

하진은 받아 들었다. 그녀는 이런 과일은 본 적이 없었다. 겉껍질은 거칠고 검은빛을 띠었으나, 속살은 유백색이었다.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으니, 달콤한 향기가 입안 가득 감돌았다.

“어떠신가요?”

아낙의 눈에 빛이 돌았다.

아낙의 지아비는 일하다가 실수로 발을 다쳐 거동을 못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 혼자 과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장사가 잘 안되어 광주리 하나를 거의 팔지 못했다.

눈앞의 아가씨가 조금이라도 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과육은 식감이 좋고 즙이 많아 달콤하군.”

그러고는 옆에 있던 규안에게 건넸다.

“너도 한번 맛보아라.”

규안도 맛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맛있는 과일은 처음 먹어봅니다. 좀 사서 가시지요?”

아낙도 거들었다.

“좀 싸드릴까요?”

하진은 생각하더니 손을 저어 필요 없음을 알렸다.

아낙의 눈에 깃든 빛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러다 이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괜찮습니다. 양젖 과일이 아가씨 입에 맞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방금 내 근심을 덜어줬으니, 나도 자네에게 돈을 버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는 어느새 점점 약해져, 조금씩 내리는 소리만 날 뿐 아까처럼 맹렬하지 않았다.

아낙은 영문을 모르고 물었다.

“돈을 버는 방법이라니요?”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젖 과일 한 근에 얼마인가?”

“한 근에 삼 문입니다.”

아낙이 답했다.

“이 광주리를 다 팔아도 얼마 되지 않겠군.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이 양젖 과일로 음료를 만들어보게. 내일 청산사 아래에 자리를 펴고 차가운 음료를 팔아보게. 한 그릇에 삼 문씩, 무게로 팔지 말고 한 그릇 단위로 팔게나.”

아낙은 멍해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세상에! 어찌 진작에 이 생각을 못 했는지요!”

옆의 규안이 말을 보탰다.

“이 계절에 하늘이 개면 해가 아주 뜨거워질 것입니다. 내일은 초 여드렛날이라 절에 축원하러 오는 사람이 많을 터, 산에 오르내리면 몹시 목이 마를 것입니다. 한 광주리가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낙은 기뻐서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고, 한편으로는 품속의 아이를 토닥이며 한편으로는 양젖 과일이 담긴 광주리를 바라보았다.

비도 이미 그쳤다.

아낙은 하진에게 감사를 표하고 대나무 광주리를 등에 지고 떠났다.

하진은 몸을 일으켜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옆을 보니 처마 아래 통로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는 창백한 푸른색 둥근 깃 도포를 입고 흰 옥 허리띠를 두른 채, 서른쯤 되어 보이는 용모였다. 옆모습에 굳건함과 빼어남이 뒤섞여 있었다.

바로 2층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이었다.

하진은 글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견식이 높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필시 자신보다 훨씬 많은 학문을 익혔을 것이라 짐작했다.

마치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남자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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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끈한 열기 속에 호수의 시원함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정자 주위는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지들은 자유롭게 흩어져 정자 안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뒤집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정자 안에는 두 남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앉아 있었다.서 있는 남자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스무 살이 훌쩍 넘어 보였다.초록색 둥근 깃 도포를 입었는데, 깃 가장자리로 손가락 반 마디 너비의 새하얀 속옷이 보였고, 허리에는 검은 가죽띠를 묶고 있었다. 양지옥으로 만든 속이 빈 향낭을 차고 작은 은장도를 매달았으며, 검은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 코는 살짝 들려 있었고, 여의 무늬가 은은하게 수놓여 있었다.남자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집에 언제 저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들어온 것입니까? 싸움을 말린 것이 아니라, 분명히 불을 지핀 것인데, 미안해합니다. 꽤 흥미롭군요.”젊은 남자가 몸을 돌려 탁자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며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탁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육씨 가문의 첫째, 육명장이고, 말을 건넨 사람은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육씨 가문의 셋째, 육명천이었다.육명장은 두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맑은 물빛의 넓은 입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찻잔은 선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윤기 나는 푸른빛을 띠고 있어, 광택이 은은하게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탁자 옆의 두 겹으로 조각된 배꽃 무늬 나무 상자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입 넓은 찻잔 세 개가 있었다.육명장은 푸른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집안의 관계를 따지면 너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육명천은 말문이 막혀 물었다. “친척입니까?” 그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사씨 가문의 외척이다.” 육명장이 말했다.육명천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사씨 가문을 떠올렸고, 무심하게 웃었다.“이번에 가져온 다기가 마음에 드시는

  • 봄 옷을 벗다   제26화

    마지막에는 한마디 덧붙였다. “상인의 집안 출신이니, 셈이 빠르기는 하나, 수포로 될까 봐 두렵습니다.”육완아가 사미정의 말을 이어받았다. “할머니께서는 예의와 규범을 가장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그분의 마음을 얻는다 해도, 문벌에 맞지 않는 집안에 시집보내지는 않으실 겁니다. 일찌감치 그 마음을 접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바로 얼마 전에 사씨 가문과 파혼하고, 곧이어 육부로 들어와 할머니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배경을 바꾸려 하다니. 야망이 크기도 하지.’이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치도 없나 보군.”하진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 말을 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육희아였다.육완아의 얼굴을 붉히고 육희아에게 따졌다. “무슨 뜻이냐?”더 이상 나서지 않을 줄 알았던 육희하가 계속 말했다. “낯짝이 두껍기도 하지. 네 출신 배경을 잊은 것이냐? 감히 남의 흉을 보다니. 하진 아가씨는 적어도 이름있는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근본도 없이 의기양양해서 지껄여? 어느 진흙 구멍에서 굴러 나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흥분한 육희아의 양 볼이 붉어졌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져 말이 잘 통할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입담이 매서운 사람이었다. 육완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되받아쳤다. “너는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적자도 서자도 아닌 주제에, 이 집안에서 널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긴 하느냐? 네 할머니조차 우리 할머니 덕을 보는데.”육완아가 다시 말했다. “만약 그해 할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첫째 댁에 너희가 발 디딜 곳이나 있었겠느냐.”육 대감은 젊은 시절, 세상 구경을 나갔던 중 조 노부인과 먼저 인연을 맺었다. 가족들에게 숨기고 남몰래 조 노부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훗날 집안에서는 반대하며 조 노부인을 집에 들이지 못하게 했으며, 육 대감에게 다른 명문가의 여식을 혼처로 정해주었다. 육 대감은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주선에 따라 명문가의 여식과 혼례를

  • 봄 옷을 벗다   제25화

    다만 하진은 조금 이상했다. 그날 육희아의 말처럼 상황이 그토록 급박하여 마차가 뒤집힐 지경이었다면, 함께 있던 호위 무사들이 육완아를 에워싸고 먼저 보내야 했다. 마차는 지키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지킬 수 있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어찌하여 마차 안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을까? 만약 그 마차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작년의 화등절이라?’ 하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부터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육희아는 하진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화등절이 얼마나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내원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그곳을 거닐던 육완아와 사미정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육완아는 앞섶이 맞닿는 덧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감이 가볍고 얇았으며, 안에는 노란색 저고리를 입었다. 길이는 발목까지 닿았고, 치마 끝에 찬 장식에서 쟁강거리는 소리가 났다.사미정은 수행원처럼 육완아의 곁에 반 걸음 뒤처져 따랐고,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네 사람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쳤다.육완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비록 하진이 유씨와의 혼약을 먼저 파기했고, 그 제안도 하진 쪽에서 먼저 나온 것이었지만, 육완아에게 하진은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그녀는 하진이 사준영과 혼약을 물리기를 바랐지만, 하진이 먼저 제안한 것이 싫었다. 대하진 같은 미천한 상인의 여식이 감히 사대부 자제와의 혼약을 먼저 물리고자 한 것에 화가 났다. 마치 하진이 버린 것을 주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물론 사준영을 향한 육완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그 간절함이 더해졌다. 사준영이 그녀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일수록, 그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기에 좋았다. 육완아는 사씨 가문의 문제라 생각지 않고, 마음속의 모든 불만을 하진의 탓으로 돌렸다.‘혼약은 마땅히 물려야 하지만, 너 같은 상인의 여식이 먼저 제안해서는 안 되었다.’하진은 마땅히 버림받아야지만, 육완아는 마음 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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