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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or: 수산월
육명장은 조회가 끝난 후, 복흥 주점에 들러 반나절쯤 앉아 쉬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가 오기만 하면 2층은 그의 차지였다. 매일 오는 것은 아니었고, 사흘에 한 번꼴로 들렀다. 복흥 주점은 늘 미리 자리를 비워두고 그를 맞이했다.

그가 바깥에서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 편히 조용하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흥취가 더욱 깊어졌다. 1층 객실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보살이라.’

보살이라는 여인은 창가에 앉아 팔꿈치를 탁자 위에 괴고 있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희고 통통한 팔목이 드러났고, 팔목에는 투명한 옥 팔찌와 소박한 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뾰족한 손가락 끝으로 뺨을 건드렸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비가 거세지자 바람을 타고 들이쳐 도포 자락이 젖었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인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했으나, 그녀의 그 움직임 때문에 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육명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앳된 계집아이였다.

그는 술잔을 들어 홀짝이며 정신을 빗속에 담갔다가 다시 비워냈다.

조용한 빗소리 속에서 다시 움직임이 있었다.

그녀는 치마를 여미고 쪼그리고 앉아 아낙에게 날씨를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느릿했으며, 외지 억양이 섞여 있어 다소 특별했다.

육명장은 문득, 저 음색으로는 화를 내도 거칠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비가 잦아들었다.

그는 층계를 내려와 주점 밖으로 나가 처마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진이 옆을 돌아보았을 때, 그와 시선과 마주쳤고, 순간 멈칫했다. 예의를 갖추면서 미소를 짓더니 그리고 치마를 여며 절을 올렸다.

맞은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에 얕은 눈빛을 하고 있을 뿐, 고개를 숙이는 인사조차 없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진은 마주 선 문인이 붙임성이 없다고 여겼다. 냉정하고 인정없는 분위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도 차갑게 식혔다.

그녀는 규안에게 명했다.

“들어가서 밥값을 치르거라.”

규안은 대답하고 들어가 돈을 냈고, 잠시 후 나와 하진을 부축하여 마차에 태웠다.

그들이 사라진 후, 장안은 육명장에게 물었다.

“이제 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육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하늘은 맑게 개어 푸른빛이 감돌았고, 태양이 걸려 아침 햇살이 희미했으나 이미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규안은 몸종 몇을 불러 하진이 일어나 씻는 것을 시중들게 했다.

집안은 유난히 분주했다. 청산사로 축원하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만여 모녀는 머리 장식부터 옷차림까지 온통 정성껏 꾸몄다.

가주인 사백산은 처자식처럼 기쁨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마냥 평온하지도 않았다.

육명장을 한 번 뵙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만약 가까이서 마주하게 된다면, 한두 마디라도 말을 섞게 된다면, 그를 바라보는 동료의 눈빛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육씨 가문의 규수가 하진을 만나려 한다는 것도 중요했다.

다행히 하진은 주제 파악을 잘하기에, 이번에 아무 탈 없이 지나갈 것이다.

사씨 가문 일행은 저택 문을 나서 마차에 오르고 앞뒤로 하인들을 거느린 채 왁자지껄하게 성 밖으로 향했다.

하진은 마차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길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절에 향을 피우고 축원하러 가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었고, 바람 속에는 촉촉한 풀 향기와 약간의 흙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행인들과 마차들이 분주히 향 먼지를 밟고 지나갔다.

한참을 달려 청산사에 도착하자, 하진은 사미정과 함께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산기슭은 활기가 넘쳤다. 향초를 파는 이, 축원 물품을 파는 이, 점을 치고 괘를 풀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일행은 층계를 따라올라 먼저 사찰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축원했고, 하진은 따로 승려에게 경서 몇 권을 청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읽을 요량이었다.

사찰 문을 나섰을 때, 어디선가 비단옷을 입은 부인 몇이 다가와 사백산과 대만여에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특별히 이 자리에서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나리와 마님을 뵙습니다. 저희 노부인께서 아침부터 이 댁의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낙은 말하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하진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단번에 사씨 가문의 외가 친척임을 알아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놀랐지만, 다시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상인 집안 출신이라 들었던 대하진은 자태만 보면 육씨 가문의 아가씨들과 견주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하진은 목이 가늘고 길며, 등이 얇고 피부는 보기 드물게 희었다.

관료 대신 집안의 여인들이 모여 앉아 서로 은근히 정성껏 가꾼 살결을 내보이면, 눈으로 보기엔 모두 비슷하게 희었으나, 대하진의 옆에 서자 귀부인들의 흰 피부가 누렇게 뜨고 광택을 잃었다.

대만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몇 마디 대답하였고, 사씨 가문 일행은 육씨 가문의 아낙들을 따라 사찰 후원으로 향했다.

사찰 앞은 시끄러웠으나, 후원은 고요했다.

이따금 숲 사이로 새소리만 들려와 더욱 고요했다. 지나가는 승려들은 합장하고 길을 비켜주었다.

아낙들은 사람들을 넓은 선방 앞으로 안내했고, 안에서는 이미 누군가 소식을 전했는지 몸종이 휘장을 걷어 올렸다.

안채는 넓고 시원했으며, 중앙에는 여섯 폭의 휘장 병풍이 세워져 있어 희미하게 안쪽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백산과 사준영은 남자였기에 바깥쪽에 앉았고, 세 여인은 아낙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서자 방 안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노부인, 사씨 가문의 나리와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낙이 사람들을 안내한 후, 하인들에게 차와 다과를 올리도록 불렀다.

바깥의 사씨 가문 부자는 휘장을 향해 몸을 굽혀 인사했다.

“노부인, 안녕하시니까? 청정한 곳에 폐를 끼쳤습니다.”

육 노부인은 온화하게 말했다.

“격식 차리실 것 없네. 이 늙은이는 그런 것을 중히 여기지 않으니, 앉아서 이야기하게.”

이에 사씨 가문 부자는 바깥쪽에 앉았다.

대만여는 사미정과 하진을 이끌고 나아가 인사했고, 육 노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사미정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여 손을 잡고 몇 번을 자세히 보았다.

“사씨 가문 마님께서는 복이 많으구려. 이리도 훌륭한 자식들을 길러 내다니.”

그러고는 옆을 보며 농담하듯 말했다.

“우리 손녀가 그 댁 이야기를 자주 언급한 이유가 있었구려.”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미정은 육 노부인이 자기 손을 잡고 있었기에,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기쁜 나머지 우쭐해져 스스로를 더욱 높게 여겼다.

이때 옆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할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정이 아가씨와 저랑 나이가 비슷해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히 그리된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방 안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서, 서 있지 말고 사씨 마님을 자리로 모시거라.”

육 노부인이 말을 하자, 하인들이 대만여를 자리로 안내했다.

대만여는 거듭 감사를 표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시종일관 하진은 목을 숙이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한두 곳이 아니며 사방에서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육 노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저 아이가 바로…”

대만여가 재빨리 설명했다.

“이 아이는 제 친정 조카딸로, 평곡에서 왔습니다. 당분간 저희 집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육 노부인은 사미정의 손을 놓고 하진을 앞으로 불렀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진은 절을 하며 답했다.

“성은 대, 이름은 하진입니다. 나이는 열아홉이고, 집에서는 맏이입니다.”

“그렇구나, 고개를 들어라. 내 얼굴을 한번 보자꾸나.”

하진이 눈을 들었고, 그 순간 방 안의 모습을 대략이나마 볼 수 있었다.

상석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귀한 노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육 노부인이라 불렸으나 실제로는 그리 늙어 보이지 않았고, 귀밑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섞였으나 정신은 맑고 기운이 넘쳤다.

그녀의 뒤에는 비단옷을 입은 두 명의 아낙이 지키고 있었고, 양쪽에는 젊은 규수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시선이 유난히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육완아 말고는 그녀를 이렇게 볼 사람이 없었다.

육 노부인은 하진을 옆으로 끌어당겨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웃었다.

“평곡의 물과 흙이 사람을 잘 기른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이 아이가 우리 집 아이들보다 나은 것 같구나.”

모두 웃으며 동조했다.

“평곡의 물과 흙이 아무리 사람을 잘 길러도, 노부인 곁에서 자라는 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은 육 노부인에게 아첨하는 동시에, 육완아와 육 노부인 곁에서 총애를 받는 규수들을 간접적으로 칭찬하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육완아는 육 노부인의 옆구리에 기대어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할머니 눈에는 오직 하진 아가씨만 보이시고, 이 손녀들은 안 보이시나 봅니다.”

육 노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너를 칭찬한다고 서운해하는구나.”

모두가 웃고 떠드는 사이에, 육 노부인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또 다른 규수가 하진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어쩐지 노부인께서 이리 좋아하시더라니, 저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듭니다. 마치 눈으로 빚어낸 사람 같습니다.”

하진은 이 규수에 대해 알지 못했다.

전생에 하진은 사준영의 첩이 된 후 깊은 규방에 머물렀기에, 집 밖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때, 육완아가 다가와 하진의 손을 잡고 물었다.

“저보다 몇 살 많으시니, 언니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하진은 육완아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순진하고 해맑은 얼굴을 마주하자, 차갑게 식었던 기억이 다시 타올랐고, 하진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그녀의 코를 잡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두피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주었고, 억지로 하늘을 바라본 채로, 손발은 꼼짝없이 붙잡혔다. 얼마후, 비릿하고 걸쭉한 검은 탕약이 코와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저런 대우를 받지 않는다.

굴욕과 무력함이 그녀로 하여금, 그들의 눈에 자신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가축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첩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지킬 수 없었고, 뱃속의 아이도 지킬 수 없었다.

하진은 멀리 떨어진 기억에서 억지로 빠져나와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었다.

“당치 않습니다. 편히 낭자라고 불러주세요.”

육완아는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입꼬리까지 올린 채, 하진을 이끌어 육 노부인의 옆자리에 앉혔고, 사미정을 옆에 내버려 두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삭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하진 아가씨의 나이가 열아홉이라지요? 혹시 정혼은 하였습니까?”

하진은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여겼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대만여가 말을 가로챘다.

“몇 해 전 제 오라비의 부인께서 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이 아이는 삼 년 동안 상복을 입고 효도를 하느라 혼기를 놓쳤습니다. 아직 정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만여는 이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지만, 육씨 가문의 여인들은 오히려 미묘한 표정으로 각자 찻잔을 들어 유유히 차를 마셨다.

대만여는 불안해졌다.

사람들은 재미난 연극을 보는 듯,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연극을 즐기는 것 같았다.

사미정은 눈치가 빠르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어머니 옆에 굳어 앉아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칸막이 너머의 사씨 가문 부자 역시 안쪽의 말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하진은 속으로 냉소했다.

‘육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한두 마디 말로 속일 수 있겠는가? 혼약에 관한 일은 이미 샅샅이 알아보고 왔을 터, 당신의 말에 휘둘리겠어? 높은 가문의 초대를 받고 온 주제에 거짓말을 하려 들다니. 밖으로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야.’

육완아는 육 노부인의 팔을 흔들었다.

“할머니.”

육 노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노부인은 사실 사씨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전에 몇 가지 일 때문에, 게다가 사준영의 비범한 재능과 손녀의 센 고집에 이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육완아는 비록 혈연관계로 엮이지 않았지만, 노부인이 직접 키운 아이였다.

육 노부인은 고개를 돌려 하진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물었다.

“네 고모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니, 네가 말해보렴. 집에서 너의 혼사를 정했느냐?”

혼인 문제는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사씨 가문이 출세 때문에 혼약을 무시한다면, 육씨 가문은 그런 집안과는 결코 사돈을 맺을 수 없었다. 만일 혼사를 정했다면, 육완아는 단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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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 옷을 벗다   제30화

    조씨의 말에, 옆방의 휘장에 한 줄기 틈이 생겼고, 곧이어 작은 그림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어린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 아이는 육명천 앞으로 걸어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발을 모아 섰는데, 잔뜩 겁을 먹고 위축된 모습이었다.육명천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어찌 이렇게 큰 것인가?’아이의 이름은 육승호로, 육명천과 죽은 부인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가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만 해도 아이는 아직 어렸다.2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대여섯 살 정도로 컸다.육명천은 모친 앞에서 차마 속의 말을 다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육희아도 그 나이 때는 이렇지 않았다.그해 둘째 형님과 형수님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혼자 남겨진 육희아는 늘 안채에서 뛰어다녔고, 육 노부인께서는 어린 손주들이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녀를 곁에 두고 키웠다.그때 그의 어머니는 뒤에서 몇 마디 험담을 했을 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육명천이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 아이는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지방으로 간 후에는 쭉 어머니인 조씨의 손에서 자랐다.노부인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경을 외고, 그 후에는 비스듬히 누워 몸종에게 어깨를 주무르게 하거나, 눈을 감고 선잠을 잤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아이는 본래 천성이 활발하고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였으나, 억지로 방 안에 갇혀 조 노부인과 함께 앉아 있어야 했다. 노부인이 경을 외면, 아이는 옆방에서 경서를 베껴 썼고, 노부인이 눈을 감고 선잠을 자도, 여전히 경서를 베껴 썼다. 오직 노부인이 내원을 거닐 때만, 같이 밖에 나가 잠시 걸을 수 있었다.별채의 몸종들과 아낙네들은 명령을 받아 아이를 매우 엄하게 감시했고, 심지어 마당 문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이처럼 억압적인 생활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오래도록 갇힌 생활을 한 아이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맑은 눈빛도 사라

  • 봄 옷을 벗다   제29화

    “됐다, 가서 준비하거라.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머님도 자주 뵙거라.”육명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저 계집에게는 마음 두지 마라. 친척으로 연결된 사이다.”그의 아우는 성정이 자유분방하고 통제하기 어려웠으며, 타고난 다정한 눈빛으로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전에 집안에서 그에게 부인을 얻어주었으나, 그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산후 출혈로 아이만 남기고 세상을 떴다. 지금은 조씨 부인 손에서 크고 있었다.육명천은 살짝 당황했다. 말을 아끼는 형님께서 오늘따라 어찌 된 일인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다.“형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친척에게까지 손을 대지 않습니다.”육명장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육명천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육명천은 곧장 별채로 돌아왔다. 정원 안의 배치가 정교하였고 산과 물이 있고,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그럼에도 별채라 불린 것은 안채와 다르게 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육 노부인이 거처하는 곳은 안채, 조 노부인이 거처하는 마당은 별채라 불리게 되었다.육명천을 마주한 몸종들은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절했다. 별채 안으로 들어선 육명천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몸종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문의 휘장을 걷어 올렸고, 육명천은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듯한 무겁고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마치 문발 하나가 바깥공기를 차단하여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바깥의 빛도 잘 들지 않아, 오직 창문 앞에 가늘게 비치는 빛줄기만이 눈부시게 밝을 뿐이었다. 방 안에는 몇 명의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다른 두 명은 평상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평상에는 부인 한 명이 기대어 누워 있었는데, 나이가 좀 들어 보였지만, 관리를 잘해서 피부는 아직 윤기가 있었다. 다만 눈가에 몇 줄의 불규칙한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조씨였다.“어머니.” 육명천이 조씨에게 인사했다.조씨는 금방이라도 탁

  • 봄 옷을 벗다   제28화

    남자는 육명천에게 권력을 가진 형님이 있기에 지금 같은 권세를 누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 비해 자신은 온갖 고생을 하며 기어 올라왔음에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나를 왜 끌어당기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친형제끼리도 틈이 생기거늘, 하물며 한 어머니에게서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저 육재상이 마음이 넓어, 너를 용납해 준 것뿐이다. 만약 나라면….”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네 어미와 같이 쫓아낼 것이다. 네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거운 주먹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 남자는 즉사했다.손이 빨랐던 탓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말릴 틈이 없었다.육명천은 일부러 살인을 저지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주먹 한 방에 사람을 죽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술이 깨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관아로 가서 자수했다.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육명장의 정적들은 이 기회를, 구실을 삼았고, 저잣거리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대개 육명천이 그 형님의 명성을 빌려, 법도 없이 날뛰고 있다는 것이었다.백성들은 분노했고, 심지어 대연의 군정을 장악하는 육명장의 덕이 지위에 미치지 못한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외부에서 아무리 육명장에게 불리한 소문이 돌아도, 그는 평소처럼 궁에 들어 정무를 봤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조정의 목소리는 민간보다 더욱 흥미진진했다. 세 가지 목소리로 나뉘었는데, 육명장이 정의로운 척하니, 추밀사 직위를 파면하고, 결백이 증명된 후에 다시 관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관직에서 한 번 파면되면, 복직은 고사하고,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지 모른다.그들은 육명장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다른 무리는 육명장을 지지하는 무리로, 문관과 무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육명장의 휘하 사람들이었다.마지막 한

  • 봄 옷을 벗다   제27화

    후끈한 열기 속에 호수의 시원함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정자 주위는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지들은 자유롭게 흩어져 정자 안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뒤집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정자 안에는 두 남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앉아 있었다.서 있는 남자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스무 살이 훌쩍 넘어 보였다.초록색 둥근 깃 도포를 입었는데, 깃 가장자리로 손가락 반 마디 너비의 새하얀 속옷이 보였고, 허리에는 검은 가죽띠를 묶고 있었다. 양지옥으로 만든 속이 빈 향낭을 차고 작은 은장도를 매달았으며, 검은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 코는 살짝 들려 있었고, 여의 무늬가 은은하게 수놓여 있었다.남자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집에 언제 저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들어온 것입니까? 싸움을 말린 것이 아니라, 분명히 불을 지핀 것인데, 미안해합니다. 꽤 흥미롭군요.”젊은 남자가 몸을 돌려 탁자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며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탁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육씨 가문의 첫째, 육명장이고, 말을 건넨 사람은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육씨 가문의 셋째, 육명천이었다.육명장은 두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맑은 물빛의 넓은 입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찻잔은 선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윤기 나는 푸른빛을 띠고 있어, 광택이 은은하게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탁자 옆의 두 겹으로 조각된 배꽃 무늬 나무 상자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입 넓은 찻잔 세 개가 있었다.육명장은 푸른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집안의 관계를 따지면 너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육명천은 말문이 막혀 물었다. “친척입니까?” 그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사씨 가문의 외척이다.” 육명장이 말했다.육명천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사씨 가문을 떠올렸고, 무심하게 웃었다.“이번에 가져온 다기가 마음에 드시는

  • 봄 옷을 벗다   제26화

    마지막에는 한마디 덧붙였다. “상인의 집안 출신이니, 셈이 빠르기는 하나, 수포로 될까 봐 두렵습니다.”육완아가 사미정의 말을 이어받았다. “할머니께서는 예의와 규범을 가장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그분의 마음을 얻는다 해도, 문벌에 맞지 않는 집안에 시집보내지는 않으실 겁니다. 일찌감치 그 마음을 접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바로 얼마 전에 사씨 가문과 파혼하고, 곧이어 육부로 들어와 할머니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배경을 바꾸려 하다니. 야망이 크기도 하지.’이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치도 없나 보군.”하진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 말을 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육희아였다.육완아의 얼굴을 붉히고 육희아에게 따졌다. “무슨 뜻이냐?”더 이상 나서지 않을 줄 알았던 육희하가 계속 말했다. “낯짝이 두껍기도 하지. 네 출신 배경을 잊은 것이냐? 감히 남의 흉을 보다니. 하진 아가씨는 적어도 이름있는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근본도 없이 의기양양해서 지껄여? 어느 진흙 구멍에서 굴러 나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흥분한 육희아의 양 볼이 붉어졌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져 말이 잘 통할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입담이 매서운 사람이었다. 육완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되받아쳤다. “너는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적자도 서자도 아닌 주제에, 이 집안에서 널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긴 하느냐? 네 할머니조차 우리 할머니 덕을 보는데.”육완아가 다시 말했다. “만약 그해 할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첫째 댁에 너희가 발 디딜 곳이나 있었겠느냐.”육 대감은 젊은 시절, 세상 구경을 나갔던 중 조 노부인과 먼저 인연을 맺었다. 가족들에게 숨기고 남몰래 조 노부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훗날 집안에서는 반대하며 조 노부인을 집에 들이지 못하게 했으며, 육 대감에게 다른 명문가의 여식을 혼처로 정해주었다. 육 대감은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주선에 따라 명문가의 여식과 혼례를

  • 봄 옷을 벗다   제25화

    다만 하진은 조금 이상했다. 그날 육희아의 말처럼 상황이 그토록 급박하여 마차가 뒤집힐 지경이었다면, 함께 있던 호위 무사들이 육완아를 에워싸고 먼저 보내야 했다. 마차는 지키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지킬 수 있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어찌하여 마차 안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을까? 만약 그 마차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작년의 화등절이라?’ 하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부터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육희아는 하진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화등절이 얼마나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내원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그곳을 거닐던 육완아와 사미정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육완아는 앞섶이 맞닿는 덧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감이 가볍고 얇았으며, 안에는 노란색 저고리를 입었다. 길이는 발목까지 닿았고, 치마 끝에 찬 장식에서 쟁강거리는 소리가 났다.사미정은 수행원처럼 육완아의 곁에 반 걸음 뒤처져 따랐고,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네 사람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쳤다.육완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비록 하진이 유씨와의 혼약을 먼저 파기했고, 그 제안도 하진 쪽에서 먼저 나온 것이었지만, 육완아에게 하진은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그녀는 하진이 사준영과 혼약을 물리기를 바랐지만, 하진이 먼저 제안한 것이 싫었다. 대하진 같은 미천한 상인의 여식이 감히 사대부 자제와의 혼약을 먼저 물리고자 한 것에 화가 났다. 마치 하진이 버린 것을 주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물론 사준영을 향한 육완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그 간절함이 더해졌다. 사준영이 그녀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일수록, 그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기에 좋았다. 육완아는 사씨 가문의 문제라 생각지 않고, 마음속의 모든 불만을 하진의 탓으로 돌렸다.‘혼약은 마땅히 물려야 하지만, 너 같은 상인의 여식이 먼저 제안해서는 안 되었다.’하진은 마땅히 버림받아야지만, 육완아는 마음 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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