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는 수년간 수씨와 얽혔던 은혜와 원한을 떠올렸다.수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사람이 죽으면 등불이 꺼지듯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수씨가 그녀를 화나게 했던 많은 일들은 사실 그녀의 잘못이 더 컸건만 가의는 매번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사실 그녀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효성스럽고 너그러웠으며 후작을 위해 장남을 낳았고, 심지어는 수년간 후부의 살림도 총괄했지. 작년에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몸 상태가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유산을 했단 말이냐?” 시만자가 물었다.“그렇다. 그녀는 원래 체질이 좋지 않았다. 의원이 임신은 피하라고 당부했는데 하필 그 시기에 또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태아가 선천적으로 약해 결국 지키지 못했고 유산 이후 몸이 더 상하게 되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송석석은 문득 노 집사가 풍 집사에게 물었을 때 풍 집사가 이런 일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저 그녀가 둘째 아이를 낳을 때 병을 얻었다고만 말한 것을 들었다. 즉, 풍 집사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 집사에게 일부만 전한 것이 분명했다.시만자는 속으로 탄식하며 수씨는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다시금 믿었다. 악독하고 깐깐한 가의조차 그녀를 좋게 평가한다면 그건 진심일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총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고 몸이 망가졌으니, 참으로 아쉬울 뿐이다.시만자가 다시 물었다.“정말 하인을 죽인 적은 없는 것이냐?”가의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때리고 꾸짖은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다. 허나 노부인이 싫어해서 자주 그런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 곁에는 대부분 내 지참금으로 데려온 사람들 아니겠느냐? 내가 굳이 내 사람에게 그럴 이유가 뭐 있겠느냐?”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시만자는 가의를 내쫓겠다는 말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송석석이 말했다.“우리가 의
풍 집사와 대화를 끝낸 노 집사는 가의가 실제로 하인을 학대하고 구타한 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풍 집사가 수씨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수씨는 평양후부에서 매우 인망이 높았으며 가의가 아니었더라면 정실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홍시도 돌아왔지만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 그녀는 평양후부의 하인들에게도 물었지만 그들은 철저히 침묵했다.단 가의에게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가의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이로써 평양후부의 하인 관리와 내부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그러니 오히려 몇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의를 비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양후부에서는 별다른 단서를 못 찾았지만 이번 외부에서 퍼진 유언비어는 몇몇 거자들이 공방을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시작된 것이었어요.”“거자들이라니? 그들이 누구란 말이냐?”“조사해 보니 모두 제상서의 제자들이었습니다.”“제상서?”시만자는 한동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네, 이부상서이자 황후의 부친이다.”“그 사람이구나.” 송석석이 말하고 나서야 기억이 난 시만자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근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송석석이 담담히 말했다.“여인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길을 열어주는 일은 원래 황후의 일이지 않더냐.”“허나 황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비난받기 딱 좋은 일에 황후가 왜 나선단 말이냐?”“지금은 비난받기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공방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야.그렇게 되면 내가 북명왕비로서 황후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지.”홍시가 동의하며 말했다.“맞습니다. 황후는 가만히 있어도 국모로서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만약 왕비가 나서서 이런 일을 성공시킨다면 황후의 위상이 흔들릴 테니까요.”시만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그럼 그냥 지지한다고 하면 되지 않더냐!”“지금 황후는 태자가 정해지기 전이라 비난을 감당할 여유가 없어.”“본인은 아무것도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여묵은 사람을 시켜 상서부로 방문첩을 보냈다.“내 사제와 맞서려 들다니 오늘 밤 제대로 눈 붙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라.”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일 저도 함께 동행해 제대부인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좋소.”사여묵은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고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월이 되었건만 우리가 단 하루도 들놀이를 나간 적이 없다네. 나와 혼인하고 고생만 하게 해서 매번 송구스러울 뿐이오.”송석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는, 문득 그가 산에서 굴러내리던 일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때처럼 또 썰매를 타고 싶은 겁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아니오, 아니오!”사여묵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입을 맞추며 말문을 닫아버렸다.마침 야식을 들고 들어온 궁녀 영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뛰쳐나가는 보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부딪힐 뻔했지만 궁녀 영씨는 웃으며 보주를 나무랐다.“어쩜 이렇게 덜렁대느냐?”궁녀 영씨는 몇 발짝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리개를 젖히는 순간 궁녀 영씨는 그 자리에서 몸을 홱 돌리더니 이내 야식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하긴 저런 상황에 야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궁녀 영씨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빛이 가득했고 초승달은 옅은 구름 속에 숨어 쑥스러운 듯 세상과 마주하길 꺼리는 듯했다.…제부.제상서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태사 의자에 앉아 있었다.한밤중에 북명왕이 방문첩을 보냈으니 그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의가 있다고 하기엔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고 예의가 없다고 하기엔 하필 밤중에 방문첩을 보냈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제상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은 평양후부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 보통 사람은 평양후부에서 멈췄을 것이겠지만, 북명왕
송석석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의 없는 말과 진심을 구분하는 건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대부인께서는 황후마마의 생모이십니다. 만약 소진 소주방이 황후마마께서 주도하시는 사업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제대부인은 살짝 멈칫하며 말했다.“왕비님, 소진 소주방만 성공한다면, 장차 역사가 기억할 대업이 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하셨으니 난관이 있더라도 왕비님께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송석석이 부드럽게 답했다.“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모두 관념을 바꾸는 일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군요. 하지만 왕비님께서 이미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황후마마와 공을 나누려 하십니까?”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일에서 공로를 논하는 건 너무 속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조롭게 시행되는 것이 백성을 위한 대업 아니겠습니까?”제대부인은 그녀의 담대한 답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감탄하며 말했다.“왕비님이 이처럼 넓은 아량과 안목을 가지셨다니 참으로 귀합니다.”“대부인께서 황후마마께 이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송석석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여학이 태후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공방도 황후가 주도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감사합니다, 왕비님. 제가 황후마마께 전하겠습니다.”하지만 제대부인의 평온한 목소리를 듣자, 송석석은 황후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만약 황후마마께서 흥미를 보이지 않으신다면 대부인께서 관심이 있으십니까?”두 사람은 정자에 이르렀고 자리에 앉은 제대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는 집안일에 얽매여 왕비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 말에 송석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기대에 부
사여묵은 천천히 말했다."남에게 쥐어진 약점이 있으면 모든 일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왕이 처음에 제상서의 일을 떠들지 않았던 것은 좋은 약점은 중요한 순간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왔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틀 안에 제상서가 준비한 글을 염 선생께 전달하지 않으면 그들이 제대인을 위해 글을 쓸 것입니다."이건 적나라한 위협이었다. 제상서는 가슴이 꽉 막히며 화가 나 몸이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여묵은 여전히 여유롭게 앉아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그는 평소에 매우 까다로운 사람인데 제상서 집의 차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이 자만에 빠져 있지만 사실 가장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제상서처럼 명성을 중시하면서도 명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더 쉽게 다룰 수 있었다.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니 송석석과 제대부인이 돌아와 있었다. 사여묵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제상서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급한 일이 있으니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제상서는 얼굴에 웃음을 지을 힘도 없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안녕히 가십시오. 왕야, 왕비님.”그에 비해 제대부인은 진심 어린 배웅을 했다. "왕비님, 시간이 되시면 자주 들러 주십시오. 저는 왕비님과 대화하는 것이 정말 좋으니깐요.""네, 꼭 오겠습니다." 송석석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마차가 천천히 출발했고 진성의 번화함은 거리를 가득 메웠다.잠시 여유를 즐기기 위해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염구진과 보주를 먼저 보내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거리를 걷는 그들의 외모와 기품은 눈에 너무 띄었다.하여 그들은 왕경루로 향해 아늑한 방을 잡고 맛있는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한 뒤 이화주를 한 주전자 시켰다.이화주가 잔에 담기자 술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사여묵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군."송석석
제부.제상서가 옷소매를 휘두르며 말했다. "부인은 참 어리석소. 어찌 그 송석석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만약 마마께서 정말 공방을 지지하면 문관 청류들이 비난할 것이 뻔하지 않겠소? 마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황자의 지위는 확고하오. 그는 중궁의 적자이고 장남이오. 허니 그 외에 누가 있겠소?"제대부인은 자리에 앉은 채 반문했다. "그렇다면 대인께서는 왜 공방을 노리시는 겁니까?"고청묘 사건 이후로 제대부인은 그를 한 번도 부군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 함께했지만 그들 사이엔 틈이 있었다.제상서는 입술을 깨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다.제대부인은 이유를 잘 알기에 직접 밝히기로 했다. "폐하는 지금 강건하시니 후계자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궁중에는 후궁도 많고 황자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황자보다 똑똑하고 기민한 사람이 있다면 폐하 역시 다른 생각을 하실 겁니다. 폐하가 여태 후계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대황자가 별 볼 일 없기 때문이겠죠."제상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했지만 할 말이 없어 결국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면 공훈가문과 문관 청류들이 반감을 품을 것이오. 그렇다면 마마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지 않소? 부인, 제발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제대부인이 말했다. "이 일은 북명왕비와 이씨 부인이 주도하고 있으니 마마께서는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께서는 먼저 태후의 입장을 살피다가 만약 태후께서도 찬성하시면 공방에 조금의 돈을 보태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가 책망하더라도 태후에 효를 다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폐하가 책망하지 않으면 외부의 비판에 불과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마마와 대황자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대인께서도 공방을 추진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사람을 시켜 방해한 게 아닙니까?"제대부인이 아무리 설득해도 제상서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 않으면 실수할 일도 없소. 이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가 없단
몇몇 거자들이 글을 가져왔지만, 염구진은 왕야에게까지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바로 거절했다. 그들은 태도가 부자연스러웠고 공방에 대한 편견도 여전했다. "내일 다시 제출하시게. 만약 내일도 이렇게 쓸 거라면 더는 오지 않아도 될 걸세." 염구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그중 진씨 성을 가진 거자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선생님도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권세를 얻고 나서 학문하는 사람을 괴롭히시는 겁니까?"염구진은 그들의 얕은 생각을 직접적이고 간단하게 반박했다. "자네들이 여자가 아닌 것이 한탄스럽소. 어머니의 고생을 알지 못하니 말이오.""공방과 여인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버려진 여인들을 수용하는 곳입니다."염구진이 엄하게 말했다. "버려진 사내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소?"그러자 거자들이 모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버려진 사내라니요? 정말 우스운 말이군요."염구진은 그들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버려진 사내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세상 사내가 모두 고귀해 여인을 능가한다고 생각하는 게요?""사내는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하고 아내와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지 않습니까?"그러자 염구진이 물었다. "여인들은 못하는 일이오?"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내일 이 시간까지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이 제출되지 않으면 그대들의 미래는 없을 것이오. 돌아가서 농사를 짓든 글을 팔든, 아니면 아내가 자수라도 잘하면 아내의 힘으로 먹고 살 수 있소. 그러다 아내가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기다리다 아내를 쫓아내면 될 것이오."염구진은 결국 몽동이를 불러 사람들을 쫓아내게 했다.그러자 몽둥이가 철몽둥이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여인의 몸속에서 나온 것들이 까짓 학문을 좀 익혔다고 어머니까지 욕보이다니! 참으로 우습도다. 의리도 모르고 효도도 모르고, 백성을 위해 싸우지도 않고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것저것 비난만 할 줄
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수씨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가장 아니길 바랐던 것이 바로 수씨었다. 그녀는 다년간 후부에서 집안의 일을 도맡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가의는 늘 그녀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비록 그녀가 노부인의 조카이긴 했지만, 본처가 아니라 명분도 제대로 얻지 못했다. 시만자 역시 머리가 아팠다. “이걸 어쩐단 말이냐? 정말 수씨라는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사람도 다 죽은 마당에 조사한들 평양후부의 노부인이 그 말을 믿기나 할까? 게다가 수씨가 죽기 전에 계획했다는 증좌도 없으니 단지 시녀의 증언으로 부족할 것이다.” 송석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노 집사에게 부탁해 풍 집사를 청하도록 하지. 이번엔 우리가 직접 묻는 것이 좋겠구나.” “그럴 수밖에. 모든 일은 풍 집사가 안배한 일이니 그자는 절대 아무 이유도 없이 가의를 겨냥하지 않을 것이다.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송석석은 먼저 노 집사를 불러 풍 집사에 대해 철저히 알아보면 그의 의도를 분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풍 집사가 이 일을 꾸몄을 거라는 말에 노 집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화가 역력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에게 했던 말들은 전부 일부러 왕비님의 귀에 들어가라고 한 말이군요.”“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사실을 왜곡해 우리가 가의를 나쁜 사람으로 믿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가의가 악독하긴 하지만 이 일에 있어 무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가의를 의심하게 유도한 것이지.” 송석석은 노 집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허나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일이 밝혀지고 나서 다시 묻도록 하자.” 송석석은 풍 집사의 의도를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악의적인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노 집사와 이렇게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자 노 집사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하긴, 정말 절 이용하려고 했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