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지율은 조금 전 유소린과 나눴던 이야기를 주용화에게 다시 설명해 줬다.그러자 주용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하지율과 유소린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두 사람 모두 주용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유소린은 원래 하지율과 따로 주용화 이야기를 해보려 했지만, 주용화가 계속해서 하지율의 곁을 지키고 있어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결국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뜬 유소린은 하지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율아, 내 생각에는 화야 씨 어디 아픈 것 같아.]하지율 역시 주용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 심각한 상태인지는 알지 못했다.하지율은 주용화에게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증상이 심해지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남시온에게서 주용화가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면 치료까지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고, 주씨 가문을 둘러싼 여러 소문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주용화의 병에 대해 어렴풋한 짐작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주용화가 곁에 머문 시간 동안 하지율이 직접 본 증상은 심한 불면 정도뿐이었다.그래서 주씨 가문의 병이 세간의 소문처럼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인지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오히려 세간의 소문에 과장이 섞여 있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하지율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하지율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시죠?”수화기 너머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율 씨, 진소현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신가요?”하지율은 주용화를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같은 공간 안에 있기만 하면 주용화도 굳이 껌딱지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았다.주용화는 그저 하지율이 창가 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볼 뿐, 자리를 지켰다.“네, 괜찮아요.”진소현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용화 씨가 곁에 있을 것 같아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지율이 보이지 않자, 주용화는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다.곧바로 방을 뛰쳐나와 하지율을 찾아다니느라 탁자 위에 놓인 쪽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었다.하지율은 묘한 불안을 느꼈지만 마음을 가라앉힌 뒤 주용화의 손을 잡고 방으로 걸어갔다.그리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쪽지를 주용화에게 건넸다.[화야 씨, 처리할 일이 있어서 서재에 다녀올게요. 일어나시면 서재로 오세요.]쪽지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뒤에야 주용화의 거친 숨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주용화는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지율 씨,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하지율은 그런 주용화를 지긋이 바라봤다. 이윽고 하려던 말을 삼킨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의 주용화는 하지율에게도 낯설었다.평소처럼 모든 상황을 침착하게 대응하던 모습보다는 오히려 작은 일에도 쉽게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다.이번에 하지율이 사라졌던 일은 주용화에게 생각보다 훨씬 깊은 상처를 남긴 듯했다.한참 뒤, 하지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화야 씨.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다음부터는 어디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꼭 직접 말하고 갈게요. 화야 씨가 걱정하지 않게요.”주용화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말 마음에 새겨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한편, 하지율은 막 돌아온 참이라 처리해야 할 일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주용화를 달랜 뒤, 하지율은 다시 유소린을 찾아갔다.유소린이 먼저 물었다.“지율아, 이제 너도 돌아왔으니... 연정미랑 손형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풀어줄까?”연정미와 손형서는 아직도 주용화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하지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풀어주면 안 돼. 내가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을 풀어주면, 두 사람이 납치된 일이 우리랑 관련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잖아.”유소린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한데 계속 가둬두는 것도 문제야. 혹시라도 들키면 일이 커져서...”하지만 이내 고민 섞인 투로
하지만 유소린의 생각은 달랐다.“그런 말도 있잖아요. 큰 걸 얻으려면 그만한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라고요. 좋은 것만 챙기고 부담은 전부 피하겠다는 건 욕심이죠. 지분을 받기로 했다면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당해야 하는 거고요. 그게 뭐가 문제예요?”유소린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설마 함우민 씨는 지율이가 지분은 받으면서도 아무 책임도 지지 않길 바란다는 거예요? 좋은 건 다 챙기면서도 끝까지 깨끗한 사람으로만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유소린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렇게 따지면 연정미랑 뭐가 달라요? 이상이니 신념이니, 고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 취급받으면 어때요? 착하다고 칭찬받을 바에 독한 여자로 살며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게 백배 나아요. 더구나 지율이가 남의 걸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걸 왜 거절해요?”이내 유소린은 함우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아니면 함우민 씨는 지율이가 손형원 씨 지분 하나 제대로 관리할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 그랬다면 손형원 씨가 그걸 지율이한테 넘겼겠어요? 차라리 손형서한테 더 많이 남겼겠죠.”유소린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손형원 씨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손형서는 지금 가진 지분만으로도 벅찰 거라는 걸요. 7퍼센트면 손형서 씨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에 가까웠을 테고, 그걸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거예요.”유소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차갑게 말했다.“반대로 지율이가 지분을 받는다면 앞으로 손형서 씨를 도와줄 거라는 것도 알았겠죠. 손형원 씨조차 지율이의 능력과 사람 됨됨이는 믿었어요. 그런데 함우민 씨는 무슨 자격으로 그걸 의심하는 거예요?”손형원이 아무리 하지율을 좋아했다고 해도 손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손형서가 그동안 손형원을 여러 번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친여동생이었으니까.손형원이 죽고 나서 하지율이 손씨 가문 지분 38퍼센트를 갖고, 손형서가
초반에는 유소린도 손형원이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손형원이 죽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씁쓸했다. 특히 린을 떠올릴 때면 묘한 동정심이 밀려왔다.돌이켜보면 손형원은 끝까지 안쓰럽고도 미운 사람이었다.하지율은 망가진 손을 멍하니 내려다봤다.이윽고 한참이 지나서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응.”그 대답이 무슨 뜻인지는 유소린도 알 수 없었다.손형원과의 인연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손형원이 남긴 지분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인지.하지만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손형원은 하지율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다.소중한 손을 망가뜨리며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도 손형원이었고, 이후 누구보다 많은 것을 내어주며 속죄하려 했던 사람도 손형원이었다.사람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순간으로 나뉜다면, 주용화는 전자이고 손형원은 후자일 터였다.따지고 보면 손형원 역시 하지율의 인생에 흔적을 남긴 셈이었다.하지율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소린아, 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잠시 말을 멈춘 하지율이 씁쓸하게 웃었다.“어쩌면 나도 연정미랑 다를 게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어...”하지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재 문이 거칠게 열렸다.문가에 나타난 사람은 함우민이었다.“지율 씨, 손형원 씨가 남긴 지분은 절대 받으시면 안 됩니다.”함우민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손형원 씨는 지율 씨가 다시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오랫동안 감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는 없습니다.”함우민을 본 유소린이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함우민 씨, 또 엿듣고 있었어요?”최근 들어 함우민이 하지율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유소린도 그를 다시 보게 될 뻔했다.그런데 결국 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짓을 하고 말았다.함우민은 유소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시선
유소린은 듣는 내내 거의 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유소린은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난 지금 가치관이 조금 삐뚤어졌고... 돈 앞에서 눈이 뒤집힌 거네.’만약 유소린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받았을 것이다.안 받으면 손해 그 자체였다.송지한이 다시 말했다.“만약 하지율 씨께서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손 대표님 지분은 5년 동안 동결됩니다. 동결 기간 하지율 씨는 언제든 마음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송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다만 손씨 가문 상황이 특수하다 보니 실제로 5년을 온전히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건 손 대표님께서 최대한 확보해 두신 기간입니다.”다시 말해 하지율은 5년 안에 언제든 선택을 바꿀 수 있었다.주용화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혹은 급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손씨 가문의 지분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다만 손형원의 압박이 없는 상태에서 그 지분이 정말 5년 동안 온전히 동결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어쩌면 길어야 2, 3년일 수도 있었다.하지율이 그 시간을 놓친 뒤 후회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손형원이 하지율을 위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다.송지한은 당장 하지율의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하지율 씨께서는 지금 바로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막 돌아오신 참이니 처리하실 일도 많으시겠죠. 아직 손 대표님 실종 기간이 길지 않기에 손씨 가문도 그렇게 빨리 수배령을 내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동안 천천히 생각해 보셔도 됩니다.”말을 마친 송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몇 걸음 걷던 송지한은 무언가 떠올린 듯 다시 멈춰서 하지율을 바라봤다.“하지율 씨, 손 대표님께서 하지율 씨의 손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의사를 찾아 두셨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하지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송지한은 바로 알아차렸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소린이 배웅하려 했지
하지율은 유소린에게 말했다.“소린아, 송 비서를 서재로 안내해 줘. 나는 먼저 화야 씨의 상태를 좀 보고 올게.”유소린은 알겠다고 답한 뒤 송지한을 데리러 갔다.하지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주용화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하지율은 처음에는 주용화를 깨우려 했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편히 자는 모습을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하지율은 메모 한 장을 남긴 뒤,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하지율이 서재에서 잠시 기다리자 유소린이 송지한을 데리고 들어왔다.송지한을 보자 하지율도 곧 기억났다.예전에 병원에서 손형원을 마주쳤을 때 몇 번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다만 이름까지는 몰랐을 뿐이었다.하지율은 송지한에게 앉을 자리를 권한 뒤 물었다.“송 비서님이 굳이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송지한은 서류봉투에서 몇 장의 문서를 꺼내 하지율의 앞으로 내밀었다.“이건 손 대표님께서 제게 맡겨 두셨던 지분 양도 계약서입니다. 먼저 확인해 보시죠.”‘지분 양도 계약서라고?’유소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하지율은 지분 양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아마 주용화가 함께 있어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유소린은 송지한이 건넨 서류를 받아 하지율에게 넘겼다.하지율은 서류를 펼쳐 훑어봤다.손형원이 섬에서 보여 줬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계약서였다.하지율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송지한이 먼저 말했다.“며칠 전에 손 대표님의 헬기가 추락한 일은 이미 손씨 가문에서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송지한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현재 손씨 가문에서 계속 수색과 구조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만... 아직까지 손 대표님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아마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하지율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손형원은 총까지 맞은 상태였고 거기다 폭우와 거센 파도까지 몰아쳤다.설령 총상을 입지 않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바다에 추락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송지한이 말을 이
“윤택아, 이모가 이따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 만들어 줄까?”임채아를 보자, 고윤택은 얌전히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채아 이모.” 그리고 옆에 서 있던 하지율을 흘깃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채아 이모, 저는 이따가 엄마랑 돌아가야 해요.”임채아는 그제야 하지율을 본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지율 씨도 계시네요? 윤택아,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니?”고윤택이 대답했다.“외할아버지 보러 왔어요.”“외할아버지?” 임채아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놀란 듯 하지율을 바라봤다.“하지율 씨 아버지
고지후의 말뜻은 하지율을 선택하겠다는 것이었다.하지율은 약간 놀랐지만 또 고지후의 상황이 이해되기도 했다.고지후는 항상 이성적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하지율은 차갑고 표독스러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돌리자 임채아가 입술을 꽉 깨물고 붉어진 눈으로 하지율을 노려보았다.임채아는 고지후가 두 사람 중에서 하지율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분명 임채아를 위해서 하지율과 이혼했으면서 말이다.그런데 왜 하지율을 선택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율은 차갑게 웃었다.임채아는 죽을병에 걸렸다고
유세진은 고민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들고 웃으면서 얘기했다.“하지율, 당신은 정말 설득을 잘해.”하지율이 유세진을 보면서 물었다.“그럼 대답은?”유세진이 웃으면서 대답했다.“총명한 사람과 대화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 솔직히... 죽이기 아까울 정도야.”하지율이 미소를 지었다.“내 사심도 있어. 고윤택은 그래도 내 아들이니까 살리고 싶어. 그리고 나도 살고 싶지. 당신을 돕는 건 나를 돕는 것과 같아.”유세진은 솔직한 하지율을 보면서 만족해했다.“하지율 씨처럼 총명한 사람은 정말 죽이기 아까워. 이렇게 하자. 고지후가
임채아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임채아는 단종건이 그저 미친 늙은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단종건의 의술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전혀 몰랐다.어쩌면 단종건은 임채아의 꾀병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아무리 임채아의 반응 속도가 느리다고 해도, 지금 생각해 보면 단종건의 그 행동들은 모두 임채아를 놀리기 위함이었다.하지율은 어쩌면 임채아의 꾀병에 대해 진작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율이 그런 임채아의 거짓말을 까밝히지 않은 것은 고지후의 손에서 그 2천억을 손에 넣기 위함일 것이다.단종건이 만약 아무 권력도 없는 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