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단보현은 고집스러운 연정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정미야, 아직도 계속 싸울 생각이야?”연정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보현 오빠는 그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졌는데 그냥 넘어갈 생각이에요? 이런 꼴이 됐다고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나요?”그러자 단보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아직도 모르겠어? 하지율의 세력은 계속 커지고 있고 우리 쪽 힘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 지금 네가 하지율과 주용화를 상대로 뭘 할 수 있는데? 설령 네 뱃속의 아이가 심수현의 아이라고 해도 아이 하나로 그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정미야, 난 네가 영리하고 상황 판단도 빠르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보니 너무 순진하군. 권력이 네 손에 있을 때도 넌 그 사람들을 어쩌지 못했잖아. 이제 남에게 기대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그러자 연정미가 대답했다.“이길 수 있든 없든 이렇게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죠. 보현 오빠는 가주였던 사람이니 그런 이치쯤은 저보다 더 잘 알잖아요.”연정미는 자신의 아랫배 위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주용화와 하지율이 무슨 말을 했기에 오빠가 그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는 쉽게 지우지 않을 거예요. 보현 오빠가 복수하고 싶지 않다면 상관없어요. 저는 마지막 숨이 남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을 마친 연정미는 단보현을 깊이 바라본 뒤 돌아서서 병실을 나갔다.병실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서 엿듣고 있던 단성훈과 마주쳤다.단성훈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연정미는 단성훈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다.단성훈은 연정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병실을 한번 돌아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단성훈은 왠지 초조해 보였다.“삼촌, 어떻게 연정미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할 수 있어요?”단보현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그 아이가 심수현의 아이든 내 아이든 주용화는 반드시 그걸 이용하려 들 거야
연정미는 곧바로 병원으로 단보현을 찾아갔다.병실에 들어서서 단보현의 모습을 본 순간, 연정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어디를 다친 건지 단보현은 얼굴 절반이 붕대로 감겨 있었고 발 쪽도 거즈로 단단히 싸여 있었다.하지만 형태만 봐도 한쪽 발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연정미는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보현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단보현의 눈빛은 사납고 음침했다.“주용화야.”단보현은 이를 갈며 말했다.“주용화가 날 납치해서 이 꼴로 만들었어. 심지어 날 맹수와 싸우게 해 놓고 자기는 옆에 앉아 구경까지 했다고!”연정미는 숨이 턱 막혔고 얼굴도 희미하게 질렸다.‘맹수와의 결투라니...’연정미가 조사해 낸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주용화가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내용은 분명히 있었다.당시 연정미는 단보현에게 사람과 맹수가 싸우는 장면을 꾸며 보자고 제안할 생각까지 했었다.주용화가 겪었던 일을 재현해 그 기억을 자극하면 끔찍한 과거를 떠올린 주용화가 완전히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런데 주용화는 마치 연정미의 속셈을 꿰뚫어 본 것처럼 단보현에게 먼저 똑같은 일을 벌였다.‘우연일까?’아니, 절대 아니었다.분명 연정미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연정미는 독사가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그때 단보현의 시선이 문득 연정미의 아랫배로 향했다.“정미야, 듣자 하니... 임신했다며?”정신을 차린 연정미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쓰다듬은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단보현의 입가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내 아이야? 아니면 심수현의 아이야?”그 순간, 연정미의 눈에는 망설임이 어렸다.지금 임신한 아이가 단보현의 아이라고 말하는 편이 자신에게 더 유리할지 계산하는 중이었다.지난번 일 이후로 조성희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졌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빈정거리며 연정미를 조롱했다.지금 연정미에게는 그런 거슬리는 여자들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그렇지 않으면 연정미는 다른 일에 집
하지율은 대답하지 않고 손끝으로 주용화의 몸에 희미하게 남은 흉터를 천천히 쓸었다.누가 봐도 그건 오래전에 생긴 상처였다.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약을 써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선명한 흔적이 남았다는 건 당시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하지율의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처음부터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주용화의 강함은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버텨 내며 얻은 것이었다.그리고 지금 하지율이 누리는 모든 것은 주용화가 자신의 피로 일궈 낸 결과였다.그런데 자신은 우습게도 주용화가 언제나 이기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손형원의 말이 맞았다.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주용화가 어떤 과거를 살아왔는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했다.하지율은 고개를 숙여 주용화의 몸에 남은 흉터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순간 주용화의 몸이 단단하게 굳었다.“지율 씨...”하지율은 고개를 들어 주용화를 바라봤다.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맑은 눈동자에는 물처럼 부드러운 빛이 어려 있었다.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화야 씨, 오늘은 제가 해도 돼요?”그 순간, 주용화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고 눈빛은 더욱 깊고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런데도 하지율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맑고 뜨거웠고 불길이 타오르는 듯 강렬해서 사람의 영혼까지 데울 것만 같았다.주용화의 두 눈동자에 하지율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그 순간, 알 수 없는 흥분과 욕망이 온몸을 휩쓸며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하지율의 허리를 감싼 주용화의 두 팔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훗날 주용화는 이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 독 가시가 돋은 덩굴이 자라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주용화는 숨이 막히고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주용화는 이런 감정이 증오라는 걸 깨달았다....단보현이 단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의 상처가 대부분 회복되어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하지 않았다.하지
손형원의 말투는 마치 이렇게 들렸다.“안 선생님, 제가 지키는 건 하지율 씨와의 약속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알 바가 아니죠.”자신은 여전히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그때 안병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안병철은 화제를 바꿔 물었다.“단종건이 네 몸에 든 독은 언제쯤 다 빠진다고 하더냐?”그러자 손형원이 대답했다.“한 달 정도 더 걸린다고 했습니다.”안병철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제 나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율은 주용화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하지율은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던 바이올린 ‘무명’을 꺼냈다.가볍게 현을 튕겨 본 뒤 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완벽에 가까운 연주였다.하지만 전성기의 하지율과 비교하면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예전에도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놓았다가 다시 시작했지만 기본기와 실력이 남아 있었음에도 하지율은 매일 오랜 시간 연습해야 했다.게다가 지금은 손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그러지 짧은 시간 안에 예전의 실력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하지만 하지율은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하고 불안했다.이제 하지율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하지율은 자신의 연주가 주용화의 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율은 곡을 연주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치료 계획을 생각했다.어쩌면 ‘여름밤의 별’을 쓰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과거 뒤뜰에서 연주했던 곡도 바로 그 바이올린으로 연주했으니까 말이다.‘여름밤의 별’을 떠올리자 그 바이올린을 직접 수리해 준 사람도 주용화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한 곡을 마친 하지율은 ‘여름밤의 별’을 찾으러 가려다 문 앞에 서 있는 훤칠한 그림자를 발견했다.“화야 씨, 언제 돌아오셨어요?”“조금 전에요.”주용화는 하지율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바라봤다.“지율 씨, 방금 연주에 집중하지 않으셨네요.”하지율은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른 생각을 하느
손형원과 주용화는 서로의 존재와 마지노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특히 손형원은 몇 번이고 주용화의 심기를 건드리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었다.손형원이 간이 큰 건지, 정말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그때 하지율이 말했다.“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그러자 손형원이 대답했다.“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하지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하지율은 안병철의 거처에 도착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안병철의 의견도 단종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짧게 연주하는 건 괜찮지만 오래 하는 건 안 돼. 그리고 의사를 찾는 일은...”안벼얼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마침 실력 있는 의사를 한 명 알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 두마.”하지율의 눈에는 고마운 기색이 떠올랐다.“안 어르신, 감사합니다.”안병철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더 할 말 없으면 이제 가 봐. 그리고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라면 앞으로 매주 한 번씩 나한테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해.”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는 손형원이 보였다.손형원은 더 붙잡지 않고 하지율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하지율도 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안으로 들어오는 손형원을 본 안병철이 코웃음을 쳤다.“네 몸에 든 독도 아직 못 풀었으면서 남 걱정할 여유는 있나 보구나. 주씨 가문 그 녀석 때문에 이 꼴이 됐으면 복수할 생각부터 해야지 네 적을 치료할 의사까지 찾아 주는 거야? 바다에 빠지더니 머릿속까지 물이 잔뜩 들어찬 모양이군.”하지만 손형원은 담담하게 말했다.“주용화가 저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닙니다. 제가 자초한 일이죠.”안병철은 할 말을 잃었다.잠시 뒤 답답하다는 듯 호통을 쳤다.“너 정말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야? 너도 예전에는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던 놈 아니었어? 이제 와서 개과천선이라도 하
하지율은 손형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그러자 손형원은 뜸을 들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들은 주용화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주 무거운 족쇄를 채워 뒀습니다. 그런데 주용화는 자기 몸에도 가차 없이 손을 대야만 했어요.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손을 억지로 부러뜨렸대요.”손형원은 당시 주용화가 손을 부러뜨리는 모습을 목격한 교도관이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하지율에게 말하지 않았다.교도관은 감옥을 순찰하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했다.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주용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보기만 해도 온몸이 서늘해질 정도였다.그러다 주용화는 교도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주용화의 눈빛은 어둡고 음산한 나머지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 같았다.교도관은 그 자리에서 겁에 질렸고 주용화의 싸움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원을 부르러 갔다.하지만 그 짧은 사이 주용화는 이미 탈출한 뒤였다.손형원의 말을 들은 하지율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율은 주용화가 과거 최면 치료를 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고문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것도 반년이나 이어졌다는 건 더더욱 알지 못했다.진소현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주용화 역시 예전에 자신이 싸우고 죽이던 이야기는 하지율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로 대충 넘겼을 뿐이었다.그에게 이렇게 끔찍한 과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손형원의 담담한 설명은 오히려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손형원은 새하얗게 질린 하지율의 얼굴과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하지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물었다.“주용화가 언제나 이기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하지율은 잠시 침묵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율은 주용화가 최면으로 잊은 과거가 감정 문제와 관련됐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주용화의 살기가 지나치게 강해 감정을 안정시키기 위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연정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몇 번이나 그대로 잠들 뻔했다.그러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문 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꾸벅꾸벅 졸던 연정미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어서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문 쪽을 바라봤다.밖에서는 손형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보현 오빠, 어제 정미한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현 오빠한테까지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단보현이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 조사해보니 연정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여기였어.”손형서
손형서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주용화 앞으로 내밀고 저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화야 씨, 뭐 마실래요?”주용화는 메뉴판을 받지 않고 말했다.“연정미 씨 말로는 여기 라테가 대표 메뉴라던데요. 라테로 할게요.”손형서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정미가... 왜 그걸 화야 씨한테 말했죠?”이 카페는 연정미가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이었다.주용화가 태연하게 답했다.“지난번 같이 식사했을 때 들었어요.”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그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둘은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눴
결국 하지율이 나서서 말했다.“아버지, 오빠, 지금 중요한 건 범인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는 게 중요해요. 이런 소문이 계속 돌면 회사 이미지도 타격이 큽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회사 협력사 중에는 연정미 씨 때문에 붙은 곳도 많아요. 저런 얘기를 들으면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재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회의실에 또렷하게 퍼졌다.“큰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정미 아가씨 쪽에서 거의 성사됐던 협업이... 또 하나 취소됐습니다.”최근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해외에서 나댈 수는 없으니까요.”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임채아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다른 건 참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공경하지 않는 건... 전 정말 용납이 안 됩니다.”그러면서 지난번 대회장에서 하지율을 마주쳤을 때, 하지율이 현성 대가에게 눈곱만큼도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곧이어 하지율에 대한 남은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레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저런 인물이 무대에서 활개를 치다니, 음악가의 수치와 다름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