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술이 끝난 뒤, 여자는 계산을 하며 말했다.“원장님은 사람을 많이 보셨으니까, 거짓말도 잘 보이겠네요.”이수는 자연스럽게 웃었다.“직업병이죠.”“그럼, 거짓말하는 사람은 어떤 표정이에요?”“보통은 너무 솔직하려고 해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여자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정지였다. 그 찰나를 이수는 놓치지 않았다.여자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또 뵐게요.”문이 닫히고, 종소리가 길게 울렸다.하빈이 다가왔다.“어때.”이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번엔 확실히 이상해.”“어디가.”“질문이 점점 구체적이야. 그리고 내 대답을 기록하는 느낌이 들어.”“녹음?”“아니. 머릿속에.”이수는 거울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는 여자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누굴 겨냥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시험하고 있어.”하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우리도 지켜보자.”“어떻게.”“너는 평소처럼. 나는 주변부터.”이수는 그를 바라봤다.“무리하지 마.”“무리 안 해.”그는 차분하게 덧붙였다.“지금은 우리 쪽이 더 조용해.”이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급하게 움직일수록 상대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었다. 아직은 확실한 패턴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얇은 균열선이 생겼다는 감각만이 분명했다.그날 밤, 이수는 창가에 서서 골목을 오래 바라봤다. 아무도 없었다. 차도, 그림자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자신을 향해 시선이 닿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어제의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통화 기록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하빈이 뒤에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혼자 상상하지 마.”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상상은 안 할게.”그녀는 커튼을 닫으며 속으로 생각했다.‘이번엔 내가 먼저 흔들리지 않을 거야.’보이지 않는 기류가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밤새 이어진 빗소리가 새벽까지 미묘한 긴장을 남겼고, 아침이 되었을 때도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수는 미용실 셔터를 올리면서 어제 만났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질문을 던질 때의 눈빛이 계속 걸렸다.“누가 먼저 끝내야 하는지.”그 말은 단순한 상담 질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수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질문은 ‘이혼을 고민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이미 방향을 정해둔 사람의 질문에 가까웠다.하빈은 안쪽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수의 표정을 한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 없이 컵을 건넸다. 억지로 분위기를 바꾸려 하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오늘 또 올 것 같아?”그가 조용히 물었다.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모르겠어. 근데 다시 올 거야.”“왜 그렇게 생각해.”“정리할 게 있다면서, 머리를 잘랐잖아. 그 정도 말투였으면 한 번으로 안 끝나.”그녀의 말에는 확신이라기보다 감각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눈을 오래 봐온 직업이 만들어낸 직관이었다.오전 예약이 한 차례 밀려들었다. 이수는 손님을 맞으며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머릿속 한쪽에서는 어제의 대화를 계속 복기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졌고, 답을 확인하는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것이 이상했다. 보통 상담을 빌미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감정을 먼저 쏟아낸다. 그런데 어제의 여자는 마치 상대의 반응을 점검하듯 움직였다.점심 무렵, 이수는 잠시 손을 멈추고 하빈에게 말했다.“그 사람, 나를 보러 온 느낌이었어.”하빈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손님이 아니라?”“응. 머리 자르러 온 사람 같진 않았어.”“그럼 뭐 하러.”이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확인.”그녀의 말은 조심스러웠다.“뭘 확인해.”“내가 어떤 사람인지.”하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아직 확정된 위험은 없었지만, 이수가 허
비는 밤새 내렸다.아침이 되었을 때도 공기는 축축했고, 골목 바닥에는 물이 얇게 고여 있었다. 이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미용실 문을 열었다. 비 오는 날은 이상하게 손님이 많았다. 머리를 정리하고 나면 기분도 정리된다고들 말했다.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특유의 샴푸 향과 따뜻한 공기가 맞았다. 이수는 불을 켜고, 기계 전원을 올리고, 커피를 내렸다.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그 리듬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그녀는 문 쪽을 한 번 바라봤다. 아무도 없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골목도 한산했다.‘괜한 생각이었나.’어젯밤의 번호가 머릿속을 스쳤다.평범한 예약 문자. 하지만 그 짧은 교환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있었다.하빈이 조금 늦게 들어왔다. 우산을 접으며 말했다.“비 오니까 공기 좋네.”“응.”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건넸다.“어제 그 예약, 오늘 오지?”“응. 오후 네 시.”하빈은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그저 새로운 손님일 뿐이었다.오전은 분주하게 흘러갔다. 손님이 겹쳤고, 드라이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이수는 가위를 움직이며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손은 안정적이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그런데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다는 걸 느꼈다. 이유를 찾으려 하자 더 어색해졌다. 손님을 보내고 나서야 숨이 조금 내려왔다.“괜찮아?”하빈이 물었다.“응. 그냥 좀 피곤해서.”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피로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선이 닿는 느낌, 누군가가 한 발짝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기분이 스며들었다.오후 세 시 반이 조금 넘었을 무렵, 문 위의 종이 울렸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단정한 코트 차림에, 화장도 과하지 않았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으로 보였다.“예약하신 분 맞죠.”이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
며칠이 그렇게 흘렀다.특별한 사건은 없었고, 태훈 쪽에서도 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미정은 상담을 이어가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었고, 서연과 재호 역시 연락을 끊지 않은 채 관계를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사건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자, 미용실의 공기도 예전보다 느긋해졌다.이수는 오전 예약을 마치고 잠시 거울 앞에 섰다. 가위를 내려놓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거울 속 표정을 오래 보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면 스스로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줄어든 덕분이었다.“왜 그렇게 봐.”하빈이 카운터 쪽에서 물었다.“나 좀 달라졌나 싶어서.”그녀가 대답했다.“응, 달라졌지.”“어디가.”“눈.”이수는 피식 웃었다.“그게 뭐야.”“전에는 늘 계산하고 있었어. 지금은 그냥 보고 있어.”그 말은 가볍게 던진 농담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계산하지 않는다는 건, 즉각적으로 방어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수는 자신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점심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받지 않았다. 벨소리는 곧 멈췄고, 이어서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예약 문의드립니다.]짧은 내용이었다. 이상할 것 없는 문자였다. 이수는 대수롭지 않게 답장을 보냈다. 예약 날짜와 시간을 조율하는 몇 마디의 메시지가 오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문자를 정리하고 나서도 묘하게 손끝이 차가웠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한 발짝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스쳤다.“뭐야.”하빈이 물었다.“예약 하나 잡혔어.”“왜 표정이 그래.”“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방금 전까지의 평온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미용실은 다시 바빠졌다. 이수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며 대
이수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직 멀게 느껴졌지만, 적어도 이 사람과는 도망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창밖에서 멀리 차 소리가 지나갔다. 이수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진짜 무너질 때가 오면.”“응.”“그때도 옆에 있을 거야?”“있을 거야.”짧지만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이수는 그 대답을 의심하지 않았다.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차이가 지금의 그녀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잠이 서서히 내려앉았다.이수는 손을 놓지 않은 채 잠들었고, 하빈은 한참 동안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 숨이 안정되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그날 밤은 조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평범한 밤이었지만, 그 평범함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더 줄여 놓았다.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움직임이 천천히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수는 아직 알지 못했다.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길게 들어왔다.이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 밤새 깊게 잠들었는지, 몸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손을 움직이려다 멈췄다. 옆에 누워 있던 하빈의 팔이 아직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그녀는 한동안 그 체온을 가만히 느꼈다. 도망칠 필요도, 핑계를 만들 필요도 없는 아침이라는 게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깼어?”하빈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응.”“왜 가만히 있어.”“그냥.”이수는 솔직하게 말했다.“이게 진짜인지 확인 중.”하빈이 눈을 떴다. 미소를 짓지도 농담을 던지지도 않았다. 대신 팔에 힘을 조금 더 주며 말했다.“진짜야.”이수는 작게 웃었다. 확인은 이미 끝난 셈이었다.미용실은 오전부터 바빴다. 단골 손님이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요즘 얼굴 좋아졌네.”이수는 가위를 들며 웃었다.“그런가요.”“전엔 좀 날 서 있었어.”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처음이었다.사랑을 재촉하지 않는 사람.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거실은 따뜻했고, 익숙한 냄새가 났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하빈은 물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두었다.잠깐의 정적.“나 무너질 수도 있어.”이수가 말했다.“응.”“그때 너도 힘들 거야.”“응.”“그래도 괜찮아?”하빈은 그녀 앞에 앉았다.“무너질 때 옆에 있는 게 힘든 거면, 떠나는 건 뭐야.”짧은 침묵.“더 힘들지.”이수는 고개를 숙였다.가슴이 천천히 조여왔고, 이번엔 불안이 아니었다.누군가를 잃을까 봐 두려운 감정이 아니라,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그 차이를 그녀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밤이 깊어졌다.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거리는 여전히 조금 남아 있었지만 예전처럼 멀지는 않았다.이수는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말했다.“하빈.”“응.”“도망가면 잡아.”“알았어.”“진짜로.”“알았다니까.”그의 목소리는 웃음 섞여 있었지만 단단했다.이수는 그걸 들으며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괜찮을지도 몰라.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도망칠 준비부터 하지는 않았다.그리고, 그 평온이 조금 더 깊어졌다.밤은 생각보다 빨리 깊어졌다.불을 끈 뒤에도 창밖의 불빛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옅게 밝혔다. 이수는 등을 대고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바로 옆에서 하빈이 뒤척이는 기척이 났지만, 그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있다는 걸, 이수는 느끼고 있었다.“자?”이수가 낮게 물었다.“아직.”“왜.”“네가 안 자잖아.”이수는 작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대화조차 부담스러웠을 텐데, 지금은 그저 숨이 맞는 느낌이었다.“하빈.”“응.”“나 요즘 이상해.”“어떻게.”“불안한데… 동시에 편해.”그녀의 말은 모순처럼 들렸지만, 감정은 분명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안도와, 그걸 잃을까 봐 드는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하
카페의 아침은 생각보다 빨랐다.문을 열기도 전에 커피 향이 먼저 퍼졌고,기계가 예열되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진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셔터를 올렸다.매일 같은 시간, 같은 순서였고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는 동작들이었다.이수는 그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문을 열자 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계는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목소리는 낮았고, 불필요한 온도는 없었다.앞치마를 두르는 동안 그녀는 카페 안
비는 밤새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아침이 되자 길 위엔 물기가 남았고, 공기는 묘하게 가벼웠다.무언가 씻겨 내려간 뒤의 냄새였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어제와 같은 말이었다.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말보다 먼저 인식하는 방식.그건 습관이 아니라 선택에 가까웠다.“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손이 앞치마 끈을 묶는 동안,진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을 따라갔다.손목, 손가락, 매듭.이수는 그 시
남자들은 너무 완벽한 것 앞에서 경계한다.완벽은 함정의 냄새가 난다.대신 ‘조금 과한 듯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했다.그래야 자기 욕망을 자기 탓으로 돌릴 수 있다.이수는 파운데이션을 얇게 올렸다.눈매를 길게 뺐다.립은 선명하지만 젖지 않게. 향수는 거의 쓰지 않았다.향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옷은 고민하지 않았다.고민이 길어지면 마음이 늦어진다.이수는 얇은 니트와 코트를 걸쳤다.너무 화려하지 않은 색.하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거울 앞에서 한 번 더 확인했다.표정은 비워두었다.웃는 얼굴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장미 미용실.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붉었던 글자는 연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