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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 속에 울리는
붉은 달 속에 울리는
Author: r라

1. 늪에 비친

Author: r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9 10:52:11

[그렇게 고집 부리더니 꼴이 그게 뭐냐? 내 말 좀 귀담아듣지… 하여간 고집만 세가지고. 그래서 너 지금 어디에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태준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친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내비치는 감정에 짙은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속엔 분명 내 처지를 향한 조소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찌질한걸까?

“그래. 쓸데없는 고집부리다가 결국 이 꼴이 났네. 지금은 인터넷도 잘 잡히지 않는 시골에 박혀있고.”

[거기서 뭐해먹고 사는데?]

뭐해먹고 살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지.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저 방정맞은 놈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현오 니가 농사를 짓는다고? 밥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라는 둥 사람 속을 긁어댈 것이 뻔했다.

“대충 살아. 밥 그까짓거 뭐….”

[몇 개월 동안 연락도 안되고 그러길래 죽은 줄 알았네. 언제 돌아오려고? 평생 거기서 살거냐?]

“어. 평생 살거야. 나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 이제 전화하지마. 죽으면 알아서 부고 문자 보낼테니까.”

신경질적이게 전화를 끊고 뒷마당 한 켠에 던져버렸다. 나무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휴대폰을 보며 흠칫 놀라 액정을 살펴보았다. 멀쩡한 휴대폰을 보고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찌질한 내 모습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킴 채 휴대폰 전원을 껐다. 

맞다. 난 원래 이 정도로 찌질한 인간이다. 태준이의 아니꼬운 말투는 15년 전 부터 알고 있었다. 

평소의 나, 아니… 불과 반 년 전의 나였다면 태준이의 진심을 알아차리곤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태준이 뿐이라는 걸. 

다만 지금의 나는 중고로 싸게 구매한 휴대폰의 액정이 나갔을까 노심초사 하고, 15년지기 친구의 마음을 비꼬아들을 정도로 머리와 마음이 녹슬어 있었기에 그 순수한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녹슨 이유는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오랫동안 일구었던 사업이 망했다. 그것도 아주 쫄딱. 몇 년간 고생해서 이루었던 것들을 순식간에 모든 것을 다 날렸다. 평생 번 돈은 물론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이 작은 컨테이너집이 전부다. 

“인생이 너무 고독한데.”

낮은 혼잣말을 하자 등 뒤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빳빳한 꼬리가 위로를 건네듯 내 팔을 휘감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에서 밥을 몇 번 챙겨주니 아예 집 안으로 들어와 상주하고 있는 고양이 ‘네로.’ 였다.

이름에 맞게 발을 제외한 모든 털이 새까맣다. 밤에 보면 가끔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 그래. 너가 있으니 덜 고독하다.”

위로에 답해주자 네로는 만족했다는 듯 ‘야옹-.’ 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네로와 동거한지 3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상과 단절한 채 24시간을 살다보니 작은 몸짓과 울음소리가 어떤 걸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산책을 갈테니 문을 열어달라는 뜻이다.

평소라면 문만 살짝 열어두고 냅뒀을텐데…. 그 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도 함께 길을 따라 나섰다. 네로의 산책길은 늘 똑같다. 한 달간 주구장창 쫓아다녀봐서 알고 있다. 딱히 궁금할 것도 없는데 왜 굳이 따라 나간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홀린 듯 네로의 종종거리는 발자취를 따라 밤길을 걸었다.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시골.’ 은 거짓말이 아니다. 갈라진 땅에 가로등도 많지 않은 시골. 인적없는 동네에 벌레와 풀소리만 가득한 이 곳의 밤은 꽤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 네로?”

익숙한 길만 찾아다니던 네로가 낯선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새 네로의 산책길이 바뀐 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네로의 뒤를 따라갔다. 구부정하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낮은 산길을 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지겨워지려는 찰나 작은 늪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달빛을 그대로 받아 표면이 빛을 내고 있는 늪.

그 오묘하지만 확실한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분명 낮에 봤더라면 초라하기 짝이 없을텐데….

이 곳에 산지 6개월이 넘었음에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홀린 듯 멍하니 늪을 바라보다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검은색 털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호박색의 두 눈은 더욱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먀아-.”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청아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나무 사이사이로 울려퍼졌다. 달빛이 환해 늦은 밤시간에도 검은색 고양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네로의 호박색 눈망울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에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다.

지금 네로의 얼굴은 먹이를 사냥하는 얼굴이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콧수염이 앞으로 나온.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이내 꼬리를 살랑거리며 요염한 걸음걸이로 늪으로 향했다.

“야! 네로…!”

나는 분명 늪으로 향하는 네로를 잡으려 했을 뿐이다. 망성임 없이 늪으로 향하는 네로의 발걸음이 늪바닥까지 향할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팔을 쭉 뻗었으나 결국 닿지 않았다.

네로가 늪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딱히 네로에게 정을 준 것도 아닌데, 왜 내 몸은 본능적으로 그 새까만 늪으로 향했을까. 차가운 물이 팔과 다리를 뒤덮었을 때만 해도 위기감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낮은 동네 산의 늪이니까. 여차하면 수영하면 되니까. 수영은 배웠으니까. 게다가 작은 네로를 건져 내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일테니까.

복부까지 축축한 늪 속에 들어갔을 무렵, 늪 지평선에 보이는 아지랑이 같은 붉은 형체를 발견했다. 나의 움직임으로 인해 강하게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그 붉은 형체도 함께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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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1. 명백한 근거

    얼마나 안쓰러운 존재들인지. 죽어서도 편해지지 못하고, 살아서도 놓을 수 없는. 이름 없는 신이 왜 기웃거리는지 이해가 갔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고… 확실한 건 차엘은 그저 ‘복수’ 가 하고 싶을 뿐, 왕좌엔 욕심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내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어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 이야긴 여기서 끝이야. 그래서 원하는 답은 찾았나?” ”예. 충분합니다. 돌려 말할 것 없이 저의 제안을 바로 말씀드리죠. 저는 제느 왕권이 사라지면 라임 장군이 왕좌에 앉았으면 합니다.” 차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저 작은 손바닥에 숨어진 입가엔 분명 미소가 지어져 있으리라. 차엘에게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다. 그녀에게 명예라는 건 허물 좋은 껍데기를 뒤집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하는 것 뿐, 자신의 조카가 왕좌에 앉는다면 복수는 물론이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 놓기에 충분했다.신의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의 쪽에 서다니! 처음 계획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 물거품 속에 반짝이는 진주가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차엘 본인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조상이 굽어살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지?“ 차엘의 질문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는 이유를 정확하게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차마 그녀에게 ‘라임 장군이 예쁘게 웃길 바래서요.’ 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현오의 침묵에 차엘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죠?” 라임 장군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세모낳게 치켜세운 채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와, 우리 오랜만에 보네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내 모습에 약이 바짝 올랐는지, 일부러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오랜만? 그러시겠죠. 당신이 왕궁에 돌아오질 않았으니. 대체 뭐하자는거야? 지금 왕궁이 얼마나 뒤집어 졌는지 알아요? 한 달 넘게 이 곳에 짱박혀 있으면 어쩌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0. 음모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차엘은 내게 붉은 빛을 띄는 차를 내밀었다. 익숙한 향과 맛이었다. 어디서 마셔 봤는지 떠오르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로하 공주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내게 건넸던 차와 비슷했다. 하지만 차엘이 건넨 차는 풍미와 깊이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맛이 좋았다. 예의상 한 입만 마시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차의 열기를 식혀가며 반이나 홀짝이게 맛을 음미했다. “다행히 입에 맞으시는가 보군요. 저희 가문은 대대로 찻잎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죠. 꽤 유명하죠.” “아. 그래서 집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당신이 내게 줄 패는 뭐죠?” 차엘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들을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나는 라임 장군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블러드의 실험실’ 같은 둘 만의 내용은 제외한 채 내가 가진 정보들을 말했다. 가장 중요한 아사베의 정신이 네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과 내가 유일하게 그녀와 정신이 통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는 것. 내가 제느의 시초 여왕 혹은 알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정말 재수없으면 그럴지도 몰라요.”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진심으로 그러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차엘은 어떤 표정변화도 없이 내 말을 묵묵히 들었다. 내뱉을 때 마다 로하 공주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애써 외면했다. 지금 내게 양심은 사치였다. 내 말이 끝나자 차엘은 고개를 주옥거리곤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당신의 그 고양이 속에 아사베 전 여왕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내심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는데. 로하 공주가 단순히 자질이 부족해서 여왕식을 치루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니. 결론은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군요.”잠깐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차엘은 네로는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썬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전 당신들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전 당신들이 필요하고, 힘을 합치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9. 그녀와 대화

    인삿말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본론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투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뱉은 말투에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차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안내하던 보초병들은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사라졌다. 차엘은 내게 집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자며 앞장 섰다. 나는 네로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근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네로가- 아니. 아사베가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마저도 근거없는 합리화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금의 나는 로하 공주도, 라임 장군도 100% 신뢰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인성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의 문제다. 내겐 생존이 걸린 일이니 그녀들이 아무리 내게 잘해준다고 해도 난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되어 세상 비열한 인간이 될지라도.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내가 이 세상에 똥같은 저주를 뿌린 장본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막연하게지만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을거라 희망을 걸었던 로하 공주는 신의 힘도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태에다가 신의 목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 난 다시 다른 곳에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나는 곳은 ‘루’ 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내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집 안으로 들어서자 차엘의 집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큰 집 평수에 채워져 있는 집기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연베이지 톤의 내부와 코 끝에 아른거리는 향긋한 꽃향에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엘은 우아한 몸짓으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 라임 장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걸테죠.”“저… 라임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9. 그녀와 대화

    인삿말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본론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투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뱉은 말투에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차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안내하던 보초병들은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사라졌다. 차엘은 내게 집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자며 앞장 섰다. 나는 네로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근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네로가- 아니. 아사베가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마저도 근거없는 합리화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금의 나는 로하 공주도, 라임 장군도 100% 신뢰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인성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의 문제다. 내겐 생존이 걸린 일이니 그녀들이 아무리 내게 잘해준다고 해도 난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되어 세상 비열한 인간이 될지라도.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내가 이 세상에 똥같은 저주를 뿌린 장본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막연하게지만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을거라 희망을 걸었던 로하 공주는 신의 힘도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태에다가 신의 목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 난 다시 다른 곳에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나는 곳은 ‘루’ 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내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집 안으로 들어서자 차엘의 집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큰 집 평수에 채워져 있는 집기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연베이지 톤의 내부와 코 끝에 아른거리는 향긋한 꽃향에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엘은 우아한 몸짓으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 라임 장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걸테죠.”“저… 라임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8. 차엘

    결국 도착했다.그 어마무시한 마을로 내 두 발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들에게 내가 눈엣가시가 되었다는 것은 라임 장군에게 이미 들었으니. 친절이나 환영 따위는 바라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는 커녕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다. 네로도 저 모양이니 힘을 쓸 수도 없을테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단검이 전부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쪽문을 밀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왕궁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위압감이 나를 압도했다. 왕궁은 온 건물들이 전부 하얗고, 화려하고, 반짝였다. 그러나 문 밖에 나선 마을 ‘루’는 전부 어두칙칙하고 검했다. 게다가 저 멀리 간간히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들도 검은색 망토를 휘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라임 장군이 말해준대로 확실히 이 곳에선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다녀야 하는 듯 했다. 나도 안전하게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움직이고 싶었는데…. 그런걸 누군가에게 부탁하다간 로하 공주나 라임 장군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오긴 했지만. 역시 너무 눈에 튀려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문을 건너 발을 디뎠다. 천천히 쪽문을 닫고 마을을 둘러보았다.음침한 분위기 때문인지, 하늘도 왕궁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해와 달, 지구가 같이 떠 있는 하늘은 분명 같았으나 왕궁에서 봐오던 포근한 햇살이 아니었다. 어두운 햇살이었다. 햇빛이 내리 쬐고는 있으나 안개가 잔뜩 낀 그런 느낌이었다. 같은 세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천국과 지옥 같을까. 확연한 이질감에 당황해하던 중, 네로가 내 발목을 쓱하고 할퀴었다. 갑자기 들어온 통증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그 찰나의 시간에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검은 망토를 둘러싼 창을 든 병사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물론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창날의 끝은 나를 향했다. 뭐, 이제 이런 대우는 익숙하다. “너는-.” “하하. 수고가 많으십니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7. 마을 ‘루’ 를 향해

    “전 이해가 안가는데요. 당신도, 당신의 어머니도…”“어떤 면이?” “당신들, 정말로 저주를 풀고 싶은겁니까? 당신의 권력이 흔들릴 수 있는데?” 나라면 절대 놓치 않을 것이다. 숭배에 가까운. 아니, 그것보다 더 단단한… 쉽게 받을 수 없는 그 권력을. “왕권은 지켜질겁니다. 어머니는 제느 가문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형태로 정치를 하셨지만, 전 다르거든요. 제가 지켜낼겁니다. 저주를 없애는 이유는 더욱 견고한 왕권을 만들기 위해서에요. 이런 위태로운 환경에서 군림하는 왕은 언제 깨질지 모를 왕관을 쓰고 있을 뿐이죠.”그렇게 말하는 로하 공주의 모습엔 강렬하게 일렁이는 독기가 느껴졌다. 아사베는 자신의 딸에게 ‘건방지다.’ 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건 과소평가다. 순간 내 눈엔 그녀의 모습이 커다랗고 화려한 왕관을 쓰고 날카로운 검을 손에 쥐고 있는 공주가 아닌 ‘여왕’ 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다. 과연 그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 몇 시간 후 네로는 깨어났지만 아사베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쫓아다니며 상태를 열심히 살펴봤지만 그저 평범한 고양이에 불과했다. 되레 평소보다 지능이 더 낮아진 것 같았다. 하지도 않던 우다다를 한다던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창가에 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낮잠을 즐기기도 했으며 내가 착 달라붙자 짜증이 났는지 날카로운 발톱으로 콧잔등을 할퀴기도 했다. 네로가 나를 할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락없는 고양이의 모습에 혹시라도 아사베의 정신이 소멸한 것 아니냐며 걱정하자 로하 공주는 아사베의 정신이 소멸했다면 자신에게 자연스레 힘이 넘어올테고 기운이 느껴질 것이라 말했다. 아직까지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아사베의 정신은 분명 남아있을 것이라고. 아마 신의 방해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일거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로하 공주의 모습에도 초조함은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진심으로 저주를 풀기 바라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상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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