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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집 부리더니 꼴이 그게 뭐냐? 내 말 좀 귀담아듣지… 하여간 고집만 세가지고. 그래서 너 지금 어디에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태준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친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내비치는 감정에 짙은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속엔 분명 내 처지를 향한 조소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찌질한걸까?
“그래. 쓸데없는 고집부리다가 결국 이 꼴이 났네. 지금은 인터넷도 잘 잡히지 않는 시골에 박혀있고.”
[거기서 뭐해먹고 사는데?]
뭐해먹고 살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지.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저 방정맞은 놈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현오 니가 농사를 짓는다고? 밥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라는 둥 사람 속을 긁어댈 것이 뻔했다.
“대충 살아. 밥 그까짓거 뭐….”
[몇 개월 동안 연락도 안되고 그러길래 죽은 줄 알았네. 언제 돌아오려고? 평생 거기서 살거냐?]
“어. 평생 살거야. 나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 이제 전화하지마. 죽으면 알아서 부고 문자 보낼테니까.”
신경질적이게 전화를 끊고 뒷마당 한 켠에 던져버렸다. 나무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휴대폰을 보며 흠칫 놀라 액정을 살펴보았다. 멀쩡한 휴대폰을 보고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찌질한 내 모습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킴 채 휴대폰 전원을 껐다.
맞다. 난 원래 이 정도로 찌질한 인간이다. 태준이의 아니꼬운 말투는 15년 전 부터 알고 있었다.
평소의 나, 아니… 불과 반 년 전의 나였다면 태준이의 진심을 알아차리곤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태준이 뿐이라는 걸.
다만 지금의 나는 중고로 싸게 구매한 휴대폰의 액정이 나갔을까 노심초사 하고, 15년지기 친구의 마음을 비꼬아들을 정도로 머리와 마음이 녹슬어 있었기에 그 순수한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녹슨 이유는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오랫동안 일구었던 사업이 망했다. 그것도 아주 쫄딱. 몇 년간 고생해서 이루었던 것들을 순식간에 모든 것을 다 날렸다. 평생 번 돈은 물론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이 작은 컨테이너집이 전부다.
“인생이 너무 고독한데.”
낮은 혼잣말을 하자 등 뒤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빳빳한 꼬리가 위로를 건네듯 내 팔을 휘감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에서 밥을 몇 번 챙겨주니 아예 집 안으로 들어와 상주하고 있는 고양이 ‘네로.’ 였다.
이름에 맞게 발을 제외한 모든 털이 새까맣다. 밤에 보면 가끔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 그래. 너가 있으니 덜 고독하다.”
위로에 답해주자 네로는 만족했다는 듯 ‘야옹-.’ 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네로와 동거한지 3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상과 단절한 채 24시간을 살다보니 작은 몸짓과 울음소리가 어떤 걸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산책을 갈테니 문을 열어달라는 뜻이다.
평소라면 문만 살짝 열어두고 냅뒀을텐데…. 그 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도 함께 길을 따라 나섰다. 네로의 산책길은 늘 똑같다. 한 달간 주구장창 쫓아다녀봐서 알고 있다. 딱히 궁금할 것도 없는데 왜 굳이 따라 나간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홀린 듯 네로의 종종거리는 발자취를 따라 밤길을 걸었다.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시골.’ 은 거짓말이 아니다. 갈라진 땅에 가로등도 많지 않은 시골. 인적없는 동네에 벌레와 풀소리만 가득한 이 곳의 밤은 꽤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 네로?”
익숙한 길만 찾아다니던 네로가 낯선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새 네로의 산책길이 바뀐 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네로의 뒤를 따라갔다. 구부정하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낮은 산길을 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지겨워지려는 찰나 작은 늪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달빛을 그대로 받아 표면이 빛을 내고 있는 늪.
그 오묘하지만 확실한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분명 낮에 봤더라면 초라하기 짝이 없을텐데….
이 곳에 산지 6개월이 넘었음에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홀린 듯 멍하니 늪을 바라보다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검은색 털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호박색의 두 눈은 더욱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먀아-.”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청아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나무 사이사이로 울려퍼졌다. 달빛이 환해 늦은 밤시간에도 검은색 고양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네로의 호박색 눈망울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에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다.
지금 네로의 얼굴은 먹이를 사냥하는 얼굴이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콧수염이 앞으로 나온.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이내 꼬리를 살랑거리며 요염한 걸음걸이로 늪으로 향했다.
“야! 네로…!”
나는 분명 늪으로 향하는 네로를 잡으려 했을 뿐이다. 망성임 없이 늪으로 향하는 네로의 발걸음이 늪바닥까지 향할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팔을 쭉 뻗었으나 결국 닿지 않았다.
네로가 늪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딱히 네로에게 정을 준 것도 아닌데, 왜 내 몸은 본능적으로 그 새까만 늪으로 향했을까. 차가운 물이 팔과 다리를 뒤덮었을 때만 해도 위기감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낮은 동네 산의 늪이니까. 여차하면 수영하면 되니까. 수영은 배웠으니까. 게다가 작은 네로를 건져 내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일테니까.
복부까지 축축한 늪 속에 들어갔을 무렵, 늪 지평선에 보이는 아지랑이 같은 붉은 형체를 발견했다. 나의 움직임으로 인해 강하게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그 붉은 형체도 함께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게?”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두려 했던 사랑이 발악하듯 그녀의 실루엣만으로도 가슴이 미친듯 뛰는 것을 느낀 알트는 본인들의 사랑이 위대하다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알트의 가슴 한 켠에는 허전함과 동시에 답답함을 느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사랑하던 여자가 옆에 있고, 부모가 원하던 권력도 이루어냈다. 자신을 한심하게 보던 사람들 또한 사라졌다. 있을 것 다 있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살고 있음에도 왜 이런 사치스러운 감정이 드는가. 사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블러드가 나타났고, 타이밍 좋게 아르나가 나타나 괴물들을 몰살시켰다. ‘검은 마녀’ 라는 질타로 산 속에 숨어살던 여자가.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변한 채로 나타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힘을 쓰면서. 신의 자손이라 스스로를 칭하면서. 참 완벽한 타이밍이 아닌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 모를 괴물과 아르나….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사랑하던 그녀는 이젠 없다. 5년 전 그들의 숲 속에서 사라졌다. 알트는 그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진한 향수에 시달리다 결국 베느를 찾아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제느 아르나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지금의 아르나가 아니다. 홀로 외로이 산을 지키고 있던, 고독함이 가녀린 몸을 지배하고 있던, 언제 사라질 지 모를 위태로움을 가진 채 자신만을 기다리던 순수한 아르나. 그 시절의 그녀가 그리웠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제느 왕권이 무너트려야 했다. * 여왕의 남편 비센 알프 또한 반제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자 소극적이던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르나가 알트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지는 왕궁 문턱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과장한다면 키우는 짐승들조차 알 정도. 그런 알트가 아르나를 끌어내리려 한다니. 이것은 퍽 쇼킹한 이슈
그 순간, 메아리는 생각을 멈추었다. 생각을 멈추자 아르나가 빠진 호수는 붉은 빛으로 물들고 화려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고요하던 산 속엔 거센 태풍이 휘몰아쳤으며 그 바람 사이로 ’가이’ 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에게 흘러들어왔다.“나를 통제하지 말라. 가이. 이 곳은 나의 영역이며 너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메아리는 분노했다. 도르비를 통해 사랑이란 감정을 배우고, 아르나를 통해 부성애한 걸 알게 된 탓에 다른 감정들 또한 자연스럽게 배워버린 것이다. 피처럼 새빨간 빛으로 물든 호수는 성난 황소처럼 파도를 치기 시작했고, 아르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는 알트의 눈동자처럼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이 곳은 먼 훗날, ‘저주의 호수.’ 라고 불리게 된다. 평화롭기만 하던 세상에 재앙이 들이닥쳤다.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인간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도 없었기에 군대도 없었기에 슬라브 왕권은 괴물의 횡포에 대응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계급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날아다니는 괴물의 손짓 하나 날개짓 하나로 세상이 새빨간 피로 물들었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아니, 그 단어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 구세주처럼 누군가 나타났다. 짙은 초록빛을 담은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 그 여자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하늘에서 번개가 비처럼 쏟아졌고, 그녀가 내린 번개들은 정확하게 괴물들의 몸을 관통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신이다. 우리를 살려주는 신.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힘을 쓰는 아름다운 존재. 자신들을 지켜주는 건 무능한 슬라브가 아닌 저 여자다. 괴물이 출몰하자 제일 먼저 도망을 친 슬라브 왕권은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파멸했고, 여자는 자연스레 왕권을 쥐었다. 여자는 자신을 신의 자손이라 말하며 본인의 이름을 ‘제느 아르나’ 라고 말했다. 아
메아리 아르나. 그녀는 세상에서 도태된 빈민가에 천민으로 태어났다. 메아리 라는 성을 가진 신이 사랑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도르비’ 라는 여성의 딸로 태어난 아르나는 제 엄마를 쏙 빼닮아 숨이 막힐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하지만 매우 불운하게도 머리색과 눈동자색은 아버지를 닮아 칠흙같은 검은색으로 태어났고,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아르나에게 엄청난 비극이였다. 태어난 것 부터가 비극이었다. 도르비는 제 딸에게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검은색은 없다. 모든 인간들이 눈처럼 순박한 하얀색을 가지고 있었고, 하얀 인간들은 본인들과 다른 아르나를 기피하며 경멸했고, ‘검은 마녀’ 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했다.메아리는 모녀를 지키지 못했다. 원래 신이란 존재는 인간 세상에 개입할 수 없었다. 보호해주는 남자 없이 여자 둘이서 살아남기엔 힘든 세상이었다. 도르비는 검은 마녀를 낳았다는 이유로 돌팔매질을 맞다 죽었다. 가뜩이나 천민으로 태어나 성도 가질 수 없었던 도르비의 죽음은 짐승의 죽음과 무게가 같았다. 그 시절, 성 없이 태어났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아르나는 메아리라는 성을 붙여 ‘메아리 아르나’ 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이름을 아는 것은 도르비와 아르나, 메아리 뿐이었다.아르나는 사람들의 돌팔매질을 피해 인적 없는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얼어죽는다거나 굶어죽을 일은 없었다. 메아리는 인간들의 세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순 없었지만, 제 딸의 생명 정도는 보존시킬 수 있었다. 체온이 떨어질 때 주변에 불을 지펴주고, 먹을만한 것들을 눈 앞에 놓고 가면 될 뿐이었으니. 아르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느낄 순 있었다. 늘 죽을 뻔 한 상황에 ‘죽지 않을 만큼.’ 의 행운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아버지가 괴물이 아닌 신이라던 어머니의 말을 그제서야 믿을 수 있었다. 괴물이라면 이런 호의는 베풀지 않을
그녀가 말한 향수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4년 전 처음 데이트 때 선물했던 꽃향기가 나는 향수. 그 시절 난 그녀에게 뭐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거래처들의 미납으로 현금 융통이 안되서 고난을 겪고 있었기에 비싼 브랜드가 아닌 쉽게 살 수 있는 30ml의 작고 저렴한 향수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가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는 걸. 그저 내가 준 향기가 마음에 들어서 몇 년 간 같은 걸 뿌리는 줄 알았다. 그런 자잘한 것들을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돈을 잘 벌게 되고 나선 카드를 쥐어줬으니 필요하면 알아서 사리라고 생각했다. 간간이 데이트 할 때나 날아오는 거래승인문자에 ‘내가 참 좋은 여자를 만났구나. 이 여자와는 미래를 그릴 수 있겠다.’ 라는 속 편한 생각을 했던 과거의 나를 패대기치고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왜 지금껏 말하지 않고 혼자 이별을 준비한 그녀가 미웠다. 답은 알고있었다. 내가 신뢰를 주지 않았다는 것. 적어도 내가 하는 최선이 그녀에겐 차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 그간의 내 최선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을 땐 이미 모든 걸 잃은 후 였다. 원래 신은 사람이 낭떠러지로 떨어졌을 때, 더욱 더 잔혹하게 짖밟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손가락 하나하나, 꿈틀거리지도 못하도록. 그래. 그래서 신이겠지. 신이니까 이토록 잔인할 수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도의를 알고 있는 존재라면 내게 이럴 수는 없을테니까. 그녀는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날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갔다. 헤어진 그 날도, 몇 번이고 반
내 침묵에 그녀 또한 입을 다물었다. 길고 무거운 이 침묵이 불편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느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 이지 않나요? 그러다 신에게 미움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제 자리에 멈춰서 정신나간 여자처럼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목소리가 과하게 울리는 통로 안에 그녀의 웃음소리는 기괴하게 들려왔고, 조금 소름이 끼쳤다. “이미 미움을 한껏 받고 있는데, 더 받을 게 있을까요?” “네?” “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오로지 제느만을 사랑하고 있죠. 우리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진작에 블러드를 없애주셨어야 했고, 꼬인 실타래를 풀었어야 했어요. 이 세상이 꼬이기 시작한 건 전부 제느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죠. 신은 방관하고 추잡한 제느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고.” 추잡한, 자신의 왕을 표현하기엔 굉장히 공격적인 단어다. 이 정도면 단순히 싫어하는 걸 넘어서 원망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저 확신한다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공주를 정말 싫어하나 보네요.” “네. 처음 보는 당신에게 이런 걸 말할 정로도요. 왕궁 내에 그걸 모르는 사람도 없을걸요.” 최대한 담담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려는 그 목소리에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불현듯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얼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왜인지 지금 라임 장군의 감정에 저 말이 어울렸다. 무엇을 근거로 공주 때문에 꼬였다고 확신하냐 물으려는 찰나, 눈 앞에 막힌 통로가 나왔다. 라임 장군은 익숙하게 발 밑에 있는 벽돌 하나를 잡아 지긋이 눌렀고, 또 한 번 ‘달칵’ 소리를 내며 단단한 벽문이 열렸다. 바깥으로 나서자 지금까지 본 풍경과 상반되는 흑색 빛의 잔디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정확히 열 걸음. 앞으로 걸어가봐요.” 나는 그녀가 지시한대로 속으로 숫자를 세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6, 7… 8… 9… 10. 숫자 10을 맞춰 바닥을 딛자 방금 전 디디던 땅과는 조금
당연히 봤지. 공주와 강렬하게 눈싸움을 하던 인물인데. 게다가 이쁘고.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단호하지만 상냥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성문으로 나가면 보초들 쫙 깔려 있어요. 실력자들로 배치해서 당신 힘으론 절대 뚫고 갈 수 없을거에요. 제가 알려주는 곳으로 가요.” “하핫. 무슨 말씀이신지… 전 방 안에 화장실을 못보고 나가서 찾으려 했던건데.”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전 당신편이니까.” “내 편이라고?” “응. 당신 편 맞아요. 도와주려는거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을텐데, 내 말을 들어서 나쁠것도 없지 않아요? 설마 제느 공주를 믿는 건 아니죠?“ 아아. 알겠다. 저 여자 제느를 멕이고 싶어서 나를 이용하는거구나. 아까 봤을 때 사이가 안좋아보였지.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공주를 엿먹이고 싶다 이거군. 의도야 어찌되었던 저 여자의 말이 진실이면 내가 손해볼 일은 없을 것이다. 진실이라면. “오해입니다. 전 도망가려 한 것이 아닙니다.” “에이, 거짓말.” 아예 거짓말은 아니지. 지금은 도망가려고 했다기보단 답사를 하려고 했달까. 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라임 장군은 못마땅하디는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새침하게 말했다. “못믿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네요. 어떻게 신뢰를 줘야 한담?“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냐. 그나저나 이 여자, 보면 볼수록 내 이상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을 약속했던 전 여자친구와 똑 닮았다. 전형적인 아기 복숭아상의 얼굴에 상반되는 중성 목소리와 침착한 말투가 정말 매력적이다. 게다가사슴같은 눈을 새침하게 치켜 뜨는 걸 보고 있자니 상황에 맞지 않게 얼굴에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발정난 짐승도 아니고… 외계인에 가까운 존재한테 얼굴을 붉히다니. 미친 게 아닐까? 게다가 저 여자는 재수없는 첸장군을 좋아하고 있다. 짐작하건데, 공주를 싫어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따라와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