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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붉은 달

Penulis: r라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29 10:58:17

스트레스로 인해 없던 색맹이 생긴 줄 알았다. 원래라면 하얀색감을 가진 동그란 형태여야 했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달은 아주 뚜렷하게 붉은 색을 띄고 있었고, 늪 수면 위에 비친 모습 또한 붉은색이였다. 

검은 늪 위에 비친 붉은 달의 모습. 

분명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발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것 처럼.  늪이 턱까지 차오르고, 검은 물이 온 몸을 잠식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늪 안이… 원래 이런가?

많이 이상하다. 분명 수심이 낮을거라 생각했다. 내 몸을 다 잠식하고 눈을 떴을 때, 달빛에 환하게 비춰진 물 속 안이 눈에 들어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한 물 속은 광활한 바다 속을 연상케했다. 끝없어보이는 심해와 바깥에서 봤을 때완 비교도 안될 정도로 넓은…

아까 내가 본 늪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때 네로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 앞을 지나쳤다. 그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고양이가 물 속 안에서 수영을 한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네로의 몸에서 섬광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며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뭔데, 이거…. 고양이 몸에서 섬광이 흘러나올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지금 늪에 빠져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설마 벌써 죽은 거 아니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더 깨달았다. 내가 바깥에 있는 것처럼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물 속에서. 그럼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되려 고급 호텔 침대에 누워있는 것처럼 편안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머리 속은 빨리 네로를 잡아 이 곳을 나가야 한다 명령하고 있는데 내 몸은 명령을 거부했다. 대자로 뻗어진 팔 다리는 이미 물흐름에 따라 가고 있었고 나는 잠에 들 듯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은 나를 마비시켰고, 나는 그렇게 끝없는 심해로 깊이, 더욱 더 깊이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불길한 것을 살려둔다니요! 명령을 거두어주십시오. 제느 로하 공주님!”

“맞습니다. 지금처럼 저주의 흐름이 좋지 않을 때 저런 변수는 무조건 제거해야 합니다.”

귓가에 울리는 대화소리 덕분에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환한 빛이 곧바로 눈에 쏟아졌다. 빛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그 사이 사람들의 말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당장 저 검은머리의 목을 치라고 해주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검은 머리’ 라는 인칭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눈에 빛이 익숙해지자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의로우면서도 기괴했다.

마치 19세기 말을 재현한 것 같은 사람들의 복장과 그들 손에 들려 있는 길고 날카로운 창칼,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올법한 실내 건출물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무엇보다 더 충격적인 건 그들의 외모였다. 모두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상의에 하얀바지, 하얀 신발.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그것보다 더 새하얀 머리카락. 하얀 배경에 파란 물감을 콕 찍어 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대조되는 파란색 눈동자. 그 푸르디 푸른빛이 너무 강렬해 멀리서 보아도 또렷하게 보여졌다.

천사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창과 검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 누가봐도 사람이었다. 그래, 차라리 사람처럼 안생겼다면 저런 희귀한 행색들이 납득이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내린 답은 ‘코스프레를 하는 미친 인간들.’ 이였다.

더 나아가 이상한 코스프레를 하며 상황극을 하고 있는 사이비집단일거란 결론이 내려졌다. 사이비집단 사람들이 이상한 시대 컨셉에 거하게 취해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사이비집단일지도 모른다.

이런 희한한 사이비는 듣도 보도 못했지만… 세상엔 미친사람들 천지니까.

“조용.”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실내 안을 울렸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무거운 침묵에 잠식되었다. 마치 숨소리도 허락하지 않는 듯한 고요함이 커다란 실내 안을 잠식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한층 높이의 계단 위에 금발의 머리를 가진 여성이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고, 맑고 하얀 얼굴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던 그녀는 외형부터 다른이들과 달랐다.

하얀 머리카락이 아닌 형광빛에 가까운 샛노란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가 아닌 나뭇잎 같은 초록색빛을 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대조되는 그 색감과 그녀의 남다른 외모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저 여자가 이 미친 집단의 교주일 확률이 컸다. 하지만 교주를 하기엔 어려보이는 외관이었다.

”부디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

가장 가까이 서있던 중년 남성이 앞장서서 소리쳤다. 워낙 선명하고 커다란 이목구비 때문일까. 먼 거리에서도 그 여자의 일그러진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그대들이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나 제 명령에 번복은 없습니다.” “제느 로하 공주님!”

제느… 로하 공주… 라니. 

두 입술을 이빨로 깨물며 간신히 웃음이 나올뻔 한 걸 막아냈다.

네이밍 센스가 너무 구리지 않은가?

머리 속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이런 웅장한 무대를 만들고 온갖 의상과 소품, 콘택트렌즈까지 낄 정도의 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컨셉 치고는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수많은 물음표가 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제 고양이는 없었나요? 검은색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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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1. 명백한 근거

    얼마나 안쓰러운 존재들인지. 죽어서도 편해지지 못하고, 살아서도 놓을 수 없는. 이름 없는 신이 왜 기웃거리는지 이해가 갔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고… 확실한 건 차엘은 그저 ‘복수’ 가 하고 싶을 뿐, 왕좌엔 욕심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내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어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 이야긴 여기서 끝이야. 그래서 원하는 답은 찾았나?” ”예. 충분합니다. 돌려 말할 것 없이 저의 제안을 바로 말씀드리죠. 저는 제느 왕권이 사라지면 라임 장군이 왕좌에 앉았으면 합니다.” 차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저 작은 손바닥에 숨어진 입가엔 분명 미소가 지어져 있으리라. 차엘에게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다. 그녀에게 명예라는 건 허물 좋은 껍데기를 뒤집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하는 것 뿐, 자신의 조카가 왕좌에 앉는다면 복수는 물론이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 놓기에 충분했다.신의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의 쪽에 서다니! 처음 계획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 물거품 속에 반짝이는 진주가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차엘 본인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조상이 굽어살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지?“ 차엘의 질문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는 이유를 정확하게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차마 그녀에게 ‘라임 장군이 예쁘게 웃길 바래서요.’ 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현오의 침묵에 차엘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죠?” 라임 장군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세모낳게 치켜세운 채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와, 우리 오랜만에 보네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내 모습에 약이 바짝 올랐는지, 일부러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오랜만? 그러시겠죠. 당신이 왕궁에 돌아오질 않았으니. 대체 뭐하자는거야? 지금 왕궁이 얼마나 뒤집어 졌는지 알아요? 한 달 넘게 이 곳에 짱박혀 있으면 어쩌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0. 음모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차엘은 내게 붉은 빛을 띄는 차를 내밀었다. 익숙한 향과 맛이었다. 어디서 마셔 봤는지 떠오르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로하 공주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내게 건넸던 차와 비슷했다. 하지만 차엘이 건넨 차는 풍미와 깊이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맛이 좋았다. 예의상 한 입만 마시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차의 열기를 식혀가며 반이나 홀짝이게 맛을 음미했다. “다행히 입에 맞으시는가 보군요. 저희 가문은 대대로 찻잎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죠. 꽤 유명하죠.” “아. 그래서 집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당신이 내게 줄 패는 뭐죠?” 차엘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들을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나는 라임 장군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블러드의 실험실’ 같은 둘 만의 내용은 제외한 채 내가 가진 정보들을 말했다. 가장 중요한 아사베의 정신이 네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과 내가 유일하게 그녀와 정신이 통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는 것. 내가 제느의 시초 여왕 혹은 알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정말 재수없으면 그럴지도 몰라요.”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진심으로 그러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차엘은 어떤 표정변화도 없이 내 말을 묵묵히 들었다. 내뱉을 때 마다 로하 공주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애써 외면했다. 지금 내게 양심은 사치였다. 내 말이 끝나자 차엘은 고개를 주옥거리곤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당신의 그 고양이 속에 아사베 전 여왕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내심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는데. 로하 공주가 단순히 자질이 부족해서 여왕식을 치루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니. 결론은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군요.”잠깐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차엘은 네로는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썬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전 당신들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전 당신들이 필요하고, 힘을 합치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9. 그녀와 대화

    인삿말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본론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투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뱉은 말투에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차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안내하던 보초병들은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사라졌다. 차엘은 내게 집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자며 앞장 섰다. 나는 네로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근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네로가- 아니. 아사베가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마저도 근거없는 합리화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금의 나는 로하 공주도, 라임 장군도 100% 신뢰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인성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의 문제다. 내겐 생존이 걸린 일이니 그녀들이 아무리 내게 잘해준다고 해도 난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되어 세상 비열한 인간이 될지라도.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내가 이 세상에 똥같은 저주를 뿌린 장본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막연하게지만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을거라 희망을 걸었던 로하 공주는 신의 힘도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태에다가 신의 목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 난 다시 다른 곳에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나는 곳은 ‘루’ 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내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집 안으로 들어서자 차엘의 집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큰 집 평수에 채워져 있는 집기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연베이지 톤의 내부와 코 끝에 아른거리는 향긋한 꽃향에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엘은 우아한 몸짓으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 라임 장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걸테죠.”“저… 라임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9. 그녀와 대화

    인삿말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본론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투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뱉은 말투에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차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안내하던 보초병들은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사라졌다. 차엘은 내게 집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자며 앞장 섰다. 나는 네로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근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네로가- 아니. 아사베가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마저도 근거없는 합리화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금의 나는 로하 공주도, 라임 장군도 100% 신뢰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인성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의 문제다. 내겐 생존이 걸린 일이니 그녀들이 아무리 내게 잘해준다고 해도 난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되어 세상 비열한 인간이 될지라도.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내가 이 세상에 똥같은 저주를 뿌린 장본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막연하게지만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을거라 희망을 걸었던 로하 공주는 신의 힘도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태에다가 신의 목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 난 다시 다른 곳에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나는 곳은 ‘루’ 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내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집 안으로 들어서자 차엘의 집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큰 집 평수에 채워져 있는 집기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연베이지 톤의 내부와 코 끝에 아른거리는 향긋한 꽃향에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엘은 우아한 몸짓으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 라임 장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걸테죠.”“저… 라임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8. 차엘

    결국 도착했다.그 어마무시한 마을로 내 두 발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들에게 내가 눈엣가시가 되었다는 것은 라임 장군에게 이미 들었으니. 친절이나 환영 따위는 바라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는 커녕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다. 네로도 저 모양이니 힘을 쓸 수도 없을테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단검이 전부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쪽문을 밀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왕궁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위압감이 나를 압도했다. 왕궁은 온 건물들이 전부 하얗고, 화려하고, 반짝였다. 그러나 문 밖에 나선 마을 ‘루’는 전부 어두칙칙하고 검했다. 게다가 저 멀리 간간히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들도 검은색 망토를 휘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라임 장군이 말해준대로 확실히 이 곳에선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다녀야 하는 듯 했다. 나도 안전하게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움직이고 싶었는데…. 그런걸 누군가에게 부탁하다간 로하 공주나 라임 장군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오긴 했지만. 역시 너무 눈에 튀려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문을 건너 발을 디뎠다. 천천히 쪽문을 닫고 마을을 둘러보았다.음침한 분위기 때문인지, 하늘도 왕궁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해와 달, 지구가 같이 떠 있는 하늘은 분명 같았으나 왕궁에서 봐오던 포근한 햇살이 아니었다. 어두운 햇살이었다. 햇빛이 내리 쬐고는 있으나 안개가 잔뜩 낀 그런 느낌이었다. 같은 세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천국과 지옥 같을까. 확연한 이질감에 당황해하던 중, 네로가 내 발목을 쓱하고 할퀴었다. 갑자기 들어온 통증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그 찰나의 시간에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검은 망토를 둘러싼 창을 든 병사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물론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창날의 끝은 나를 향했다. 뭐, 이제 이런 대우는 익숙하다. “너는-.” “하하. 수고가 많으십니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27. 마을 ‘루’ 를 향해

    “전 이해가 안가는데요. 당신도, 당신의 어머니도…”“어떤 면이?” “당신들, 정말로 저주를 풀고 싶은겁니까? 당신의 권력이 흔들릴 수 있는데?” 나라면 절대 놓치 않을 것이다. 숭배에 가까운. 아니, 그것보다 더 단단한… 쉽게 받을 수 없는 그 권력을. “왕권은 지켜질겁니다. 어머니는 제느 가문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형태로 정치를 하셨지만, 전 다르거든요. 제가 지켜낼겁니다. 저주를 없애는 이유는 더욱 견고한 왕권을 만들기 위해서에요. 이런 위태로운 환경에서 군림하는 왕은 언제 깨질지 모를 왕관을 쓰고 있을 뿐이죠.”그렇게 말하는 로하 공주의 모습엔 강렬하게 일렁이는 독기가 느껴졌다. 아사베는 자신의 딸에게 ‘건방지다.’ 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건 과소평가다. 순간 내 눈엔 그녀의 모습이 커다랗고 화려한 왕관을 쓰고 날카로운 검을 손에 쥐고 있는 공주가 아닌 ‘여왕’ 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다. 과연 그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 몇 시간 후 네로는 깨어났지만 아사베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쫓아다니며 상태를 열심히 살펴봤지만 그저 평범한 고양이에 불과했다. 되레 평소보다 지능이 더 낮아진 것 같았다. 하지도 않던 우다다를 한다던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창가에 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낮잠을 즐기기도 했으며 내가 착 달라붙자 짜증이 났는지 날카로운 발톱으로 콧잔등을 할퀴기도 했다. 네로가 나를 할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락없는 고양이의 모습에 혹시라도 아사베의 정신이 소멸한 것 아니냐며 걱정하자 로하 공주는 아사베의 정신이 소멸했다면 자신에게 자연스레 힘이 넘어올테고 기운이 느껴질 것이라 말했다. 아직까지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아사베의 정신은 분명 남아있을 것이라고. 아마 신의 방해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일거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로하 공주의 모습에도 초조함은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진심으로 저주를 풀기 바라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상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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