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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느에게 영광을

작가: r라
last update 게시일: 2026-06-29 12:23:08

정말 끔찍한 소리다. 머리 속에 뉴스에서나 보던 쇼킹한 내용들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이런식으로 나를 옭아메어 감금하려는 건 아닐까?

더 끔찍한 것은 여자가 사람들을 향해 이상한 손짓으로 무언가를 지휘하자 일제히 내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느에게 영광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그 문구가 노래처럼 들려왔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멘탈이 깨지기 직전, 로하 공주는 내 팔과 다리 쪽을 향해 무언가를 읊조리며 손짓했다.

나를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던 포박의 압력이 순식간에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 봤던 나무줄기도 그렇고, 손도 대지 않고 포박이 풀린 것도 그렇고… 마법처럼 보이는 장치들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아 꽤나 정성스러운 사이비 집단임이 분명했다.

“우선 제 핸드폰과 고양이를 좀 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휴대폰이 좀 그러면 고양이만이라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내가 아무리 잃을 것 없는 밑바닥 인생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이런 사이비 집단들 사이에서 세뇌나 당하고 살 수는 없었다. 지금은 최대한 이들의 심기를 맞추고 타이밍을 봐서 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휴대폰이라는 건 뭔지 모르겠고. 당신의 고양이는 제 방 침실에서 잘 자고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됩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제 개인 하인들도 여럿 붙였으니 어떠한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겁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네로가 나보다 더 팔자가 좋군. 나는 한 끼도 못먹고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로 누워있었는데.

“모두 들으세요. 여기 있는 이현오는 ‘검은 재앙의 잔여물.’이 아닙니다. 함부로 대하는 행동을 자제하고, 예우를 갖추세요. 이현오를 만난 오늘 우리는 천 년 째 이어오던 검은 재앙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된 날입니다.”

그 때,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란한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 불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발소리의 주인은 짧은 숏컷 머리를 한 보이쉬한 여성이었다. 여성은 어디서 전쟁이라도 하고 온 행색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색에 붉은색 물감을 휘날려 묻힌 것 처럼 핏자국같은 것들이 얼룩덜룩 묻어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또렷하게 보이는 얼굴에도 붉은색이 사정없이 묻어있었다.

“제느 로하를 뵙습니다.”

공손한 말과는 달리 얼굴은 표독스러웠다. 하지만 아담한 체구에 가느다란 선들과 선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유일하게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무섭다기보단… 저 여자 살짝 내 스타일인데.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싶어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런 속단을 할 법한 귀엽고 연약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사슴같은 눈망울이 그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입니까. 라임 장군. 회의실에 그런 몰골로 들어오다니.”

로하 공주의 목소리는 냉랭했으나 표정은 온화했다. 그에 비해 라임 장군이라는 여자는 목소리도 얼굴도 냉랭했다.

“검은 머리를 살려두신다니. 정말 이기적이고 이례적인 일입니다.”

공손한 말투지만 그 속엔 분명한 가시가 잔뜩 박혀 있다.

“어머나. 화가 나신 것 같군요.”

“그런 걸 갑작스럽게 발표하신다니요. 명백한 메아리 법규 위반입니다. 선대 여왕들 중 그 누구도 이 법 만큼은 어기신 적 없습니다.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다른 장군들을 무시하는 행동도 하지 않으셨고요.”

범상치 않은 분위기다. 이것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싸움구경. 그 중 가장 피튀기는 여자들의 기싸움이었다.

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역시 귀여운 쪽 편이 낫겠지. 저 재수없어 보이는 공주보다야.

내가 누구 편에 있던 저들에겐 조금도 상관없을테지만 마음 속으로 숏컷 여자를 열렬히 응원했다.

“비교를 하는 겁니까? 감히.”

웃음기 빠진 얼굴과 저 한 마디로 이 곳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그저 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과연 우두머리 다운 포스를 풍기고 있는 로하 공주. 그에 못지 않은 라임 장군. 정말 흥미진진한 상황이다. 얼핏 두 여자 사이에 날카롭고 매서운 스파크가 튄 것도 같았다. 마음같아선 치킨과 맥주라도 가져다놓고 올림픽 생중계 방송처럼 생생히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해. 라임.”

뜨거운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첸 장군이었다. 슬며시 로하 공주 앞에 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액션을 취했다. 서늘한 그의 눈빛은 ‘네가 누구든 나는 벨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라임 장군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송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쳇, 한창 재미있어지려고 했는데. 저 남자 진짜 마음에 안드네.

“또 의견을 내실 분 있으신지?”

로하 공주가 뻔히 정해져 있는 대답을 물었고, 그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제느에게 영광을!”

그들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메아리에게 영광을.”

그 모습이 얼마나 공포였는지.

귀신이나 무서운 것을 경험하는 것만 공포가 아니었다. 내 상식 수준에서 벗어난 것들을 이렇게 리얼하게 보는 것도 엄청난 공포였다.

사업이 쫄딱 망해 시골로 들어왔을 때, 그 집 문턱을 들어가는 것이 참 끔찍하게 싫었는데, 지금만큼은 간절하게 그 집 문턱을 밟고싶다.

잔뜩 녹슨 청색쇳덩이 문이 이렇게나 그리울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내게 다가올 진짜 공포는 따로 있었다. 다른 사람들 손에 이끌려 끌려가다시피 그 곳을 나온 난 보고야 말았다. 내 키의 세 배 쯤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창문 바깥의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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