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예쁘게 자네.” 로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조금 푸석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길 때 마다 복잡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카락 향기와 함께 새어나왔다. 그가 자신의 안에 들어올 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그 목소리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격렬한 몸부림이 계속될수록 목소리를 더욱 또렷해졌고, 나중엔 절규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메아리’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계획에 없던, 원하지 않던 여왕식을 남자와 몸을 섞을 때 자신의 의사따윈 상관없이 치뤄진 것이다. 이 얼마나 천박한 여왕식인가? 어떤 예언도,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가장 헐거워진 상태에서 치뤄지는 여왕식이라니.제느 여왕이 탄생한 이후로 자신과 같은 여왕식을 치룬 인물은 없을 것이다.스스로가 더럽고 비참해 목구멍 속이 울렁거렸지만, 지금은 자기연민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머니가 죽었다. 끝난 것이다. 이젠 정말 완벽하게. 아사베의 죽음으로 본인에게 넘어온 설명할 수 없는 기운들이 혈관 하나하나를 빛내며 꿀렁였다. 넘쳐흐르는 이 불쾌감. 걷잡을 수 없는 수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 지금 당장이라도 눈 앞에 있는 첸을 죽이고, 왕긍 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이고, 메아리가 만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불태우고 싶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이 욕망. “역시 난 제느와 걸맞지 않아.” 그녀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은 ‘제느‘ 가 아닌, 오로지 ‘로하’ 로써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이었다. * 반제느 단체를 지휘할만한 권력을 쥐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능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충성심을 사기엔 충분했고, 차엘과 처음 만나게 된 건 행운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생각보다 그녀가 가진 지위는 대단했다. 처음 차엘과 구상한 계획을 장로들에게 말했을 땐 대부분
첸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라임 장군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 왕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라임 장군의 감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첸은 로하가 원한다면, 혹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라임의 목을 베어 심장을 도려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실 예전부터 그러고 싶었다. 라임이 로하에게 건방진 태도를 보일 때 마다, 반제느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도. 단지 로하 때문에 참아 왔던 것이다. 로하가 라임을 아끼니까.“아, 맞아. 당신은 이렇게 차가운 남자였지. 가끔 잊는다니까.”이런 상황에서 장난스레 싱긋 미소 짓는 로하를 보니 첸은 속이 뒤집혔다. “지금 왕궁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첸. 칼 내려놔.” “싫습니다.” 이 상황에서까지 왜 ‘루’를 습격하지 않는 것인지. 반제느 단체따윈 제느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기껏해봐야 정치싸움 정도. 그 마저도 그들이 외치는 ‘진정한 혁명’ 따위가 아니라, 가문들끼리의 지저분한 기싸움일 뿐. 로하가, 혹은 그 선대 여왕들이 반제느를 전멸시키지 않고 왕궁 내에서 주제넘게 활보하는 것을 봐주는 이유는 숲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렸을 적 로하가 그렇게 말했었다. 자연 속에는 해충도 있고, 짐승도 있는 법이라고. 눈에 거슬린다고 그것들을 전부 없애면 그건 더 이상 숲도, 자연도 아니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이 생긴다. 정말 그것이 다일까? 지금 없앤다고 해도 해충과 짐승은 언제든 생겨난다. 언제 없애든 그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지금만큼 확실한 타이밍도 없었다. 이현오에게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힘을 가지고 반제느에게 붙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이 토벌할 최적의 타이밍인 셈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타이밍일지도 모르고. “이현오가 라임장군과 붙어 지낼 때 부터 어느 정도 감안했던 부분이야. 시기가 빠르긴 했지만, 문제될 건 없어.”
얼마나 안쓰러운 존재들인지. 죽어서도 편해지지 못하고, 살아서도 놓을 수 없는. 이름 없는 신이 왜 기웃거리는지 이해가 갔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고… 확실한 건 차엘은 그저 ‘복수’ 가 하고 싶을 뿐, 왕좌엔 욕심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내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어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 이야긴 여기서 끝이야. 그래서 원하는 답은 찾았나?” ”예. 충분합니다. 돌려 말할 것 없이 저의 제안을 바로 말씀드리죠. 저는 제느 왕권이 사라지면 라임 장군이 왕좌에 앉았으면 합니다.” 차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저 작은 손바닥에 숨어진 입가엔 분명 미소가 지어져 있으리라. 차엘에게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다. 그녀에게 명예라는 건 허물 좋은 껍데기를 뒤집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하는 것 뿐, 자신의 조카가 왕좌에 앉는다면 복수는 물론이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 놓기에 충분했다.신의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의 쪽에 서다니! 처음 계획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 물거품 속에 반짝이는 진주가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차엘 본인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조상이 굽어살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지?“ 차엘의 질문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는 이유를 정확하게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차마 그녀에게 ‘라임 장군이 예쁘게 웃길 바래서요.’ 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현오의 침묵에 차엘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죠?” 라임 장군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세모낳게 치켜세운 채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와, 우리 오랜만에 보네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내 모습에 약이 바짝 올랐는지, 일부러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오랜만? 그러시겠죠. 당신이 왕궁에 돌아오질 않았으니. 대체 뭐하자는거야? 지금 왕궁이 얼마나 뒤집어 졌는지 알아요? 한 달 넘게 이 곳에 짱박혀 있으면 어쩌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차엘은 내게 붉은 빛을 띄는 차를 내밀었다. 익숙한 향과 맛이었다. 어디서 마셔 봤는지 떠오르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로하 공주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내게 건넸던 차와 비슷했다. 하지만 차엘이 건넨 차는 풍미와 깊이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맛이 좋았다. 예의상 한 입만 마시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차의 열기를 식혀가며 반이나 홀짝이게 맛을 음미했다. “다행히 입에 맞으시는가 보군요. 저희 가문은 대대로 찻잎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죠. 꽤 유명하죠.” “아. 그래서 집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당신이 내게 줄 패는 뭐죠?” 차엘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들을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나는 라임 장군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블러드의 실험실’ 같은 둘 만의 내용은 제외한 채 내가 가진 정보들을 말했다. 가장 중요한 아사베의 정신이 네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과 내가 유일하게 그녀와 정신이 통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는 것. 내가 제느의 시초 여왕 혹은 알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정말 재수없으면 그럴지도 몰라요.”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진심으로 그러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차엘은 어떤 표정변화도 없이 내 말을 묵묵히 들었다. 내뱉을 때 마다 로하 공주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애써 외면했다. 지금 내게 양심은 사치였다. 내 말이 끝나자 차엘은 고개를 주옥거리곤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당신의 그 고양이 속에 아사베 전 여왕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내심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는데. 로하 공주가 단순히 자질이 부족해서 여왕식을 치루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니. 결론은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군요.”잠깐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차엘은 네로는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썬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전 당신들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전 당신들이 필요하고, 힘을 합치
인삿말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본론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투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뱉은 말투에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차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안내하던 보초병들은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사라졌다. 차엘은 내게 집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자며 앞장 섰다. 나는 네로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근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네로가- 아니. 아사베가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마저도 근거없는 합리화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금의 나는 로하 공주도, 라임 장군도 100% 신뢰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인성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의 문제다. 내겐 생존이 걸린 일이니 그녀들이 아무리 내게 잘해준다고 해도 난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되어 세상 비열한 인간이 될지라도.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내가 이 세상에 똥같은 저주를 뿌린 장본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막연하게지만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을거라 희망을 걸었던 로하 공주는 신의 힘도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태에다가 신의 목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 난 다시 다른 곳에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나는 곳은 ‘루’ 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내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집 안으로 들어서자 차엘의 집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큰 집 평수에 채워져 있는 집기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연베이지 톤의 내부와 코 끝에 아른거리는 향긋한 꽃향에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엘은 우아한 몸짓으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 라임 장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걸테죠.”“저… 라임
인삿말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본론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투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뱉은 말투에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차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안내하던 보초병들은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사라졌다. 차엘은 내게 집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자며 앞장 섰다. 나는 네로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근거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네로가- 아니. 아사베가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마저도 근거없는 합리화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금의 나는 로하 공주도, 라임 장군도 100% 신뢰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인성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의 문제다. 내겐 생존이 걸린 일이니 그녀들이 아무리 내게 잘해준다고 해도 난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되어 세상 비열한 인간이 될지라도.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에 내가 이 세상에 똥같은 저주를 뿌린 장본인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막연하게지만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을거라 희망을 걸었던 로하 공주는 신의 힘도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태에다가 신의 목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 난 다시 다른 곳에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나는 곳은 ‘루’ 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루트로 내가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집 안으로 들어서자 차엘의 집은 그녀를 많이 닮아있었다. 큰 집 평수에 채워져 있는 집기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연베이지 톤의 내부와 코 끝에 아른거리는 향긋한 꽃향에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엘은 우아한 몸짓으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 라임 장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걸테죠.”“저… 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