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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자하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네가 기다린 루세티아도 아니고, 네가 이용할 열쇠도 아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엘리노아 루체른이다.”
그가 내 이름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손목의 문양이 아주 따뜻하게 빛났다.
나는 갑자기 울 것만 같았다.
*“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카엘루스는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눈빛은 명백히 ‘어쭈, 이것 봐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양심이 좀 찔리긴 했지만 지금은 양심보다 목숨이 우선이었다.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무언가 반박하려던 찰나였다.치익, 지지직—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고요한 응접실의 공기를 긁어 내렸다.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전 분명히 정화해 냈던 벽면의 금색 덩굴 문양이 마치 도살당한 짐승의 근육처럼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뭐, 뭐지? 분명히 빛으로 태워버렸는데!
‘입을 열 때마다 거짓을 고하는 이 앙큼한 고양이를 어찌해야 할까.’얼토당토않은 강아지 타령을 늘어놓는 엘리노아를 보자 카엘루스는 처음엔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 앞에서 이토록 뻔뻔하게 궤변을 늘어놓는 자는 생전 처음이었다.맑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무해한 척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정말 그녀의 말대로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하지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길들여진 강아지보다는 발톱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는 영악한 고양이에 가까웠다.‘……내가 지금 이
카엘루스는 먹잇감을 몰아넣는 맹수처럼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자벨라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나만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마치 내 영혼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루체른 영애. 응접실에서 무얼 하고 있었지? 낯익은 곳이라 반갑기라도 했던 건가?"쿵—.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한 발짝 더 다가와 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아주 낮게 속삭였다."아니면…… 이번에는 바닥 말고 벽을 닦으려고 왔
벽면의 기하학적인 거미줄 문양과 그 마디마다 박힌 흑색 점들이 내 시야 안에서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이건 단순히 누군가를 향한 저주 따위가 아니야. 황궁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거미집이지.'나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벽면에 손을 뻗었다. 내 안의 권능이 이 기묘한 어둠을 태워버리라고 속삭이는 듯했다.손끝에 서린 투명한 빛의 입자가 검은 마력과 부딪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기 직전이었다."어머, 루체른 영애께서는 황궁 벽지가 신기하셨나 보군요? 영지에서만 지내시느라 이런 화려한 장식은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