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하아, 하아….”
오른팔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수빈은 깊게 팬 상처를 움켜쥔 채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으로 미간이 일그러졌으나, 두찬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서늘할 정도로 생생했다.
“야, 곽두찬! 이제 그만 끝내자!”
먼저 죽음을 입에 올리는 당돌함에 두찬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기괴하게 씰룩였다.
그는 수빈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고정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 형사. 아니… 오수빈.”
눈앞의 총구에도 수빈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철컥, 안전장치를 푼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때였다.
“흑….”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이질적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리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짚었다.
“흑……, 흐윽.”
참다못한 예리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옆자리 남자를 째려봤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부터 옆자리 남자는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맙소사, 요새도 이런 신파극에 우는 사람이 있어?’
축축하게 젖어 형체를 잃은 휴지로 연신 눈가를 찍어내던 은호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이미 다 써버렸는지 빈손만 허무하게 휘저을 뿐이었다.
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에서 정갈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옆으로 툭 건넸다.
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손수건에 은호의 울음이 멎었다.
은호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돌렸으나, 예리는 여전히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팔만 뻗고 있을 뿐이었다.
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수건을 받아 갔다.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예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은호의 속삭이는 듯한 작은 대답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무대의 막이 다시 서서히 올라갔다.
총알이 관통한 듯 무대 위 남자 배우의 가슴과 입가에서는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주원아, 김주원!”
수빈의 절규 섞인 부름에도 주원은 그저 품에 안겨 흐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거칠고 힘겨운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네가 왜! 도대체 왜...!”
주원은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수빈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날 예전에 구해줬을 때부터… 내 목숨은 네 거나 마찬가지였어, 수빈아.”
“흑, 흐흑….”
수빈이 자신의 볼에 닿은 주원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주원의 손등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김주원, 죽지 마! 나랑 끝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이렇게 무책임하게 가면 안 되는 거잖아!”
수빈이 피가 뿜어져 나오는 주원의 가슴을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막을 길은 없었다.
“너랑 한 약속, 다 지키고 싶었는데…… 미안해.”
“너 절대 안 죽어. 아니, 죽게 안 놔둘 거야. 그러니까 벌써 미안하단 말 하지 마!”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원은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힘없이 떨어진 그의 손이 무대 바닥에 툭, 부딪혔다.
주원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수빈이 품속에서 검은 물체를 꺼내 든 건 바로 그때였다.
금속 특유의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어, 안 되는데…!"
은호가 작게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수빈이 쥔 총구 끝에 못 박혀 있었다.
“주원아,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 사랑해…….”
수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바짝 갖다 붙였다.
탕—! 찢어질 듯한 굉음이 극장 안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의 모든 불이 꺼지며 지독한 암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은호의 커다란 어깨 역시 아까보다 더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제 끝인가….’
예리는 습관적으로 은호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암전으로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는 헛수고였다.
예리는 피곤한 듯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랑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목숨까지 거는 건지….’
예리의 눈시울은 건조하기만 했다.
총구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던 주인공이 고작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하나에 생을 마감하다니.
그렇게 예리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어두웠던 공간이 다시 밝아졌다. 배우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남녀 주인공이 손을 잡고 등장했다.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예리도 친구 주은의 등장에 마지못해 일어나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예리의 시야에 은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커다란 두 손을 성실하게 맞부딪치며 무대 위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배우가 허리를 숙이자 객석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며 사람들이 일제히 출구로 몰려들었다. 이를 본 예리는 미련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리가 무심하게 휴대폰을 확인하며 인파가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은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손수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객석이 어느 정도 비워지자 예리가 먼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예리가 무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나 작다는 소린 듣지 않는 키였지만, 그의 넓은 가슴팍에 가로막힌 시선은 한참이나 올라가서야 겨우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은호가 예리의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변은 짓무른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 탓인지 붉어진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묘하게 처연하고도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 타인이 우는 꼴이라면 치를 떨던 예리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만큼은, 그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해미는 예리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녀의 뒤를 서준이 그림자처럼 따랐다.홀로 남은 예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대가만 따진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가 결정을 방해하고 있었다.커플 매니저로서 직업윤리 같은 건 없었다.굳이 만들자면 사랑을 철저히 비즈니스 수단으로 여기는 것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고객의 마음은 철저히 배제되었다.그저 이득이 되는 조건을 계산하고 유효기간이 넉넉한 상대를 골라주면 그만이었다. 사랑을 운운하던 고객들도 조건에 딱 맞는 상대를 마주하면 금세 말을 바꾸곤 했으니까.예리가 업계 1위의 위상을 일궈낸 것도 이런 비정한 태도 덕분이었다.그런데 왜일까. 죽은 줄 알았던 양심이 자꾸만 옆구리를 찔러댔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를 거 없잖아…?”지금껏 처리해 온 수만 건의 의뢰와 해미의 의뢰나 본질은 같았다.VIP 전담팀이 상대하는 고객들의 요구는 99%가 일치했다. 집안에서 정해준 기준에 부합하는 재력과 배경을 갖춘 가장 매칭률 좋은 조각을 찾을 것.그들이 제시한 기준에 당사자의 진정한 사랑이나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그저 이 조각 저 조각을 비교하며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줄 맞춤형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 전부였다.결국 최고의 상대를 찾는 부모들이나, 최악의 상대를 찾는 박 회장이나 도긴개긴이었다.잠시 희생양이 될 유은호가 떠올랐지만, 예리는 금세 생각을 털어냈다.사랑에 빠질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해미의 함정에 빠져 지옥을 맛볼지 아니면 무사히 피해 갈지는 결국 그의 선택에 달린 문제였다.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을 괴롭히던 작은 불편함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깔끔하진 않지만 충분했다.자리로 돌아온 예리는 수화기를 들어 소진을 호출했다.“박 회장님께 제안 수락하겠다고 전달해 주세요. 아, 그리고 조건 하나 덧붙이세요.”수화기를 고쳐 쥐는 예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어떤 방식을
“유은호 걔가 도통 반응을 안 하더라고. 어설픈 연기는 귀신같이 알아채는 건지, 아니면 눈이 지나치게 높은 건지. 그렇지, 문 비서?”해미가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곁에 있던 서준이 말을 거들었다.“심지어 섭외한 배우들이 유 이사님께 역으로 빠져드는 바람에 작전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미간을 짓누르며 화를 삭이던 해미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번뜩이는 눈동자에는 독기 어린 기대가 서려 있었다.“그래서 나 팀장을 찾아온 거예요. 업계 성혼율 1위. 한 번 맺은 인연은 파혼조차 없다는 그 전설적인 실력.”해미의 시선이 예리에게 못 박혔다.“대한민국에서 짝을 제일 잘 찾아준다는 전문가니까,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도 기가 막히게 골라내지 않겠어?”예리는 내심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가 이런 꺼림칙한 의뢰를 맡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게다가 서슬 퍼런 경영권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법이었다.무엇보다 예리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고.예리가 정중한 거절의 말을 고르려 입술을 떼던 찰나였다.해미가 그 기색을 귀신같이 채가며 거부할 수 없는 패를 던졌다.“물론 우리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아니에요. 나 팀장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움직일 거 아니야. 비즈니스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해미가 고개를 돌려 가볍게 손짓했다.대기하던 서준이 태블릿을 해미의 손 위에 올렸다. 그녀는 건네받은 태블릿을 여유롭게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놓았다.“요새 인연이 많이 힘들겠어요. 매치 랩인가 하는 곳에 고객을 꽤 뺏겼더라고.”예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화면에는 인연에서 이탈해 경쟁사로 옮겨간 회원 수와 급락하는 시장 점유율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예리가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약점을 기막히게 꿰뚫는 박해미다운 방식이었다.‘매치 랩(Match Lab)’은 거대 IT 기
“최악의 짝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박 회장이 테이블 너머 예리를 향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말 그대로예요. 나도 다른 고객들처럼 아들의 결혼 상대를 찾으러 인연에 온 게 맞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최악인 상대를 찾으러 왔다는 거?”잘못 들은 게 아닐까. 예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지구상 최악의 결혼 상대를 골라달라는 의뢰는 커플 매니저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저희 인연의 설립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의뢰라 당혹스럽습니다. 실례지만 굳이 이런 일을 맡기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그 순간 해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숨이 넘어갈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박장대소하는 그 기괴한 광경에 예리는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끅끅대며 웃던 해미가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가볍게 훔치더니, 굳어버린 예리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동안 나 같은 의뢰인은 없었나 봐요? 하기야 보통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길 바랄 테니까. 나 역시 그래요. 내 자식들은 누구보다 행복해야지.”말을 마친 해미가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워냈다. 대신 입술 끝을 비릿하게 끌어 올렸다.“그런데 유은호는, 내 아들이 아니잖아?”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지만 수십 년을 한 집에서 지내온 사이였다.그 긴 세월을 단 한 문장으로 부정하다니….일말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태도에 예리의 등 뒤로 얇은 소름이 돋았다.“나 팀장 아까 내가 은호의 지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죠?”예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나는 해상의 차기 리더 자리를 우리 도현이와 동현이에게 물려주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어요. 그리고 최근에 그 모든 준비를 끝냈고.”순간 해미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돌았다.“그런데 해결 못 한 결정적인 문제가 딱 하나 있네?”해미가 짜증스러운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거칠게 다리를 바꿔 꼬았다.“유
멀리서 찍힌 사진이라 형체는 흐릿했으나 낮은 화질을 뚫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배어 나왔다.‘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찰나의 기시감이 스쳤으나 예리는 곧장 의심을 지워냈다. 최근 자료조차 1년 전인 사람을 마주했을 리 없었다.언뜻 보기에도 수려한 외모, 좋은 학벌과 집안 게다가 선대 회장의 친아들이라는 상징성까지. 결혼 시장에서 그의 가치는 측정 불가였다.결정사 문을 두드리기도 전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그를 사위로 삼으려 일찌감치 줄을 섰을 터였다.그중에서 고르면 되지 굳이 왜.예리는 습관적으로 턱을 괴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 속 흐릿한 유은호에게 고정된 채였다.시계 초침이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짧은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팀장님, 박해미 회장님 곧 도착하신답니다.”데스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예리가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예리를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에는 은근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해상 관련 자료는 충분히 확인하셨어요? 워낙 만만한 분이 아니시라… 걱정이 돼서요.”예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껐다.“지금 자료로는 턱없이 부족하네요. 특히 유은호 이사에 대한 건 백지상태나 다름없고요.”예리는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서랍에 넣었다. 그러곤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그래도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박해미 회장이 무슨 패를 들고 왔든 휘둘리지 않으려면.”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으나 눈동자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소진의 안내를 받은 박해미가 예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짙은 초록빛 슈트를 차려입은 그녀는 등장만으로 공간의 공기를 뒤바꿔 놓았다.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다가오는 예리를 향한 해미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예리는 그 날카로운 안광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으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박해미 회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큼, 첫째와 둘째를 향한 박 회장의 애정은 유별났다. 그런 그녀가 발 벗고 나선 상대가 금지옥엽 두 아들이 아닌, 배다른 자식으로 알려진 막내 유은호라니.자식의 결혼조차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로 이용할 박해미였다. 이득이 없는 곳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가 유은호의 결혼을 주도한다는 사실은, 이번 방문이 결코 순수한 의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유도현도 유동현도 아니고, 왜 하필 유은호지?’그때 태블릿 화면 속, 19년 전 기사 하나가 예리의 눈에 들어왔다.[[단독]’아르케 리서치’ 박해미 대표, 해상 유상만 회장과 11일 백년가약]이혼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우던 박해미와 은호의 부친인 유상만 회장이 재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정·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상 그룹의 새로운 안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자선 행사에서 만나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혼인 신고 후 세 아들과 함께 매체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대중의 부러움을 사는 화목한 재벌가 가족의 표본이 되었지만, 그 행복은 그리 얼마 가지 못했다.예리는 화면을 위로 쓸어 넘겼다. 2년 뒤, 유 회장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알리는 대대적인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예리는 그 중 뉴스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해상 그룹 유상만 회장이 어젯밤 교통사고로 별세했습니다. 유 회장은 가족과의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직접 운전대를 잡았던 것으로 확인됐습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했다.“네, 어머니. 그럼 한번 만나 볼게요.”“잘 생각했어. 올해 결혼한 유력 가문 자제들 반 이상은 인연에서 진행했다더구나. 나 팀장, 실력 하나는 독보적이니 걱정 말렴.”해미는 얼마 전, 예리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너는 특별히 더 신경 써달라고 직접 당부해 뒀어.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네 매칭은 아주 공들여 준비할 거야.”“네, 감사합니다.”은호는 막막한 속을 숨긴 채 강박적으로 미소를 지었다.“올해는 은호 덕분에 나도 혼주복 좀 입어볼 수 있으려나?”해미가 혼자 즐거운 듯 우아하면서도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방 안을 가득 채우는 해미의 서늘한 웃음소리 사이로,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식탁 위를 위태롭게 채웠다.누구 하나 은호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이는 없었다. 도현은 여전히 은호를 없는 취급 했고, 동현은 은호를 얄밉게 쏘아볼 뿐이었다.은호는 입안의 음식물이 모래알처럼 느껴졌지만, 해미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였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은호가 답답한 듯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백미러로 은호의 안색을 살피던 선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사님, 근처 약국에서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한강 너머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빌딩 숲을 응시하던 은호가 선우에게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