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는 찬성하는 분위기였다.유현진만이 정중한 얼굴로 되물었다.“남자가 원칙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요? 예를 들어 바람을 피워 내연녀가 배가 불러서 찾아와 도발하는 경우요. 전 여사님이라면 어떻게 처리할 것 같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 여사의 안색은 크게 어두워졌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송민영의 얼굴도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혹시 이런 일 당하신 적 있으세요?”이 질문은 너무 도발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유현진은 주스를 천천히 마시고 나서야 이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제 친구 이야기예요. 그녀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내연녀는 임신하였고 제 친구는 이혼을 원하지 않고 있죠. 친구가 그 여자를 찾아가 유산하고 남편을 떠나라고 하자 10억을 요구했어요. 그러면 유산하겠다고요. 하지만 그 친구는 전업주부라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아요. 며칠 전에 저한테 돈을 빌리러 왔는데 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에요.”“사실 전 그녀의 방법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고 있거든요. 하지만 저 자신도 특별히 좋은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전 여사님은 현명하고 경험도 풍부하니 제 친구 대신 혹시 이런 일을 당하셨다면 어떻게 대처하셨겠어요?”그녀가 말을 마치자 송민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전 여사의 얼굴은 이미 완전히 굳어져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답하고 말았다.“어떻게 이런 경험이 있겠어? 사람 잘 못 봤어!”유현진이 급히 말하였다.“전 여사님, 화내지 마세요. 전 아저씨가 뭐가 있으시다는 게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어요.” 전 여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화내는 게 아니라 네 질문엔 도저히 대답할 수 없구나. 화장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유현진은 황급히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전 여사님, 시간 날 때 같이 고스톱 해요.”전 부인은 몸을 떨며 작은 구두를 신은 발은 걸음을
“뭐라고?”유현진이 놀라서 되물었다.강한서는 그녀의 눈빛을 피해 가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 사람도 있고 하니까 할머니 귀에 무슨 소리라도 들어가 봐야 좋을 거 없잖아. 깊게 생각하지 마.”어쩐지.유현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강한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 남자야말로 배우 출신이 따로 없었다. 장소 불문 연기가 가능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협조해야 하는 거야?막 거절하려는 찰나 갑자기 송민영이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쳐다보고는 달려와 그들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였다.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강한서의 어깨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말한 건 지켜.”이어 그녀가 발끝을 세우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였다.강한서의 입술은 약간 촉촉하였고 은은한 와인 향도 같이 퍼져 나왔다.강한서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유혹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그녀가 아무리 감추는 거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강한서는 달랐다. 아무리 친밀한 접촉이라도 그의 얼굴에는 담담함 외에는 다른 표정을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예전에 그런 침착하고 여유로운 강한서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좋아하는 여자를 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관심이 없다면 여자가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강한서도 마찬가지이고.마지못해 그녀와의 접촉이 있는 날이면 화장실에서 두 시간이나 있었다. 마치 그녀 몸에 균이라도 있는 것처럼!유현진은 갑자기 모든 게 불만스러워졌다. 분명히 이 결혼 생활에서 줄곧 참아온 것은 그녀 자신이었는데!강한서가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건지?그녀는 그녀를 한때는 사랑에 빠지게 한 눈앞의 이 얼굴을 노려보며 망설임 없이 혀를 내밀었다.강한서의 몸은 굳어지더니 갑자기 눈썹을 찡그렸다.유현진은 한참 후에야 손을 놓았다.이 결벽증 있는 인간아, 한번
유현진이 막 손을 뻗어 술잔을 받으려 하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술 못 마시는 거 아니었어?”송민영이 준 술을 마시기 싫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송민영을 신경 쓴다고 보이기는 싫었으니까. “누가 술 마신대?”그녀는 손을 돌려 방금 마신 주스를 집어 들고 주강운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스로 대신해도 괜찮죠?”주강운이 조금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편할 대로 하세요.”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진 것을 눈치챈 한성우가 얼른 술잔을 들어 강한서에게 쥐어주고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술은 당연히 다 같이 마셔야지. 형수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유현진은 이상하다는 듯 한성우를 바라보았다. 평소 한성우와 유현진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강한서의 친구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녀가 강한서와 결혼 한 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강한서와 함께 있을 때는 그를 봐서라도 친한 척 인사를 나누지만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인사는커녕 아예 못 본척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현진도 강한서 주변의 부잣집 도련님들을 싫어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성우를.그녀가 한성우를 싫어하는 제일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송민영이었다. 강한서와 송민영의 일이 알려지지 않고 송민영이 여러 스캔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성우 덕분이었다. 평소엔 눈꼴사납게 굴더니 이젠 형수님, 형수님하고 부르니 유현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송민영은 마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이분은 대표님 친구분이세요?”한성우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 척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그러자 송민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이미 한참 동안 여기 서있었다.송민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매니저가 얘기 안 드렸어요? 오늘 자선 공연 있는 날이거든요.”“그러고 보니, 얘기를 들
“당연히 해드려야죠.”송민영은 말하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가방을 본 유현진은 순간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강한서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술을 음미할 뿐 가방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다른 사람이 준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 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현진이 하루 동안 집에서 옷을 세 벌이나 갈아입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유현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가방을 한참을 뒤적이던 송민영은 펜 하나만 꺼내들고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해요. 사인지를 안 가져왔네요. 다음에 해드릴게요. 아니면 제가 사인해서 한 대표님 통해서 전해드려도 되고요.”“괜찮으시면 제 손목에 사인해 주시겠어요?”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송민영이 순간 움찔 눈을 떨었다. '설마 주강운이 진짜로 송민영의 팬은 아니겠지?'한성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주강운, 너 이런 취향이었어?”주강운은 가볍게 웃더니 팔을 내밀며 말했다.“송민영 씨 한 번 만나기가 좀 어려워야지.”주강운의 한 마디에 허영심이 한 번에 충족된 송민영은 더 이상 말설이지 않고 펜을 들어 주강운의 손목에 사인을 했다. 주강운의 눈은 글씨 쓰는 송민영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한서와는 달리 주강운은 요염한 눈매를 가졌다. 그의 눈빛은 쓰레기 더미를 보더라도 애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틋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송민영이 사인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뺨을 한 대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송민영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조금 지나서야 그녀는 자신을 때린 사람이 강한서의 동생 강민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송민영은 휘청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피라미드 모양의 술잔이 와르르 무너졌다. 송민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치마에는
“춤추실래요?”주강운의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아니, 따뜻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분명 매력 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주강운은 한 번도 유현진에게 이렇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유현진은 울컥 서러움에 북받쳤고 술 때문이었는지 억울함 때문이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춤 잘 못 춰요."“저도 잘 못 춰요.”주강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한 걸음 한 걸음, 멜로디에 맞춰 발을 내디디며 그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갔다. 이는 유현진과 강한서 사이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케미였다. 유현진은 늘 강한서의 발을 밟았고, 강한서는 인내심이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그녀와 춤을 추려 하지 않았다. 유현진이 춤을 못 춰서라기보다는 그저 강한서가 유현진을 맞춰줄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뿐이었다. 두 번의 춤을 추고 나니, 유현진의 코 끝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술잔을 건네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물었다. “정말 송민영 팬이에요?”주강운은 피식 웃더니 종이에 술을 조금 묻혀 손목의 사인펜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전 사실 TV 잘 안 봐요. 근데 그런 대스타는 처음이라. 궁금했거든요. 어떤 매력이 있는지.”유현진은 주강운의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이유가 조금 억지스러웠기 때문이다. 유현진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주강운이 말했다. “농담이에요. 사실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송민영 팬만 아니면 돼요.”그녀의 집요한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주강운은 손을 들어 맹세했다. “전 절대 아닙니다. 맹세해요.”“그럼 마셔요.”주강운은 술잔을 들며 불쑥 말했다.“송민영 씨, 아까 다치셨어요.”유현진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넘어지실 때, 팔이 유리 위로 떨어졌거든요. 아무래도 공인이시라,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사진이
유현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신용카드를 갚으라는 내용의 여자 기계음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전화를 뚝 끊고는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떨어지려는 순간, 다시 손을 내려 전원을 끄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주강운은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데려다줄게요.”“강한서가 데려다주라고 한 거면 됐어요. 자기 와이프 직접 데리러 오라고 해요.”겉으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꽤나 화가 나 있었다. 어디도 가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는 건 아마도 강한서의 소식을 기다리는 거겠지. “너무 늦었어요. 이 시간에 여자 혼자 밖에 있으면 위험해요.”돌려 말하긴 했지만, 유현진은 알고 있었다. 강한서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는걸. 와이프를 파티장에 두고 왔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지난번 주차했던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차에 오른 뒤 유현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모습은 잠든 것 같기도 했다. 차가 멈추고, 주강운이 유현진을 부르려는 찰나 그녀가 눈을 떴다. “도착했어요?”“네.”유현진은 창밖을 내다보고는 걸쳐있던 외투를 돌려주며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이때, 주강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고개를 숙여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고는 휴대전화를 한 쪽에 내버려 두었다. 유현진의 모습이 아파트 입구에서 사리지고 나서야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려 떠나게 했다. 강한서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을 때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람, 집에 들어갔나요?”“사모님이요? 사모님 대표님과 함께 파티에 가셨잖아요.”강한서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안 싸웠어. 이혼하면 재산 분할도 해주기로 했는데, 내가 왜 싸워? 돈은 받아야지.”“너 그럼 지금 돌아가려고?”“오늘엔 병원에 가려고. 낮에 간병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엄마가 또 반응을 보였대.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옆에서 얘기 많이 해드리려고. 혹시 더 일찍 깨어나실지도 모르잖아.”“내가 데려다줄게.”“아냐, 됐어. 차 불렀어.”유현진이 차미주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너도 일찍 쉬어.”하현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차미주에게 얘기한 것처럼 반응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유현진은 그저 그녀 옆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엄마 옆에서라면 어떤 서러운 일이 있어도, 아무런 위로의 말이 없어도 마음만은 편할 수 있었다. 의사는 항상 그녀에게 어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누라고 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소통이 적었던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기억을 더듬어 이전의 일들을 얘기해 보고 싶었지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도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애쓰는 모습을 보던 간병인은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편분 이야기를 하셔도 괜찮아요. 결혼생활 얘기도. 엄마는 딸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니까.”“뭐,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서요.”유현진의 입꼬리가 내려갔다.“사고만 나지 않았어도, 아마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겠죠.”간병인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몸을 일으며 하현주가 갖고 있던 골동품인 카세트 라디오를 켰다. 하현주는 국악을 좋아해서 집에 많은 데이프를 모아놓고 있었다. 이 카세트 라디오도 모아 둔 테이프를 듣기 위해 산 것이었다. 의사가 하현주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해서 자극을 줘야 한다고 얘기를 한 후부터 유현진은 집에서 물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무 테이프나 골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책상 위에 놓였던 잡지를 펼쳐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혼 후 전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 였다.유현진은 아무
하현주가 보였던 두 번의 반응의 유일한 공통점은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사는 이런 내용을 진료차트에 적으며 말했다. “카세트테이프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계속 같은 방법으로 자극을 줘보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 하지는 마시고요. 틀어놓고 반응을 잘 살피시고 반응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병실을 나간 후, 유현진은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보았다. 테이프가 워낙 오래되어 위의 글씨가 대부분 흐릿해 “국악의 대가” 라는 글씨만 희미하게 보였다. “언니, 지난번 엄마가 반응을 보였던 테이프, 어떤 건지 기억나세요?”“그건 기억이 잘 안 나요. 하지만 멜로디는 기억나요. 흥얼거려 볼게요.”기억난다는 간병인의 말에 유현진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짧게 흥얼거린 간병인이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무슨 노래인지 알겠어요? 이 멜로디는 정확하게 기억해요.”유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간병인이 말한 흥얼거림이란 진짜로 흥얼거림 그 자체였다. 가사 한 줄도 없이, 심지어 음정조차 맞지 않는 듯한 흥얼거림이었다. 하현주를 따라 들은 국악이 얼마인데,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80% 이상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간병인이 흥얼거린 멜로디로는 전혀 어떤 곡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간병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말했다.“들어본 적 없는 곡인 것 같아요.”간병인이 열정적으로 나섰다.“제가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한 번 더 해볼게요.”“괜찮아요.”유현진은 테이프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 간병인에게 말했다.“언니, 앞으로 이 테이프들을 순서대로 틀어줘요. 엄마가 반응을 보이는 것들로만 추려서, 그것만 들려드려요.”“네.”유현진은 간병인이 가져온 보호자용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딱딱한 접이식 침대에 온몸이 아팠다. 이튿날 아침,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래층에서 간병인에게 줄 아침밥을 가져다주고, 몇 가지를 당부하고 나서야 택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