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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담긴 것은 차가운 모욕이었다.
“또 깨작거리는군. 집에서 온종일 뒹굴면서 남편 퇴근길 밥상 하나 제대로 못 차리는 게, 입맛까지 까다로워?”
식탁 맞은편에서 서태우가 질색하며 젓가락을 내던졌다. 도자기 그릇에 부딪힌 은수저가 쨍, 날 선 소리를 냈다. 백채린은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서툰 솜씨로 반나절 내내 씨름해 끓여낸 소고기뭇국과 나물들이 식어가고 있었다.
“기름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죄송해요.”
“죄송하면 먹어. 네 친정아버지 회사 넘어가기 직전에 내가 숨통 트여준 값, 이런 형편없는 밥상으로 갚을 생각 말고.”
태우는 혐오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일어섰다. 거칠게 닫히는 서재 문소리가 적막한 펜트하우스 복도를 울렸다. 혼자 남은 식탁. 채린은 메스꺼움을 억누르며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혀끝에 닿자마자 목구멍이 굳어지며 역한 구역질이 치밀었다.
우욱.
채린은 싱크대로 달려가 위액을 쏟아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노란 담즙만 섞인 신물이 타일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식증.
남편의 3년에 걸친 폭언과 감시, 그리고 인형처럼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녀의 목구멍을 닫아버린 지 오래였다. 세상의 모든 음식이 모래알 같았고, 삼키는 행위 자체가 지옥 같은 형벌이었다. 다음 날 오후, 거실에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 주말, 프랑스 파트너사 임원들이 우리 집으로 온다. 네 손으로 차릴 생각 따윈 꿈도 꾸지 마.”
태우가 넥타이를 고쳐 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예약 대기만 반년이라는 프라이빗 출장 셰프를 불렀어. 파리 미슐랭 3스타 출신이라더군. 괜히 주방 얼씬거리면서 창피 주지 마.”
태우가 출근한 뒤, 현관 벨이 정적을 깨고 울렸다. 채린이 인터폰을 확인하고 문을 열자, 초가을 바람과 함께 낯선 남자가 문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오늘부터 주방 동선과 식자재 점검을 맡은 강도혁입니다.”
문턱에 선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187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와 탄탄한 어깨. 단정한 블랙 셰프 코트와 차분한 눈매가 먼저 들어왔다. 그에게서는 신선한 허브와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이 희미하게 났다.
“아…… 서태우 상무님이 말씀하신…….”
“네. 오늘 저녁 사전 테이스팅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도혁의 낮은 목소리가 채린의 귓전에 닿았다. 도혁은 채린의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입술을 짧게 살폈다.
“남편분은 저녁 늦게 들어오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회의가 길어져서…… 혼자 준비하셔도 괜찮아요. 전 제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 편하게 쓰세요.”
채린이 몸을 돌려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사모님.”
도혁이 한 걸음 다가오다 멈춰 주방 쪽을 가리켰다.
“셰프의 음식은 드실 분의 입맛을 맞춰야 완성됩니다. 잠깐만 확인해 주시죠.”
강요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도혁은 주방으로 가는 길을 비켜둔 채 기다렸다. 채린은 망설이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섰다. 도혁은 거침없는 손길로 나이프를 잡고 레몬과 신선한 무화과를 얇게 저몄다.
도마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빛 볼에 담긴 크림빛 소스가 완성되었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과 진한 바닐라 향이 주방의 공기를 채웠다.
“자, 드셔보시죠.”
도혁이 작은 스푼을 채린에게 건넸다. 하지만 채린은 뒷걸음질을 쳤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며 어제의 역한 구역질이 다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전…… 못 먹어요.”
“못 먹는 겁니까, 안 먹는 겁니까?”
“속이 안 좋아서……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해요. 그러니까 그냥 남편 입맛에 맞추세요.”
채린이 고개를 돌리며 거부했다. 도혁은 한 걸음 다가오다 멈췄다.
“억지로 먹이진 않겠습니다.”
그는 더 다가가지 않고 소스가 담긴 볼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냄새부터 맡아보십시오. 속이 뒤집히면 여기서 끝냅니다.”
“그걸 왜 당신이 정해요?”
“끝낼지는 사모님이 정합니다. 저는 온도와 향만 맞출 겁니다.”
도혁은 검지 끝에 무화과 크림을 아주 조금 묻혀 보였다.
“스푼이 싫다면 이만큼만. 어느 쪽이든 선택하십시오.”
채린은 당장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코끝에 닿은 레몬과 무화과 향에도 속이 울렁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기름기 없는 과일 향에도 명치부터 굳었을 텐데, 오늘은 침이 아주 조금 고였다. 그 낯선 반응에 채린은 제 몸을 의심하듯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만요.”
도혁은 손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채린이 먼저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끝에 입술을 댔다. 차가운 크림이 갈라진 아랫입술에 스며들었다.
“산미가 먼저입니까, 단맛이 먼저입니까?”
“단맛이요. 뒤에…… 레몬 맛이 나요.”
“좋습니다. 그럼 삼킬 수 있는 만큼만 넘겨보십시오.”
채린이 조심스럽게 혀를 움직이자 무화과 씨앗이 톡톡 터졌다. 구역질 대신 침이 고였고, 목구멍이 아주 조금 열렸다.
꿀꺽.
도혁의 눈이 그녀의 목울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사모님.”
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맛을 느끼면서도, 그동안 얼마나 참으신 겁니까.”
채린은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눌렀다.“싫어서 뛰는 건 아니에요. 들킬까 봐 무서운 거예요.”도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쥔 손부터 풀었다.“그럼 여기서 멈춥니다.”그가 한 걸음 물러서자 오히려 찬 공기가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채린은 숨을 고르다 그의 셰프 코트 소매를 다시 붙잡았다.“멈추라는 말은 안 했어요.”“채린 씨.”“오래 끌지 말라는 뜻이에요. 밖에서 또 찾을 테니까.”도혁의 눈매가 짙어졌지만,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알겠습니다.”그는 품 안에서 작은 보온 케이스를 꺼냈다. 주방에서 미리 그을려 둔 무화과와 블루치즈 한 조각이 미지근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달콤한 과즙과 알싸한 치즈 향이 서늘한 공기에 번졌다.“아까 푸아그라보다 산미를 높였습니다. 한 입만 확인해 주세요.”“이 와중에도 맛부터 묻네요.”“그게 제 일이니까요.”“사람이 이런데도요?”“이럴수록 맛은 정확해야 합니다. 단맛이 지나치면 금방 질리고, 향이 세면 다른 감각을 덮습니다.”“사람도 그래요?”도혁은 잠깐 그녀를 봤다.“사람은 제가 함부로 간하지 않습니다.”채린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 도혁이 포크를 내밀자 그녀가 손목을 잡아 방향을 바꿨다.“이번에도 제가 정할게요.”“네. 손은 어디에 둘까요?”“허리만.&rd
삐이익—.팬트리 문이 열리며 다이닝룸의 소음과 바깥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채린의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듯했다. 남편에게 들키면 친정 회사도 자신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문과 와인 랙 사이 거리를 재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도혁이 즉시 채린의 허리를 받쳐 와인 랙 뒤편의 좁은 틈으로 이끌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참나무 선반과 식자재 박스가 시야를 가려주었다. 도혁이 채린의 뒤를 가리고 섰다. 손바닥이 입술 위에 닿기 전, 그가 눈으로 허락을 구했다. 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이 조심스럽게 입을 덮었다. 다른 팔은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허리만 받쳤다.차가운 선반 모서리가 팔에 닿았고 와인 병 하나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도혁은 병이 더 움직이지 않도록 손등으로 받치면서도 채린을 누르지는 않았다.“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이 여편네가?”서태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팬트리 안을 울렸다. 무거운 구두 발소리가 안쪽으로 다가왔고, 술과 독한 애프터셰이브 향이 좁은 공간에 번졌다. 채린의 무릎이 작게 떨렸다. 바로 앞 선반 너머로 서태우의 양복 소매가 스쳤다. 고개만 돌려도 두 사람을 볼 수 있는 거리였다.도혁은 그녀의 귀 뒤에 이마를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드레스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과 목덜미에 닿는 숨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채린은 공포 때문에 떨면서도, 자신을 받친 남자의 체온까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숨을 더 얕게 쉬었다.손등에 닿은 셰프 코트의 단추 하나까지 느껴졌다. 채린은 그 감각을 붙잡고 속으로 호흡을 셌다. 남편의 구두가 한 걸음씩 옮겨갈 때마다 도혁의 팔은 흔들리지 않았고, 채린이 먼저 손목을 붙잡기 전까지 더 가까이 당기지도 않았다. 태우가 투덜거리며 선반 위를 거칠게 뒤적였다.“와인 하나 제 손으로 못 챙겨서 손님들 앞에서 개망신을 줘? 살림도 못 하는 년
철컥.팬트리 문이 닫히며 다이닝룸의 조명과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잘렸다. 벽을 채운 와인 병, 올리브유, 건조 하몽의 향이 서늘한 공기 속에 뒤섞였다.“왜 여기로 불렀어요?”채린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혁은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난 채 작은 도자기 접시를 들어 보였다. 포도주에 졸인 무화과와 따뜻한 푸아그라 테린 한 점이 놓여 있었다.“손님들께 내기 전 마지막 페어링입니다. 지금은 채린 씨 혀가 제일 정확하니까요.”“밖에서 남편이 와인을 기다려요.”“그럼 와인만 들고 나가셔도 됩니다.”도혁은 길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비켜섰다.“문은 잠그지 마요.”“잠그지 않았습니다.”도혁은 손잡이를 한 번 내려 보여주었다. 언제든 열고 나갈 수 있다는 확인이었다. 채린은 그제야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불과 3미터 밖에서는 잔이 부딪히고 서태우의 과장된 웃음이 터졌다.“하하하! 오늘 계약은 문제없습니다, 부사장님!”“서 상무의 환대에 건배를.”채린은 문고리를 바라보다 다시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고소한 지방 향 뒤로 무화과의 달콤한 산미가 올라왔다. 며칠 전이었다면 냄새만으로도 속이 뒤집혔을 텐데, 지금은 맛을 구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한 입만요. 그리고 빨리 끝내요.”“알겠습니다.”“맛만 볼 겁니다.”“맛만 묻겠습니다.”도혁은 약속하듯 접시를 채린 쪽으로 밀고 자신은 반걸음 물러섰다. 도혁은 포크를 건네주었다. 채린은 제 손으로 푸아그라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녹는 지방 뒤에 무화과의 산미가 번지자 미간이 조금 펴졌다.“어떻습니까?”“잼이 조금 달아요. 와인과 먹으면 더 무거울 것 같아요.”도혁의 눈에 짧은 만족이 스쳤다.“그럼 산미를 올리겠습니다. 정확하군요.”“내 혀가 정확한지 어떻게 알아요?”“단맛에 눌린 지방 맛을 바로 짚었습니다. 훈련받은 사람도 자주 놓칩니다.”채린은 포크 끝을 내려다봤다. 태우에게는 ‘맛도 모르는 여자’였는데, 도혁은 그녀의 한마디로 접시를 바꾸고 있었다.“내가
토요일 저녁 7시, 펜트하우스 다이닝룸은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황금빛 조명으로 눈부시게 타올랐다.프랑스 대형 유통 그룹 ‘루미에르’의 아시아 총괄 부사장 장뤽(Jean-Luc)을 비롯한 해외 귀빈 여섯 명이 웅장한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서태우는 최고급 맞춤 수트에 샴페인 글라스를 높이 치켜들고 특유의 오만하고 과시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장뤽 부사장님, 오늘 귀빈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파리 미슐랭 3스타 출신의 수셰프를 어렵게 모셨습니다. 오늘 밤 서울 한복판에서 파리 최고의 미식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오, 서 상무님. 기대가 아주 큽니다. 파리의 유서 깊은 맛을 서울에서 만난다니 참으로 대단하군요.”태우는 우쭐한 표정으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 다이닝룸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안주인 백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의 시선이 채린에게 모였다. 감청색 이브닝드레스는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드레스 안쪽에는 오후에 변호사와 함께 확인한 소형 녹음 핀이 달려 있었다. 채린은 태우의 위협이 나오면 남기겠다고 직접 작동 버튼을 눌렀다.안색은 여전히 옅었지만 시선은 달랐다. 채린은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상석 옆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장뤽 부사장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미소 지었다.“마담 백, 직접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프랑스어가 아주 자연스러우시군요.”“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음식과 대화 모두 편하게 즐겨주세요.”채린은 막힘없는 프랑스어로 화답했다. 장뤽이 최근 파리 물류 파업 이야기를 꺼내자 현지 항만 사정까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태우의 눈매가 불쾌하게 가늘어졌다. 집에서는 말끝마다 사과하던 아내가 손님 앞에서는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채린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그때, 다이닝룸의 문이 열리고 블랙 셰프 코트를 입은 강도혁이 은빛 카트를 밀고 들어섰다. 손님들 앞에서는 표정도 보폭도 흐트러짐이 없었다.“첫 번째 아뮤즈 부쉬 서빙하겠습니
채린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날아오던 태우의 손이 다시 보였다. 채린은 바닥의 줄눈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손끝 떨림이 조금 줄어든 뒤에야 도혁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이제…… 잡아줘요.”도혁이 그제야 가까이 와 무릎을 꿇고 채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남자의 단단한 흉통과 묵직한 심장 박동이 채린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끝났습니다, 채린 씨. 내가 막았습니다.”귓가에 울리는 다정한 음성에 채린의 가슴속에서 서러운 오열이 터져 나왔다. 채린은 도혁의 검은 셔츠 깃을 주먹으로 꽉 쥔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힘을 주지 않고, 채린이 몸을 기댄 만큼만 받쳐주었다.한참을 울고 난 뒤 호흡이 잦아들자, 도혁이 팔을 받쳐 채린을 일으켜 주방 아일랜드 앞 의자에 앉혔다.“속이 비었을 겁니다. 뜨거운 건 피하고 맑은 것부터 드시죠.”도혁은 채린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작은 무쇠 솥에서는 쌀밥 김이 올랐고, 옆 뚝배기에서는 무와 다시마 육수가 맑게 끓었다. 도혁은 완도산 활전복을 얇게 저며 육수에 살짝 데쳤다. 참기름 한 방울과 쪽파를 얹은 전복 맑은탕, 그리고 흰쌀밥을 작은 양으로 담았다.도혁은 소박한 반상을 채린 앞에 놓고 수저는 손이 닿는 곳에 내려두었다.“서양 요리만 할 줄 알았습니까?”“조금요.”채린의 대답에 도혁의 입가가 아주 잠깐 풀렸다.“복수는 나중입니다. 지금은 한 숟갈 넘기고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게 먼저예요.”채린은 흰쌀밥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오래 씹을수록 밥알에서 구수한 단맛이 났다. 이어 전복 맑은탕의 국물을 한 모금 넘겼다. 명치가 순간 굳었지만, 도혁은 더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여기서 멈춰도 됩니다.”그가 그릇을 치우려 하자 채린이 수저를 붙잡았다.“아니요. 오늘은 제가 끝낼 만큼 정할게요.”채린은 숨을 고른 뒤 밥을 두 숟갈 더 먹었다. 한
식탁 위로 번쩍 안아 올려진 채린의 호흡이 가파르게 흩어졌다. 도혁의 손이 채린의 허리를 받쳤고, 채린은 그의 셰프 코트 깃을 놓지 않았다.“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멈출까요?”“아니요. 그냥…… 긴장돼서 그래요.”도혁이 채린의 대답을 확인하고 입술로 고개를 숙이려던 때였다.쾅, 쾅, 쾅! 쾅!현관문이 부서질 듯한 거친 발길질 소리와 함께 인터폰 경보음이 펜트하우스 복도를 사납게 뒤흔들었다.“문 열어! 백채린,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안 열어?!”서태우의 악에 받친 고함이었다. 출근했던 남편이 불과 10분 만에 핏대를 세우며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채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사지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안심 걸쇠가 굳게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한 남편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도혁은 놀라운 순발력으로 채린을 식탁에서 내려놓고, 그녀의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칼을 단정히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현관으로 걸어가 도어락 걸쇠를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핏발 선 눈을 한 서태우가 짐승처럼 들이닥쳤다.“왜 문을 잠가놓고 지랄이야?! 셰프 놈이랑 대낮부터 안에서 대체 뭘 쑤석거리고 있었는데?!”태우는 거칠게 도혁의 어깨를 밀치며 거실로 난입했다. 차 열쇠와 함께 두고 간 긴급 결재 서류를 찾으려던 태우의 시선이, 소파 쿠션 밑에서 삐져나와 있는 노란 서류 봉투에 멎었다. 불길한 예감에 태우가 성큼 다가가 서류를 거칠게 낚아챘다. 봉투 안에서 튀어나온 종이를 확인한 순간, 남자의 얼굴이 흉측한 분노로 일그러졌다.[선우물산 담보권 실행 및 강제 매각 추진 계획서]태우가 고개를 돌려 주방 입구에 서 있던 채린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이걸…… 네년이 봤어?”“…….”“감히 남편 서류를 뒤져? 네 친정아비 빚더미에서 건져줬더니 뒤통수를 쳐? 이 은혜도 모르는 기생충 같은 년이!”태우가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손바닥이 채린의 뺨을 향해 날아왔다. 채린은 본능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