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같은 시각, 태성그룹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대표이사 집무실.
차도혁은 넓은 가죽 의자에 기댄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쥐었던 고급 만년필을 부서뜨릴 듯 움켜쥔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화가 차단당했다. 강이현이라는 사생아 여자가, 감히 차도혁의 전화를 거절하고 차단까지 한 것이다. 평생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모욕감과 당혹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올라 왔다.
그때 조심스럽게 비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요청하신 강이현 씨의 오늘 동선 보고입니다."
"말해."
도혁이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서를 올려놓았다.
"강이현 씨는 오전 일찍 한국대학교 로스쿨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산그룹 윤 회장님의 막내아들인 윤민우 씨와 함께 도서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윤민우?"
도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
"예. 두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노트를 공유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혁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탁’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단순한 모욕감이 아니었다.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질투와, 제 소유물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포식자의 악랄한 소유욕이었다.
'나를 거부하고 찾아간 곳이 고작 윤민우 앞이었나?'
항상 자신만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인형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다른 사내의 곁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도혁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강이현..."
도혁은 낮게 읊조렸다.
"네가 나를 버리고 감히 다른 놈에게 가겠다고?"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강이현은 차도혁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
"비서실장."
"예, 대표님."
"강이현의 어머니 한서영 씨가 관리하고 있는 재단과 계좌 현황, 전부 조사해라. 그리고 강 회장 쪽에 연락해서 조만간 저택에서 식사 자리를 잡으라고 해."
도혁의 서늘한 눈빛 속에 자비란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아무리 날아서 도망치려고 해도, 결국 넌 내 발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이현의 독립을 향한 첫걸음과, 그녀를 향해 뻗어 오는 도혁의 검은 집착의 손길. 두 사람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잔혹한 계약의 서막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도서관 공기는 유독 서늘했다. 높은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햇살 속에서 조용히 먼지가 나부꼈고, 웅장한 층고를 가득 채운 종이 냄새가 이현의 감각을 또렷하게 깨워 주었다.
이현은 두꺼운 민법 판례집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그녀가 무기력하게 포기했던 시간만큼, 머릿속에 채워야 할 지식의 양은 방대했다. 하지만 단 한 줄의 조문도, 단 하나의 판례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었다.
이 작은 조문들은 단순한 문자의 집합이 아니었다. 강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감옥과 차도혁이라는 오만한 포식자의 손아귀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자 방패였다.
'민법 제103조,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 그리고 제104조, 불공정한 법률행위.'
이현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문장을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다.
상대방의 궁박과 경솔, 무경험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 했던 차도혁과의 관계. 강씨 가문이 사생아라는 약점을 잡고 그녀의 삶을 유린했던 지난 세월. 전생의 비참한 기억을 정교한 법학적 지식과 결합해 가자,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과 그들의 목을 죌 수 있는 법적 허점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커피 마실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현이 고개를 들자,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있는 윤민우가 서 있었다. 민우는 특유의 깔끔한 미소를 지으며 이현의 옆자리에 차분히 앉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이현이 컵을 받아 들자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공부하더니, 아직도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네. 판례 해석이 잘 안 풀려?"
민우가 이현의 노트에 적힌 정갈한 글씨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차도혁에게서 느껴지던 오만한 평가나 감시의 기색 따위는 없었다. 오직 같은 학문을 탐구하는 동료로서의 순수한 존중만이 들어차 있었다.
"도혁 씨가 언니 어미 쪽을 조사한다고요?""그래. 차도혁이라는 아이는 절대 제 소유물을 빼앗기거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걸 참지 못하는 부류다. 강이현이 도망치려고 하니, 숨통을 조여서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만들려는 거지."이선희는 미소를 지으며 유라의 뺨을 문질렀다."오늘 저녁에 네 아버지가 도혁이를 저택으로 불렀다. 강이현 그 기집애도 어미의 목줄을 쥐고 불러낼 테니, 너는 그저 완벽한 여주인으로서 도혁이 옆자리를 지키기만 해라. 제 어미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과연 그 애가 얼마나 오만하게 굴 수 있을지 보자꾸나."유라의 얼굴에 가학적인 환희가 떠올랐다."맞아... 그 년은 어미 일이라면 자빠져서 빌던 년이니까. 오늘 저녁에 도혁 씨 앞에서 무릎 꿇고 빌게 만들 거야!"오후 4시, 도서관을 나온 이현은 민우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서초동 거리를 걷던 그녀의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극심한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엄마였다.이현은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응, 엄마.""이현아... 이현아, 어떡하니...!"수화기 너머로 한서영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숨이 넘어갈 듯한 호흡과 함께 덜덜 떨리는 음성이 이현의 귓가를 찔렀다."엄마,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천천히 말해봐."
"아니, 판례 자체는 이해했어. 다만 이 판례를 실제 법정에서 어떻게 변형하고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실제 법정이라... 역시 생각하는 깊이가 다르네. 대부분의 입시생들은 시험 지문에 나올 키워드만 외우기 바쁜데, 너는 이미 변호사로서 사건을 대하는 시각을 갖고 있잖아."민우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컵을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어제 네가 정리해 둔 계약법 파트 노트를 잠깐 봤거든. 단순한 조문 암기가 아니라, 계약의 무효와 취소 사유를 실무적인 관점에서 정교하게 나누어 둔 게 인상 깊었어. 혹시 나중에 계약법 스터디라도 같이 해볼 생각 있어? 너한테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서.""나한테 배운다니. 너도 로스쿨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학점 잘 받는 거랑, 실제 법리를 다루는 감각은 다른 법이니까. 무엇보다 너랑 대화하고 있으면 공부가 아니라 진짜 법률가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어."민우의 곧은 눈동자가 이현을 향했다. 그 눈빛 속에는 어떠한 불순한 의도나 계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차도혁이라는 사내에게 매일같이 당해왔던 언어적 폭력과 통제욕과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는 태도였다.이현은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이자 주체로 바라봐 주는 사람과의 대화가 이토록 환상적인 것일 줄은 몰랐다."좋아. 스터디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진짜지? 거절당할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이다."민우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두
같은 시각, 태성그룹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대표이사 집무실.차도혁은 넓은 가죽 의자에 기댄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쥐었던 고급 만년필을 부서뜨릴 듯 움켜쥔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전화가 차단당했다. 강이현이라는 사생아 여자가, 감히 차도혁의 전화를 거절하고 차단까지 한 것이다. 평생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모욕감과 당혹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올라 왔다.그때 조심스럽게 비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요청하신 강이현 씨의 오늘 동선 보고입니다.""말해."도혁이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서를 올려놓았다."강이현 씨는 오전 일찍 한국대학교 로스쿨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산그룹 윤 회장님의 막내아들인 윤민우 씨와 함께 도서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윤민우?"도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예. 두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노트를 공유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혁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탁’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단순한 모욕감이 아니었다.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질투와, 제 소유물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포식자의 악랄한 소유욕이었다.'나를 거부하고 찾아간 곳이 고작 윤민우 앞이었나?'항상 자신만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인형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다른 사내의 곁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도혁의 이성을 마비시켰다."강이현..."도혁은 낮게 읊조렸다."네가 나를 버리고 감히 다른 놈에게 가겠다고?"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강이현은 차도혁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비서실장.""예, 대표님.""강이현의 어머니 한서영 씨가 관리하고 있는 재단과 계좌 현황, 전부 조사해라. 그리
이현은 펜을 잡았다. 형법 총론과 민법 판례집을 펼치자, 잊고 있던 법조문들이 뇌리에 차곡차곡 각인되기 시작했다. 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권력과 기만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칼날이었다.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판례를 정리하던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진동음을 울리며 요동쳤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차도혁이었다.이현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대었다."응, 도혁 씨.""강이현. 지금 어디야?"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도혁의 음성은 서늘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평소처럼 상대를 아래로 깔아보는 고압적인 어조였다."집이야.""무슨 집? 네가 살던 그 저택이야, 아니면 그 허름한 오피스텔이야?"도혁의 조소 섞인 물음에 이현은 나지막하게 실소를 흘렸다."내가 어디에 있든 도혁 씨가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그리고 허름하다고 평가하는 건 당신 자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 가식적인 저택이나 당신 펜트하우스보다 여기가 훨씬 숨 쉬기 편해.""너 진짜 미쳤어? 파티룸에서 그 난리를 치고, 유라한테 폭언까지 퍼붓고 그냥 나가 버려?"도혁의 목소리가 한 층 더 거칠어졌다. 언제나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굴던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침없는 언변에 이성적인 통제력이 흔들리는 듯했다."미친 게 아니라 제정신을 차린 거지. 유라한테 한 말은 폭언이 아니라 사실을 바로잡아 준 거 뿐이야.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겨라. 그리고 사생아라는 이유로 남의 심부름이나 하며 눈치 보던 강이현은 이제 없어.""당장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유라한테 사과해.""내가 왜 그래야 하지?"이현은 펜을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내 시간은 당신이나 강유라 같은 사람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사과할 이유도 전혀 없어.""강이현! 너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나랑 파혼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이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의 한서영은 딸의 완전히 달라진 어조에 말을 잃었다."조만간 찾아갈게. 그동안은 강 회장 집안 사람들 전화 오면 받지 마. 알았지?"전화를 끊은 이현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현은 책상에 앉아 두꺼운 법학 책을 펼쳤다. 형법 총론, 민법 및 판례집. 전생에 훑어보았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되어 떠올랐다.형사소송법 제1조, 민법 제103조...법조문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는 이현의 눈빛에 차가운 불꽃이 피어올랐다.'차도혁, 강유라, 그리고 강 회장.'너희가 만든 신분이라는 감옥에서 날 짓밟으려 했던 모든 것들을,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인 법으로 전부 부숴줄 테니까.밤이 깊어가는 동안, 서초동의 작고 어두운 방에는 불빛만이 환하게 꺼지지 않았다. 강이현의 두 번째 인생이 비로소 제대로 된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창문 너머로 비치던 거친 장대비가 비로소 줄어들었지만, 펜트하우스 내부를 감싼 서늘한 정적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차도혁은 한참 동안이나 문가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지고 완벽한 침묵이 파티룸에 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는 바닥에 구겨진 채 뒹굴고 있는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강유라가 요청했던 명품 장신구와 가방의 품번이 적힌 종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을 강이현의 손에 쥐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상의 일부였다. 이현은 언제나 그 서류를 조용히 받아 들었고, 도혁의 무심한 눈길 한 자락에도 감지덕지하며 강유라의 온갖 억지와 심부름을 군소리 없이 감내했었다.사생아라는 비참한 굴레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차도혁이라는 거대한 온실의 그늘 아래 머물기 위해 그녀가 선택했던 비굴한 생존 방식이었다.'그런데 방금 그 여자는 이걸 툭 차 버렸다.'도혁은 서류 봉투를 집어 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빳빳한 종이가 비틀어지며 자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갔다.""네? 벌써요? 내일 모임에 가져갈 장신구 체크해야 하는데... 언니는 왜 이렇게 책임감이 없을까요. 도혁 씨한테도 무례하게 굴고 그냥 간 건 아니죠?"유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혁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도혁은 유라의 손길을 덤덤히 피하며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직접 해라, 유라야.""네? 도혁 씨, 그게 무슨...?""이현이가 네 하수인인가? 네 물건 챙기는 것까지 왜 그 애에게 맡기지?"도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단 한 번도 이현의 편을 들거나 자신에게 뼈 있는 말을 던진 적 없던 도혁이었다."도, 도혁 씨... 저는 그냥 언니가 한가해 보이길래 부탁한 건데...""앞으로는 이런 일로 이현이를 부르지 마. 파티룸도 정리하고 나가라."도혁은 차가운 말을 남긴 채 외투를 챙겨 파티룸을 나섰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졸려오는 이상한 불쾌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강이현의 그 차가운 눈빛이 잔상처럼 남았다.택시에서 내린 이현은 서초동 외곽의 작은 오피스텔로 들어섰다.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살기 시작한 작고 허름한 공간. 하지만 전생의 기억 속 화려하지만 차가웠던 저택보다는 이곳이 훨씬 더 안전하고 평온했다.이현은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는 아직 전생의 비참한 흉터들이 없었다. 오직 매끄럽고 깨끗한 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바꿀 거야. 전부.'샤워를 마친 이현은 옷장 앞으로 향했다. 옷장 안에는 차도혁의 취향에 맞추어 사 모았던 단정하고 여성스러운 원피스들과, 강유라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샀던 은은한 파스텔톤의 옷들이 가득했다. 자신을 지우고 남의 입맛에 맞추어 살아온 흔적들이었다.이현은 망설임 없이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꺼냈다.그리고 옷장에 걸린 옷들을 무자비하게 쓸어 담기 시작했다. 명품 브랜드의 택이 붙은 옷도, 도혁과의 데이트를 위해 몇 달을 고민해 샀던 옷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