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현은 펜을 잡았다. 형법 총론과 민법 판례집을 펼치자, 잊고 있던 법조문들이 뇌리에 차곡차곡 각인되기 시작했다. 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권력과 기만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칼날이었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판례를 정리하던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진동음을 울리며 요동쳤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차도혁이었다.
이현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대었다.
"응, 도혁 씨."
"강이현. 지금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도혁의 음성은 서늘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평소처럼 상대를 아래로 깔아보는 고압적인 어조였다.
"집이야."
"무슨 집? 네가 살던 그 저택이야, 아니면 그 허름한 오피스텔이야?"
도혁의 조소 섞인 물음에 이현은 나지막하게 실소를 흘렸다.
"내가 어디에 있든 도혁 씨가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그리고 허름하다고 평가하는 건 당신 자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 가식적인 저택이나 당신 펜트하우스보다 여기가 훨씬 숨 쉬기 편해."
"너 진짜 미쳤어? 파티룸에서 그 난리를 치고, 유라한테 폭언까지 퍼붓고 그냥 나가 버려?"
도혁의 목소리가 한 층 더 거칠어졌다. 언제나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굴던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침없는 언변에 이성적인 통제력이 흔들리는 듯했다.
"미친 게 아니라 제정신을 차린 거지. 유라한테 한 말은 폭언이 아니라 사실을 바로잡아 준 거 뿐이야.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겨라. 그리고 사생아라는 이유로 남의 심부름이나 하며 눈치 보던 강이현은 이제 없어."
"당장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유라한테 사과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현은 펜을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 시간은 당신이나 강유라 같은 사람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사과할 이유도 전혀 없어."
"강이현! 너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나랑 파혼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도혁이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단어를 꺼내 들었다. 전생의 이현이라면 파혼이라는 단어 두 글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당장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었을 터였다. 도혁과의 약혼은 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밧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현에게 그 밧줄은 그저 목을 죄어 오는 썩은 줄에 불과했다.
"파혼?"
이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내가 그 말을 들으면 겁을 먹고 빌 줄 알았어? 도혁 씨, 큰 착각을 하고 있네. 난 더 이상 당신과의 약혼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 파혼하고 싶다면 언제든 당신이 먼저 가문에 통보해. 난 전혀 아쉬울 것 없으니까."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앞으로 이딴 쓸데없는 일로 전화하지 마."
이현은 차도혁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차도혁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등록했다.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지자 방 안에는 다시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시원한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현은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한국대학교 로스쿨 도서관을 찾았다.
높은 층고와 수많은 법학 서적으로 둘러싸인 도서관 내부에는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치열한 열기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현은 창가 쪽 조용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두꺼운 민법총칙과 형사소송법 책을 펼쳤다.
전생에 훑어보았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되살아났지만, 완벽한 변호사로서 법정에 서기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지식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중요 판례와 법조문을 정갈한 글씨로 적어 내려가며 집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그녀의 옆자리에 의자를 빼고 차분하게 앉았다. 짙은 샌들우드 향과 함께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현이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깔끔하게 정돈된 단정한 머리칼에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훤칠한 체구에 깊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 윤민우였다. 태산그룹의 막내아들이자, 로스쿨 내에서도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안녕?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 다들 열심이라 빈자리가 거의 없네."
민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현은 뜻밖의 접근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했다.
"응, 앉아도 돼."
"고마워. 아까부터 봤는데, 정리하는 노트 스킬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민법총칙 최신 판례까지 깔끔하게 분류해 둔 걸 보니 로스쿨 준비를 엄청 오래 한 모양이야?"
민우는 이현의 노트를 슬쩍 바라보며 진심 어린 탄복을 표했다. 도혁처럼 상대를 아래로 내리까는 눈빛이 아닌, 순수한 존중과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오래했다기보다는...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정리해 두는 거야."
"난 로스쿨 1학년 윤민우라고 해. 혹시 괜찮다면 나중에 스터디나 정보 공유라도 같이 할 수 있을까? 나도 민법 파트에서 자꾸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민우가 다정한 어조로 제안을 건넸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윤민우는 재벌가 후계자라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법조계에서 입지를 다진 유능한 인물이었다.
"난 강이현이야. 스터디는... 생각해 볼게."
"그래,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하지만 혼자 외롭게 공부하는 것보다 서로 판례 토론도 하면서 준비하면 훨씬 효율적이니까. 필요한 자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민우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법률 서적을 펼쳤다. 차갑고 통제적인 차도혁의 존재에만 익숙해져 있던 이현에게, 동등한 인격체로서 다가오는 윤민우의 배려는 생경하면서도 묘한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아니, 판례 자체는 이해했어. 다만 이 판례를 실제 법정에서 어떻게 변형하고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실제 법정이라... 역시 생각하는 깊이가 다르네. 대부분의 입시생들은 시험 지문에 나올 키워드만 외우기 바쁜데, 너는 이미 변호사로서 사건을 대하는 시각을 갖고 있잖아."민우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컵을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어제 네가 정리해 둔 계약법 파트 노트를 잠깐 봤거든. 단순한 조문 암기가 아니라, 계약의 무효와 취소 사유를 실무적인 관점에서 정교하게 나누어 둔 게 인상 깊었어. 혹시 나중에 계약법 스터디라도 같이 해볼 생각 있어? 너한테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서.""나한테 배운다니. 너도 로스쿨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학점 잘 받는 거랑, 실제 법리를 다루는 감각은 다른 법이니까. 무엇보다 너랑 대화하고 있으면 공부가 아니라 진짜 법률가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어."민우의 곧은 눈동자가 이현을 향했다. 그 눈빛 속에는 어떠한 불순한 의도나 계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차도혁이라는 사내에게 매일같이 당해왔던 언어적 폭력과 통제욕과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는 태도였다.이현은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이자 주체로 바라봐 주는 사람과의 대화가 이토록 환상적인 것일 줄은 몰랐다."좋아. 스터디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진짜지? 거절당할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이다."민우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두
같은 시각, 태성그룹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대표이사 집무실.차도혁은 넓은 가죽 의자에 기댄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쥐었던 고급 만년필을 부서뜨릴 듯 움켜쥔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전화가 차단당했다. 강이현이라는 사생아 여자가, 감히 차도혁의 전화를 거절하고 차단까지 한 것이다. 평생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모욕감과 당혹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올라 왔다.그때 조심스럽게 비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요청하신 강이현 씨의 오늘 동선 보고입니다.""말해."도혁이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서를 올려놓았다."강이현 씨는 오전 일찍 한국대학교 로스쿨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산그룹 윤 회장님의 막내아들인 윤민우 씨와 함께 도서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윤민우?"도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예. 두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노트를 공유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혁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탁’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단순한 모욕감이 아니었다.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질투와, 제 소유물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포식자의 악랄한 소유욕이었다.'나를 거부하고 찾아간 곳이 고작 윤민우 앞이었나?'항상 자신만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인형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다른 사내의 곁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도혁의 이성을 마비시켰다."강이현..."도혁은 낮게 읊조렸다."네가 나를 버리고 감히 다른 놈에게 가겠다고?"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강이현은 차도혁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비서실장.""예, 대표님.""강이현의 어머니 한서영 씨가 관리하고 있는 재단과 계좌 현황, 전부 조사해라. 그리
이현은 펜을 잡았다. 형법 총론과 민법 판례집을 펼치자, 잊고 있던 법조문들이 뇌리에 차곡차곡 각인되기 시작했다. 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권력과 기만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칼날이었다.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판례를 정리하던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진동음을 울리며 요동쳤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차도혁이었다.이현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대었다."응, 도혁 씨.""강이현. 지금 어디야?"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도혁의 음성은 서늘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평소처럼 상대를 아래로 깔아보는 고압적인 어조였다."집이야.""무슨 집? 네가 살던 그 저택이야, 아니면 그 허름한 오피스텔이야?"도혁의 조소 섞인 물음에 이현은 나지막하게 실소를 흘렸다."내가 어디에 있든 도혁 씨가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그리고 허름하다고 평가하는 건 당신 자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 가식적인 저택이나 당신 펜트하우스보다 여기가 훨씬 숨 쉬기 편해.""너 진짜 미쳤어? 파티룸에서 그 난리를 치고, 유라한테 폭언까지 퍼붓고 그냥 나가 버려?"도혁의 목소리가 한 층 더 거칠어졌다. 언제나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굴던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침없는 언변에 이성적인 통제력이 흔들리는 듯했다."미친 게 아니라 제정신을 차린 거지. 유라한테 한 말은 폭언이 아니라 사실을 바로잡아 준 거 뿐이야.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겨라. 그리고 사생아라는 이유로 남의 심부름이나 하며 눈치 보던 강이현은 이제 없어.""당장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유라한테 사과해.""내가 왜 그래야 하지?"이현은 펜을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내 시간은 당신이나 강유라 같은 사람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사과할 이유도 전혀 없어.""강이현! 너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나랑 파혼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이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의 한서영은 딸의 완전히 달라진 어조에 말을 잃었다."조만간 찾아갈게. 그동안은 강 회장 집안 사람들 전화 오면 받지 마. 알았지?"전화를 끊은 이현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현은 책상에 앉아 두꺼운 법학 책을 펼쳤다. 형법 총론, 민법 및 판례집. 전생에 훑어보았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되어 떠올랐다.형사소송법 제1조, 민법 제103조...법조문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는 이현의 눈빛에 차가운 불꽃이 피어올랐다.'차도혁, 강유라, 그리고 강 회장.'너희가 만든 신분이라는 감옥에서 날 짓밟으려 했던 모든 것들을,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인 법으로 전부 부숴줄 테니까.밤이 깊어가는 동안, 서초동의 작고 어두운 방에는 불빛만이 환하게 꺼지지 않았다. 강이현의 두 번째 인생이 비로소 제대로 된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창문 너머로 비치던 거친 장대비가 비로소 줄어들었지만, 펜트하우스 내부를 감싼 서늘한 정적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차도혁은 한참 동안이나 문가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지고 완벽한 침묵이 파티룸에 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는 바닥에 구겨진 채 뒹굴고 있는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강유라가 요청했던 명품 장신구와 가방의 품번이 적힌 종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을 강이현의 손에 쥐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상의 일부였다. 이현은 언제나 그 서류를 조용히 받아 들었고, 도혁의 무심한 눈길 한 자락에도 감지덕지하며 강유라의 온갖 억지와 심부름을 군소리 없이 감내했었다.사생아라는 비참한 굴레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차도혁이라는 거대한 온실의 그늘 아래 머물기 위해 그녀가 선택했던 비굴한 생존 방식이었다.'그런데 방금 그 여자는 이걸 툭 차 버렸다.'도혁은 서류 봉투를 집어 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빳빳한 종이가 비틀어지며 자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갔다.""네? 벌써요? 내일 모임에 가져갈 장신구 체크해야 하는데... 언니는 왜 이렇게 책임감이 없을까요. 도혁 씨한테도 무례하게 굴고 그냥 간 건 아니죠?"유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혁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도혁은 유라의 손길을 덤덤히 피하며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직접 해라, 유라야.""네? 도혁 씨, 그게 무슨...?""이현이가 네 하수인인가? 네 물건 챙기는 것까지 왜 그 애에게 맡기지?"도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단 한 번도 이현의 편을 들거나 자신에게 뼈 있는 말을 던진 적 없던 도혁이었다."도, 도혁 씨... 저는 그냥 언니가 한가해 보이길래 부탁한 건데...""앞으로는 이런 일로 이현이를 부르지 마. 파티룸도 정리하고 나가라."도혁은 차가운 말을 남긴 채 외투를 챙겨 파티룸을 나섰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졸려오는 이상한 불쾌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강이현의 그 차가운 눈빛이 잔상처럼 남았다.택시에서 내린 이현은 서초동 외곽의 작은 오피스텔로 들어섰다.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살기 시작한 작고 허름한 공간. 하지만 전생의 기억 속 화려하지만 차가웠던 저택보다는 이곳이 훨씬 더 안전하고 평온했다.이현은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는 아직 전생의 비참한 흉터들이 없었다. 오직 매끄럽고 깨끗한 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바꿀 거야. 전부.'샤워를 마친 이현은 옷장 앞으로 향했다. 옷장 안에는 차도혁의 취향에 맞추어 사 모았던 단정하고 여성스러운 원피스들과, 강유라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샀던 은은한 파스텔톤의 옷들이 가득했다. 자신을 지우고 남의 입맛에 맞추어 살아온 흔적들이었다.이현은 망설임 없이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꺼냈다.그리고 옷장에 걸린 옷들을 무자비하게 쓸어 담기 시작했다. 명품 브랜드의 택이 붙은 옷도, 도혁과의 데이트를 위해 몇 달을 고민해 샀던 옷도 예
차가운 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이현은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명치 끝을 찌르던 서늘한 감각과 차가운 빗물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감돌았다. 분명 이복자매 유라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음습한 바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었다.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비굴하게 헌신했던 지난날의 끝은 그렇게 처참했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서초동에 위치한 약혼자 차도혁의 개인 파티룸이었다.'혹시... 내가 살아서 돌아온 건가.'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2년 전, 아직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기 전의 젊은 모습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대기업 집단의 사생아이자 차도혁의 충실한 약혼녀로 살아가던 시절이었다."강이현, 여기서 뭐 하고 있어?"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태성그룹의 후계자이자 이현의 약혼자인 차도혁이었다. 서늘한 눈빛과 완벽하게 정돈된 수트 차림. 전생에 이현이 목숨 바쳐 사랑했고, 그녀의 희생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남자였다.도혁은 무심한 태도로 이현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던졌다."유라가 이번 사교 모임에 쓸 가방이랑 장신구 목록이다. 네가 알아서 챙겨서 유라한테 전달해."전생의 이현이라면 그 모욕적인 심부름도 군소리 없이 수행했을 것이다. 도혁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어서, 사생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인정받고 싶어서 비굴하게 웃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이현은 달랐다.이현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흘끔 바라보더니, 시선을 올려 도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이었다."내가 왜 그래야 하지?""뭐?"도혁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항상 자신의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못하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조였다."내가 강유라의 하수인도 아니고, 도혁 씨의 심부름꾼은 더더욱 아니야. 앞으론 이런 불필요한 일로 날 부르지 마."이현은 서류 봉투를 툭 차버리고 차분한 걸음으로 파티룸 문을 향해 걸어갔다."강이현, 너 지금 무슨 짓이야? 갑자기 왜 이러지?"도혁이 이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