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은발의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그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옆을 봤다. 레오나르드가 웃고 있었다. 입꼬리는 분명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내 허리를 감싼 손에도 조금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이거. 설마. 나는 다시 은발의 남자를 바라봤다. 짙은 회색 눈동자. 단정한 은발 사이로 살짝 드러난 늑대의 귀.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얼굴이었다. 에드윈 클레멘트 후작. 서부를 다스리는 은빛늑대 일족의 수장. 발테리온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정확히 말하면. 경쟁 관계에 가까운 가문이었다. “영광이에요, 후작님.”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 왜 이래. 나는 레오나르드를 슬쩍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레오나르드?” “왜.” “손.” “응.” “놓아야 제가 춤을 추죠.” “…….” 잠시 정적. 그러다. “그래야 하나?” “당연하죠.” “꼭 춰야 하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님.” “왜.” “지금 설마.”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다른 남자랑 춤추는 게 싫으세요?” “그래.” “…….” 너무 즉답이었다.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왜요?” “싫으니까.” “그러니까 왜 싫냐고요.” “…….”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에드윈이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바라봤다. “혹시 제가 방해한 겁니까?”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동시에. “그런 것 같군.” 레오나르드가 말했다.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왜.” “방해 아니거든요?” “내 기준에는 맞아.” “또 공작님 기준!” “내 기준이 중요한데.” “왜요?” “내 아내니까.” “……계약.” “알아.” 레오나르드가 먼저 잘랐다. “계약 아내.” 그런데도. 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사교계에서 첫 춤 이후에는 다른 상대와 춤춰도 아무 문제 없어요.” “알아.” “그럼 놓으세요.” “싫다.” “왜요?” “저 늑대가 마음에 안 들어.” 에드윈이 웃었다. “제가 다 듣고 있습니다만.” “들으라고 한 말이다.” “레오나르드!” 내가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 단단하다. 아니. 왜 옆구리까지 이렇게 단단해? 꼬집히기는 하는 건가?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나를 내려다봤다. “지금.” “뭐요.” “나 꼬집었나?” “네.” “왜?” “말을 안 들으니까.” “…….”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또. 저 아무것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드의 손등을 톡톡 쳤다. “놓으세요.” “…….” “사람들 봐요.” 그 말에야 레오나르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실제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주 대놓고. 누군가는 부채 뒤에서 속닥거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웃음을 참았다.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것 봐요.” “보라고 해.” “저는 싫어요.” 그 말에. 레오나르드가 멈췄다. 잠시 후.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풀렸다. “알았다.” 나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쉽게? 그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정말 싫다고 하면 결국 놓는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내가 목을 움츠리자 바로 물러났다. ……이상한 사자. 나는 에드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 으르렁. 나는 굳었다. 에드윈도 멈췄다. 주변의 육식계 수인들이 동시에 레오나르드를 바라봤다. 나는 천천히 뒤돌았다. “……공작님.” “왜.” “방금.” “뭐.” “으르렁거렸죠?” “아닌데.” “했잖아요.” “안 했다.” “저도 들었거든요?” 에드윈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들었습니다.” 레오나르드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넌 빠져.” “이래서야 춤을 청한 보람이 있군요.” “뭐?” “제국의 황금사자가 질투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도 멈췄다. 레오나르드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질투. ……설마. 나는 그를 바라봤다. “공작님.” “아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아니까.” “질투해요?” “아니.” “그런데 왜 으르렁거려요?” “본능.” “왜 제 허리에 손 올려요?” “본능.” “왜 향 묻혔어요?” “본능.” “왜 다른 드레스 입으라고 했어요?”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본능?” 잠시 침묵. “그래.” “거짓말.” “…….” “공작님 지금 거짓말했죠?” 황금빛 귀가. 아주 잠깐. 나타났다. 그리고. 움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귀.” 레오나르드가 바로 감췄다. “봤어요.” “못 봤어.” “봤거든요!” “착각이다.” “움직였어요!” “춤이나 춰.” 그가 몸을 돌렸다.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 이 남자. 귀가 솔직하구나.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는 중요한 약점을 발견한 기분으로 에드윈과 무도회장 중앙으로 향했다. ⸻ 음악이 시작됐다. 에드윈은 생각보다 춤을 잘 췄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두 분.” 그가 웃었다. “정말 정략결혼 맞습니까?” 발이 순간 꼬일 뻔했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사교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으니까요.” 계약결혼이라는 것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황금사자와 붉은여우 가문의 정략결혼. 그 정도였다. “맞아요.” “그런데 이상하군요.” “뭐가요?” 에드윈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향했다. “저렇게 보는 정략 남편은 처음이라.”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보는데요?” “궁금하십니까?” “조금.” 에드윈이 낮게 웃었다. “제가 부인의 허리에 손을 올리면 죽이겠다는 얼굴입니다.” “…….” 나는 결국 뒤를 돌아봤다. 레오나르드는 연회장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손에는 샴페인 잔. 표정은 무심했다. 하지만. 황금빛 눈은. 정확히. 에드윈의 손을 보고 있었다. 내 허리에 얹힌 손. “…….” 정말이네. 나는 황급히 앞을 봤다. “원래 사자들은 영역의식이 강하잖아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럼요?” “짝에게 보이는 반응에 가깝죠.” 발이 멈출 뻔했다. “……짝이요?” “예.” “아니에요.” 나는 바로 부정했다. “저희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네.” “그런데 공작 전하의 체향이 부인에게 상당히 진하게 배어 있는데.” “그건!” 목소리가 커졌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봤다. 나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저 인간이 마음대로 묻힌 거예요.” “마음대로?” “네.”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네.” 에드윈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 나는 멈칫했다. 그가 말했다. “수인에게 체향 표시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니까요.” “알아요.” “특히 목덜미 가까이에는.” “목에는 안 했어요.” “다행이군요.” 에드윈이 내 손을 잡은 채 한 바퀴 돌렸다. “배우자라 해도 원하지 않는 표식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이 묘하게 남았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작 전하께서도 그 선은 아실 겁니다.” “……그런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그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드는 계속 장난치고. 향을 묻히고. 나를 당황하게 만들지만. 내가 정말 싫다고 말한 순간에는 멈췄다. 그렇다면. 아까의 체향은. “…….” 내가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아서? 아니. 그렇다고 마음대로 묻혀도 된다는 건 아니지.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해야겠다. 음악이 끝났다. 에드윈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 순간. “거기까지.” 낮은 목소리. 동시에. 내 손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레오나르드가 내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 몸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익숙한 향이 확 밀려왔다. “공작님!” “춤 끝났잖아.” “인사는 해야죠.” “했다.” “누가요?” “내가.” 에드윈이 웃었다. “질투가 아니라더니.” “꺼져.” “예. 오늘은 이만 물러나 드리죠.” 에드윈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즐거웠습니다, 공작부인.” “저도요.” “다음에 또—” “없다.” 레오나르드가 잘랐다. “…….” 에드윈은 결국 웃으며 떠났다. 나는 레오나르드의 가슴을 밀었다. “놔요.” 이번에는 바로 놓아주었다. 나는 그를 노려봤다. “저희 얘기 좀 해요.” “여기서?” “조용한 곳으로 가요.” “…….” 레오나르드가 나를 바라봤다. 왜인지.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 ⸻ 우리는 연회장과 연결된 작은 테라스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음악 소리가 멀어졌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나는 난간 앞에 섰다. 레오나르드가 뒤따라왔다. “말해.” “공작님.” “응.” “앞으로.” 나는 내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제 허락 없이 체향 묻히지 마세요.” 레오나르드의 표정이 굳었다. “…….” “들었죠?” “그래.” 생각보다 바로 대답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안 따져요?” “네가 싫다잖아.” “…….” “그러면 안 해야지.” 또. 이렇다. 나는 괜히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 이번에는 더 놀랐다. “……네?” “아까 마차에서.” “…….” “네 허락을 받았어야 했다.” 나는 레오나르드를 올려다봤다. 그는 장난치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앞으로 안 할게.” “……네.” “네가 허락하기 전에는.” 마지막 말이 묘했다. “허락할 일 없을 건데요.” “그건 모르는 거지.” “공작님.” “왜.” “또 시작이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게 차라리 익숙하다. 나는 난간에 기대었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해.” “아까.” “응.” “질투했어요?” 레오나르드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왜 대답 안 해요?” “아니라고 했잖아.” “에드윈 후작이 제 손 잡았을 때 으르렁거렸잖아요.” “…….” “허리 볼 때도 계속 쳐다보고.” “…….” “춤 끝나자마자 데려왔고.” “세리아.” “네.” “재미있나?” “조금?” “…….” 나는 결국 웃었다. “공작님도 당황하긴 하는구나.” “당황 안 했다.” “귀 나왔잖아요.” “안 나왔다.” “봤다니까요?” “착각.” “또 거짓말.” 나는 그의 머리 위를 빤히 바라봤다. “귀 보여줘요.” “싫어.” “왜요?” “네가 놀릴 거니까.” “안 놀릴게요.” “못 믿겠는데.” “한 번만.” “싫다.” 나는 괜히 오기가 생겼다. “저는 어제 결혼식 내내 귀랑 꼬리 다 보여줬잖아요.” “그건 결혼식이니까.” “공작님도 보여줬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못 봤어요.” “…….” “한 번만 보여줘요.” 레오나르드가 나를 내려다봤다. “보고 싶어?” “네.” 대답하고 나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렇게 보고 싶나.”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내 귀가?” “……네.”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 “너도 보여줘.” “제 귀요?” “그래.” “왜요?” “나도 보고 싶으니까.” “…….” 이상하다. 분명 귀 얘기인데. 왜 분위기가 이렇지? 나는 침을 삼켰다. “그냥 귀인데요.” “그러게.” 레오나르드가 말했다. “그냥 귀인데.” 목소리가 낮아졌다. “왜 그렇게 긴장하지?” “누가 긴장했다고…….” “냄새가 달라졌는데.” “……!” 나는 코를 막았다. 레오나르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거 한다고 안 나는 거 아니다.” “정말 불공평해.” “뭐가.” “공작님은 제 감정 다 알잖아요.” “전부는 몰라.” “냄새로 알면서.” “대충.” “그게 어디예요.” “그럼.” 그가 말했다. “나도 보여줄 테니까.” 황금빛 빛이 그의 머리 위로 희미하게 번졌다. 그리고. 툭. 금빛 귀 두 개가 나타났다. “…….” 나는 말을 잃었다. 사람 모습에서 보니까. 결혼식 때와 또 달랐다. 짙은 금발 사이로 솟은 사자의 귀. 생각보다 둥글고. ……귀엽다. “…….” “왜.” “아니.” “왜 웃지?” “안 웃었어요.” “웃었는데.” “조금.” “…….” 귀 하나가 뒤로 눕혀졌다.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귀여워.” 정적. 레오나르드의 얼굴이 굳었다. “뭐?” “귀요.” “…….” “생각보다 귀여운데요?” 황금빛 귀가 완전히 뒤로 눕혀졌다. “세리아.” “네.” “그 말 취소해.” “왜요?” “사자한테 귀엽다고 하지 마.” “귀여운데 어떡해요.” “…….” 나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락 없이 체향을 묻히지 말라고.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손을 내렸다. “왜.” 레오나르드가 물었다. “아니에요.” “만지고 싶었나?” “……조금.” “그럼 만져.” 나는 눈을 깜빡였다. “돼요?” “허락했잖아.” “…….”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손끝이 황금빛 귀 끝에 닿았다. 부드러웠다. 생각보다 훨씬. “……우와.” 살짝 쓸어보았다. 귀가 움찔했다. “움직였어요.” “당연하지.” “한 번 더.” “세리아.” “잠깐만요.” 이번에는 귀의 둥근 부분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 순간. 탁. 손목이 잡혔다. “……?” 레오나르드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까와 달랐다. 눈빛이 짙었다. 호흡도 조금. 정말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왜 그래요?” “……그만.” “아팠어요?” “아니.” “그럼.” 레오나르드가 내 손목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거기.” “네.” “계속 만지면.” 잠시 침묵.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참기 힘들어.” “……뭘요?” 그가 눈을 떴다. 황금빛 눈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그런 의미구나.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 저는 그냥…….” “알아.” “귀가 귀여워서…….” “그 말도 그만.” “왜요?” “더 이상 귀여운 상태가 아니니까.”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내 손목을 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체온. 숨결. 체향. 모든 것이 선명했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려고 했다. 그 순간. 테라스 문이 열렸다. “공작 전하.” 시종이었다. 우리가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시종이 굳었다. 왜? 나는 의아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레오나르드의 귀는 아직 나와 있었고. 나는 그 바로 앞에 서 있었으며. 내 손은 조금 전까지 그의 귀를 만지고 있었다. 시종의 얼굴이 묘해졌다. “……죄송합니다.” “잠깐.”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쾅. 문이 닫혔다. 나는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 레오나르드가 말했다. “오해했군.” “누구 때문인데요!” “네가 내 귀 만졌잖아.” “허락했잖아요!” “그래.” “그런데 왜 제 탓처럼 말해요?” “탓한 적 없는데.” “표정이 그렇거든요?” 그가 피식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들어가요.” “잠깐.” “또 뭐예요?” 레오나르드가 내 머리 위를 바라봤다. “약속.” “무슨 약속?” “나만 보여줬잖아.” “…….” 아. 내 귀. “꼭 보여줘야 해요?” “싫으면 안 보여줘도 돼.” 그런데. 저렇게 말하니까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잖아.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수인화를 억누르던 마력을 풀었다. 붉은빛이 머리 위로 번졌다. 툭. 붉은 여우 귀가 나타났다. 뒤이어. 풍성한 꼬리도 드레스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됐죠?” 대답이 없다. “공작님?” 레오나르드는 내 얼굴이 아니라. 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꼬리. 다시 귀. “……왜 그렇게 봐요?” “세리아.” “네.” “나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뭔데요?” 그가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꼬리도 만져도 돼?” “안 돼요.” 즉답했다. 레오나르드의 눈썹이 움직였다. “왜.” “왜긴 왜예요!” “나는 귀 만지게 해줬는데.” “귀랑 꼬리가 같아요?” “뭐가 다른데.” 나는 입을 벌렸다. 이 남자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여우 수인에게 꼬리는. 귀보다 훨씬 민감했다. 특히 꼬리의 뿌리 가까이는.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연인이 아니라면 손을 대지 않는 부위였다. “안 돼요.” “알았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런데. 레오나르드의 시선은 여전히 내 꼬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보지도 마세요.” “그건 너무하지 않나.” “왜요?” “눈앞에서 흔들리는데.” 나는 뒤를 봤다. 정말.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 나는 황급히 꼬리를 붙잡았다. 레오나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분 좋나?” “아니거든요.” “꼬리가 그런데.” “바람 때문에!” “실내인데.” “테라스잖아요!” “바람 안 부는데.” “…….” 정말. 이 남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들어가요.”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레오나르드가 갑자기 말했다. “세리아.” “왜요?” “다음에는.” 나는 돌아봤다. 그의 황금빛 귀가 아직도 나와 있었다. “내가 만져도 된다고 생각되는 날이 오면.” 시선이 천천히 내 꼬리로 향했다. “네가 먼저 말해.” “…….” “그전에는 안 건드릴 테니까.” 나는 멈칫했다. 장난스러운 말투가 아니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다. 허락 없이 하지 말라고. “……네.” 나는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을 통과하는 순간에도. 꼬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살랑. 살랑. 기분 좋은 것처럼 움직였다. 나는 황급히 붙잡았다. 정말이지. 이 꼬리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 그날 밤. 연회가 끝난 뒤. 나는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멈췄다. “……?” 침대 위. 어제의 황금빛 담요 옆에.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붉은색 리본이 있었다. 그리고 짧은 쪽지. 꼬리 묶으라고. “…….” 나는 한참 쪽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친 사자!” 옆방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 들려요!”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붉은 리본을 집어 들었다. 부드러운 비단. 꼬리를 상하지 않게 묶는 수인 전용 리본이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대. 나는 한동안 리본을 바라봤다. 그리고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진짜 이상한 남자야.” 그런데. 그날 밤에도. 나는 그의 담요를 덮고 잤다. 이번에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냥. 따뜻했으니까.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은. 그 냄새가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같이 다녀요.”내가 먼저.레오나르드의 손을 잡았다.그리고.황금빛 귀가.툭.나왔다.나는 웃었다.“또 나왔다.”“신경 쓰지 마.”“좋아하면서.”“그래.”이번에는.그가 부정하지 않았다.손가락이.내 손 사이로 들어왔다.천천히.깍지를 꼈다.“좋아.”심장이.따뜻해졌다.나는.잡힌 손을 바라봤다.처음에는.1년만 버티려고 했다.그런데.이제는.하루가 지날수록.다른 생각이 들었다.1년 뒤.헤어지지 않는 방법을.먼저.내가 찾게 되는 건 아닐까.그리고.그 사실이.이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문제는.그날 밤부터였다.“……왜 따라와요?”나는 침실 문 앞에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레오나르드가 너무도 태연하게 서 있었다.“어디를.”“제 뒤요.”“같은 방 쓰잖아.”“아.”맞다.별궁에서는.같은 방.같은 침대.그리고.어젯밤.계약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했고.체향 의식까지 했다.나는 괜히 헛기침했다.“그렇죠.”문을 열었다.그런데.들어가자마자.또 문제가 생겼다.침대.정확히는.침대 위에 놓인 것.“…….”나는 천천히 다가갔다.붉은 꽃잎.황금빛 리본.그리고.침대 한가운데 놓인 작은 카드.“이건 또 뭐예요?”레오나르드가 카드를 집었다.읽었다.그리고.표정이 묘해졌다.“뭔데요?”“…….”“줘봐요.”나는 카드를 빼앗았다.그리고.읽었다.신혼 의식 둘째 날.불길하다.아래.작은 글씨.부부는 서로의 체향을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밤새 같은 이불을 사용합니다.“…….”나는 카드를 뒤집었다.뒷면에도 글이 있었다.가능하다면 서로의 품 안에서 잠드십시오.“…….”나는 그대로 굳었다.레오나르드가 낮게 웃었다.“웃지 마요.”“안 웃었다.”“웃고 있잖아요.”“조금.”“이 가문은 대체 신혼부부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나도 처음 알았다.”“진짜요?”“그래.”“거짓말 아니죠?”“귀 보여줄까.”나는 그를 바라봤다.“……요즘 그거 이용
“두 분이.”엘로디아가 웃으며 말했다.“1년 뒤 헤어지기로 했다는.”정적.방 안의 공기가.완전히 식었다.나는 레오나르드를 바라봤다.그도.나를 보고 있었다.1년.그건.우리 둘만의 계약이었다.정확히는 계약서를 작성한 변호사와 극소수의 측근들만 알고 있는 내용.외부에 알려질 이유가 없었다.특히.과거 레오나르드와 혼담이 오갔던 여자가 알 이유는.더더욱.없었다.내 꼬리가.그의 다리를 더 세게 감았다.이번에는.나도 일부러 풀지 않았다.레오나르드가 아주 천천히 시선을 엘로디아에게 돌렸다.“누구에게 들었지.”목소리가 차가웠다.엘로디아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그게 중요한가요?”“중요하다.”“그냥 소문이에요.”“소문에는 시작점이 있어.”레오나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잠깐.”그가 나를 봤다.“제가 물을게요.”“세리아.”“괜찮아요.”나는 엘로디아를 바라봤다.그리고.웃었다.“영애.”“네.”“그 소문.”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어디서 들으셨어요?”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사교계에서요.”“어느 사교계요?”“…….”“수도에 있는 귀족들이 그렇게 한가한가 봐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남의 결혼 계약 기간까지 알아낼 정도로.”엘로디아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굳이 따지실 필요가 있을까요?”“있죠.”“왜요?”“사실이 아니니까.”말해놓고.심장이 순간 움찔했다.사실이다.정확히.1년 뒤 합의 이혼.계약서에 쓰여 있다.그런데.나는.거짓말을 했다.엘로디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사실이 아니라고요?”“네.”나는 웃었다.“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일부러 레오나르드의 팔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저희 사이가 그렇게 보였나 봐요?”“…….”엘로디아의 시선이.내 손으로 향했다.그리고.내 꼬리.아직도 레오나르드의 다리에 감겨 있는 붉은 꼬리.“공작부인.”그녀가 천천히 말했다.“그럼.”웃었다.“1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그게.가장 큰 문제였다.“…….”바로 앞.레오나르드의 얼굴.느린 숨.흐트러진 금발.그리고.내 허리를 감싼 팔.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이제.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익숙했다.“……큰일 났네.”아주 작게 중얼거렸다.이 상황이.익숙해졌다는 사실이.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그런데.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자는 줄 알았는데.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레오나르드.”대답이 없다.“일어났죠?”침묵.“다 알아요.”그 순간.입꼬리가.아주 조금.올라갔다.“…….”나는 바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일어났잖아요!”황금빛 눈이 천천히 열렸다.“좋은 아침.”“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전.”“거짓말.”“왜.”“웃었잖아요.”“네가 귀여워서.”“또 그 말.”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런데.팔이 아직 허리에 있었다.“손.”“싫어?”“…….”이전 같았으면.바로 놓으라고 했을 텐데.이번에는.대답이 늦었다.그것을.레오나르드도 알아챘다.“세리아.”“네.”“싫으면 놓을게.”나는 잠시 그의 팔을 바라봤다.그리고.아주 작게 말했다.“……조금만 더.”말해놓고.얼굴이 뜨거워졌다.레오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몸이.다시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나도.밀어내지 않았다.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짙은 체향.따뜻한 체온.평온했다.이상할 정도로.“레오나르드.”“응.”“우리.”“그래.”“계약결혼 맞죠?”그의 몸이.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왜 갑자기.”“그냥.”나는 그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자꾸 잊을 것 같아서.”“…….”“이러다.”웃으려고 했는데.잘 안 됐다.“진짜 부부 같잖아요.”침묵.레오나르드가 말했다.“싫어?”“…….”또.그 질문.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을 바라봤다.“아니요.”솔직하게.
“오늘 밤.”나는 닫힌 상자를 바라봤다.“아무 일도 없기는.”시선이 옆으로 향했다.레오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나를 바라봤다.황금빛 눈동자.조금 전까지 나와 있던 귀는 이미 감췄지만.그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나는 봤다.아까.저 귀가 얼마나 바짝 서 있었는지.“…….”분명 나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상하게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나는 괜히 상자를 밀었다.“저녁부터 먹어요.”“그래.”“그리고.”“응.”“아까 그건 잊어요.”“뭘.”“귀 나온 거.”“네 귀?”“공작님 귀요!”레오나르드가 피식 웃었다.“왜.”“왜긴요.”“네 것도 나왔는데.”“저는 놀라서 그런 거고.”“나는?”“…….”말이 막혔다.그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나는 왜 나왔을까.”“모르죠.”“정말?”“네.”“냄새가 다른데.”나는 바로 코를 막았다.“그 말 금지.”“이미 나는데.”“맡지 마요.”“숨 쉬지 말라고?”“적어도 분석하지는 마요!”레오나르드가 웃었다.나는 그를 노려봤다.그러다가.결국.나도 웃고 말았다.정말.이 남자랑 있으면 자꾸 흐름이 이상해진다.⸻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정확히는.나는 계속 음식만 봤다.레오나르드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고.“…….”또.시선이 느껴진다.나는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왜 봐요?”“그냥.”“그냥 왜요.”“귀여워서.”숟가락이 멈췄다.“…….”“왜.”“그 말.”나는 그를 봤다.“자꾸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요.”“왜.”“제가 신경 쓰이잖아요.”말해놓고.멈췄다.아.내가 지금 뭘—레오나르드도 멈췄다.“신경 쓰여?”“…….”“내가?”“그런 뜻이 아니라.”“세리아.”“밥 먹어요.”“대답.”“싫어요.”“왜.”“민망하니까.”솔직하게 말해버렸다.잠시.정적.레오나르드가 아주 조금 웃었다.“알았다.”이번에는 정말 더 묻지 않았다.……저렇게 쉽게 넘어가니까 더 신경 쓰이잖
“한 번 더 하면.”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물었다.“계약 위반이에요?”정적.레오나르드의 황금빛 귀가 바짝 서 있었다.꼬리까지.탁.바닥을 한 번 쳤다.나는 그걸 보고 웃었다.“……기분 좋구나.”“세리아.”“귀가 다 말하는데요?”“지금 그게 중요해?”“조금?”그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웃고 있었다.그리고.나도 웃고 있었다.묘한 기분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쏜 화살 때문에 온몸이 떨렸는데.지금은.전혀 다른 이유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내 손은 여전히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놓아야 하는데.왠지.놓고 싶지 않았다.레오나르드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세리아.”“네.”“한 번 더.”낮은 목소리.“정말 하고 싶어?”“…….”이번에는.내가 선택해야 했다.그가 원하는지 아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저 귀만 봐도 충분했다.중요한 건.내가 원하는지.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조금 전의 입맞춤이 떠올랐다.짧고.조심스러웠다.오히려 너무 빨리 끝나서.아쉬웠다.그럼.답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닐까.“……네.”아주 작게 대답했다.레오나르드의 눈빛이 짙어졌다.“확실해?”“자꾸 물어보면.”괜히 민망해져서.나는 입술을 삐죽였다.“마음 바뀔 수도 있어요.”“그건 곤란한데.”이번에는.그가 바로 다가왔다.하지만.여전히 서두르지는 않았다.한 손이 내 뺨을 감쌌다.손끝이 귀 아래를 천천히 스쳤다.그 작은 접촉만으로도.어깨가 움찔했다.“…….”레오나르드가 멈췄다.“싫어?”“아니요.”“그럼.”“그냥.”나는 시선을 피했다.“간지러워서.”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웃지 마요.”“안 웃었는데.”“웃고 있잖아요.”“조금.”“정말.”말이 끝나기도 전에.그가 몸을 숙였다.입술이 닿았다.이번에는.아까보다 조금 길었다.나는 눈을 감았다.첫 번째 입맞춤은 확인에 가까웠다면.이번에는.서로가 정말 원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았다.레오
“다음에는.”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듣고 싶어지면 물어.”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 “그때는 대답할 테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혹시 레오나르드에게 들릴까 봐. 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검은 셔츠. 넓은 어깨. 조금 흐트러진 금발. 조금 전까지 내 손끝에 닿아 있던 황금빛 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 대체. 뭘 참는다는 걸까. 아니. 사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묻지 못했다. 나는 성인이다. 결혼까지 했다. 아무리 계약결혼이라 해도. 남녀 사이에서. 한 침대 위에서.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레오나르드라서. 문제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내게 그저 황금사자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수인. 무뚝뚝하고. 냉정하고. 결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남자. 나 역시 그를 남자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계약 상대.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결혼한 지 며칠 만에. 이 남자의 냄새가 익숙해졌다. 품에 안기면 편했고. 귀를 만지는 것도 좋았다. 그가 다른 남자를 보고 질투하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오늘. “…….” 나는 내 손을 바라봤다. 아직도 손끝에. 그의 귀를 만졌던 감촉이 남은 것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던. “미쳤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세리아.” “……!”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왜요.” “안 자?” “자고 있었어요.” “말했는데.” “잠꼬대.” “대답도 했는데.” “저 원래 잠꼬대 잘해요.” “처음 듣는데.” “오늘부터 아시면 돼요.” 잠시 침묵. 그리고. 레오나르드가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왜 웃어요.” “안 웃었다.” “또 거짓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