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꽤 마음에 들었나 봐.”
“나가요.” “내가 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냥 나가요!” “복도인데?” “복도에서도 나가요!” 레오나르드가 웃었다. 아주 조금. 그런데 그게 더 얄미웠다. 차라리 대놓고 웃었으면 덜 얄미웠을지도 모른다. 저 인간은 분명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창피한지. “아침 식사.” “안 먹어요.” “왜.” “입맛 없어요.” “조금 전까지 잘 잤잖아.”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잘 잤으면 배고플 텐데.” “누구 때문에 입맛이 없어졌는데요?” 레오나르드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정확히는. 내가 조금 전까지 끌어안고 있던 황금빛 담요로. 나는 황급히 담요를 등 뒤로 밀었다. “보지 마세요.” “이미 봤는데.” “잊으세요.” “왜.” “그냥!” 그가 팔짱을 꼈다. “싫은데.” “…….” 또. 싫은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싫다는 말이 많은 거야? “공작님.” “왜.” “저희 계약서 기억하시죠?” “전부.”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제가 뭘 끌어안고 자든 신경 쓰지 마세요.” “내 털인데.” “…….” “내 냄새도 배어 있고.” “…….” “내가 신경 쓸 만하지 않나?” 할 말이 없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레오나르드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담요를 품에 안았다. 그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렇게 좋아?” “아니거든요!” “그럼 왜 또 안고 있지?” “공작님이 가까이 오니까 치우려고…….” 말하다 멈췄다. ……잠깐. 이거 이상한데. 레오나르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가까이 오면 내 냄새가 나는 담요를 안는다?” “아니.” “그것도 꽤 의미가—” “아니라고요!” 나는 담요를 냅다 던졌다. 퍽. 담요가 레오나르드의 얼굴을 덮었다. “…….” “…….” 아. 망했다. 황금사자 일족의 수장. 제국의 대공. 황제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남자에게. 담요를 던졌다. 그것도 얼굴에. 나는 침을 삼켰다. “……실수예요.”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담요를 내렸다. “실수?” “네.” “내 얼굴을 정확히 맞혔는데?” “여우는 원래 명중률이 좋아요.” “처음 듣는데.” “오늘부터 아시면 돼요.” 정적. 그러다. “풉.” 그가 웃었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지금 웃었죠?” “아니.” “웃었잖아요.” “안 웃었다.” “분명히 들었거든요?” 레오나르드가 담요를 팔에 걸쳤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씻고 내려와.” “안 먹는다니까요.” “오늘 로제니아 상단의 대리인이 온다.” 내 표정이 굳었다. “……누가요?” “로제니아 상단.”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단숨에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왜요?” “네 작은아버지가 보냈다더군.” “…….” 역시. 결혼했다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 가장 먼저 가문의 재산에 손을 대려고 한 사람. 데미안 로제니아. 내 작은아버지. 내가 발테리온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던 인간이었다. “무슨 일로 왔다는데요?” “상단 운영권 문제.” 나는 피식 웃었다. “빠르기도 하지.” “예상했나?” “네.” “그래서 나와 결혼한 거고?” 나는 레오나르드를 바라봤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죠.” “…….” “왜요?” “아무것도.” 또 저 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님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참 많네요.” “네 앞에서는 그런 것 같군.” “무슨 뜻이에요?” “씻고 내려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렸다. “잠깐.” 레오나르드가 멈췄다. 나는 그의 팔에 걸린 담요를 가리켰다. “그거 두고 가세요.” 그가 천천히 돌아봤다. “왜.” “…….” 왜긴. 오늘 밤에도 필요할 것 같아서. 하지만. 죽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제 방 물건이니까요.” “내 털인데.” “저한테 줬잖아요.” “필요 없다며.”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 “공작님.” “응.” “그냥 두고 가요.” 잠시 침묵하던 레오나르드가 담요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나가기 직전. 낮게 덧붙였다. “오늘 밤에도 잘 자겠네.” “나가요!” 문이 닫혔다. 나는 베개를 집어 던졌다. ⸻ 한 시간 뒤. 나는 응접실로 내려갔다. 오늘은 귀와 꼬리를 완전히 감췄다. 어제처럼 내 감정을 레오나르드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해 줄 생각은 없었다. “부인.”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님도요?” “예.”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왜요?” “……예?” “로제니아 가문의 일이잖아요.” 집사가 잠시 당황했다. “공작님께서는 부인의 일이니 당연히 참석하신다고…….” 당연히? 나는 문을 바라봤다. 계약 내용과 달랐다. 레오나르드는 내게 이름을 빌려주면 된다. 발테리온 공작부인이라는 지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가문의 문제까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레오나르드.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대리인 두 명. 그중 한 명은 익숙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이제 아가씨가 아니라 공작부인이죠, 로웬 경.”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레오나르드의 옆자리. 당연하다는 듯 준비된 자리였다. 앉으려는 순간. 레오나르드가 손을 뻗었다. 툭. 내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 나는 그를 바라봤다. “왜.” “아니에요.” 앉았다. 그가 의자를 밀어주었다. 로웬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분명 일부러다. 이 남자는 사교계에서 냉정하기로 유명하다. 아내의 의자를 빼주는 친절한 남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말해.” 레오나르드의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로웬이 흠칫했다. “예, 전하.” “무슨 일로 내 아내를 찾아왔지?” 내 아내. 어제부터 몇 번이나 들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로웬 앞이라서 그런가. “로제니아 상단의 운영권 문제입니다.” 그가 서류를 꺼냈다. “공작부인께서 혼인하셨으니 상단 운영에서 손을 떼시는 것이 옳다는 로제니아 경의 판단입니다.” 예상대로다. 나는 서류를 받았다. “이유는?” “발테리온의 공작부인이 다른 가문의 상단을 운영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요.” “누가 그래요?” “……예?” “제국법 어디에 그런 조항이 있죠?” “그건…….” “상법?” “…….” “귀족법?” “…….” “황실령?” 로웬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없죠?” “하지만 관례상—” “관례는 법이 아니에요.” “공작부인.” “그리고.” 나는 웃었다. “로제니아 상단 지분의 42퍼센트는 제 명의예요.” “…….” “아버지의 지분을 제외하면 단일 최대 주주죠.” “그건 혼인 전의 일이고.” “혼인했다고 제 재산이 사라지나요?” “발테리온 공작가에 귀속될 가능성이—” “없다.”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로웬의 입이 닫혔다. 레오나르드였다. 그가 턱을 괸 채 남자를 바라봤다. “혼인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 “세리아의 혼전 재산은 전부 세리아 로제니아 개인에게 귀속된다.” 내가 그를 바라봤다. 레오나르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니 발테리온을 핑계 삼지 마.” 로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희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무슨 뜻이지?” “…….” “내 아내의 재산을 빼앗겠다는 뜻?” 공기가 변했다. 사자. 그 단어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잊고 있었다. 이 남자가. 제국 최강의 포식자라는 것을. 로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결코 아닙니다.” “그럼.” 레오나르드가 말했다. “돌아가.” “전하.” “그리고 데미안 로제니아에게 전해.” 황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다음부터 내 아내에게 볼일이 있다면 직접 오라고.” “…….” “대리인을 보내 예의를 논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로웬이 서둘러 일어났다. 두 사람은 거의 도망치듯 응접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 그랬어요?” 레오나르드가 나를 봤다. “뭘.” “도와준 거요.” “도와줬나?” “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공작님.”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계약할 때 그랬잖아요.” 서로 필요한 것만 주기로 했다. “저한테 필요한 건 발테리온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알아.” “가문 문제에 직접 개입해 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알아.” “그런데 왜.” 레오나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세리아.” “네.” “한 가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뭘요?” “계약결혼이라고 해서.” 그가 내 앞에 멈췄다. “네가 내 아내가 아닌 건 아니다.” “…….” “1년 동안은.” 레오나르드가 말했다. “확실하게 내 아내야.” 심장이. 쿵. “그러니까 누군가 내 아내를 건드리면.” 그가 허리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내가 개입하는 게 맞지.” “……그건.” “계약에도 없는 내용인가?” “……네.” “그럼 추가해.” “뭐라고요?” “남편은 아내의 편을 든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런 조항이 어디 있어. 계약결혼에.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아주 조금.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필요 없어요.” 나는 시선을 피했다.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알아.” “그런데요?” “네가 혼자 할 수 있는 것과.” 그가 말했다. “혼자 해야 하는 건 다르니까.” “…….” 왜. 이 남자는 가끔.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나는 괜히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먼저 말해 주세요.” “알았다.” “그리고 너무 무섭게 하지 마세요.” “누구를.” “방금 사람들.” “무섭게 안 했는데.” “그게요?” “포효도 안 했고.” “…….” “이빨도 안 보였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냥 말하지 마세요.” ⸻ 문제는. 그날 오후에 터졌다. 발테리온 공작부인으로서 처음 참석하는 황실 연회. 나는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확인했다. 어깨가 드러나는 짙은 적색 드레스. 목선은 생각보다 조금 깊었다. “……너무 파였나?” “아닙니다.” 시녀가 말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래?” “예. 특히 목걸이를 하시면…….” 시녀가 보석함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렸다. “준비됐나.” 레오나르드였다. 나는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검은 예복. 금빛 장식. 평소보다 더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 ……잘생기긴 했다. 아주. 짜증 날 정도로. 그런데. 레오나르드가 갑자기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내 목에 꽂혔다. “왜요?” 대답이 없다. “공작님?”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드레스.” “네.” “다른 거 없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요?” “너무 파였다.” “…….” 나는 내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이 정도는 사교계에서 흔하다. 오히려 얌전한 편이다. “안 파였는데요?” “파였어.” “이 정도가요?” “그래.” “공작님.” “왜.” “혹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제 옷에 간섭하세요?” 그가 입을 다물었다. 계약서.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씨익 웃었다. “계약 위반.” “…….” “벌써 몇 번째예요?” 레오나르드의 표정이 굳었다. “갈아입을 생각 없어?” “네.” “전혀?” “네.” “…….” 그의 시선이 다시 내 목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목과 어깨 사이. 수인에게는 꽤 민감한 곳. 배우자가 체향을 남기는 자리. “거기.” 그가 말했다. “너무 드러나.” “그래서요?” “다른 놈들이 본다.” “보라고 입는 드레스인데요?”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 이거. 재미있는데? 나는 일부러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목선이 더 드러났다. 레오나르드의 턱이 굳었다. “세리아.” “왜요?” “일부러 그러지.” “뭘요?” 나는 웃었다. “계약 남편이 왜 신경 쓰시는데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한 걸음 다가오기 전까지는. “……?” 또 한 걸음. 나는 뒤로 물러났다. “왜 와요?” 레오나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등 뒤로 화장대가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공작님.” 그가 바로 앞에 섰다. 커다란 몸이 시야를 가렸다. “뭐 하려고…….” 손이 올라왔다. 나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내 몸에 닿지 않았다. 대신.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았다. 천천히. 앞으로 가져왔다. 드러나 있던 목선을 붉은 머리카락으로 가렸다. “됐어.” “…….”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뭐 하신 거예요?” “가렸다.” “왜요?” “보기 싫어서.” “뭐가요?” “다른 놈들이 보는 거.” “…….” 목소리가 낮았다. 농담이 아니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지는 것 같았다. “싫으면.”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공작님이 안 보면 되잖아요.” 정적. 레오나르드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차. 그 순간 알았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 “그래?” “……네.” “내가 안 보면 돼?” 그가 조금 더 몸을 숙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화장대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낮은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 떨어졌다. “다른 놈들은 봐도 되고?” “그런 뜻이 아니라…….” “세리아.” 그의 손이 내 옆 화장대를 짚었다.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갇힌 것 같았다. 짙은 체향이 가까워졌다. 사자의 향. 어젯밤. 내가 끌어안고 잠들었던 바로 그 냄새. 내 귀가 나타났다면. 분명 바짝 서 있었을 것이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어떤 식으로요?” “시험하는 것처럼.” “제가 언제…….” “내가 어디까지 참나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까.” 심장이 철렁했다. 레오나르드의 시선이 내려갔다. 눈. 코. 입술. 그리고. 목. 아주 천천히. 다시 올라왔다. “특히.” 그가 말했다. “그 목을 내 앞에서 일부러 드러내면서.” “…….” “그러지 마.” 이번에는 웃을 수 없었다.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왜요?” 겨우 물었다. 레오나르드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물고 싶어지니까.” “……!” 숨이 멎었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어제도 말했지.” “…….” “참고 있다고.” 나는 목을 가렸다. 레오나르드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제야 막혀 있던 숨이 터졌다. “후…….” “그러니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매를 정리했다. “다른 드레스 입어.” “……싫어요.” 레오나르드가 나를 봤다. “아직도?” “네.” 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이거 입을 거예요.” “…….” “계약 위반이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레오나르드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좋아.” 순순히 물러났다. ……뭐지? 왜 더 불안하지? ⸻ 그 이유는. 황실 연회장에 도착하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발테리온 공작 전하와 공작부인께서 입장하십니다!” 수백 개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나는 레오나르드의 팔에 손을 얹었다. 완벽한 부부처럼.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변에 있던 육식계 남성 수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다가. 하나둘. 시선을 피했다. “……?” 왜 저래? 특히 내 쪽을 보던 남자들이 유난히 그랬다. 한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예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레오나르드에게 속삭였다. “공작님.” “왜.” “사람들이 왜 저래요?” “뭐가.” “저를 피하잖아요.”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는 맡았다. 짙은 향. 나무. 숲. 따뜻한 햇빛. “…….” 익숙하다. 너무 익숙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르드가 태연하게 앞을 보고 있었다. “공작님.” “왜.” “저한테.” “응.” “뭐 했어요?” “아무것도.” “거짓말.” 나는 내 머리카락을 잡았다. 향이 났다. 그의 향. 어젯밤 담요보다도 선명했다. “언제 묻혔어요?” “마차에서.” “……언제!” “네가 창밖 볼 때.” 나는 입을 벌렸다. 이 인간이. “계약 위반!” “뭐가.” “영역 표시하지 말랬잖아요!” “그 조항.”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계약서에 아직 안 들어갔는데.” “…….” “네가 추가하자고 했고.”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거절했지.” “…….” 말문이 막혔다. 레오나르드가 아주 조금 웃었다. 그리고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몸이 가까워졌다.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공작님.” “왜.” “손.” “응.” “허리에서 내려요.” “싫은데.” “또!” 나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테리온 공작부인.” 우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늑대 수인. 그는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내 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 나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옆을 바라봤다. 레오나르드가 웃고 있었다. 아주 아름답게. 그런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내 허리를 감싼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아. 나는 직감했다. 이거. 재미있어질 것 같다.“같이 다녀요.”내가 먼저.레오나르드의 손을 잡았다.그리고.황금빛 귀가.툭.나왔다.나는 웃었다.“또 나왔다.”“신경 쓰지 마.”“좋아하면서.”“그래.”이번에는.그가 부정하지 않았다.손가락이.내 손 사이로 들어왔다.천천히.깍지를 꼈다.“좋아.”심장이.따뜻해졌다.나는.잡힌 손을 바라봤다.처음에는.1년만 버티려고 했다.그런데.이제는.하루가 지날수록.다른 생각이 들었다.1년 뒤.헤어지지 않는 방법을.먼저.내가 찾게 되는 건 아닐까.그리고.그 사실이.이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문제는.그날 밤부터였다.“……왜 따라와요?”나는 침실 문 앞에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레오나르드가 너무도 태연하게 서 있었다.“어디를.”“제 뒤요.”“같은 방 쓰잖아.”“아.”맞다.별궁에서는.같은 방.같은 침대.그리고.어젯밤.계약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했고.체향 의식까지 했다.나는 괜히 헛기침했다.“그렇죠.”문을 열었다.그런데.들어가자마자.또 문제가 생겼다.침대.정확히는.침대 위에 놓인 것.“…….”나는 천천히 다가갔다.붉은 꽃잎.황금빛 리본.그리고.침대 한가운데 놓인 작은 카드.“이건 또 뭐예요?”레오나르드가 카드를 집었다.읽었다.그리고.표정이 묘해졌다.“뭔데요?”“…….”“줘봐요.”나는 카드를 빼앗았다.그리고.읽었다.신혼 의식 둘째 날.불길하다.아래.작은 글씨.부부는 서로의 체향을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밤새 같은 이불을 사용합니다.“…….”나는 카드를 뒤집었다.뒷면에도 글이 있었다.가능하다면 서로의 품 안에서 잠드십시오.“…….”나는 그대로 굳었다.레오나르드가 낮게 웃었다.“웃지 마요.”“안 웃었다.”“웃고 있잖아요.”“조금.”“이 가문은 대체 신혼부부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나도 처음 알았다.”“진짜요?”“그래.”“거짓말 아니죠?”“귀 보여줄까.”나는 그를 바라봤다.“……요즘 그거 이용
“두 분이.”엘로디아가 웃으며 말했다.“1년 뒤 헤어지기로 했다는.”정적.방 안의 공기가.완전히 식었다.나는 레오나르드를 바라봤다.그도.나를 보고 있었다.1년.그건.우리 둘만의 계약이었다.정확히는 계약서를 작성한 변호사와 극소수의 측근들만 알고 있는 내용.외부에 알려질 이유가 없었다.특히.과거 레오나르드와 혼담이 오갔던 여자가 알 이유는.더더욱.없었다.내 꼬리가.그의 다리를 더 세게 감았다.이번에는.나도 일부러 풀지 않았다.레오나르드가 아주 천천히 시선을 엘로디아에게 돌렸다.“누구에게 들었지.”목소리가 차가웠다.엘로디아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그게 중요한가요?”“중요하다.”“그냥 소문이에요.”“소문에는 시작점이 있어.”레오나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잠깐.”그가 나를 봤다.“제가 물을게요.”“세리아.”“괜찮아요.”나는 엘로디아를 바라봤다.그리고.웃었다.“영애.”“네.”“그 소문.”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어디서 들으셨어요?”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사교계에서요.”“어느 사교계요?”“…….”“수도에 있는 귀족들이 그렇게 한가한가 봐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남의 결혼 계약 기간까지 알아낼 정도로.”엘로디아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굳이 따지실 필요가 있을까요?”“있죠.”“왜요?”“사실이 아니니까.”말해놓고.심장이 순간 움찔했다.사실이다.정확히.1년 뒤 합의 이혼.계약서에 쓰여 있다.그런데.나는.거짓말을 했다.엘로디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사실이 아니라고요?”“네.”나는 웃었다.“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일부러 레오나르드의 팔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저희 사이가 그렇게 보였나 봐요?”“…….”엘로디아의 시선이.내 손으로 향했다.그리고.내 꼬리.아직도 레오나르드의 다리에 감겨 있는 붉은 꼬리.“공작부인.”그녀가 천천히 말했다.“그럼.”웃었다.“1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그게.가장 큰 문제였다.“…….”바로 앞.레오나르드의 얼굴.느린 숨.흐트러진 금발.그리고.내 허리를 감싼 팔.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이제.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익숙했다.“……큰일 났네.”아주 작게 중얼거렸다.이 상황이.익숙해졌다는 사실이.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그런데.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자는 줄 알았는데.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레오나르드.”대답이 없다.“일어났죠?”침묵.“다 알아요.”그 순간.입꼬리가.아주 조금.올라갔다.“…….”나는 바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일어났잖아요!”황금빛 눈이 천천히 열렸다.“좋은 아침.”“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전.”“거짓말.”“왜.”“웃었잖아요.”“네가 귀여워서.”“또 그 말.”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런데.팔이 아직 허리에 있었다.“손.”“싫어?”“…….”이전 같았으면.바로 놓으라고 했을 텐데.이번에는.대답이 늦었다.그것을.레오나르드도 알아챘다.“세리아.”“네.”“싫으면 놓을게.”나는 잠시 그의 팔을 바라봤다.그리고.아주 작게 말했다.“……조금만 더.”말해놓고.얼굴이 뜨거워졌다.레오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몸이.다시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나도.밀어내지 않았다.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짙은 체향.따뜻한 체온.평온했다.이상할 정도로.“레오나르드.”“응.”“우리.”“그래.”“계약결혼 맞죠?”그의 몸이.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왜 갑자기.”“그냥.”나는 그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자꾸 잊을 것 같아서.”“…….”“이러다.”웃으려고 했는데.잘 안 됐다.“진짜 부부 같잖아요.”침묵.레오나르드가 말했다.“싫어?”“…….”또.그 질문.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을 바라봤다.“아니요.”솔직하게.
“오늘 밤.”나는 닫힌 상자를 바라봤다.“아무 일도 없기는.”시선이 옆으로 향했다.레오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나를 바라봤다.황금빛 눈동자.조금 전까지 나와 있던 귀는 이미 감췄지만.그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나는 봤다.아까.저 귀가 얼마나 바짝 서 있었는지.“…….”분명 나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상하게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나는 괜히 상자를 밀었다.“저녁부터 먹어요.”“그래.”“그리고.”“응.”“아까 그건 잊어요.”“뭘.”“귀 나온 거.”“네 귀?”“공작님 귀요!”레오나르드가 피식 웃었다.“왜.”“왜긴요.”“네 것도 나왔는데.”“저는 놀라서 그런 거고.”“나는?”“…….”말이 막혔다.그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나는 왜 나왔을까.”“모르죠.”“정말?”“네.”“냄새가 다른데.”나는 바로 코를 막았다.“그 말 금지.”“이미 나는데.”“맡지 마요.”“숨 쉬지 말라고?”“적어도 분석하지는 마요!”레오나르드가 웃었다.나는 그를 노려봤다.그러다가.결국.나도 웃고 말았다.정말.이 남자랑 있으면 자꾸 흐름이 이상해진다.⸻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정확히는.나는 계속 음식만 봤다.레오나르드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고.“…….”또.시선이 느껴진다.나는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왜 봐요?”“그냥.”“그냥 왜요.”“귀여워서.”숟가락이 멈췄다.“…….”“왜.”“그 말.”나는 그를 봤다.“자꾸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요.”“왜.”“제가 신경 쓰이잖아요.”말해놓고.멈췄다.아.내가 지금 뭘—레오나르드도 멈췄다.“신경 쓰여?”“…….”“내가?”“그런 뜻이 아니라.”“세리아.”“밥 먹어요.”“대답.”“싫어요.”“왜.”“민망하니까.”솔직하게 말해버렸다.잠시.정적.레오나르드가 아주 조금 웃었다.“알았다.”이번에는 정말 더 묻지 않았다.……저렇게 쉽게 넘어가니까 더 신경 쓰이잖
“한 번 더 하면.”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물었다.“계약 위반이에요?”정적.레오나르드의 황금빛 귀가 바짝 서 있었다.꼬리까지.탁.바닥을 한 번 쳤다.나는 그걸 보고 웃었다.“……기분 좋구나.”“세리아.”“귀가 다 말하는데요?”“지금 그게 중요해?”“조금?”그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웃고 있었다.그리고.나도 웃고 있었다.묘한 기분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쏜 화살 때문에 온몸이 떨렸는데.지금은.전혀 다른 이유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내 손은 여전히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놓아야 하는데.왠지.놓고 싶지 않았다.레오나르드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세리아.”“네.”“한 번 더.”낮은 목소리.“정말 하고 싶어?”“…….”이번에는.내가 선택해야 했다.그가 원하는지 아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저 귀만 봐도 충분했다.중요한 건.내가 원하는지.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조금 전의 입맞춤이 떠올랐다.짧고.조심스러웠다.오히려 너무 빨리 끝나서.아쉬웠다.그럼.답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닐까.“……네.”아주 작게 대답했다.레오나르드의 눈빛이 짙어졌다.“확실해?”“자꾸 물어보면.”괜히 민망해져서.나는 입술을 삐죽였다.“마음 바뀔 수도 있어요.”“그건 곤란한데.”이번에는.그가 바로 다가왔다.하지만.여전히 서두르지는 않았다.한 손이 내 뺨을 감쌌다.손끝이 귀 아래를 천천히 스쳤다.그 작은 접촉만으로도.어깨가 움찔했다.“…….”레오나르드가 멈췄다.“싫어?”“아니요.”“그럼.”“그냥.”나는 시선을 피했다.“간지러워서.”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웃지 마요.”“안 웃었는데.”“웃고 있잖아요.”“조금.”“정말.”말이 끝나기도 전에.그가 몸을 숙였다.입술이 닿았다.이번에는.아까보다 조금 길었다.나는 눈을 감았다.첫 번째 입맞춤은 확인에 가까웠다면.이번에는.서로가 정말 원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았다.레오
“다음에는.”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듣고 싶어지면 물어.”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 “그때는 대답할 테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혹시 레오나르드에게 들릴까 봐. 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검은 셔츠. 넓은 어깨. 조금 흐트러진 금발. 조금 전까지 내 손끝에 닿아 있던 황금빛 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 대체. 뭘 참는다는 걸까. 아니. 사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묻지 못했다. 나는 성인이다. 결혼까지 했다. 아무리 계약결혼이라 해도. 남녀 사이에서. 한 침대 위에서.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레오나르드라서. 문제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내게 그저 황금사자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수인. 무뚝뚝하고. 냉정하고. 결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남자. 나 역시 그를 남자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계약 상대.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결혼한 지 며칠 만에. 이 남자의 냄새가 익숙해졌다. 품에 안기면 편했고. 귀를 만지는 것도 좋았다. 그가 다른 남자를 보고 질투하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오늘. “…….” 나는 내 손을 바라봤다. 아직도 손끝에. 그의 귀를 만졌던 감촉이 남은 것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던. “미쳤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세리아.” “……!”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왜요.” “안 자?” “자고 있었어요.” “말했는데.” “잠꼬대.” “대답도 했는데.” “저 원래 잠꼬대 잘해요.” “처음 듣는데.” “오늘부터 아시면 돼요.” 잠시 침묵. 그리고. 레오나르드가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왜 웃어요.” “안 웃었다.” “또 거짓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