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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맥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01.08.2026 22:50:00

약함의 놋쇠 고리가 다시 부딪히기 전에 문이 열렸다.

태후전 상궁이 먼저 들었다. 잿빛 궁장에 은비녀 하나. 뒤따른 어의는 백발이 귀밑에 성기게 남은 노인이었다. 약함을 든 의관 둘과 기록을 맡은 내관까지 들어서자, 넓지 않은 방이 갑자기 사람으로 찼다.

문가에 앉아 있던 호위 아이가 오른손으로 몸을 일으켰다. 상궁은 붕대에 밴 피를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소월백은 말없이 검을 집어 들고 바깥채로 물러났다. 흰 옷자락이 문턱을 넘는 동안 어의의 눈이 검집을 따라갔고, 상궁의 눈은 그 눈을 따라갔다. 이 방에서는 아이의 피보다 누가 곁을 지켰는지가 먼저 적힐 모양이었다.

상궁의 눈이 서안 위 빈 향갑을 지나, 온보요의 손가락 사이에 눌린 매실에 닿았다. 닿고도 묻지는 않았다.

"변고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 밤새 염려하셨습니다."

사가의 대문은 나흘 동안 닫혀 있었다. 밖으로 나간 것은 북강행 기별 한 장뿐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먼저 저 아이의 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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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85화. 어명

    정문으로 들어간 글은 해가 지기 전, 편전의 마른 찻잔 곁에 놓였다.온보요가 다시 편전에 들었을 때에는 등촉이 넷뿐이었다. 지난번보다 둘이 적었다. 황제는 펼친 겉봉을 서안 한가운데 두고 있었다. 봉하지 않은 입이 보는 이를 향해 벌어져 있었다.서안 곁에는 처음 보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아직 김이 올랐고 잔 가장자리에 연지가 아주 옅게 묻어 있었다. 온보요가 부복하는 동안 내관이 그것을 소매 안으로 감추어 나갔다. 태후전 사람이 먼저 이 글을 읽고 갔다는 자국은, 닦지 않고 일부러 남긴 듯 선명했다."삭왕비는 글에도 문을 달지 않는군.""닫아도 보실 분들이옵니다.""모후를 말하느냐, 짐을 말하느냐.""두 분 모두이옵니다."황제는 잠시 문 쪽을 보았다. 닫힌 문 너머로 떠난 찻잔의 주인을 보는 눈이었다. 용포 소매 아래 손등에 붉은 인주가 한 점 말라 있었다. 오늘 찍은 장계가 많았거나, 찍지 못하고 만 것이 많았을 것이다.황제의 손끝이 답안의 첫 줄을 두드렸다. 벽이옵니다. 먹이 마른 네 글자가 손톱 아래 가렸다 나타났다."짐더러 네 지아비의 무단 이탈에 길을 깔아 주라는 말이구나.""폐하의 벽을 남이 뽑아 갔사옵니다.""아직 북강에 있을 수도 있지."온보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랬으면 좋겠사옵니다."황제의 손가락이 멎었다."너도 모른다?""나흘 전 기별을 보낸 뒤, 두 번째 글은 띄우지 않았사옵니다. 길목마다 눈이 기다릴 것이옵니다."편전 바깥에서 밤 순라의 목탁이 울렸다. 한 번. 멀어졌다가 다시 한 번.황제는 장계 무더기 가운데서 빈 황지를 꺼냈다. 붓을 들고도 곧 쓰지는 않았다."짐이 삭왕을 부르면 조정은 겁을 먹는다. 모후는 노하시고, 허 승상은 병을 핑계로 조회를 비우겠지.""부르지 않으시면 역모 상소가 먼저 궁문을 넘을 것이옵니다.""어느 쪽이든 시끄럽군.""벽이 움직이면 본래 돌 소리가 나옵니다.""그 벽이 군사를 끌고 오면.""오지 않을 것이옵니다.""너는 모른다며.""어디 계신지는 모르오나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84화. 답안

    열흘은 약함의 놋쇠 고리가 대문을 빠져나간 뒤부터 줄기 시작했다.온보요는 어의가 남긴 처방을 화로에 넣었다. 마른 종이 끝에서 불이 붙고, 놀라 위기가 막혔다는 먹글씨가 먼저 오그라들었다. 아이를 품었다는 글자는 애초에 적히지 않았다. 적히지 않은 것이, 적힌 것보다 오래 남을 터였다.종이가 다 타기 전에 늙은 시비가 놋대야를 받쳤다. 재 한 조각도 마루 틈에 남기지 않고 물을 부었다. 매캐한 김이 올라오자 온보요는 고개를 돌렸다. 시비는 그 작은 움직임까지 보고, 화로를 창밖으로 가져갔다. 어제까지는 시중이던 손이 오늘부터 비밀을 지키는 손이 되어 있었다.소월백은 서안 맞은편에서 빈 향갑을 보고 있었다."열흘 안에 왕야가 올까요.""말을 죽여 가며 오면.""그분은 말을 아끼는 사내가 아닙니다.""너도 아니지."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속이 빈 채로 먹을 갈았다. 먹향은 견딜 만했다. 닭국과 당귀에서만 속이 뒤집혔다. 늙은 시비가 창가에 놓은 매실물은 손대지 않았다."내가 북쪽으로 가면 막을 수 있어."소월백의 말에 먹 가는 손이 멎지 않았다."왕야를요?""길을. 그 사내는 못 막겠지.""공자가 사가를 비우면 태후전은 두 번 묻지 않고 들어옵니다."소월백은 더 말하지 않았다. 검집 위에 얹힌 손가락만 한 번 굽었다 펴졌다. 붙잡으러 갈 수도, 곁을 비울 수도 없는 자의 손이었다.서안 위에 새 종이를 폈다.폐하께서 물으신 세 답 가운데 하나를 찾았사옵니다.첫 줄을 쓴 뒤 붓이 잠깐 멎었다. 편전의 등촉 여섯, 마른 찻잔, 용포가 아직 큰 어깨가 종이 위에 떠올랐다. 황제는 삭왕이 칼인지, 벽인지, 적인지 물었다.온보요는 다음 줄을 썼다.벽이옵니다.누군가 폐하의 벽을 제자리에서 뽑아 길 위에 세우려 하옵니다. 신첩이 죽었어도 부고가 갔을 것이고, 살았으니 피격 기별이 갔습니다. 어느 쪽이든 삭왕은 남하합니다. 그 길의 끝에서 역모를 묻고자 하는 자가 있사옵니다.삭왕을 폐하의 이름으로 부르소서.마지막 획을 마친 붓끝에서 먹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83화. 맥

    약함의 놋쇠 고리가 다시 부딪히기 전에 문이 열렸다.태후전 상궁이 먼저 들었다. 잿빛 궁장에 은비녀 하나. 뒤따른 어의는 백발이 귀밑에 성기게 남은 노인이었다. 약함을 든 의관 둘과 기록을 맡은 내관까지 들어서자, 넓지 않은 방이 갑자기 사람으로 찼다.문가에 앉아 있던 호위 아이가 오른손으로 몸을 일으켰다. 상궁은 붕대에 밴 피를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소월백은 말없이 검을 집어 들고 바깥채로 물러났다. 흰 옷자락이 문턱을 넘는 동안 어의의 눈이 검집을 따라갔고, 상궁의 눈은 그 눈을 따라갔다. 이 방에서는 아이의 피보다 누가 곁을 지켰는지가 먼저 적힐 모양이었다.상궁의 눈이 서안 위 빈 향갑을 지나, 온보요의 손가락 사이에 눌린 매실에 닿았다. 닿고도 묻지는 않았다."변고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 밤새 염려하셨습니다."사가의 대문은 나흘 동안 닫혀 있었다. 밖으로 나간 것은 북강행 기별 한 장뿐이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먼저 저 아이의 팔을 보아 주세요. 칼을 받은 지 나흘인데 피가 다시 배었으니."어의는 상궁의 낯을 살핀 뒤에야 아이 앞에 앉았다. 붕대를 풀자 벌어진 살이 드러났다. 다행히 검붉게 죽은 자리는 없었다. 노인은 데운 술로 상처를 씻고 약가루를 눌러 담았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으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온보요는 아이의 맨발 발가락이 바닥을 움켜쥐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상궁이 말했다."이제 마마의 차례이십니다."온보요가 손을 내밀었다. 어의는 손목 위에 흰 명주를 덮었다. 세 손가락이 명주 위에 차례로 앉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다음에는 살이 눌릴 만큼 깊게. 노인의 눈꺼풀이 내려갔다.방 안에서 기와 맞추는 소리만 또각또각 들렸다.세 손가락 가운데 하나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둥근 구슬이 손끝 아래로 미끄러지듯 흐르는 맥을 쫓는 움직임이었다.상궁이 놓치지 않았다."어떠한가."어의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반대쪽 손목도 내어 달라 했다. 온보요는 소매를 걷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다시 내려앉았다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82화. 빈 향갑

    북강에서 털어 내지 않은 꽃잎이 남쪽으로 길을 잡은 그 새벽, 경성 사가에서는 은빛 매화의 밑판이 열렸다.온보요가 가느다란 비녀 끝을 향갑의 이음새에 밀어 넣었다. 은판이 손톱만큼 들리더니, 딸깍 소리를 내며 빠졌다. 패물은 녹여 팔고 비단은 마름질해도, 향갑은 안주인의 손에 오래 머문다. 그래서 밀지를 숨기는 자들은 이런 얕은 바닥을 좋아했다.바닥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먹 한 점도, 향가루 한 톨도. 새 은을 긁은 자국만 둥글게 남아 있었다."사람을 죽이러 온 자가 새 노리개를 품고 왔군."소월백은 등불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흰 소매의 어깨께에는 찢긴 자리를 꿰맨 실이 가늘게 비뚤어져 있었다. 그가 향갑을 뒤집자 매화 다섯 잎이 서안 위에서 반듯하게 빛났다.온보요는 나흘 전의 방을 다시 보았다. 이불을 가르던 칼. 서안을 부순 칼. 호위 아이의 팔을 깊이 벤 칼. 목을 노린 자들은 달아나면서도, 이불 곁에 새 은을 남겼다."그날 밤 일이 적힌 기별은.""나흘 전 북강으로 떠났지."서안 위의 은빛이 차갑게 번졌다."제가 죽었어도 부고가 갔겠지요.""살았으니 피격 기별이 갔고."소월백의 눈이 향갑에서 그녀에게로 들렸다."어느 쪽이든 그 사내는 성벽을 나서겠군.""봉지의 왕이 어명 없이 남하하면, 역모를 묻겠지요.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어도."온보요가 향갑 뚜껑을 닫았다. 빈 물건이 그제야 무거운 소리를 냈다.창밖에서 기와 맞추는 망치가 세 번 울렸다. 반 치 밀려났던 기와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붕은 고쳤으나, 북강으로 간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왕야는 압니다." 그녀가 말했다."알고도 오겠지."소월백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 온보요의 손가락이 향갑 위에서 멎었다. 그 사내가 성벽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자신을 버려두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었다.문가의 호위 아이가 몸을 일으키려다 얼굴을 찌푸렸다. 왼팔의 흰 무명 위로 붉은 것이 새끼손톱만큼 번졌다. 온보요는 보지 않은 척 약그릇을 아이 쪽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81화. 북풍(北風)

    매화 향갑의 기별이 북강에 닿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파발은 역참 여섯을 갈아타며 밤낮없이 달렸다. 자시 넘어 왕부 문루를 두드린 파발꾼은 안장에서 내리다 무릎이 꺾여, 군졸 둘이 부축해 들였다. 서신은 노강의 손을 거쳐 서재로 들어갔다.서재의 등불은 켜져 있었다. 봄 들어 그 등불이 꺼진 밤이 없었다. 심지 갈던 시비가 졸다 데인 뒤로는, 노강이 밤마다 제 손으로 심지를 갈았다.진묵은 서신을 선 채로 읽었다. 두 번 읽지 않았다. 읽고 난 종이를 서안에 내려놓는 손이, 너무 반듯해서— 문가의 노강은 제 등이 먼저 곧아졌다."다친 것은.""호위 아이 하나— 팔이라 하옵니다. 마마께서는 무탈하시다고.""무탈."그 두 글자를 사내는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굴리고 난 낯이, 눈 덮인 산봉우리의 그 낯이었다. 산봉우리 아래서 무엇이 끓는지는, 방 안의 등불만 흔들림으로 알았다. 서안 위에는 남쪽에서 온 서신들이 날짜순으로 각 맞춰 쌓여 있었다. 맨 위의 것만— 각이 틀어져 있었다."노강.""예.""채비해라.""어느 채비를— 여쭈옵니다."진묵은 서안 뒤의 벽으로 걸어갔다. 벽에는 검이 걸려 있었다. 서재의 검— 세자 시절부터 스무 해를 함께 온, 요즘은 장식처럼 걸려만 있던 그 검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벽에서 내렸다. 검이 제 무게로 손안에 앉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에 낮게 울렸다. 검집의 가죽끈이 새것으로 갈려 있었다. 언제 갈았는지는, 노강도 못 본 사이였다."남행 채비다."노강의 숨이 멎었다."왕야. 봉지의 왕이 어명 없이 봉지를 비우는 것은—""안다.""경성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왕야께서 스스로 걸어 들어오시기를— 그 죄목 하나면 저들은—""안다." 진묵은 검을 서안에 눕혔다. 눕히고, 문가의 부관을 바로 보았다. 스무 해를 모신 부관이 처음 보는 눈이었다. "노강. 본왕은 스무 해 동안 성벽 안에서 이겼다. 성벽을 지키는 싸움은— 성벽 안에서 하는 것이니.""하오면 어찌—""한데 본왕의 성벽이 지금 경성에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80화. 밤손님

    밀려난 기와는 밤새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침 볕에 그 틈이, 지붕 위에 가는 그림자 한 줄을 그었다.이튿날 호위 아이는 말없이 마당의 물건들을 옮겼다. 장독 둘을 담 밑으로, 빨랫줄을 반 자 낮게, 마른 살구 가지가 꽂힌 물병을 창가에서 안쪽 서안으로. 옮기는 손이 야무져서, 사가의 시비들은 봄맞이 청소로만 알았다. 저녁상을 물리며 아이는 마마의 방에 화로 부젓가락을 하나 더 들여놓았다. 들여놓으며, 눈으로 서안과 창 사이의 거리를 한 번 쟀다.온보요는 그날 밤 등불을 일찍 껐다. 끄고,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이불 위에 앉아 있었다.삼경이 넘어, 마당의 소리가 한 겹 얇아졌다.풀벌레가 먼저 그쳤다. 다음은 바람. 담 위에서 무언가가 젖은 종이처럼 소리 없이 내려앉았고— 방문의 창호지에 사람 그림자가 스몄다. 하나. 처마 쪽에서 둘.문이 열리는 것과 그림자가 방바닥을 딛는 것과 호위 아이의 단검이 어둠을 긋는 것이, 한 호흡 안에 있었다. 어둠 속의 칼은 소리로 먼저 왔다. 천이 갈리는 소리.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 서안 모서리가 한 뼘 날아갔다.쇠와 쇠가 물리는 소리. 등불 없는 방 안에서 소리만이 싸움의 꼴을 그렸다. 온보요는 이불을 걷어 첫 그림자의 낯을 향해 던지고, 서안 뒤로 물러났다. 서안 위의 벼루가 손에 잡혔다. 두 번째 그림자가 창을 넘던 순간— 벼루가 날았고, 이마에 맞은 그림자가 창틀에서 반 호흡 무너졌다.그 반 호흡 사이로, 마당에서 흰 것이 들이쳤다.소월백의 검은 그믐밤의 그 검이 아니었다. 살기가 실려 있었다. 첫 합에 한 자루가 꺾이고, 둘째 합에 비명이 났다. 그림자 둘이 담을 되넘어 달아나는 소리가 지붕 위로 흩어졌다. 쫓지 않았다. 소월백의 검끝이 문께의 어둠을 반 바퀴 훑고서야, 내려왔다. 그리고— 방 안에는 피 냄새와, 향 냄새가 남았다."등불."소월백의 목소리에 앵무가 덜덜 떨며 불을 붙였다.호위 아이가 문설주에 기대앉아 있었다. 왼팔 소매가 검게 젖어 갔다. 낯은 태연한데, 단검을 쥔 오른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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