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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화 - 자동 회신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29 21:47:57

자동 회신 메일은 아침까지도 받은편지함 맨 위에 걸려 있었다.

재하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채 화면을 다시 눌렀다.

`[공모전 사무국] 문의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밤에는 그 문장이 실행 확인처럼 보였다.

보냈고, 접수됐고, 이제는 물릴 수 없다는 식으로. 그런데 출근길에 다시 보니까 모양이 달랐다.

끝났다는 문장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형식대로 움직이라는 문장에 가까웠다.

본문 아래쪽에 짧은 안내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접수 건 검토 후 담당자가 별도 회신할 수 있으며, 필요 시 추가 증빙자료 제출을 요청드릴 예정입니다.

재하는 엄지로 그 문장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밤새 몇 번이나 봤던 메일인데, 저 한 줄은 아침에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검토. 담당자. 추가 증빙. 갑자기 일이 사람 손을 타기 시작한 기분.

지하철이 역에 멈추자, 누군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휴대폰을 잠갔다가 다시 켰다.

보낸 편지함, 문의 양식 접수 화면 캡처, 전날 밤 정리해 둔 폴더까지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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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츠 단추가 풀렸다.재하가 먼저, 지안이 뒤이어. 블라우스가 벗겨지는 순간 재하 시선이 쇄골에서 멈췄다.그 눈이 너무 또렷해서 지안은 괜히 손으로 가리려다 말았다."왜 봐?""보고 싶었으니까요."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반박이 안 됐다.재하 입술이 목 옆을 따라 내려왔다. 쇄골 위에서 한 번 멈추고, 가슴 사이를 느리게 훑었다.입김이 닿을 때마다 피부가 오그라들었고, 지안은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천천히.."지안이 말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에 가까웠다."네."재하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입술이 아래로 더 내려갔다. 배 위를 지나 허벅지 안쪽에 닿았을 때 지안은 숨을 참다가 결국 놓쳤다.짧은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소리에 재하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한 번 세게 눌렸다."그 소리."재하가 낮게 말했다."어?""좋아요."그 한마디가 목소리째로 피부 위에 닿는 것 같아 재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평소의 판단력 같은 건 이미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재하 손이 허벅지를 벌리고 입술이 더 깊이 닿았을 때 지안 허리가 시트에서 떠올랐다."재하, 잠깐—"멈추라는 게 아니었다.그걸 재하도 알았다. 속도를 조금 늦추되 멈추지 않았다.손가락이 먼저 천천히 들어왔고, 지안은 고개를 젖힌 채 천장을 봤다. 형광등 빛이 흐릿했다. 감각이 한 곳에 모이면서 나머지가 전부 먼 곳으로 밀려났다."괜찮아?"재하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존댓말이 완전히 빠진 목소리. 그 변화가 지안 몸을 한 번 더 떨리게 했다."괜찮아."지안이 눈을 감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다.재하가 다시 올라왔다. 얼굴이 가까워졌고, 이마가 닿았다. 둘 다 숨이 거칠었다.그 상태에서 재하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지안아, 봐."눈을 뜨자 재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고, 눈이 진지했다.장난기는 완전히 없었다. 이 사람의 진짜 얼굴.그 밤에는 어둠 속에서 봤고,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100화 - 선배님이 막잖아요

    퇴근길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서연이 먼저 가방을 챙기면서 "둘이 알아서 가" 한마디를 놓고 나가자 지안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정리했다.소율은 이미 내려갔고, 사무실엔 재하와 둘만 남았다. 재하가 태블릿을 가방에 넣는 동작이 유난히 느렸다. 지안은 그걸 보다가 먼저 말했다."뭐 해?""가방 싸고 있잖아요.""세상에서 제일 느린 짐 싸기네."재하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능글거리는 쪽이 아니라 그냥 좋은 쪽의 웃음이었다. 지안은 괜히 이미 꺼진 모니터를 한 번 더 확인했다."우리 집 갈래?"말이 나가고 나서 조금 아차 싶었다. 아, 이거 예전에도 이렇게 말했지.그때는 횡단보도 앞이었다. 지금은 빈 사무실이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재하가 가방 지퍼를 올리며 대답했다."안 간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아니.""그럼 가죠."밖은 저녁이었다.택시 안에서 재하는 지안 손을 먼저 잡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고, 그 손등이 지안 허벅지에서 손가락 두어 개 거리에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지안이 먼저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오늘은 그 거리를 그대로 뒀다.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길게 지나갈 때마다 재하 손등 위로 빛이 한 번씩 미끄러졌다.지안이 먼저 손을 올렸다.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는 정도. 재하가 그쪽을 보지 않고 아주 작게 웃었다.현관문이 닫혔을 때 둘 다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신발을 벗는 동작, 가방을 내리는 동작, 불을 켜는 동작.그 사이에 들어간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현관에서 긴장이 먼저 올라왔다.비밀이었으니까.그다음에는 피로와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숨길 게 없는 사람들이 집에 같이 온 것.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공기가 더 가벼웠다."물?"지안이 물었다."아뇨."재하가 웃지 않고 말했다."물 마시러 온 거 아니라서요."지안은 재킷을 소파 위에 놓다가 멈췄다."그럼 뭐하러 왔는데?"재하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좁은 거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9화 - 공개

    "재하."이름이 입 밖으로 나간 뒤에도 회의실 공기는 바로 바뀌지 않았다.화가 다 풀린 것도 아니고, 바깥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고, 몇 주를 건너온 마음이 한 번에 정리될 리도 없었다.그런데도 그 한 단어 이후로는 숨길 게 줄었다. 지안은 그걸 먼저 알았다. 더는 다시 모른 척할 수 없는 거리라는 걸.재하는 지안이 손을 놓을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섣불리 끌어안지도 않았고, 급하게 붙잡지도 않았다. 그게 지금은 맞았다.지안이 먼저 열었고, 그래서 재하도 그 속도를 그대로 받는 쪽을 고르는 게."가요."지안이 먼저 말했다."네."둘은 회의실 문을 나섰다. 복도는 퇴근 직전보다 더 조용해져 있었다.멀리서 팀장 목소리가 아직 회의실 안쪽에 걸려 있었고, 프린터 불빛만 하나 남아 있었다.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둘이 같은 복도를 나오는 것부터 신경 썼을 거다. 누가 보는지, 몇 걸음 차이 둘지, 엘리베이터는 따로 탈지. 그런데 오늘은 그런 계산이 올라오지 않았다.그냥 재하랑 나란히 걸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웃길 정도였다.***다음 날 아침, TF는 사실상 끝난 분위기였다.최종본 전달은 마무리됐고, 남은 건 자잘한 수정 대응이랑 종료 정리 정도.팀장은 아침부터 유난히 얼굴이 펴져 있었고, 소율은 "이제 좀 살겠다"는 말을 세 번쯤 했고, 서연은 외부 공유 폴더 정리하면서 삭제해도 되는 버전들을 하나씩 골라냈다.지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뚜껑을 열었다.맞은편에선 재하가 메일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잠깐, 시선이 마주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다 멈췄다.예전 같았으면 바로 돌렸을 거리인데, 오늘은 안 돌려도 됐다. 그 차이가 아직 몸에 안 붙어서 좀 어색했다.그리고 재하는 평소처럼 묻는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커피 식기 전에 드세요."지안은 컵을 들다가 멈췄다.별거 아닌 말인데, 그걸 별거 아닌 얼굴로 듣는 게 낯설었다.예전 같으면 누가 들을까 먼저 봤을 텐데, 오늘은 그 반사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8화 - 다시

    이번엔 자기가 먼저였다.손잡이를 누르자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안엔 재하 혼자 있었다. 통화는 끝난 뒤였는지 휴대폰은 화면만 꺼진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재하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지안을 보자 그대로 멈췄다. 놀란 표정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얼굴. 예상은 못 했는데, 도망치지도 않는 얼굴."잠깐 얘기해요."지안이 먼저 말했다.재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는 몇 걸음이 생각보다 길었다.지안은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다가 결국 의자를 당기지 않았다. 앉으면 괜히 더 오래 돌릴 것 같아서.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돌릴 만큼 돌렸고, 피해 갈 만큼 피해 갔다."나 확인했어요."재하 시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발표본이랑 메일이랑, 사진이랑. 다.""...네.""운영사무국 메일도 봤고."재하는 변명하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말도 바로 안 했다. 그 침묵이 재하답다고 생각하면서, 지안은 괜히 더 짜증이 났다."그게 제일 열받았어."지안이 낮게 말했다."네가 맞았다는 거."재하는 눈을 들었다. 뭔가 말하려는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다시 가라앉았다."내가 나중에야 확인한 것도 열받았고, 네가 그걸 다 해 놓고도 말 안 한 것도 열받았고."지안은 잠깐 쉬었다."아직도 화나요. 늦은 거, 숨긴 거, 멋대로 시작한 거. 다.""알고 있습니다."짧고 조용한 대답이었다."아니, 모를 수도 있지."지안은 피식 웃었다."윤재하 씨는 맨날 절반만 말했으니까."그 말에 재하가 입을 열었다."선배님.""근데."지안이 바로 끊었다. 지금은 저 사람 설명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화가 나는데도, 끝이라고 말하는 건 또 안 되더라."회의실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얇게 돌았다.재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 쪽을 고르는 사람처럼.지안은 테이블 위에 손끝을 짚었다. 손바닥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한동안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7화 - 찾아갈 이유

    내가 먼저 가서 물을 수도 있겠구나.그 생각은 집에 도착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디.지안은 현관에 서서 한참 신발도 못 벗었다. 가방 끈이 어깨에 걸린 채로, 휴대폰만 쥐고 있었다.누구한테 연락할 것도 아니고, 당장 어디로 갈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멈췄다.갈 수 있겠구나, 가야 하나, 는 완전히 다른 문장이라서.지안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거실은 조용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 얇게 들렸다. 생각은 계속 같은 데를 맴돌았다.왜 그랬냐고 묻는 건 이미 늦었다. 그 질문 뒤엔 결국 또 재하 설명만 남을 것 같았다. 지안이 알고 싶은 건 이제 조금 달랐다.그 사람이 뭘 했는지보다, 그걸 다 보고 난 뒤 자기가 뭘 할 건지.그게 어려웠다.지안은 눈을 감았다 뜨고, 머릿속으로만 몇 번 정리했다.용서해 주려고 가는 거 아님.불쌍해서 가는 것도 아님.내가 선택할지 말지, 그걸 더 미루기 싫어서.그 정도까지 오자 좀 숨이 붙었다. 이유가 없어서 못 가는 건 아니었다.이유를 자꾸 상대 쪽에서 찾느라 늦었던 거지.지안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와서야 겨우 방향이 잡히는 게 웃겼다. 그래도 적어도 끌려가는 쪽은 아니라서 전보다 낫긴 했다.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프로젝트 마감 주간 특유의 조급한 공기."오늘 끝나면 TF도 사실상 정리네."소율이 지나가듯 말했고, 지안은 그 말에 손을 잠깐 멈췄다.사실상 정리.그 단어가 유독 오래 남았다.프로젝트가 끝나면 숨길 이유도, 핑계도 같이 줄어든다. 회사 안에서 둘 사이를 가리는 명분도 점점 얇아진다. 그 사실이 갑자기 너무 분명해졌다.계속 미루다 보면 그냥 타이밍이 지나가는 쪽이 먼저 올 수도 있다는 뜻.맞은편에선 재하가 내부 수정본을 정리하고 있었다.대외 공유에서 빠지고 난 뒤로 더 조용해진 자리. 움직임은 평소 같았는데, 일의 결이 달라진 건 이제 누가 봐도 알았다.팀장도 재하한테 말 거는 횟수가 줄었고, 외부 통화는 거의 서연이나 지안 쪽으로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6화 - 거울

    그래도..그 한 단어가 집에 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 올랐다.지안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까지도 그다음 문장을 못 붙였다.그래도. 그 뒤의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차라리 싫다, 아니다, 끝났다, 같은 쪽이면 편했을텐데. 지금은 무슨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소파에 가방을 던져 두고도 한동안 불을 안 켰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길게 걸렸다. 지안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휴대폰만 내려다봤다.연락할 사람도 없고, 올 연락도 없는데 화면만 껐다 켰다.그러다 결국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미치겠네."누가 들을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작았다. 진짜 미치겠다고 소리치는 쪽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지 이제 무시가 안 되는 쪽.다음 날 점심시간 직전에 서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지안.""왜.""밥.""입맛 없어.""그럼 커피.""그것도 없어."서연은 한쪽 눈썹만 올렸다."네가 입맛 없다고 해서 세상이 멈추진 않거든.""박서연.""빨리와."지안은 결국 노트북을 덮었다. 따라나서면서도 기분은 별로였다. 정확히는, 서연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보여서 더.둘은 회사 건물 뒤편 작은 카페로 갔다. 점심시간 끝 무렵이라 사람이 애매하게 빠져 있었다.서연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키고는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았다. 지안은 컵을 받아 놓고도 바로 마시지 않았다."그래서?"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그 뒤로 뭐 했어.""뭘 하긴.""계속 생각했겠지.""너 점쟁이냐.""아니, 네 친구."서연은 빨대를 한 번 눌렀다가 놓았다."표정이 딱 그 얼굴이야. 생각은 엄청 했는데 결론 낸 척하는 얼굴."지안은 웃음도 안 났다."결론 안 냈어.""그것도 알아.""그럼 왜 물어?""네가 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보려고."지안은 그 말에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기준이 뭐긴 뭐야.""왜 자꾸 걔가 뭘 잘못했고 뭘 대가로 내고 있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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