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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作者: SeuMim

1화 연애는 퇴근했습니다

作者: SeuM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0 18:01:47

월요일 오전 여덟 시 반.

지하철 2호선은 오늘도 평화로운 전쟁터였다.

나는 왼손으로 머리 위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오른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출근 전 업무 메일을 미리 확인하려는 모범적인 직장인의 자세였다.

그런데 메일함 대신 엉뚱한 팝업 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년 전 오늘 작성한 메모가 있습니다.]

클라우드 동기화가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모양이다.

무심코 알림을 눌렀다.

화면에 익숙한 제목이 나타났다.

[그에 대해 기억해 둘 것]

스크롤을 조금 내렸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 양파 생으로 들어간 음식 극혐함 (익힌 건 먹음)

• 돈가스는 무조건 등심, 소스는 찍먹

• 셔츠는 목 둘레 100, 팔 길이는 수선 필수

• 가고 싶다고 했던 성수동 사진전 (예매 오픈일 알람 맞춰 둘 것)

• 생일: 11월 14일 / 1주년: 4월 22일

• 기분 상했을 때 대화법: 바로 따지지 말고 일단 밥부터 먹인 뒤 한 시간 뒤에 말 꺼내기

와. 이걸 내가 다 적어 놨었네.

입술이 저절로 삐죽 튀어나왔다.

생일, 기념일, 좋아하는 음식, 심지어 셔츠 사이즈까지.

이 정도면 여자친구가 아니라 거의 대기업 총수 수행비서 수준 아닌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한 칸 더 밀어 올렸다.

제일 아래에 적힌 마지막 줄이 눈에 들어왔다.

• 서운한 점 말할 때는 감정 빼고 육하원칙으로 설명할 것 (안 그러면 피곤해함)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얼른 입술을 꾹 깨물어 소리를 삼켰다.

내가 지난 4년 동안 연애를 한 거야, 악성 민원인 고객 관리 업무를 한 거야?

그때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시선이 내 휴대폰 쪽으로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화면을 내 가슴 쪽으로 숨겼다.

아무도 안 봤어.

아무도 안 봤겠지.

제발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해 줘.

누구에게도 내 호구 연애사가 알려져서는 안된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처음부터 이런 매뉴얼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뭘 먹고 싶어 하는지, 어디에 가고 싶어 하는지 잊지 않으려고 하나씩 적었을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알아 가는 건 즐거웠다.

문제는 그걸 나 혼자만 하고 있었다는 거다.

데이트 장소를 서치한 것도 나였다.

기념일 식당을 예약한 것도 나였다.

다툰 뒤 대화를 시작하려고 눈치를 본 것도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마지막 대답은 기가 막히게 간단했다.

‘해인아, 너는 왜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다 바래?’

사소한 것.

그래.

그 사람에게는 내가 쏟은 시간과 마음이 전부 귀찮고 사소한 짓이었던 거다.

내가 바란 건 오성급 호텔 프로포즈나 명품 가방 따위가 아니었다.

가끔은 상대가 먼저 뭐 하냐고 물어봐 주는 것.

힘든 날에 왜 힘들었냐고 취조하기 전에 그냥 한 번 안아 주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 당연한 사람이 아니라, 잃을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연애 자체가 싫어진 건 아니다.

지금도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면 누군가와 같이 먹고 싶다.

골목길에서 예쁜 카페를 발견하면 다음에 누구랑 같이 와야지, 하는 생각부터 든다.

퇴근길에 웃긴 일을 겪으면 전화해서 떠들고 싶고, 주말에 아무 약속이 없어도 괜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내 연애 세포는 죽지 않았다.

다만 파업에 들어갔을 뿐이다.

다음 연애에서도 나 혼자 전부 기억하고, 나 혼자 약속을 잡고, 내가 왜 서운한지 파워포인트 띄워 놓고 브리핑하듯 설명해야 한다면?

사양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나 혼자 야근해야 유지되는 거라면, 그건 연애가 아니라 중노동이니까.

“연애는 보류다.”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내가 먼저 연락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나를 궁금해하고 먼저 다가오는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류.

물론 스물아홉 해를 살아 본 결과, 그런 유니콘 같은 남자가 내 인생에 갑자기 떨어질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므로 사실상 무기한 보류라는 뜻이다.

나는 메모 우측 상단의 점 세 개를 누르고 삭제를 눌렀다.

[이 메모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잠깐 멈칫했다.

이걸 지운다고 지난 4년이 내 인생에서 아예 증발하는 건 아니겠지.

그냥 더 이상 업데이트할 필요도 더이상 볼 필요도 없는 폐기 문서를 파쇄기에 넣는 거다.

나는 망설임 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

화면을 가득 채웠던 글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가방에 쏙 넣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좋아.

과거 업무 완벽 종료.

오늘부터 내 감정은 무조건 정시 퇴근이다.

딩동댕동.

이번 역은 역삼, 역삼역입니다.

지하철 안내 방송이 정신 차리라는 듯 귀를 때린다..

내가 내릴 역이다.

인파에 밀려 계단을 오르는데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다시 꺼내 보니 회사 업무 메일 알림이었다.

[회의 소집] 신규 프로젝트 〈오늘, 둘이서〉 현장 테스트 기획 회의 (오전 10:00 / 제2회의실)

화면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연애는 방금 깔끔하게 퇴근했는데, 데이트 콘텐츠 기획 업무는 칼같이 출근 도장을 찍어 주신다.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콘텐츠 기획자로 산다는 건 이런 거다.

내 속은 바싹 말라비틀어졌어도, 남들의 연애 세포는 어떻게든 깨워 줘야만 월급이 나오는 삶.

“가 보자, 문해인. 자본주의의 일꾼으로.”

사원증을 목에 걸며 회전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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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26화. 답장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걸까

    그의 메시지를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렸다.다음에는 더 맛있는 걸 먹어요.다음에. 또 다음이다. 휴대전화를 화면이 안 보이게 엎어버렸다.의미 부여하지 말자, 문해인.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먼저 ‘다음 현장 테스트’ 운운하며 다음이라는 단어를 꺼냈으니까, 그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음을 말한 것뿐이다. 같이 일하면서 손발 맞추는 동료끼리 다음에도 밥 한번 먹을 수 있는 거잖아.그런데 왜 나는, 방금 그 짧은 문장을 읽고 자꾸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거지?나는 검지손가락으로 씰룩거리는 내 입가를 꾹 눌렀다. 내려가. 내려가라고, 제발.엎어 둔 휴대전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화면을 힐끗 확인했다. 추가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내가 지금 또 무슨 메시지를 기다리는 건데?나는 미쳤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젓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은 뒤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화요일 아침. 어제 늦게 퇴근했지만, 직장인의 기상 시간은 자비가 없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지하철에서 내려 회사 쪽으로 걸어가는데,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지잉 울렸다. 나는 멈춰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한이준]: 출근 잘했어요?나는 걸음을 확 늦췄다.……출근? 지금 같은 팀원도 아닌 나한테 아침 출근 안부를 물어본 거야?나는 주변을 쓱 한 번 둘러보고는 얼른 답장을 입력했다.[문해인]: 네. 이제 회사 근처 도착했어요. 수석님도 출근 잘하셨어요?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세 발짝을 떼기도 전에 또 알림이 울렸다.[한이준]: 네. 저도 방금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또 바로 읽었다. 이 정도면 내가 답장을 보내는 순간을 휴대전화만 쥐고 뚫어져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건 내가 너무 나갔다. 문해인, 도끼병 금지.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열 걸음쯤 걷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화면을 켰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25화. 답장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걸까

    나는 눈을 비비고 메시지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내렸다.침착하자, 문해인. 이건 그냥 나눈 책 이야기를 업무의 연장선에서 부드럽게 이어 가자는 뜻이겠지. 오늘 갔던 독립서점 B코스를 나중에 보완해서 또 검증하러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기획안에 서로 고른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디테일한 추가 미션을 넣을 수도 있고.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생각하면 이 문장 하나로 파생되는 기획안 선택지가 꽤 많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답장을 입력했다.다음에요?전송하기 직전에 황급히 지웠다.이건 너무 내가 과잉 반응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냥 던진 질문 자체가 의미심장한 건 아니지만, 심장이 뛰고 있는 지금 내 마음 상태로는 너무 의미심장하다.나는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다시 입력했다.업무 아이디어로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이번에도 찝찝해서 보내지 못했다.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물면 정말 사적으로 주말에 같이 읽자는 뜻처럼 들려 버리잖아. ……그런데 나 지금, 같이 책 읽자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왜 이렇게 혼자 섀도복싱하며 오래 고민하는 거야?나는 결국 항복하고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그때, 징- 하고 다시 진동이 울렸다.[한이준]: 오늘 같이 저녁 먹어서 정말 좋았습니다.나는 휴대전화를 든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독립서점과 에세이 책에 관한 생산적인 대화였는데. 이번에는 책 이야기도 아니고, 내일 써야 할 기획안 업무 이야기도 완벽하게 벗어났다.오늘 같이 나란히 앉아 먹은 저녁 식사가 좋았다고, 이 남자가 선을 넘어 먼저 솔직하게 직구를 던져 온 것이다.……이건 절대 팀장님한테 올릴 업무 보고가 아닌데.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저도 맛있고 좋았어요.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손이 오그라들었다.너무 노골적이고 솔직하잖아. 안 돼.지운다.저도 외근 후 식사 즐거웠습니다.다시 읽어 본다.너무 로봇 같고 공식적인 비즈니스 멘트잖아. 이것도 탈락.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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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23화. 우리. 둘이서

    “그건 식사가 아니라 음료인데요.”“안에 카페인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카페인으로 점심 식사까지 완벽하게 해결하시는군요.”“짧은 시간에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그럼 지금 오독오독 씹어 드시는 건요?”“혈당이 떨어져서 당 보충하는 겁니다.”“식사라는 개념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네요.”나는 찔려서 시선을 돌렸다.“오전 보고 회의 끝나고 바로 B코스 자료 정리하느라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어요. 현장 검증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샌드위치라도 먹으려고 했는데…….”“결국 핑계만 대고 못 드셨군요.”“네. 그런셈이죠.”한이준은 신호가 바뀌자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차선을 우측으로 바꿨다.“근처에서 간단히 저녁 먹고 가죠.”나는 깜짝 놀라 그를 홱 돌아보았다.“지금요?”“네.”“이제 코스 검증 업무 시간도 다 끝났고 복귀만 남았는데, 괜찮겠어요?”한이준은 앞을 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배고픈 사람 밥 먹이는 게 그렇게 대단히 큰일인가요?”“큰일은 아니지만…….”“저녁 먹는 건 공식 업무가 아니잖아요.”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백 번 맞다. 저녁 식사는 업무가 아니다.그런데 바로 그 ‘업무가 아니다’라는 사실이 지금 내 심장을 가장 크게 뛰게 하는 문제였다.업무가 아니니까.공식 업무가 아니면……. 왜 갑자기 내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대답하기 어려워지는 거지?나는 괜히 손을 뻗어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시선을 피했다.“……뭐, 그건 그렇죠.”한이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식당 골목으로 우회전 방향지시등을 켰다.“그럼 먹어요. 저도 배고파요.”“이렇게 사전 기안도 없이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건가요?”“해인 과장님이 심각하게 배고픈 건 아까 사탕 소리에서 이미 확인했잖아요.”“제가 제 입으로 배고프다고 정확히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요.”“사탕을 처량하게 식사 대용으로 드시는 건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포토그래퍼라 그런지 관찰력이 아주 상당하시네요.”“

  •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22화. 우리. 둘이서

    내가 그 에세이를 건네자, 한이준이 책을 받아 들며 물었다.“왜 수많은 책 중에 이 책이죠?”나는 적당한 대답을 고르다가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사진을 진짜 잘 찍는 사람은, 남들이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장면을 오랫동안 애정 있게 보는 사람일 것 같아서요.”한이준이 책 표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그건 제 직업에 대한 칭찬 섞인 평가입니까?”“……철저한 관찰 결과입니다.”“그렇군요.”그는 한동안 표지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공기가 잠시 멈춘 것 같았다.“정말 마음에 드네요.”나는 예상보다 훨씬 담담하고 진지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덜컥 당황했다.정말 마음에 든 건가? 아니, 그 속마음을 왜 내가 혼자 짐작하고 궁금해하지?그는 서가에 조심스럽게 책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이 책은 정말 잘 골라 주셨네요. 감사합니다.”나는 어색하게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아직 읽지도 않으셨잖아요. 최종 평가를 내리기는 이릅니다.”“그럼 다 읽고 나서 다음에 제 평가 결과를 확실히 알려 주세요.”“다음 회의 때도 이 책 이야기를 할 생각이세요?”“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다시 이야기할 충분한 가치가 있잖아요.”나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다른 쪽 서가로 휙 걸음을 옮겼다.오후 네 시. 우리는 서점 창가 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제 한이준이 내게 추천할 책을 보여줄 차례였다.그는 무지개색 표지의 얇은 에세이를 내밀었다. 아주 짧은 문장들로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었다.나는 그 책을 받아 들고 제목을 읽었다.“이건 왜 저한테 골라 주셨어요?”“책이 얇고 짧아서요.”“……네?”“농담입니다.”나는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째려보았다.“방금 정말 진지하게 그게 이유인 줄 알았는데요.”“해인 과장님이 황당해하는 표정이 재미있어서 일 초만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기획자를 관찰 대상으로 실험하시는 건가요?”“아까부터

  •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21화. 우리. 둘이서

    월요일 오후. 두 번째 B코스 사전 검증. 우리는 서촌 골목에 자리한 작고 고즈넉한 독립서점에 도착했다.이 코스의 핵심 미션은 명확했다. 서로에게 어울리는 책을 골라 주고, 왜 그 책을 골랐는지 이유 설명하기. 책을 현장에서 결제해야 하는 의무는 없으므로, 책을 고르고 마음을 나누는 소소한 과정이 데이트로서 즐거운지 확인하는 게 핵심이다.나는 빽빽하게 꽂힌 서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설, 에세이, 사진집, 독립 출판물까지 분야는 다양했지만, 어느 쪽 서가에서 멈춰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그때 내 옆에서 사진 구도를 확인하던 한이준이 물었다. “고르는 게 많이 어렵습니까?” “조금요.” “책 종류가 너무 많아서요?” “아니요. 상대에게 어울리는 맞춤형 책을 골라야 하니까요. 솔직히 이준 씨가 평소에 어떤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지 아직 잘 모르잖아요.” 한이준은 서가를 가볍게 둘러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해인 씨가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을 골라도 됩니다.” 나는 즉각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이 코스 기획 미션 의도와 완전히 다르죠. 상대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책을 선물하듯 고르는 게 메인 테마잖아요.”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는 책을 상대에게 소개하고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그러면 그냥 제가 좋아하는 베스트셀러를 무작위로 추천하면 되니까, 상대를 굳이 디테일하게 관찰할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그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기서 천천히 한 번 관찰해 보세요.” 나는 클립보드를 가슴에 안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도 제 딴에는 아주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데요.” 한이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구를 맞은 사람처럼,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방금 그 말, 조금 설레네요.” 나는 서가의 책등을 살피는 척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기획자로서 파트너를 분석하는 평가 항목을 설명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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