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오전 열 시 정각.
제2회의실 대형 모니터에 내가 밤새워 다듬은 기획안이 띄워졌다. [신규 12주 프로젝트: 〈오늘, 둘이서〉 - 오만 원 이하로 즐기는 현실 밀착형 데이트 코스] "다 온건가요?" "비주얼팀 담당자인 한이준 수석 포토그래퍼는 앞선 광고주 미팅이 끝나는 대로 합류한다고 합니다." "그럼 먼저 시작하지." "네." “이 코스는 실제로 다 이용해 본 건가요?” 박 팀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화면을 가리켰다. 나는 노트북과 연결된 포인터로 지도를 짚으며 또렷하게 답했다. “주요 장소는 전부 1차 답사를 마쳤습니다. 다만 12개 코스에 대해서 각각 시작부터 마지막 장소까지 실제 동선대로 검증이 필요합니다.” “장소별로 확인했으면 된 거 아닌가?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달아 가 봐야 할 이유가 있어요?” “실제 커플들의 이동 동선과 체력 소모량을 계산해야 하니까요.” 나는 노트북 키보드를 눌러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지도상으로는 도보 십 분이지만, 그 사이에 언덕이 있는지 횡단보도가 몇 개인지는 직접 걸어 봐야 압니다. 장소 하나씩 떼어 놓으면 훌륭해 보여도 실제로 두 사람이 네 시간 동안 연달어 움직이면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김 대리가 기획안을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트 코스 기획이 생각보다 엄청 살벌하네요. 그냥 인스타 감성 나는 예쁜 카페랑 맛집 몇 군데 묶어 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짰다가는 식당 웨이팅하다가 배고파서 예민해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다가 다리 아파서 말수가 줄어들고, 마지막 카페는 웨이팅 마감돼서 길바닥에 서 있게 됩니다.”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요.” “네. 그 순간부터는 로맨틱한 데이트가 아니라 야외 생존 훈련이 되는 거죠.” 회의실 곳곳에서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박 팀장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문해인 과장, 혹시 본인 경험담이에요? 묘사가 너무 구체적인데.” 순간 마우스를 쥔 손가락이 움찔했다. 3년 전, 아무 계획 없이 핫플레이스에 갔다가 구두 굽은 나가고 식당 세 군데에서 연달아 퇴짜 맞았던 악몽이 스쳤다. 나는 일 초의 흔들림도 없이 평정심을 유지했다. “기획자로서 일반적인 이용자 불편 사례를 시뮬레이션한 겁니다.” 김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에이, 해인 과장님. 대답이 너무 자판기처럼 바로 나왔는데요?” “김 대리님, 지금 기획 회의 중에 사생활 감사까지 진행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사례가 너무 피땀 눈물이 느껴질 만큼 생생해서요.” 나는 웃으며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그 피땀 눈물을 우리 플랫폼 유저들은 흘리지 않게 하려는 거에요. 그래서 우선 이번 주 안에 A코스 현장 검증까지 끝낼 생각이고요.” 회의실에 다시 한 번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 휴. 무사히 업무 이야기로 핸들을 꺾었다. 내 사생활의 흑역사가 콘텐츠 기획의 밑거름이 되다니. 박 팀장이 기획안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체크리스트를 꼼꼼히 살폈다. “검증 항목을 아주 촘촘하게 잘 짰네요. 이동 동선, 시간 배분, 오만 원 예산 준수 여부, 돌발 불편 요소, 그리고 현장 촬영 포인트까지.” “여기에 더해 콘텐츠에 들어갈 현장 안내 문구도 직접 걸으면서 읽어 볼 생각입니다.” 내가 수첩에 펜을 올리며 덧붙였다. “모니터 앞에서 썼을 때는 그럴싸한 문장도, 막상 현장에서 읽으면 오글거리거나 분위기랑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아서요.” 박 팀장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역시 해인 씨가 디테일이 살아 있어. 기획한 사람이 직접 현장을 뛰어 보는 게 가장 정확하겠네요.”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입으로는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눈물을 삼켰다. 좋아. 내 입으로 내 무덤을 팠다. 이번 주 외근 일정 추가요. 그래도 어쩌겠나. 내 이름이 걸린 12주짜리 프로젝트인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걸. 바로 그때였다. 구석에서 노트북으로 메신저를 확인하던 정 사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박 팀장이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정 사원,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생겼어?” “아, 팀장님. 그게…….” 정 사원이 난처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 주 〈오늘, 둘이서〉 1차 현장 테스트에 참여하기로 했던 외부 체험단 커플 있잖아요. 방금 연락이 왔는데, 두 사람이 어젯밤에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고…… 참여가 불가능하답니다.” 회의실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이트 콘텐츠 체험단이 테스트 전날 결별이라니. 세상에 이런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김 대리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아니, 헤어질 거면 테스트 끝나고 헤어지지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박 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달력을 확인했다. “당장 이번 주가 1차 테스트인데, 외부 커플을 새로 섭외해서 사전 안내하고 일정 맞추려면 최소 일주일은 밀리겠네.” 정 사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지금 바로 공고를 다시 올린다 해도 금요일까지는 무리입니다. 테스트가 밀리면 디자인팀이랑 개발팀, 홍보팀 오픈 일정까지 도미노로 다 밀려요.”그의 메시지를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렸다.다음에는 더 맛있는 걸 먹어요.다음에. 또 다음이다. 휴대전화를 화면이 안 보이게 엎어버렸다.의미 부여하지 말자, 문해인.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먼저 ‘다음 현장 테스트’ 운운하며 다음이라는 단어를 꺼냈으니까, 그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음을 말한 것뿐이다. 같이 일하면서 손발 맞추는 동료끼리 다음에도 밥 한번 먹을 수 있는 거잖아.그런데 왜 나는, 방금 그 짧은 문장을 읽고 자꾸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거지?나는 검지손가락으로 씰룩거리는 내 입가를 꾹 눌렀다. 내려가. 내려가라고, 제발.엎어 둔 휴대전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화면을 힐끗 확인했다. 추가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내가 지금 또 무슨 메시지를 기다리는 건데?나는 미쳤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젓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은 뒤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화요일 아침. 어제 늦게 퇴근했지만, 직장인의 기상 시간은 자비가 없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지하철에서 내려 회사 쪽으로 걸어가는데,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지잉 울렸다. 나는 멈춰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한이준]: 출근 잘했어요?나는 걸음을 확 늦췄다.……출근? 지금 같은 팀원도 아닌 나한테 아침 출근 안부를 물어본 거야?나는 주변을 쓱 한 번 둘러보고는 얼른 답장을 입력했다.[문해인]: 네. 이제 회사 근처 도착했어요. 수석님도 출근 잘하셨어요?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세 발짝을 떼기도 전에 또 알림이 울렸다.[한이준]: 네. 저도 방금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또 바로 읽었다. 이 정도면 내가 답장을 보내는 순간을 휴대전화만 쥐고 뚫어져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건 내가 너무 나갔다. 문해인, 도끼병 금지.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열 걸음쯤 걷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화면을 켰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메시지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내렸다.침착하자, 문해인. 이건 그냥 나눈 책 이야기를 업무의 연장선에서 부드럽게 이어 가자는 뜻이겠지. 오늘 갔던 독립서점 B코스를 나중에 보완해서 또 검증하러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기획안에 서로 고른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디테일한 추가 미션을 넣을 수도 있고.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생각하면 이 문장 하나로 파생되는 기획안 선택지가 꽤 많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답장을 입력했다.다음에요?전송하기 직전에 황급히 지웠다.이건 너무 내가 과잉 반응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냥 던진 질문 자체가 의미심장한 건 아니지만, 심장이 뛰고 있는 지금 내 마음 상태로는 너무 의미심장하다.나는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다시 입력했다.업무 아이디어로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이번에도 찝찝해서 보내지 못했다.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물면 정말 사적으로 주말에 같이 읽자는 뜻처럼 들려 버리잖아. ……그런데 나 지금, 같이 책 읽자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왜 이렇게 혼자 섀도복싱하며 오래 고민하는 거야?나는 결국 항복하고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그때, 징- 하고 다시 진동이 울렸다.[한이준]: 오늘 같이 저녁 먹어서 정말 좋았습니다.나는 휴대전화를 든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독립서점과 에세이 책에 관한 생산적인 대화였는데. 이번에는 책 이야기도 아니고, 내일 써야 할 기획안 업무 이야기도 완벽하게 벗어났다.오늘 같이 나란히 앉아 먹은 저녁 식사가 좋았다고, 이 남자가 선을 넘어 먼저 솔직하게 직구를 던져 온 것이다.……이건 절대 팀장님한테 올릴 업무 보고가 아닌데.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저도 맛있고 좋았어요.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손이 오그라들었다.너무 노골적이고 솔직하잖아. 안 돼.지운다.저도 외근 후 식사 즐거웠습니다.다시 읽어 본다.너무 로봇 같고 공식적인 비즈니스 멘트잖아. 이것도 탈락.또
나는 샐러드를 집으려던 포크를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지금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질문이 거기서 왜 나와요?” “우리가 방금 영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가요.” “개연성 있는 영화 이야기와 제 웃는 얼굴은 아무리 끼워 맞춰도 별로 관계가 없는데요.” “매사에 진지하신 과장님이 제가 추천하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실지 궁금해지네요.” “…….”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수석님는 대화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참 자연스럽게 옆길로 돌리시네요.” “제가 사진을 직업으로 찍다 보면, 피사체에 맞춰서 구도를 확 바꿔야 할 때가 자주 있거든요.” “사람 간의 대화에도 구도가 있나요?” “그럼요. 저 혼자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질문하면 그건 취조나 인터뷰가 되잖아요.” “지금 이 상황도 거의 저에 대한 압박 인터뷰 같은데요.” “그럼 이번에는 제가 답하겠습니다. 과장님이 저한테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나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막상 자유롭게 물어보라니, 대체 이 남자의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 수석님은 영화를 고를 때 뭘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무슨 잔상이 남는지요.” “그냥 텍스트적인 내용이요?” “내용도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꼭 거창하고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다 보고 나서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진다거나, 아주 짧은 특정 장면이 여운처럼 오래 기억난다거나. 저는 그런 평범한 것도 아주 좋아합니다.” 특별한 메시지가 없어도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아까 서점에서 건네주었던 에세이의 말과 믾이 닮아 있었다. “……그런 잔잔한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으신가 봐요.” “네. 그리고 영화 다 보고 나서,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도 엄청 좋아합니다.” “그럼 나중에 다음에 한 편 추천해 주세요.” 말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내 입 밖으로 먼저 튀어 나간 뒤에
“그건 식사가 아니라 음료인데요.”“안에 카페인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카페인으로 점심 식사까지 완벽하게 해결하시는군요.”“짧은 시간에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그럼 지금 오독오독 씹어 드시는 건요?”“혈당이 떨어져서 당 보충하는 겁니다.”“식사라는 개념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네요.”나는 찔려서 시선을 돌렸다.“오전 보고 회의 끝나고 바로 B코스 자료 정리하느라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어요. 현장 검증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샌드위치라도 먹으려고 했는데…….”“결국 핑계만 대고 못 드셨군요.”“네. 그런셈이죠.”한이준은 신호가 바뀌자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차선을 우측으로 바꿨다.“근처에서 간단히 저녁 먹고 가죠.”나는 깜짝 놀라 그를 홱 돌아보았다.“지금요?”“네.”“이제 코스 검증 업무 시간도 다 끝났고 복귀만 남았는데, 괜찮겠어요?”한이준은 앞을 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배고픈 사람 밥 먹이는 게 그렇게 대단히 큰일인가요?”“큰일은 아니지만…….”“저녁 먹는 건 공식 업무가 아니잖아요.”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백 번 맞다. 저녁 식사는 업무가 아니다.그런데 바로 그 ‘업무가 아니다’라는 사실이 지금 내 심장을 가장 크게 뛰게 하는 문제였다.업무가 아니니까.공식 업무가 아니면……. 왜 갑자기 내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대답하기 어려워지는 거지?나는 괜히 손을 뻗어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시선을 피했다.“……뭐, 그건 그렇죠.”한이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식당 골목으로 우회전 방향지시등을 켰다.“그럼 먹어요. 저도 배고파요.”“이렇게 사전 기안도 없이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건가요?”“해인 과장님이 심각하게 배고픈 건 아까 사탕 소리에서 이미 확인했잖아요.”“제가 제 입으로 배고프다고 정확히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요.”“사탕을 처량하게 식사 대용으로 드시는 건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포토그래퍼라 그런지 관찰력이 아주 상당하시네요.”“
내가 그 에세이를 건네자, 한이준이 책을 받아 들며 물었다.“왜 수많은 책 중에 이 책이죠?”나는 적당한 대답을 고르다가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사진을 진짜 잘 찍는 사람은, 남들이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장면을 오랫동안 애정 있게 보는 사람일 것 같아서요.”한이준이 책 표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그건 제 직업에 대한 칭찬 섞인 평가입니까?”“……철저한 관찰 결과입니다.”“그렇군요.”그는 한동안 표지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공기가 잠시 멈춘 것 같았다.“정말 마음에 드네요.”나는 예상보다 훨씬 담담하고 진지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덜컥 당황했다.정말 마음에 든 건가? 아니, 그 속마음을 왜 내가 혼자 짐작하고 궁금해하지?그는 서가에 조심스럽게 책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이 책은 정말 잘 골라 주셨네요. 감사합니다.”나는 어색하게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아직 읽지도 않으셨잖아요. 최종 평가를 내리기는 이릅니다.”“그럼 다 읽고 나서 다음에 제 평가 결과를 확실히 알려 주세요.”“다음 회의 때도 이 책 이야기를 할 생각이세요?”“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다시 이야기할 충분한 가치가 있잖아요.”나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다른 쪽 서가로 휙 걸음을 옮겼다.오후 네 시. 우리는 서점 창가 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제 한이준이 내게 추천할 책을 보여줄 차례였다.그는 무지개색 표지의 얇은 에세이를 내밀었다. 아주 짧은 문장들로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었다.나는 그 책을 받아 들고 제목을 읽었다.“이건 왜 저한테 골라 주셨어요?”“책이 얇고 짧아서요.”“……네?”“농담입니다.”나는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째려보았다.“방금 정말 진지하게 그게 이유인 줄 알았는데요.”“해인 과장님이 황당해하는 표정이 재미있어서 일 초만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기획자를 관찰 대상으로 실험하시는 건가요?”“아까부터
월요일 오후. 두 번째 B코스 사전 검증. 우리는 서촌 골목에 자리한 작고 고즈넉한 독립서점에 도착했다.이 코스의 핵심 미션은 명확했다. 서로에게 어울리는 책을 골라 주고, 왜 그 책을 골랐는지 이유 설명하기. 책을 현장에서 결제해야 하는 의무는 없으므로, 책을 고르고 마음을 나누는 소소한 과정이 데이트로서 즐거운지 확인하는 게 핵심이다.나는 빽빽하게 꽂힌 서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설, 에세이, 사진집, 독립 출판물까지 분야는 다양했지만, 어느 쪽 서가에서 멈춰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그때 내 옆에서 사진 구도를 확인하던 한이준이 물었다. “고르는 게 많이 어렵습니까?” “조금요.” “책 종류가 너무 많아서요?” “아니요. 상대에게 어울리는 맞춤형 책을 골라야 하니까요. 솔직히 이준 씨가 평소에 어떤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지 아직 잘 모르잖아요.” 한이준은 서가를 가볍게 둘러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해인 씨가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을 골라도 됩니다.” 나는 즉각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이 코스 기획 미션 의도와 완전히 다르죠. 상대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책을 선물하듯 고르는 게 메인 테마잖아요.”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는 책을 상대에게 소개하고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그러면 그냥 제가 좋아하는 베스트셀러를 무작위로 추천하면 되니까, 상대를 굳이 디테일하게 관찰할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그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기서 천천히 한 번 관찰해 보세요.” 나는 클립보드를 가슴에 안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도 제 딴에는 아주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데요.” 한이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구를 맞은 사람처럼,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방금 그 말, 조금 설레네요.” 나는 서가의 책등을 살피는 척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기획자로서 파트너를 분석하는 평가 항목을 설명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