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내 수첩에 적힌 현장 체크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아주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1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말한 ‘현장 확인’은 체험단 뒤를 유령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메모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체험단이 통째로 증발해 버렸다. 이러면 갑자기 내가 직접 걸어 다녀야 하는 걸 넘어, ‘누구와 함께’ 걸어 다녀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하며 손을 들었다. “그럼 대행사를 통해 일일 아르바이트라도 급하게 구해 볼까요?” 박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일일 알바를 쓰면 피드백의 질이 떨어져요. 시간도 없고. 이번에는 내부에서 동선과 예산, 체험 요소부터 먼저 검증하죠. 실제 커플의 감정 반응이나 만족도는 다음 체험단 테스트에서 확인하고요.” 내부 사전 검증.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회사에는 직원이 많다. 김 대리님이나 정 사원이랑 같이 가서 동선과 예산만 체크하면 되는 거다. 누구랑 짝이 되든 빠르게 돌고 칼퇴근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려던 찰나였다. 똑똑. 회의실 문이 두 번 울리더니 부드럽게 열렸다. “죄송합니다. 앞선 광고주 미팅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조금 늦었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실 공기를 갈랐다. 태블릿과 참고 자료를 한 손에 든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비주얼팀의 수석 포토그래퍼, 한이준이었다. 박 팀장이 손짓했다. “이준 씨, 마침 잘 왔어요. 이번 프로젝트 비주얼 담당이시죠? 현장 테스트 일정도 같이 확인하려던 참이었어요.” 한이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빈자리를 찾다가, 모니터에 띄워진 내 기획안 표지를 보았다. “아, 이게 그 프로젝트군요. 기획팀 문해인 과장님이 담당하시는 거죠?” 순간 숨이 반 박자 멈췄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바짝 들었다. 한이준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문해인 과장님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한이준 수석님.” 내가 대답하자, 오히려 그가 살짝 놀란 듯 눈을 떴다. “어? 저 아세요?” “같은 회사 사람이니까... 알죠..” 내 담담한 대답에 한이준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다행이네요. 저 혼자만 과장님을 알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잠깐만. 내가 모를거라 생각했다고? 아니, 이 남자는 왜 초면에 사람 헷갈리는 말을 저렇게 날씨 이야기하듯 자연스럽게 던지지? 나는 속으로 울리는 경보음을 끄고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사전 공유된 프로젝트 자료에서 이름을 여러 번 봤어요. 비주얼팀에서 라이프스타일 촬영 전담하시는 수석 포토그래퍼시잖아요.” 한이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제 업무가 드디어 기획팀 에이스 분께도 인식이 되고 있었네요.” “제가 아니어도 사내에서 업무 성과로 워낙 유명하시던데요.” “그건 그렇지만, 문과장님께서 직접 알아봐 주신 건 처음이라서요.” 대답이 반 박자 늦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대화 흐름이지? 그냥 같은 사옥 쓰는 직장 동료끼리 이름 석 자 안다는 얘기잖아. 그동안 얘기할 기회가 없었으니 지금 알아봐 주는게 처음인거고. 그런데 왜 내가 괜히 일대일 심층 면접이라도 보는 것처럼 등이 뻣뻣해지는 거냐고. 나는 시선을 거두고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일단 프로젝트 자료부터 확인하시죠. 제가 전체 일정과 개요를 설명해 드릴게요.” “좋습니다. 설명 잘 듣겠습니다.” 한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바로 옆자리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가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을 때 은은한 비누 향이 스쳤다. 이전에 복도나 전체 회의에서 멀리서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A코스는 두 사람이 도보로 이동할 때 피로도가 쌓이지 않도록 동선을 짰고요.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요소를 넣었습니다.” 한이준은 내 노트북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을 확인하는 눈빛은 진지했고, 내 설명이 끝날 때마다 부드럽게 웃으며 필요한 질문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아. 이 사람, 진짜 잘생겼네. 한 박자 늦게 이성이 내 뒤통수를 쳤다. 아니, 잠깐. 일하러 온 거잖아. 얼굴 감상은 프로젝트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때 한이준이 화면의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중간에 있는 공방에서 소품 가게로 넘어가는 골목이요. 거긴 담벼락이 예뻐서 사진을 찍을 만한 지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네요.” “맞아요. 거기가 첫 번째 포토 스폿이에요.” “다만 마지막에 배치된 루프탑 카페는 시간대에 따라 빛이 달라질 수 있어요. 오후 네시 반에서 다섯 시 사이에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현장에서 확인하려고 했어요.” “좋습니다. 그러면 촬영 포인트도 함께 점검하면 되겠네요.” 세상에. 잘생겼는데 일도 잘한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네. ……아니, 지금은 업무 중이다.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자, 문해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박 팀장이 손뼉을 쳤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이번 1차 사전 검증은 두 사람이 직접 가요.” 나와 한이준의 시선이 동시에 박 팀장에게 향했다. 박 팀장이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해인 씨가 기획자 입장에서 동선과 예산을 검증하고, 이준 씨가 촬영 담당자 입장에서 촬영 구도와 현장 촬영 포인트를 함께 확인하는 겁니다. 두 사람이 실제로 움직여 봐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내 눈이 살짝 커졌다. 두 사람이요? 지금 말씀하시는 그 두 사람이 저와 한이준 씨가 맞습니까?그의 메시지를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렸다.다음에는 더 맛있는 걸 먹어요.다음에. 또 다음이다. 휴대전화를 화면이 안 보이게 엎어버렸다.의미 부여하지 말자, 문해인.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먼저 ‘다음 현장 테스트’ 운운하며 다음이라는 단어를 꺼냈으니까, 그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음을 말한 것뿐이다. 같이 일하면서 손발 맞추는 동료끼리 다음에도 밥 한번 먹을 수 있는 거잖아.그런데 왜 나는, 방금 그 짧은 문장을 읽고 자꾸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거지?나는 검지손가락으로 씰룩거리는 내 입가를 꾹 눌렀다. 내려가. 내려가라고, 제발.엎어 둔 휴대전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화면을 힐끗 확인했다. 추가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내가 지금 또 무슨 메시지를 기다리는 건데?나는 미쳤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젓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은 뒤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화요일 아침. 어제 늦게 퇴근했지만, 직장인의 기상 시간은 자비가 없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지하철에서 내려 회사 쪽으로 걸어가는데,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지잉 울렸다. 나는 멈춰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한이준]: 출근 잘했어요?나는 걸음을 확 늦췄다.……출근? 지금 같은 팀원도 아닌 나한테 아침 출근 안부를 물어본 거야?나는 주변을 쓱 한 번 둘러보고는 얼른 답장을 입력했다.[문해인]: 네. 이제 회사 근처 도착했어요. 수석님도 출근 잘하셨어요?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세 발짝을 떼기도 전에 또 알림이 울렸다.[한이준]: 네. 저도 방금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또 바로 읽었다. 이 정도면 내가 답장을 보내는 순간을 휴대전화만 쥐고 뚫어져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건 내가 너무 나갔다. 문해인, 도끼병 금지.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열 걸음쯤 걷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화면을 켰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메시지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내렸다.침착하자, 문해인. 이건 그냥 나눈 책 이야기를 업무의 연장선에서 부드럽게 이어 가자는 뜻이겠지. 오늘 갔던 독립서점 B코스를 나중에 보완해서 또 검증하러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기획안에 서로 고른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디테일한 추가 미션을 넣을 수도 있고.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생각하면 이 문장 하나로 파생되는 기획안 선택지가 꽤 많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답장을 입력했다.다음에요?전송하기 직전에 황급히 지웠다.이건 너무 내가 과잉 반응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냥 던진 질문 자체가 의미심장한 건 아니지만, 심장이 뛰고 있는 지금 내 마음 상태로는 너무 의미심장하다.나는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다시 입력했다.업무 아이디어로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이번에도 찝찝해서 보내지 못했다.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물면 정말 사적으로 주말에 같이 읽자는 뜻처럼 들려 버리잖아. ……그런데 나 지금, 같이 책 읽자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왜 이렇게 혼자 섀도복싱하며 오래 고민하는 거야?나는 결국 항복하고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그때, 징- 하고 다시 진동이 울렸다.[한이준]: 오늘 같이 저녁 먹어서 정말 좋았습니다.나는 휴대전화를 든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독립서점과 에세이 책에 관한 생산적인 대화였는데. 이번에는 책 이야기도 아니고, 내일 써야 할 기획안 업무 이야기도 완벽하게 벗어났다.오늘 같이 나란히 앉아 먹은 저녁 식사가 좋았다고, 이 남자가 선을 넘어 먼저 솔직하게 직구를 던져 온 것이다.……이건 절대 팀장님한테 올릴 업무 보고가 아닌데.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저도 맛있고 좋았어요.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손이 오그라들었다.너무 노골적이고 솔직하잖아. 안 돼.지운다.저도 외근 후 식사 즐거웠습니다.다시 읽어 본다.너무 로봇 같고 공식적인 비즈니스 멘트잖아. 이것도 탈락.또
나는 샐러드를 집으려던 포크를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지금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질문이 거기서 왜 나와요?” “우리가 방금 영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가요.” “개연성 있는 영화 이야기와 제 웃는 얼굴은 아무리 끼워 맞춰도 별로 관계가 없는데요.” “매사에 진지하신 과장님이 제가 추천하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실지 궁금해지네요.” “…….”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수석님는 대화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참 자연스럽게 옆길로 돌리시네요.” “제가 사진을 직업으로 찍다 보면, 피사체에 맞춰서 구도를 확 바꿔야 할 때가 자주 있거든요.” “사람 간의 대화에도 구도가 있나요?” “그럼요. 저 혼자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질문하면 그건 취조나 인터뷰가 되잖아요.” “지금 이 상황도 거의 저에 대한 압박 인터뷰 같은데요.” “그럼 이번에는 제가 답하겠습니다. 과장님이 저한테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나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막상 자유롭게 물어보라니, 대체 이 남자의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 수석님은 영화를 고를 때 뭘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무슨 잔상이 남는지요.” “그냥 텍스트적인 내용이요?” “내용도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꼭 거창하고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다 보고 나서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진다거나, 아주 짧은 특정 장면이 여운처럼 오래 기억난다거나. 저는 그런 평범한 것도 아주 좋아합니다.” 특별한 메시지가 없어도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아까 서점에서 건네주었던 에세이의 말과 믾이 닮아 있었다. “……그런 잔잔한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으신가 봐요.” “네. 그리고 영화 다 보고 나서,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도 엄청 좋아합니다.” “그럼 나중에 다음에 한 편 추천해 주세요.” 말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내 입 밖으로 먼저 튀어 나간 뒤에
“그건 식사가 아니라 음료인데요.”“안에 카페인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카페인으로 점심 식사까지 완벽하게 해결하시는군요.”“짧은 시간에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그럼 지금 오독오독 씹어 드시는 건요?”“혈당이 떨어져서 당 보충하는 겁니다.”“식사라는 개념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네요.”나는 찔려서 시선을 돌렸다.“오전 보고 회의 끝나고 바로 B코스 자료 정리하느라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어요. 현장 검증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샌드위치라도 먹으려고 했는데…….”“결국 핑계만 대고 못 드셨군요.”“네. 그런셈이죠.”한이준은 신호가 바뀌자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차선을 우측으로 바꿨다.“근처에서 간단히 저녁 먹고 가죠.”나는 깜짝 놀라 그를 홱 돌아보았다.“지금요?”“네.”“이제 코스 검증 업무 시간도 다 끝났고 복귀만 남았는데, 괜찮겠어요?”한이준은 앞을 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배고픈 사람 밥 먹이는 게 그렇게 대단히 큰일인가요?”“큰일은 아니지만…….”“저녁 먹는 건 공식 업무가 아니잖아요.”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백 번 맞다. 저녁 식사는 업무가 아니다.그런데 바로 그 ‘업무가 아니다’라는 사실이 지금 내 심장을 가장 크게 뛰게 하는 문제였다.업무가 아니니까.공식 업무가 아니면……. 왜 갑자기 내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대답하기 어려워지는 거지?나는 괜히 손을 뻗어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시선을 피했다.“……뭐, 그건 그렇죠.”한이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식당 골목으로 우회전 방향지시등을 켰다.“그럼 먹어요. 저도 배고파요.”“이렇게 사전 기안도 없이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건가요?”“해인 과장님이 심각하게 배고픈 건 아까 사탕 소리에서 이미 확인했잖아요.”“제가 제 입으로 배고프다고 정확히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요.”“사탕을 처량하게 식사 대용으로 드시는 건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포토그래퍼라 그런지 관찰력이 아주 상당하시네요.”“
내가 그 에세이를 건네자, 한이준이 책을 받아 들며 물었다.“왜 수많은 책 중에 이 책이죠?”나는 적당한 대답을 고르다가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사진을 진짜 잘 찍는 사람은, 남들이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장면을 오랫동안 애정 있게 보는 사람일 것 같아서요.”한이준이 책 표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그건 제 직업에 대한 칭찬 섞인 평가입니까?”“……철저한 관찰 결과입니다.”“그렇군요.”그는 한동안 표지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공기가 잠시 멈춘 것 같았다.“정말 마음에 드네요.”나는 예상보다 훨씬 담담하고 진지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덜컥 당황했다.정말 마음에 든 건가? 아니, 그 속마음을 왜 내가 혼자 짐작하고 궁금해하지?그는 서가에 조심스럽게 책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이 책은 정말 잘 골라 주셨네요. 감사합니다.”나는 어색하게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아직 읽지도 않으셨잖아요. 최종 평가를 내리기는 이릅니다.”“그럼 다 읽고 나서 다음에 제 평가 결과를 확실히 알려 주세요.”“다음 회의 때도 이 책 이야기를 할 생각이세요?”“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다시 이야기할 충분한 가치가 있잖아요.”나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다른 쪽 서가로 휙 걸음을 옮겼다.오후 네 시. 우리는 서점 창가 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제 한이준이 내게 추천할 책을 보여줄 차례였다.그는 무지개색 표지의 얇은 에세이를 내밀었다. 아주 짧은 문장들로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었다.나는 그 책을 받아 들고 제목을 읽었다.“이건 왜 저한테 골라 주셨어요?”“책이 얇고 짧아서요.”“……네?”“농담입니다.”나는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째려보았다.“방금 정말 진지하게 그게 이유인 줄 알았는데요.”“해인 과장님이 황당해하는 표정이 재미있어서 일 초만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기획자를 관찰 대상으로 실험하시는 건가요?”“아까부터
월요일 오후. 두 번째 B코스 사전 검증. 우리는 서촌 골목에 자리한 작고 고즈넉한 독립서점에 도착했다.이 코스의 핵심 미션은 명확했다. 서로에게 어울리는 책을 골라 주고, 왜 그 책을 골랐는지 이유 설명하기. 책을 현장에서 결제해야 하는 의무는 없으므로, 책을 고르고 마음을 나누는 소소한 과정이 데이트로서 즐거운지 확인하는 게 핵심이다.나는 빽빽하게 꽂힌 서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설, 에세이, 사진집, 독립 출판물까지 분야는 다양했지만, 어느 쪽 서가에서 멈춰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그때 내 옆에서 사진 구도를 확인하던 한이준이 물었다. “고르는 게 많이 어렵습니까?” “조금요.” “책 종류가 너무 많아서요?” “아니요. 상대에게 어울리는 맞춤형 책을 골라야 하니까요. 솔직히 이준 씨가 평소에 어떤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지 아직 잘 모르잖아요.” 한이준은 서가를 가볍게 둘러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해인 씨가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을 골라도 됩니다.” 나는 즉각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이 코스 기획 미션 의도와 완전히 다르죠. 상대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책을 선물하듯 고르는 게 메인 테마잖아요.”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는 책을 상대에게 소개하고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그러면 그냥 제가 좋아하는 베스트셀러를 무작위로 추천하면 되니까, 상대를 굳이 디테일하게 관찰할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그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기서 천천히 한 번 관찰해 보세요.” 나는 클립보드를 가슴에 안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도 제 딴에는 아주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데요.” 한이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직구를 맞은 사람처럼,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방금 그 말, 조금 설레네요.” 나는 서가의 책등을 살피는 척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기획자로서 파트너를 분석하는 평가 항목을 설명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