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르셀리아는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들 수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검이 문밖에 서 있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침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아르셀리아께서 보물고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왜 안 갔어.” “현재 거리에서 더 멀어지면 계약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까는 열 걸음이라며.” “그건 낮이었고.” “밤에는 달라?” “조금.” “뭐가.” “저도 확인 중입니다.” 아르셀리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명 계약. 지워진 기억. 용살성검. 그리고. 모든 드래곤을 멸하라는 명령. 단순히 예쁜 검 하나 주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잔뜩 늘어났다. 아르셀리아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붉은빛과 금빛이 얽힌 문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마법으로 지워 보거나, 아예 손목 피부를 한 번 벗겨내서라도 없앴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함부로 손대기가 꺼려졌다. 문양을 건드릴 때마다 아주 약하게 아스테리온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분 나쁘게 가까웠다.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그 사실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아르셀리아가 문을 바라봤다. “들어와.” 문밖이 조용해졌다. 잠시 뒤. “괜찮습니까?” “지금은.” 철컥.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스테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낮과 똑같은 차림인데 표정은 달랐다. 능글맞은 미소가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침실 안쪽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아스테리온이 순순히 앉았다. “침대는 안 됩니다?” “나가.” “농담입니다.” “오늘 농담 금지.”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얌전했다. 그게 오히려 낯설었다. 아르셀리아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팔을 얹었다. “처음부터.” “무엇을요.” “네 안에 있는 명령.”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한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에는?” “감각만 있었습니다.” “어떤 감각.” 아스테리온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드래곤을 보면.”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검이 반응합니다.” “죽이고 싶어져?” 아르셀리아는 일부러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스테리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으로 충분했다. “그렇구나.” “제가 원하는 감정은 아닙니다.” “알아.” “…….”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제 나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 “예.” “나 죽이고 싶었고?” “검은.” 아르셀리아가 바로 잘랐다. “너는.” 아스테리온의 눈이 흔들렸다. 아르셀리아는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너는 나를 죽이고 싶었어?” 긴 침묵. 아스테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됐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한테는 간단해.” 아르셀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의지랑 검에 새겨진 명령이 다르다는 거잖아.” “명령이 더 강해지면.” “그때 생각하지.” “아르셀리아.” “왜.” “너무 쉽게 믿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널?” “예.” “안 믿어.” 아스테리온이 말문을 잃었다. 아르셀리아는 태연했다. “그러니까 옆에 두는 거야.” “…….” “멀리 보내 놨다가 뭔 짓을 하는지 모르는 것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게 낫잖아.”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역시 드래곤이군요.” “왜.” “신뢰보다 소유가 먼저입니다.” “내 건 내가 관리해야지.” “그 말.” “또 좋아?” “예.” 아르셀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보물이라는 말이 좋아?” “아르셀리아가 말할 때는.” “이상해.”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넌 드래곤을 몇 마리 죽였어.” 아스테리온의 미소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주 느리게. “모릅니다.” “기억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예?” “조각은 있습니다.” “어떤.” 아스테리온은 손을 무릎 위에서 천천히 쥐었다. “피.” 짧은 대답이었다. “불타는 비늘.” 그리고. “비명.” 방 안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아르셀리아는 침묵했다. “검이었을 때는 직접 움직였던 게 아니죠. 누군가가 저를 들었고,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건 아닙니다.” “다 느껴?” “예.” “베이는 것도?” “제가 베이는 건 아니니까 아프진 않습니다.” “그럼.” 아스테리온이 잠시 눈을 감았다. “닿는 감각은 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순간 낮의 일을 떠올렸다. 보물고에서 검을 닦았다. 천으로 검신을 쓸고, 먼지를 털고, 손가락으로 날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검은 계속 떨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설마.” 아스테리온이 눈을 떴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어제 너 닦았을 때.” “…….” 정적. 아르셀리아는 그의 표정을 봤다. 조금 전까지 죽은 드래곤 이야기를 하던 얼굴이 아주 미묘하게 굳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느꼈어?” “…….” “아스테리온.” “다른 이야기를 하죠.” “느꼈네.” “아르셀리아.” 이번에는 아르셀리아가 아주 천천히 웃었다. 처음이었다. 늘 아스테리온이 먼저 능글맞게 웃고, 아르셀리아가 귀찮아했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그래서 계속 떨었구나.” “오래된 마도구라 그렇다고 생각하셨다면서요.” “그랬지.” “계속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싫은데.” 아스테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셀리아는 턱을 손등에 기대었다. “검신 어디까지 느껴.” “말하지 않겠습니다.” “전부?” “…….”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전부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저를 경계하시던 분이 갑자기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재밌잖아.” “저는 별로입니다.” “왜.” “주인에게 약점을 들킨 검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아르셀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난 검 아니야.” “그렇군요.” “드래곤이야.”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이번에는 아르셀리아가 웃었다. 아스테리온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 많지 않았다. 보통 무심하거나 귀찮거나, 아주 가끔 마음에 드는 보석을 봤을 때만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 자신 때문에 웃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감정을 아르셀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물었다. “그럼 인간형일 때도 검신이 있어?” “무슨 뜻입니까.” “검은 어디 가 있는데.” “제 몸 자체가 검입니다.” “그럼 지금 만져도 같은 감각이야?”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오늘 농담 금지라고 하신 분이 누구였죠?” “난 농담 아닌데.” “그게 더 문제입니다.” 아르셀리아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스테리온은 이마를 짚었다. “아르셀리아.” “응.” “제가 아무리 검이라도 남자 모습일 때는 남자 취급을 조금 해 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 “검일 때는 검이고 사람일 때는 사람이라는 거야?” “가능하면.” “복잡하네.” “저도 이렇게 복잡해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침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럼 사람일 때는 어디 만지면 안 되는데.” 아스테리온은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그걸 제가 알려 드려도 되는 겁니까?”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제야 익숙한 아스테리온이 돌아왔다. 능글맞고. 뻔뻔하고. 말끝마다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성검. “됐어.” “아쉽군요.” “역시 네가 조용한 게 낫겠다.” “조금 전에는 제 웃음이 없어서 낯설어하시던데.” “내가 언제.” “표정이 그랬습니다.” “내 표정 읽지 마.” “주인의 표정을 살피는 건 무기의 기본 소양입니다.” “또 무기인 척하네.” “필요할 때만.” 아르셀리아가 베개 하나를 집어 던졌다.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받았다. “감사합니다.” “왜.” “오늘 여기서 자라는 뜻 아닙니까?” “아닌데.” “베개를 주셨으니.” “던진 거야.” “받았습니다.” “돌려줘.” 아스테리온은 베개를 품에 안았다. “싫습니다.” 아르셀리아는 그를 한동안 노려봤다. 그러다가 결국 포기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지금 성검과 베개 하나를 두고 실랑이할 기분은 아니었다. “의자에서 자.” “알겠습니다.” “침대로 오지 마.”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말고 확답.”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예. 안 가겠습니다.” 그제야 아르셀리아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자 침실 안이 어두워졌다. 용암의 붉은빛만 창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잠시 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아스테리온.” “예.” “혹시 네가 명령에 휘둘리면.” 말이 잠시 끊겼다. “나한테 먼저 말해.”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남자의 윤곽이 보였다. “들었어?” “예.” “대답.” “…알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럼 자.” 아스테리온은 아주 낮게 말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응.” 잠시 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스테리온은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성검에게 수면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르셀리아가 잠드는 과정을 오래 바라봤다. 규칙적인 숨. 이불 위에 느슨하게 놓인 손.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반쯤 보이는 뿔. 자신의 안쪽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목소리가 있었다. 『죽여라.』 작게. 끈질기게. 『용을 죽여라.』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을 내려다봤다. 검으로 변한다면. 지금 이 거리에서는 몇 초면 충분했다. 잠든 드래곤의 심장을 겨누는 것. 어렵지 않다. 천 년 동안 반복했던 일이었다. 아르셀리아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죽여라.』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바로 그때. 침대 위에서 아르셀리아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리고 잠결에 중얼거렸다. “내 거 건드리지 마…….” 아스테리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꼬대였다. 무슨 꿈을 꾸는지는 몰랐다. 아마 보물고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거. 그 두 글자에. 머릿속의 명령이 아주 잠깐 멀어졌다. 아스테리온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아주 작은 목소리. “위험한 드래곤이군요.” 다음 날 아침. 아르셀리아가 눈을 떴을 때 아스테리온은 의자에 없었다. 그녀의 눈이 즉시 가늘어졌다. 침대 옆. 창가. 문 앞. 어디에도 없다. “아스테리온.” 대답이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봤다. 문양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제보다 흐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아스테리온.” 복도도 조용했다. 순간. 손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금빛 문양이 아주 잠깐 번쩍였다. 그리고. 감각이 밀려왔다. 차가움. 답답함. 숨이 막히는 느낌. 이건 자신의 감각이 아니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문양에 마력을 흘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깊게. 붉은 마력을 밀어 넣었다.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낯선 풍경. 검은 돌벽. 쇠사슬. 금빛 문양. 그리고 아스테리온의 손. 손목에 무언가 새겨지고 있었다. 『복종하라.』 낯선 목소리. 『너는 신의 검이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숨이 거칠어졌다. “…뭐야.” 환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손목의 통증은 남았다. 그 순간. 침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테리온이 돌아왔다. 손에는 찻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아르셀리아는 말없이 그를 봤다. 아스테리온이 조금 멈췄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어디 갔어.” “차를 가지러.” “말하고 가.” 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르셀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고치지 않았다. “갑자기 없어지지 마.” “…….” “계약 문양이 이상해졌잖아.” 아스테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언가 보셨습니까?” 아르셀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 “검은 돌방.”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쇠사슬.”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누가 너한테 말했어.” 아르셀리아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복종하라고.” 정적. “신의 검이라고.”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아르셀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기억나?” “조금.” “어디야.” “모릅니다.” “누구 목소리.” “모릅니다.” “또 기억 안 나?” “…예.”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스테리온이 놀라서 내려다봤다. “아르셀리아?” “가만있어.” “왜.” “확인하게.” 그녀는 문양에 마력을 흘렸다. 붉은 마력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스테리온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아르셀리아도 느꼈다. 어제보다 연결이 선명했다. 감각뿐 아니라 감정의 흔적까지. 차가움. 경계. 그리고. 두려움. 아르셀리아는 눈을 떴다. 아스테리온을 바라봤다. “무서워?”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무엇이요.” “그 기억.” “…….” “너 무섭잖아.” 아스테리온은 웃으려 했다. “성검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말했다. “거짓말.” “…….” “지금 느껴져.” 손을 더 꽉 잡았다. “여기.”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명 계약. 감각과 힘을 공유한다. 어제 그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감정까지 이렇게 선명하게 전달될 줄은 둘 다 몰랐다.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무서워해도.”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검이라도 무서운 건 무서울 수 있지.” “저를 너무 사람처럼 취급하시는군요.” “어제는 사람처럼 취급하라며.”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잠시 다물렸다. 아르셀리아가 덧붙였다. “필요할 때만 검인 척하지 마.” 그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아스테리온이 어제 했던 말. 아르셀리아는 별생각 없이 돌려줬을 뿐인데. 아스테리온은 오래도록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낮게. “알겠습니다.” 라고만 말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화염궁 전체가 한 번 흔들렸다. 콰아앙―! 아르셀리아가 포크를 내려놨다. “또 인간?”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용사가 돌아왔습니까?” “설마.” 두 번째 굉음. 이번에는 궁 입구였다. 곧이어 불정령 하나가 다급하게 식당으로 날아 들어왔다. “아가씨!” “왜.”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 불정령의 얼굴이 창백했다. “심연령에서.”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심연령. 블랙 드래곤. 그중에서 예고도 없이 자신의 궁까지 찾아올 드래곤은 많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디안?” “예.” 그 순간. 식당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불이 꺼진 것도 아닌데. 검은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번졌다. 아스테리온도 바로 일어났다. 금빛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식당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긴 외투를 걸친 남자가 들어왔다. 블랙 드래곤 카르디안. 칠색 의회의 의원이자. 아르셀리아와 수백 년을 알고 지낸 드래곤. 그는 들어오자마자 아르셀리아를 보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을 봤다. 정확히. 그의 가슴 중앙. 성검의 핵이 있는 위치를. 카르디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정말이군.”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뭐가.” 카르디안의 검은 눈이 아스테리온에게 고정됐다. “용살검을 주웠다는 소문.”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개가 조금 무례하군요.” 카르디안이 대답했다. “물건한테 예의를 차릴 생각은 없다.” 순간. 금빛 신성력이 식당 안에 번졌다. 동시에 검은 마력이 바닥을 뒤덮었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둘 다 그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카르디안은 아스테리온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아르셀리아에게서 떨어져.”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싫습니다.”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당신에게는 없습니다.” 검은 마력과 금빛 신성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콰직. 식탁 위 잔 하나가 깨졌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잔.”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를 봤다. 아르셀리아는 깨진 잔을 내려다봤다. 붉은 수정으로 만든 잔. 백이십 년 전 화산 깊은 곳에서 직접 찾아온 수정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내 집에서.”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내 물건 깨면서.” 불꽃이 더 커졌다. “싸우지 마.” 카르디안이 먼저 마력을 거뒀다. 아스테리온도 뒤늦게 신성력을 접었다. 아르셀리아는 깨진 잔 조각을 하나 들어 올렸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 “새로 구해 주지.” “똑같은 거 없어.” “그럼 수리해.” “금 갔잖아.” “……미안하다.” 아스테리온도 조용히 말했다.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한 번만 더 싸우면 둘 다 밖에 던질 거야.” 카르디안이 말했다. “쟤도?” “응.” 아스테리온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상처받았습니다.” “조용.” “예.” 카르디안은 그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다가 아르셀리아의 손목을 발견했다. 시선이 멈췄다. “그건 뭐지.” 아르셀리아가 자신의 손목을 봤다. 문양. 카르디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르셀리아.” “왜.” “손목 보여 줘.” “싫어.” “장난할 때 아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아르셀리아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카르디안은 문양을 가까이서 봤다. 그리고. 얼굴이 굳었다. “이거 언제 생겼어.” “어제.” “무슨 짓을 했지.”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뭘 했다고 생각해.” 카르디안이 아스테리온을 봤다. “저놈이 뭘 했든.” “마력 조금 줬어.” “어떻게.” “손잡고.” 카르디안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진명 연결이다.”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너 알아?” “알지.” “어떻게.” 카르디안은 문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대 드래곤 문양이니까.”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굳었다. “뭐라고요?” 카르디안이 그를 돌아봤다. “몰랐나.”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성검의 진명 계약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검?” 카르디안이 낮게 비웃었다. “인간들이 또 이름을 바꿨군.” 아르셀리아가 바로 물었다. “그럼 원래 뭐야.” 카르디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반려 각인과 비슷한 게 아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레니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반려 계약 같은 거냐고. 카르디안은 두 사람의 손목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보다 오래된 거다.” “얼마나.” “드래곤이 색으로 나뉘기 전.” 정적. 아르셀리아도 이번에는 표정이 굳었다. 색으로 나뉘기 전. 레드. 실버. 골드. 블랙이라는 구분조차 없던 시대. 그건 최소 수천 년 이전이었다. 카르디안의 다음 말은 더 이상했다. “이건 주인과 무기의 계약이 아니야.” 그의 시선이 아스테리온에게 향했다. “두 개의 용핵을 연결하는 문양이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물었다. “용핵?” “그래.” “근데.”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을 가리켰다. “얘 검인데.” 카르디안의 검은 눈이 싸늘해졌다. “그게 문제야.” 정적. “저 검 안에.” 카르디안이 낮게 말했다. “드래곤의 심장이 들어 있다는 뜻이니까.”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아스테리온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르디안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잠시 후. “왕급 드래곤의 심장이.”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스테리온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웅― 아스테리온의 가슴 중앙에서. 처음 보는 금빛이. 심장처럼. 쿵. 한 번 뛰었다.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황금령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황금수 주변을 가득 메웠던 빛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르셀리아의 인간형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커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했고, 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붉은 비늘은 곧 전신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의 금빛 균열이 용암처럼 번뜩이자, 황금령의 서늘했던 공기마저 단숨에 뜨거워졌다.곧 황금수 앞뜰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황금령을 둘러싼 하얀 빛기둥은 모두 열두 개.각각의 기둥을 중심으로 신성 문양이 땅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보면 아마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 몇 명을 잡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영지 하나를 봉쇄하고,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마력 자체를 억누르기 위한 규모였다.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쳤다.“제법 준비했네.”그 목소리가 인간의 말처럼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드래곤 특유의 마력이 섞인 음성이 황금령 전체를 울렸다.바닥이 떨렸다.멀리 진을 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그런데도 퇴각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의 흰 망토를 걸친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경고한다.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즉시 인간형으로 돌아가 투항하라.』아르셀리아의 거대한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싫어.”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남자의 얼굴이 멀리서도 굳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은 현재 성왕국의 신성 유물을 불법 점유하고―』“그거 말인데.”아르셀리아가 말을 끊었다.“계속 내 거 불법 점유라고 하잖아.”『성검 아스테리온은 성왕국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그래서?”『……뭐라?』“보관했다고 네 거야?”붉은 눈이 가늘어졌다.“훔쳐다가 천 년 갖고 있었다고 주인이 바뀌나?”뒤쪽에 있던 세레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카르디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검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에르하르트 역시
검은 빛이 터진 직후.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태양이 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검은 장막이 황금수의 기록실을 집어삼켰고, 몸을 짓누르는 낯선 힘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차갑다.신성력도 아니고.드래곤의 마력도 아니다.오히려 둘을 억지로 끊어 놓으려는 힘에 가까웠다.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스테리온과 연결된 무언가가.자신을 떼어 내려고 한다.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싫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계약자와 개체 간 연결을 차단합니다.』낯선 목소리.아스테리온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사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명령 그 자체.아르셀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날을 더 단단히 잡았다.손바닥이 다시 깊게 베였다.따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아르셀리아!”카르디안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손 놔! 검이 이미―”“건드리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카르디안의 손이 멈췄다.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폭발하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불꽃은 그녀의 발끝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가 검신을 감쌌다.아스테리온의 금빛과.아르셀리아의 붉은빛.두 색이 검은 장막 안에서 서로를 찾아 얽혔다.『차단 실패.』목소리가 울렸다.『계약자 마력 저항 확인.』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자.”피 묻은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누구 마음대로.”『……』“내가 언제 너희랑 계약했는데.”대답은 없었다.“아스테리온.”그녀가 검을 바라봤다.아직 남자 형태였다.한쪽 팔만 검날로 변한 채.금빛 눈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만 고정돼 있었다.아르셀리아의 손.피.자신의 검날 위에 흐르는.그녀의 피.“손.”아스테리온이 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