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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검이 내 옆에서 잠듭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0 22:07:08

아르셀리아는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들 수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검이 문밖에 서 있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침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아르셀리아께서 보물고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왜 안 갔어.”

“현재 거리에서 더 멀어지면 계약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까는 열 걸음이라며.”

“그건 낮이었고.”

“밤에는 달라?”

“조금.”

“뭐가.”

“저도 확인 중입니다.”

아르셀리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명 계약.

지워진 기억.

용살성검.

그리고.

모든 드래곤을 멸하라는 명령.

단순히 예쁜 검 하나 주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잔뜩 늘어났다.

아르셀리아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붉은빛과 금빛이 얽힌 문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마법으로 지워 보거나, 아예 손목 피부를 한 번 벗겨내서라도 없앴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함부로 손대기가 꺼려졌다.

문양을 건드릴 때마다 아주 약하게 아스테리온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분 나쁘게 가까웠다.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그 사실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아르셀리아가 문을 바라봤다.

“들어와.”

문밖이 조용해졌다.

잠시 뒤.

“괜찮습니까?”

“지금은.”

철컥.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스테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낮과 똑같은 차림인데 표정은 달랐다.

능글맞은 미소가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침실 안쪽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아스테리온이 순순히 앉았다.

“침대는 안 됩니다?”

“나가.”

“농담입니다.”

“오늘 농담 금지.”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얌전했다.

그게 오히려 낯설었다.

아르셀리아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팔을 얹었다.

“처음부터.”

“무엇을요.”

“네 안에 있는 명령.”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한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에는?”

“감각만 있었습니다.”

“어떤 감각.”

아스테리온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드래곤을 보면.”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검이 반응합니다.”

“죽이고 싶어져?”

아르셀리아는 일부러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스테리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으로 충분했다.

“그렇구나.”

“제가 원하는 감정은 아닙니다.”

“알아.”

“…….”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제 나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

“예.”

“나 죽이고 싶었고?”

“검은.”

아르셀리아가 바로 잘랐다.

“너는.”

아스테리온의 눈이 흔들렸다.

아르셀리아는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너는 나를 죽이고 싶었어?”

긴 침묵.

아스테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됐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한테는 간단해.”

아르셀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의지랑 검에 새겨진 명령이 다르다는 거잖아.”

“명령이 더 강해지면.”

“그때 생각하지.”

“아르셀리아.”

“왜.”

“너무 쉽게 믿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널?”

“예.”

“안 믿어.”

아스테리온이 말문을 잃었다.

아르셀리아는 태연했다.

“그러니까 옆에 두는 거야.”

“…….”

“멀리 보내 놨다가 뭔 짓을 하는지 모르는 것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게 낫잖아.”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역시 드래곤이군요.”

“왜.”

“신뢰보다 소유가 먼저입니다.”

“내 건 내가 관리해야지.”

“그 말.”

“또 좋아?”

“예.”

아르셀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보물이라는 말이 좋아?”

“아르셀리아가 말할 때는.”

“이상해.”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넌 드래곤을 몇 마리 죽였어.”

아스테리온의 미소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주 느리게.

“모릅니다.”

“기억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예?”

“조각은 있습니다.”

“어떤.”

아스테리온은 손을 무릎 위에서 천천히 쥐었다.

“피.”

짧은 대답이었다.

“불타는 비늘.”

그리고.

“비명.”

방 안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아르셀리아는 침묵했다.

“검이었을 때는 직접 움직였던 게 아니죠. 누군가가 저를 들었고,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건 아닙니다.”

“다 느껴?”

“예.”

“베이는 것도?”

“제가 베이는 건 아니니까 아프진 않습니다.”

“그럼.”

아스테리온이 잠시 눈을 감았다.

“닿는 감각은 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순간 낮의 일을 떠올렸다.

보물고에서 검을 닦았다.

천으로 검신을 쓸고, 먼지를 털고, 손가락으로 날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검은 계속 떨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설마.”

아스테리온이 눈을 떴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어제 너 닦았을 때.”

“…….”

정적.

아르셀리아는 그의 표정을 봤다.

조금 전까지 죽은 드래곤 이야기를 하던 얼굴이 아주 미묘하게 굳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느꼈어?”

“…….”

“아스테리온.”

“다른 이야기를 하죠.”

“느꼈네.”

“아르셀리아.”

이번에는 아르셀리아가 아주 천천히 웃었다.

처음이었다.

늘 아스테리온이 먼저 능글맞게 웃고, 아르셀리아가 귀찮아했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그래서 계속 떨었구나.”

“오래된 마도구라 그렇다고 생각하셨다면서요.”

“그랬지.”

“계속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싫은데.”

아스테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셀리아는 턱을 손등에 기대었다.

“검신 어디까지 느껴.”

“말하지 않겠습니다.”

“전부?”

“…….”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전부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저를 경계하시던 분이 갑자기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재밌잖아.”

“저는 별로입니다.”

“왜.”

“주인에게 약점을 들킨 검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아르셀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난 검 아니야.”

“그렇군요.”

“드래곤이야.”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이번에는 아르셀리아가 웃었다.

아스테리온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 많지 않았다.

보통 무심하거나 귀찮거나, 아주 가끔 마음에 드는 보석을 봤을 때만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 자신 때문에 웃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감정을 아르셀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물었다.

“그럼 인간형일 때도 검신이 있어?”

“무슨 뜻입니까.”

“검은 어디 가 있는데.”

“제 몸 자체가 검입니다.”

“그럼 지금 만져도 같은 감각이야?”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오늘 농담 금지라고 하신 분이 누구였죠?”

“난 농담 아닌데.”

“그게 더 문제입니다.”

아르셀리아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스테리온은 이마를 짚었다.

“아르셀리아.”

“응.”

“제가 아무리 검이라도 남자 모습일 때는 남자 취급을 조금 해 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

“검일 때는 검이고 사람일 때는 사람이라는 거야?”

“가능하면.”

“복잡하네.”

“저도 이렇게 복잡해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침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럼 사람일 때는 어디 만지면 안 되는데.”

아스테리온은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그걸 제가 알려 드려도 되는 겁니까?”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제야 익숙한 아스테리온이 돌아왔다.

능글맞고.

뻔뻔하고.

말끝마다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성검.

“됐어.”

“아쉽군요.”

“역시 네가 조용한 게 낫겠다.”

“조금 전에는 제 웃음이 없어서 낯설어하시던데.”

“내가 언제.”

“표정이 그랬습니다.”

“내 표정 읽지 마.”

“주인의 표정을 살피는 건 무기의 기본 소양입니다.”

“또 무기인 척하네.”

“필요할 때만.”

아르셀리아가 베개 하나를 집어 던졌다.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받았다.

“감사합니다.”

“왜.”

“오늘 여기서 자라는 뜻 아닙니까?”

“아닌데.”

“베개를 주셨으니.”

“던진 거야.”

“받았습니다.”

“돌려줘.”

아스테리온은 베개를 품에 안았다.

“싫습니다.”

아르셀리아는 그를 한동안 노려봤다.

그러다가 결국 포기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지금 성검과 베개 하나를 두고 실랑이할 기분은 아니었다.

“의자에서 자.”

“알겠습니다.”

“침대로 오지 마.”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말고 확답.”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예. 안 가겠습니다.”

그제야 아르셀리아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자 침실 안이 어두워졌다.

용암의 붉은빛만 창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잠시 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아스테리온.”

“예.”

“혹시 네가 명령에 휘둘리면.”

말이 잠시 끊겼다.

“나한테 먼저 말해.”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남자의 윤곽이 보였다.

“들었어?”

“예.”

“대답.”

“…알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럼 자.”

아스테리온은 아주 낮게 말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응.”

잠시 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스테리온은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성검에게 수면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르셀리아가 잠드는 과정을 오래 바라봤다.

규칙적인 숨.

이불 위에 느슨하게 놓인 손.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반쯤 보이는 뿔.

자신의 안쪽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목소리가 있었다.

『죽여라.』

작게.

끈질기게.

『용을 죽여라.』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을 내려다봤다.

검으로 변한다면.

지금 이 거리에서는 몇 초면 충분했다.

잠든 드래곤의 심장을 겨누는 것.

어렵지 않다.

천 년 동안 반복했던 일이었다.

아르셀리아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죽여라.』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바로 그때.

침대 위에서 아르셀리아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리고 잠결에 중얼거렸다.

“내 거 건드리지 마…….”

아스테리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꼬대였다.

무슨 꿈을 꾸는지는 몰랐다.

아마 보물고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거.

그 두 글자에.

머릿속의 명령이 아주 잠깐 멀어졌다.

아스테리온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아주 작은 목소리.

“위험한 드래곤이군요.”

다음 날 아침.

아르셀리아가 눈을 떴을 때 아스테리온은 의자에 없었다.

그녀의 눈이 즉시 가늘어졌다.

침대 옆.

창가.

문 앞.

어디에도 없다.

“아스테리온.”

대답이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봤다.

문양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제보다 흐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아스테리온.”

복도도 조용했다.

순간.

손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금빛 문양이 아주 잠깐 번쩍였다.

그리고.

감각이 밀려왔다.

차가움.

답답함.

숨이 막히는 느낌.

이건 자신의 감각이 아니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문양에 마력을 흘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깊게.

붉은 마력을 밀어 넣었다.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낯선 풍경.

검은 돌벽.

쇠사슬.

금빛 문양.

그리고 아스테리온의 손.

손목에 무언가 새겨지고 있었다.

『복종하라.』

낯선 목소리.

『너는 신의 검이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숨이 거칠어졌다.

“…뭐야.”

환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손목의 통증은 남았다.

그 순간.

침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테리온이 돌아왔다.

손에는 찻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아르셀리아는 말없이 그를 봤다.

아스테리온이 조금 멈췄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어디 갔어.”

“차를 가지러.”

“말하고 가.”

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르셀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고치지 않았다.

“갑자기 없어지지 마.”

“…….”

“계약 문양이 이상해졌잖아.”

아스테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언가 보셨습니까?”

아르셀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

“검은 돌방.”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쇠사슬.”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누가 너한테 말했어.”

아르셀리아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복종하라고.”

정적.

“신의 검이라고.”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아르셀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기억나?”

“조금.”

“어디야.”

“모릅니다.”

“누구 목소리.”

“모릅니다.”

“또 기억 안 나?”

“…예.”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스테리온이 놀라서 내려다봤다.

“아르셀리아?”

“가만있어.”

“왜.”

“확인하게.”

그녀는 문양에 마력을 흘렸다.

붉은 마력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스테리온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아르셀리아도 느꼈다.

어제보다 연결이 선명했다.

감각뿐 아니라 감정의 흔적까지.

차가움.

경계.

그리고.

두려움.

아르셀리아는 눈을 떴다.

아스테리온을 바라봤다.

“무서워?”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무엇이요.”

“그 기억.”

“…….”

“너 무섭잖아.”

아스테리온은 웃으려 했다.

“성검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말했다.

“거짓말.”

“…….”

“지금 느껴져.”

손을 더 꽉 잡았다.

“여기.”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명 계약.

감각과 힘을 공유한다.

어제 그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감정까지 이렇게 선명하게 전달될 줄은 둘 다 몰랐다.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무서워해도.”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검이라도 무서운 건 무서울 수 있지.”

“저를 너무 사람처럼 취급하시는군요.”

“어제는 사람처럼 취급하라며.”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잠시 다물렸다.

아르셀리아가 덧붙였다.

“필요할 때만 검인 척하지 마.”

그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아스테리온이 어제 했던 말.

아르셀리아는 별생각 없이 돌려줬을 뿐인데.

아스테리온은 오래도록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낮게.

“알겠습니다.”

라고만 말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화염궁 전체가 한 번 흔들렸다.

콰아앙―!

아르셀리아가 포크를 내려놨다.

“또 인간?”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용사가 돌아왔습니까?”

“설마.”

두 번째 굉음.

이번에는 궁 입구였다.

곧이어 불정령 하나가 다급하게 식당으로 날아 들어왔다.

“아가씨!”

“왜.”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

불정령의 얼굴이 창백했다.

“심연령에서.”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심연령.

블랙 드래곤.

그중에서 예고도 없이 자신의 궁까지 찾아올 드래곤은 많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디안?”

“예.”

그 순간.

식당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불이 꺼진 것도 아닌데.

검은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번졌다.

아스테리온도 바로 일어났다.

금빛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식당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긴 외투를 걸친 남자가 들어왔다.

블랙 드래곤 카르디안.

칠색 의회의 의원이자.

아르셀리아와 수백 년을 알고 지낸 드래곤.

그는 들어오자마자 아르셀리아를 보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을 봤다.

정확히.

그의 가슴 중앙.

성검의 핵이 있는 위치를.

카르디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정말이군.”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뭐가.”

카르디안의 검은 눈이 아스테리온에게 고정됐다.

“용살검을 주웠다는 소문.”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개가 조금 무례하군요.”

카르디안이 대답했다.

“물건한테 예의를 차릴 생각은 없다.”

순간.

금빛 신성력이 식당 안에 번졌다.

동시에 검은 마력이 바닥을 뒤덮었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둘 다 그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카르디안은 아스테리온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아르셀리아에게서 떨어져.”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싫습니다.”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당신에게는 없습니다.”

검은 마력과 금빛 신성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콰직.

식탁 위 잔 하나가 깨졌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잔.”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를 봤다.

아르셀리아는 깨진 잔을 내려다봤다.

붉은 수정으로 만든 잔.

백이십 년 전 화산 깊은 곳에서 직접 찾아온 수정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내 집에서.”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내 물건 깨면서.”

불꽃이 더 커졌다.

“싸우지 마.”

카르디안이 먼저 마력을 거뒀다.

아스테리온도 뒤늦게 신성력을 접었다.

아르셀리아는 깨진 잔 조각을 하나 들어 올렸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

“새로 구해 주지.”

“똑같은 거 없어.”

“그럼 수리해.”

“금 갔잖아.”

“……미안하다.”

아스테리온도 조용히 말했다.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한 번만 더 싸우면 둘 다 밖에 던질 거야.”

카르디안이 말했다.

“쟤도?”

“응.”

아스테리온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상처받았습니다.”

“조용.”

“예.”

카르디안은 그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다가 아르셀리아의 손목을 발견했다.

시선이 멈췄다.

“그건 뭐지.”

아르셀리아가 자신의 손목을 봤다.

문양.

카르디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르셀리아.”

“왜.”

“손목 보여 줘.”

“싫어.”

“장난할 때 아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아르셀리아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카르디안은 문양을 가까이서 봤다.

그리고.

얼굴이 굳었다.

“이거 언제 생겼어.”

“어제.”

“무슨 짓을 했지.”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뭘 했다고 생각해.”

카르디안이 아스테리온을 봤다.

“저놈이 뭘 했든.”

“마력 조금 줬어.”

“어떻게.”

“손잡고.”

카르디안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진명 연결이다.”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너 알아?”

“알지.”

“어떻게.”

카르디안은 문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대 드래곤 문양이니까.”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굳었다.

“뭐라고요?”

카르디안이 그를 돌아봤다.

“몰랐나.”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성검의 진명 계약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검?”

카르디안이 낮게 비웃었다.

“인간들이 또 이름을 바꿨군.”

아르셀리아가 바로 물었다.

“그럼 원래 뭐야.”

카르디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반려 각인과 비슷한 게 아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레니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반려 계약 같은 거냐고.

카르디안은 두 사람의 손목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보다 오래된 거다.”

“얼마나.”

“드래곤이 색으로 나뉘기 전.”

정적.

아르셀리아도 이번에는 표정이 굳었다.

색으로 나뉘기 전.

레드.

실버.

골드.

블랙이라는 구분조차 없던 시대.

그건 최소 수천 년 이전이었다.

카르디안의 다음 말은 더 이상했다.

“이건 주인과 무기의 계약이 아니야.”

그의 시선이 아스테리온에게 향했다.

“두 개의 용핵을 연결하는 문양이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물었다.

“용핵?”

“그래.”

“근데.”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을 가리켰다.

“얘 검인데.”

카르디안의 검은 눈이 싸늘해졌다.

“그게 문제야.”

정적.

“저 검 안에.”

카르디안이 낮게 말했다.

“드래곤의 심장이 들어 있다는 뜻이니까.”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아스테리온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르디안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잠시 후.

“왕급 드래곤의 심장이.”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스테리온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웅―

아스테리온의 가슴 중앙에서.

처음 보는 금빛이.

심장처럼.

쿵.

한 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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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 방에 오시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죠

    차를 다 마셨을 무렵, 아르셀리아는 책을 펼쳤다.아스테리온은 찻잔을 정리하다가 그녀를 봤다.“무슨 책입니까?”“서고에서 가져왔어.”“예.”“네가 전에 읽던 거.”아스테리온의 손이 멈췄다.“제가요?”“응.”그녀가 표지를 보여 줬다.은월령의 고대 식물과 마력 반응에 관한 책이었다.아스테리온은 며칠 전 그 책을 읽다가 파란색 꽃이 등장하는 부분에 표시를 해 두었다.“이거.”아르셀리아가 책장을 넘겼다.“네가 좋아한다고 했던 꽃.”“월광초.”“응.”“왜 가져오셨습니까?”“궁금해서.”“…….”“네가 왜 좋아하는지.”아스테리온은 그녀를 바라봤다.아르셀리아는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빛이 닿으면 파랗게 보이고, 어두워지면 은빛으로 바뀐다며.”“예.”“희귀한 꽃은 아닌데 은월령에서는 정원에 많이 심는다고.”“그렇습니다.”“그럼 나중에 화염궁에도 심어 볼까?”아스테리온의 눈이 커졌다.“화염궁에요?”“응.”“적염령의 기온은 월광초에 맞지 않을 텐데.”“온실 있잖아.”“…….”“마력 조절하면 되지.”아스테리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들었다.“왜.”“제가 좋아한다고 해서.”“응.”“꽃을 심으시려고요?”“싫어?”“아닙니다.”“그럼.”아르셀리아는 다시 책을 봤다.“너 파란색 좋아하잖아.”“…….”“푸른 러그도 샀고.”“예.”“이 꽃도 예쁘다며.”“예.”“그럼 네 방 창가에서 보이면 좋잖아.”아스테리온은 천천히 창가를 바라봤다.창문 밖에는 화염궁의 붉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그곳에.파란 꽃이 핀다면.자기가 좋아하는 색의 꽃이.아르셀리아의 정원에.피어난다면.“…….”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주인님.”“응.”“그 꽃은.”“응.”“제가 직접 심어도 됩니까?”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들었다.“네가?”“예.”“식물 키워 본 적 있어?”“없습니다.”“그럼 리엔한테 물어봐.”“예.”“온실 한쪽 비워 줄게.”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밝아졌다.“정말입니까?”“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 방에 오시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죠

    똑똑.아스테리온의 손이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똑똑.두 번째 노크.“아스테리온.”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나야.”아스테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문으로 걸어갔다.손잡이를 잡았다.그리고 문을 열었다.아르셀리아가 서 있었다.짙은 붉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고, 평소 집무실에서 입던 검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얇은 책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작은 접시가 있었다.“왜 그렇게 봐?”아르셀리아가 물었다.아스테리온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아스테리온?”“오셨군요.”“응.”“정말.”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올렸다.“약속했잖아.”“예.”“들어가도 돼?”아스테리온은 곧바로 옆으로 비켜섰다.“물론입니다.”아르셀리아가 문턱을 넘었다.그 순간 아스테리온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어제도 왔다.그제도 왔다.처음 초대했던 날에도 왔다.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아르셀리아가 자기 발로.약속한 시간에.자신을 만나기 위해.이 방에 왔다.“뭐 해?”아르셀리아가 물었다.아스테리온이 정신을 차렸다.“아닙니다.”“또 멈췄어.”“예.”“왜?”그는 천천히 웃었다.“반가워서요.”아르셀리아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나도.”“…….”“너 보니까 반갑네.”아스테리온은 다시 멈췄다.아르셀리아가 웃었다.“또.”“……예.”“오늘 몇 번 멈출 거야?”“아직 모르겠습니다.”“그럼 일단 차부터 줘.”“예.”아스테리온은 그녀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아르셀리아는 자연스럽게 푸른 러그 위에 앉았다.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찻상 위에 올려놓았다.아스테리온이 물었다.“이건 무엇입니까?”“과자.”“…….”“차 마신다며.”“예.”“빈속에 마시면 심심하잖아.”아스테리온은 접시를 내려다봤다.작은 버터 과자였다.화염궁 주방에서 만든 것으로 보였다.“직접 가져오셨습니까?”“응.”“왜요?”아르셀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봤다.“손님이 빈손으로 오면 좀 그렇잖아.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 방에 오시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죠

    “성검님?”관리 정령의 부름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예.”“여기 기록이 하나 빠졌어요.”정령이 가리킨 곳은 붉은 수정 왕관과 황금 술잔 사이였다.아스테리온이 처음 놓였던 자리.그곳의 목록에는 오래된 항목이 남아 있었다.고대 성검. 소유자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아스테리온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소유자.그 단어는 이제 익숙하지 않았다.아르셀리아는 왕실 기록에서 자신을 사용한 사람들을 ‘소유자’가 아니라 ‘사용자’로 고쳐 적었다. 자신을 검으로 다루던 이들의 이름을 읽으며, 그들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기록은 조금 달랐다.그는 스스로 아르셀리아의 보물이 되고 싶다고 했다.그녀의 검이고 싶었다.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보물고의 물품 목록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이 항목은.”아스테리온이 조용히 말했다.“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어떻게요?”그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펜을 들었다.기존 기록 위에 선을 그었다.고대 성검. 소유자 아르셀리아 로하르트.그 아래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아스테리온. 현재 독립된 인격체로 생활 중. 보물고 보관 대상에서 제외.관리 정령이 눈을 깜빡였다.“그럼 성검님은 이제 보물 목록에서 빠지는 거예요?”아스테리온은 잠시 멈췄다.“공식 물품 목록에서는요.”“아가씨가 아쉬워하시지 않을까요?”“…….”그는 빈 선반을 바라봤다.“아마.”조금 웃었다.“아르셀리아는 여전히 저를 보물이라고 부르실 겁니다.”“그럼 목록에서도 보물 아닌가요?”“그건 다른 뜻입니다.”“어떻게 다른데요?”아스테리온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생각했다.“여기 있는 물건들은 주인님이 어디에 놓을지 정하실 수 있습니다.”“네!”“하지만 저는 제가 어디에 있을지 고를 수 있습니다.”정령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활짝 웃었다.“아! 성검님은 걸어 다니는 보물이네요!”“…….”아스테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말하면 또 조금 이상하지만.”“왜요?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 방에 오시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죠

    아르셀리아는 자신이 무슨 약속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제 아스테리온의 방에서 차를 마셨고, 오늘도 가겠다고 했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차를 마셔 보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은 아니었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방을 조금씩 채워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고, 그가 고른 물건을 함께 사용하는 일도 생각보다 즐거웠으니까.그러니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했다.문제는 아스테리온이 그 약속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주인님, 오늘 저녁 일정이 있으십니까?”아침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아르셀리아는 빵에 버터를 바르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없는데.”“집무실 업무는요?”“오전에 끝낼 거야.”“칠색 의회에서 연락이 올 가능성은 없습니까?”“연락이야 언제든 오지. 왜?”“아닙니다.”아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식탁 옆에 놓아 둔 작은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었다.아르셀리아의 손이 멈췄다.“너 지금 뭐 적었어?”“오늘 일정입니다.”“내 일정?”“제 일정입니다.”“보여 줘.”아스테리온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수첩을 건넸다.아르셀리아는 펼쳐진 페이지를 내려다봤다.오전에는 서고 목록 정리, 정오에는 식사, 오후에는 보물고 물품 대조와 개인 독서 시간이 적혀 있었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그런데 저녁 일정이 이상했다.오후 여섯 시 — 아르셀리아 방문 예정.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차 준비. 찻잔 세척. 의자 주변 정리. 러그 상태 확인.아르셀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너.”“예.”“나 손님이야?”“예.”“어제도 갔잖아.”“오늘도 오시니까요.”“그런데 왜 이렇게 준비해?”아스테리온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니까요.”“내가 무슨 황실 사절단이야?”“그분들보다 중요하십니다.”아르셀리아는 입을 다물었다.아스테리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첩을 돌려받았다.“그리고 어제는 주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 방에 남겨 둔 자리는 비워 두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아침부터 자기 방문 앞에 서 있었다.정확히는, 문에 걸린 작은 나무 문패를 보고 있었다.돌아오면 반갑습니다.어제 아스테리온이 월백촌 시장에서 사 온 선물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나무판에는 특별한 마력이 깃들어 있지 않았고, 세공 역시 화염궁 보물고에 보관된 고대 유물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아르셀리아는 침실에서 나갈 때마다 그것을 한 번씩 읽게 되었다.오늘 아침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무판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건드렸다.달칵.문패가 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뭐 하십니까?”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르셀리아가 돌아봤다.아스테리온이었다.검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어제 시장에서 산 검은색 찻잔을 들고 있었다. 인간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력은 안정적이었으며,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아르셀리아는 문패를 가리켰다.“이거.”“예.”“생각보다 예뻐.”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문패로 향했다.“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오늘도 예쁘다고.”“그렇습니까.”“응.”아스테리온이 조금 웃었다.“그럼 잘 샀군요.”“잘 샀지.”아르셀리아는 다시 문패를 바라봤다.“근데 왜 하필 이 문장이야?”어제도 이유를 들었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조금 더 궁금해졌다.아스테리온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처음에는 다른 문장을 생각했습니다.”“뭔데?”“‘어서 오십시오.’”“그것도 괜찮네.”“예. 하지만 조금 이상했습니다.”“왜?”“그건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니까요.”아르셀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돌아오면 반갑다는 것도 누구한테나 할 수 있잖아.”“말은 그렇습니다.”아스테리온이 문패를 바라봤다.“하지만 저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주인님께서 돌아오실 때 반갑다는 뜻으로 골랐습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처음으로 산 선물은 보물고에 넣지 마십시오

    아스테리온이 시장 안으로 사라진 뒤, 아르셀리아는 정확히 열두 번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봤다.열두 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열세 번째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아르셀리아는 고개를 돌리려던 것을 멈추고 눈앞의 가게를 노려봤다. 가게 주인이 진열대에 놓인 유리 장식품을 정리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없어.”“그럼 혹시 기다리시는 분이…….”“있어.”“아, 그러시군요.”가게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오히려 아르셀리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뻔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그것도 이상했다.아르셀리아는 기다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화염궁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늦는 자가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다른 일을 했다. 칠색 의회에서 회의가 지연되면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그녀였다.그런데 지금은 월백촌 시장 입구에서, 자기 보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니.보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그는 분명 자기 검이었다. 계약으로 이어진 성검이었고, 그녀가 에드릭에게서 빼앗아 온 보물이기도 했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조금 전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돈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혼자 시장 안으로 걸어갔다.아르셀리아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그가 혼자 고르고 싶어 했으니까.“…….”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고작 선물 하나인데.아르셀리아는 허리춤에 찬 작은 시계를 확인했다.십칠 분.“……별로 안 지났네.”생각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었다.그녀는 결국 근처 찻집의 야외 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차를 한 잔 주문하고, 시장 입구가 잘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가게 주인이 물었다.“동행분이 오시면 차를 더 준비해 드릴까요?”아르셀리아는 잠깐 망설였다.“응. 한 잔 더.”“어떤 차로요?”“…….”아스테리온이 좋아하는 차가 뭐였더라.화염궁에서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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