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해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해 보였고 지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를 보고 나는 더 이상 그가 농담하는지조차 추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그건 애들 장난이지. 그런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진정우, 정말 왜 이래?”그는 채소를 자르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짧게 말했다.“너니까.”정말이지, 이 남자. 달콤한 말을 할 때는 과하다 싶을 정도다.“언니, 나도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든요.”진소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강유형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강유형은 내가 진정우를 데려가고 싶다고 오해했을 뿐이었다.진정우는 내가 데려갈 필요도 없이 놀이공원에 갈 것이었다. 놀이공원 후반 작업, 특히 조명 설계는 그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까.개장 광고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마케팅팀은 사전 예측을 통해 시간대를 나눠 티켓을 판매하고 입장을 조절했다. 덕분에 혼란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진정우와 나는 진소영을 데리고 전용 통로를 통해 입장했다. 진정우는 내가 특별 손님인 걸 알고 있었기에 진소영을 데리고 놀러 가고 나는 개막식 참석자용 대기실로 향했다.“지원아! 어서 와! 너희 삼촌이랑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한껏 멋을 낸 강유형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나는 강유형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 몸은 좀 어떠세요?”“아주 좋아.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잠도 푹 자.”그는 농담처럼 말했다.강유형과 강진혁도 정장을 입고 나왔다. 두 사람 모두 훤칠해 눈길을 끌었다. 강유형의 어머니는 그런 두 아들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근데 너 혼자야?” 강유형이 물었다.“정우가 동생 데리고 놀러 갔어.”“점심에 연회가 열릴 거야. 그때 둘 다 같이 오라고 해.”강유형의 아버
조나연은 임신한 배를 내밀며 군중 속에 서 있었다. 얼굴엔 약간의 자신감과 도전적인 미소가 얹혀 있었다.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강유형의 아버지가 내 손을 잡은 채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강유형은 한층 더 분노한 얼굴로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조나연은 자신에게 시간을 벌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짧은 틈에 다시 입을 열었다.“강 회장님, 이 아이는 제가 낳겠다고 약속드린 아이잖아요. 강 회장님께서도 이 아이가 평생 부족함 없이 살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죠.”“그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해.”강유형의 어머니가 손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네가 가진 아이가 우리 강씨 집안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네 아비를 찾아가든지 남편을 찾아가든지 해!”“그만해!”강유형의 아버지가 강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강유형은 이미 몇 걸음 만에 조나연 옆에 도착했다.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눈빛은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조나연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여전히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유형아, 너랑 결혼 못 한다는 거, 나 이미 받아들였어. 너희 집에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했어. 그런데 왜 내가 받을 걸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거야?”그러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혹시 지원 씨, 또 저랑 경쟁하려고 그러는 거예요?”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순간적으로 이런 말이 떠올랐다.‘사람이 뻔뻔하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더니.’조나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제는 모든 자존심을 버린 상태였다.“조나연, 입 다물어.”강유형이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오늘처럼 대중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려 했다.그녀의 행동을 보니 분명 이 상황을 이용해 누군가가 영상을 찍어 온라인에 퍼트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강씨 집안이 의심받게 될 테니 말이다.조나연은 이런 방식으로 강씨 집안에
“당신은 남편이 아내와 절친한 친구와의 배신을 견디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운전할 것을 알았겠죠. 그래서 동생에게 특정 시간에 차로 접근해 놀라게 하라고 말했죠. 그로 인해 남편의 차량이 통제력을 잃도록 꾸민 거잖아요.”내 말이 끝나자 조나연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놀이공원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날 모함하는 거잖아요!”그녀 옆에 서 있던 강유형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손목을 세차게 잡아 흔들었다.“정말 그런 거야? 조나연, 똑바로 말해!”“아니야! 절대 아니야!” 조나연은 울며 소리쳤다.“강유형, 처음부터 네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내가 원한 적 없다고! 네가 먼저 다가온 거라고!”그녀의 울부짖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강유형으로 향했다. 군중들 사이에서는 욕설이 터져 나왔고 한 여자가 화를 내더니 강유형을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쓰레기! 살인자! 양심도 없는 놈!”그때 한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그만하세요!”목소리의 주인공은 진정우였다. 그는 군중을 헤치고 나와 조나연과 강유형 앞에 섰고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화면을 터치하더니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그때 맞춰 차로 갑자기 튀어 나가기만 하면 돼... 사고가 나도 너한테 책임은 없어. 네가 그 사람을 친 것도 아니고 건드린 것도 아니니까.”“이건 다 우리 누나가 짠 계획이야. 일이 잘되면 나는 강유형의 매제가 되는 거야. 그럼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어.”녹음된 음성은 조나연의 동생인 조태혁의 목소리였다.순간 조나연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아니야! 이건 사실이 아니야!”진정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당신 동생 조태현은 이미 경찰서에 있어요. 이 모든 건 경찰이 판단할 일이죠.”그의 말이 끝나자 군중들은 조나연에게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진정우는 다시 경고했다.“누군가 그녀를 폭행하면 그것 또한 범죄입니다.”그 말을
강진혁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더니 더 이상 표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나를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이제 너도 나를 무시하고 싫어하게 된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예전에 강유형과 오빠 사이에서 내가 강유형을 선택했던 건, 단지 그가 내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오빠를 무시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오빠의 행동은... 정말 실망스러워요.”그의 눈빛은 더욱 그윽해졌다.“근데 넌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고나 있어?” 그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빠, 4년 전 떠날 땐 그렇게 똑똑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예요?”4년 전, 내가 강유형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강진혁과 나는 오직 남매 같은 관계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가 강유형과 헤어지더라도 강진혁과의 가능성은 절대 없었다.“지원아, 너는 10년 동안 유형이를 사랑했지. 근데 나도 똑같았어.” 그의 말에 가슴이 잠시 먹먹해졌지만 그건 감동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과거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고통스럽고 짝사랑은 더더욱 그렇다.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유형이를 10년 동안 사랑했던 건, 그와 함께할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오빠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알면서도 걸어가고 있잖아요. 그건 오빠가 스스로 고통을 자초한 거라고요.”내는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지금 강진혁은 강유형의 모든 걸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까지도 숨기고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 했다.그런 강진혁의 모습에 정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어리석다...” 강진혁은 비웃듯 내 말을 되뇌었다. “그래, 어리석어.”그는 스스로를 비웃었지만 그 안엔 나를 향한 조롱도 섞여 있었다. 내가 강유형을 10년 동안 사랑했던 것도 똑같이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멈칫했다.우리 뒤를 따르던 자전거들 위로 어느새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고 그 위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아직 그 문구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자전거들이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진정우는 우리가 탄 자전거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내가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자전거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플래카드 위의 글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그 문구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즉시 진정우를 바라보았다.그는 전혀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건 분명 그의 계획이었다.“진정우, 이거... 나한테 청혼하려는 거야?” 나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응. 널 집으로 데려가야 아무도 널 탐내지 못할 테니까.”그는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강진혁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내가 그의 말을 곱씹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외쳤다.“오빠, 빨리 프러포즈를 해야지.”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진소영이 자전거에 앉아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진정우는 자전거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손에서 반지를 꺼낸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나랑 결혼해 줄래? 남은 삶 동안 내가 네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어.”나는 자전거에 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성껏 준비된 자전거들과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니,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결혼해!”“결혼해!”“언니! 빨리 대답해 주세요!”사람들과 진소영이 외쳐댔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그 앞에 섰다. 그리고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실망할 거야?”조금 전까지 흥겨웠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진소영도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아니. 지금 당장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내가 너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한 탓이겠지.”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서려 했다. 그
내가 그에게 무엇을 조사해달라고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건 분명 나에게 축하할 일이 세 가지나 겹친 날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한 예감에 눈꺼풀이 두 번 연속 떨렸다.“결과가 어떻게 나왔어?”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봤던 자료는 완전하지 않았어. 뒤에 최종 결론이 있었는데 네가 왜 못 본 건지 모르겠어.”신지태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그래서 그걸 찾아냈어?”“아니. 당시 사고를 담당했던 경찰이 이미 사망했거든.”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언제 죽었는데?”“네 아빠 교통사고가 처리된 지 한 달 후.”숨이 막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신지태는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부르며 다시 말을 걸었다.“지원아...”나는 그를 끊고 말했다.“그 경찰의 죽음이 우리 아빠 사고 결론과 관련이 있어?”“나도 그런 의심은 했어. 하지만 당시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판명됐고 병원의 사망 진단서도 있어.”그의 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 경찰의 가족을 찾아봤어. 하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어.”신지태가 말을 덧붙이자 나는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럼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은 없는 거네, 그렇지?”“지금으로선 그래. 그때 사건을 맡았던 경찰이 뭔가를 남겼다면 모를까, 그의 가족조차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그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으니까.”신지태의 말은 결국 내가 아빠의 사고를 더 이상 파헤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 경찰의 동료나 친한 친구는? 그들에겐 물어봤어?”실망스러웠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찾아봤고 물어보기도 했어.”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감았다.“결국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 한, 이건 여기서 끝난 거네.”“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내가 그 경찰의 가족이나 친했던 동료들과 다시 얘기해 볼게. 뭔가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잖아.”신지태의 말은 분명 나를 위로하기
사실 신지태에게 조사를 부탁한 건, 진정우의 결론만 믿고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결국 당시 사고 차량을 운전했던 건 그의 아버지였으니까.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그때 브레이크 고장이었다는 걸 의심하고 있는 거지?”진정우가 내게 물었다. 이제 우리 관계는 공식적으로 확립되었으니, 그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맞아. 난 진실을 알고 싶어.”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부드럽게 물었다.“지원아, 만약... 만약에... 그 사고의 브레이크 고장이 우리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면, 너는... 날 떠나겠어?”그 말은 심장을 찌르는 듯 아팠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며 마치 누군가 내 목을 움켜쥔 것 같았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상황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대답하기 두려웠다.“모르겠어.”내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설령 그 사고가 그의 아버지와 관련 있다고 해도 그는 그이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일 뿐, 그 잘못을 진정우에게 돌릴 수 없다는 목소리가 들렸다.하지만 그런 생각이 논리적으로 맞다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나는 자세를 조금 바꿔 그의 품에서 더 편안한 위치를 찾았다.“정우야, 만약 정말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너는... 너희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날 떠날 거야?”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역시 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난 단 하나만 알아. 널 잃을 순 없다는 거야.”‘날 떠나겠냐’는 질문과 ‘널 잃을 순 없다’는 그의 대답은 내 마음을 숨 막히게 했다.“진정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늘이 우리에게 그렇게 잔인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피부에 닿으며 점점 더 깊이 나를 삼켜갔다.그 순간, 다른 생각은 더
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의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히 흔들렸다.그 시선은 곧바로 내가 진정우와 꼭 잡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러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진정우였다.“유형 씨, 좋은 아침이네요.”‘아침이라니,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진정우의 인사에 강유형은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그는 턱을 약간 당기며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원아, 할 말이 있어.”나는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말이라면 지금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말을 나누고 모든 걸 털어버리면 다시는 이 문제로 얽힐 일이 없을 테니까.“정우야, 먼저 올라가 있어. 나 우유가 마시고 싶어.”나는 마치 평범한 아내처럼 그에게 말했다.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옷깃을 단단히 여며주었다.“아침엔 쌀쌀해.”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강유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야 나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넌 이 집을 언제 산 거야?”처음 조나연이 이곳에 산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강유형이 일부러 그녀에게 우리 집 위층을 사주어 나를 불쾌하게 하려 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방금 그의 반응을 보니, 내가 그를 오해했던 것 같았다.“아마 네가 사기 전이었을 거야.”내 대답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더 짙은 음침함이 서렸다.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혹시 이 집, 조나연이 사달라고 한 거야?”강유형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은 곧 답이었다.그녀는 정말로 치밀하고 악랄했다. 조나연은 의도적으로 우리 집 바로 위층의 집을 산 것이다.강유형과의 관계를 부각하면서 나를 괴롭히려는 목적이거나, 아니면 강유형이 나와 진정우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나에게 이미 간파당했다.“할 말이 있다며? 여기서?”나는 강유형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