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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신랑을 바꿨다

나는 조용히 신랑을 바꿨다

By:  무명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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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는 자신이 성욕이 없는 편인 데다가 다른 사람과 몸에 닿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5년을 사랑했지만, 우리의 진도는 손을 잡고 포옹하는 게 끝이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어도 남자친구는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남자친구가 원래 성격이 냉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야 남차친구가 자기 교수님의 딸과 아이를 갖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며 남자친구는 설명 아닌 설명을 덧붙였다. “정자만 빌려주는 거야. 교수님 유언이라서 내가 거절할 수가 없어.” “게다가 다혜한테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그 말에 나는 그저 살짝 웃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는 찬성이야.” 이미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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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강도언과 나는 5년을 만났다.

사귀기 전, 강도언은 이성과의 신체 접촉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했다.

“미안해. 받아들이기 힘들면 우리 헤어져도 돼.”

나는 그저 잘난 사람에게는 별난 구석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와 몸이 닿는 걸 꺼리는 강도언의 성향도 이해해 주었다.

우리는 5년 내내 서로 선을 지키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강도언의 은사인 임한수 교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전화를 받은 강도언은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하던 중, 강도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혜랑 아이를 가질 생각이야.”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뭐라고?”

강도언의 표정은 담담했다.

“교수님 병은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교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자신의 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그동안 나는 교수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러니 내가 도와드려야 해.”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다혜도 남자친구를 만나거나, 아니면...”

강도언은 미간을 문지르며 내 말을 끊었다.

“감정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게나 정할 수 있어?”

“게다가 그저 아이 하나만 낳는 것뿐이야. 정자만 빌려주는 셈이지. 다혜랑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강도언의 말투는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처럼 지극히 평범했다.

나는 수저를 식탁에 거칠게 내려놓고 강도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도언,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

“한 달 뒤면 우리 결혼이야. 그런데 지금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겠다고?”

강도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눈빛에는 짜증이 살짝 스쳤다.

“다혜는 교수님 딸이야.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어떻게 남이라고 해?”

“자기 오빠한테 임신시켜 달라고 하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

나는 이해할 수도, 이해할 방법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는지 강도언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은서야,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리자, 강도언은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강도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래. 지금 바로 갈게.”

강도언은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빠르게 집을 나섰다.

정성껏 준비한 아침 식사였지만 강도언이 먹은 것이라곤 밥 한 술뿐이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무심코 강도언을 알게 됐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 강도언은 유명한 얼음 왕자였다.

그 닉네임처럼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도언에게 다가가려는 사람은 누구든 냉정한 태도에 상처를 입고 물러서야 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심지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부딪히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렇게 3년을 얽히고설킨 끝에 강도언은 결국 내 구애에 흔들렸다.

사귀고 난 뒤에도 강도언은 여전히 차갑고 무뚝뚝했지만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무리 차가워도 강도언은 내 남자친구였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성과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게 싫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사람이 바로 강도언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저 정자만 빌려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강도언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깊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강도언이 아니라 임다혜가 보낸 영상이었다.

영상 속 강도언은 병상 앞에 서 있었고, 임한수 교수는 강도언의 손을 붙잡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언아, 내 상태는 내가 알아. 이번 생에 더 바랄 것도 없어. 다혜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만 바라지.”

강도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어 임다혜의 애처롭고 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아빠의 유언이니까 오늘 밤에 방에서 기다릴게.]

그 말에 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는 순간, 강도언의 낮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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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강도언과 나는 5년을 만났다.사귀기 전, 강도언은 이성과의 신체 접촉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했다.“미안해. 받아들이기 힘들면 우리 헤어져도 돼.”나는 그저 잘난 사람에게는 별난 구석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와 몸이 닿는 걸 꺼리는 강도언의 성향도 이해해 주었다.우리는 5년 내내 서로 선을 지키며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밤,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강도언의 은사인 임한수 교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전화를 받은 강도언은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아침 식사를 하던 중, 강도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다혜랑 아이를 가질 생각이야.”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뭐라고?”강도언의 표정은 담담했다.“교수님 병은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교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자신의 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그동안 나는 교수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러니 내가 도와드려야 해.”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그래도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다혜도 남자친구를 만나거나, 아니면...”강도언은 미간을 문지르며 내 말을 끊었다.“감정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게나 정할 수 있어?”“게다가 그저 아이 하나만 낳는 것뿐이야. 정자만 빌려주는 셈이지. 다혜랑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강도언의 말투는 마치 아주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처럼 지극히 평범했다.나는 수저를 식탁에 거칠게 내려놓고 강도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도언,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한 달 뒤면 우리 결혼이야. 그런데 지금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겠다고?”강도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눈빛에는 짜증이 살짝 스쳤다.“다혜는 교수님 딸이야.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어떻게 남이라고 해?”“자기 오빠한테 임신시켜 달라고 하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나는 이해할 수도, 이해할 방법도 없었다.내가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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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영상이 끝났는데도 나는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뒤에 마지막 부분을 몇 번이나 다시 돌려 봤고, 강도언이 ‘그래’라고 대답하는 걸 거듭 확인했다.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살아남으려는 것처럼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13번째로 그 대답을 들었을 때, 핸드폰 화면 위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황급히 얼굴을 훔치고 나서야 어느새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걸 알았다.마음이 아픈지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아니면 서럽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조금뿐이었다.‘나는 왜 울고 있는 걸까?’나는 곧 욕실로 가 얼굴을 씻고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이게 나인가?’거울 속에는 머리는 헝클어지고 피부는 누렇게 뜬 데다가 두 눈까지 퉁퉁 부은 여자가 서 있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사람을 사랑하다가 자신의 모습까지 알아볼 수 없게 되는 일이 정말로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나는 오랫동안 강도언을 깊이 사랑했고, 결혼을 앞둔 우리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결실은 이미 새까맣게 썩은 채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어지러운 생각을 가라앉힌 뒤, 휴대폰을 들어 SNS에 글을 올렸다.[결혼식에 신랑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신랑 하실 분?]글을 올리자 친구들이 줄줄이 농담을 보내왔다.내가 강도언이라면 죽고 못 산다는 걸 주변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그 글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축하로 가득한 댓글들을 바라보며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나는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송건우,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자란 남들이 말하는 소꿉친구였다.그렇다고 사이가 특별히 살가웠던 건 아니었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했다.어릴 적 송건우는 늘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내 뒤는 자기가 봐 주겠다며 털털하게 큰소리를 치곤 했다.초등학교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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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강도언은 계속 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도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임다혜가 띄엄띄엄 보내오는 도발적인 의도가 다분한 영상을 통해서, 두 사람이 어느 선까지 갔는지 짐작할 뿐이었다.두 사람의 애매한 행동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예정대로 결혼식 준비를 이어 갔다.그저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내가 보낸 청첩장에 적혀진 신랑 이름이 더 이상 강도언이 아니라 송건우라는 사실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은서 언니, 신랑 이름이 잘못 쓰여진 거 아니에요?]“아니? 제대로 쓰여진 거 맞아.”내 말투는 평온했다.“신랑이 바뀌었거든. 송건우라고 내 소꿉친구야.”청첩장을 확인한 내 지인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내게 전화나 문자 폭탄을 날렸다.[은서야, 네 남친이랑... 아니, 강도언 씨랑 싸운 거야?]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하긴 그럴 만도 했다.나는 강도언을 향한 마음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강도언을 위해 어떤 비굴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관계에서 늘 갑이었던 강도언은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었다.아니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강도언은 언제나 그랬다.차갑고 고고한 얼음 왕자처럼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정상까지 기어오르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봤다.그러다 다시 처참하게 추락해 부서지는 것까지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나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다.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저마다 농담을 던졌다. 연인끼리 결혼을 앞두고 싸우거나, 아니면 서프라이즈 비슷한 그런 장난쯤으로 생각한 것이다.3년이나 끈질기게 매달려서 겨우 손에 넣은 강도언을 내가 정말 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나조차도 신랑을 바꿨다고 말하는 순간, 잠시 멍해졌으니까 말이다.나도 이 관계를 이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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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간단히 준비를 마친 뒤, 나는 강도언과 함께 출발했다.장례식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나와 강도언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달려왔다.“도언 오빠...”바로 임다혜였다.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핀을 단 채,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었다.급히 다가가서 임다혜를 품에 안은 강도언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가득했다.“다혜야, 너무 상심하지 마.”임다혜는 강도언의 품에 기댄 채 흐느끼며 말했다.“그래도 오빠가 곁에 있어 줘서 다행이야.”두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았다.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저 둘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커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효녀인 임다혜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기는커녕, 이곳에서 외간 남자와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화를 내면서 비꼬는 말을 서슴없이 쏟아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을 그대로 무시하고 빈소로 향했다.나는 고인을 추모하러 온 것이지 두 사람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러 온 게 아니었다.강도언은 그 모습을 봤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입을 뻐끔거리면서 내게 뭔가 말을 하려는 듯했다.“오빠, 나랑 좀 같이 있어 줘.”하지만 임다혜의 목소리에 강도언은 다시 생각을 거두었다.“그래.”강도언은 부드럽게 웃었다.며칠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나는 두 사람이 구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막지 않았다. 그저 빈소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문했다.“은서야, 와 줘서 고마워.”옆에서 임다혜의 어머니 최미숙이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슬픔에 잠긴 눈에는 죄책감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다혜랑 도언이 일은 나도 처음에는 반대했어. 그런데 도언이가 워낙 속이 깊은 아이라, 교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꼭 들어드려야 한다고 하도 그러더구나.”“은서야, 마음이 많이 상했지?”최미숙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내 귀에는 그 말이, 임다혜와 관계를 맺은 것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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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최미숙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딸의 편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까지 떳떳할 수는 없었다.그런데 최미숙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강도언이 결정을 내렸다.“택시 타고 돌아가.”슬쩍 나를 바라보던 임다혜는 입가에 비웃음을 걸면서 차창을 올렸다.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강도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임다혜의 기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를 뒤로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금세 바닥에는 얇게 눈이 쌓였고, 나는 허리를 굽혀 눈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차갑네.’하지만 내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만큼 차갑지는 않았다.집에 돌아오니 강도언은 옷을 챙기고 있었다. 들어오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바로 입을 열었다.“다혜가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내가 가서 한동안 같이 있어 줄 테니까, 너는 며칠 동안 버스로 출근해.”나는 대꾸하지 않았다.‘임다혜의 기분이 안 좋으니, 옷을 챙겨서 같이 지내며 달래 주겠다는 뜻일까?’난 더 묻지 않았고 강도언 역시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옷을 다 챙긴 강도언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그 뒤로 일주일 내내 강도언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조차 한 통도 없었다.그런데도 나는 강도언이 매일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임다혜가 열심히 내게 영상이나 사진을 참 꾸준하게도 보내줬기에.그때가 돼서야 나는 강도언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그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을 뿐이었다.임다혜에게는 온갖 영양식을 만들어 주었다.직접 새우 껍질을 까 주고 갖가지 선물도 골라 주었다.그뿐만 아니라 놀이공원에도 함께 가고 관광지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헀다.그 모든 것이 내가 예전부터 강도언과 함께하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었다.하지만 강도언은 늘 너무 유치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사실 나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저 임다혜가 보내온 영상과 사진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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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강도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휴대폰을 낚아채서 화면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굳어졌다.“오은서, 이 사람 누구야?”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런 강도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화가 난 걸까? 질투하는 걸까?’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강도언의 얼굴에서 이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다.나는 강도언이 세상 모든 일에 냉담할 수 있고, 어떤 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그런데 왜? 걔는 나한테 관심이 없지 않았나?’나와 사귀던 때 한 번은 선배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하필 그 장면을 강도언에게 들켰지만, 남자는 아무 화도 내지 않았다.오히려 평온했고 태도는 평소처럼 차가웠다.그때 나는 어렴풋이 강도언은 사실 나를 그만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아니면 애초에 성격이 그렇게 냉담한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질투할 줄도 모르고 자기 것이 아닌 감정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런 강도언이 지금은 왜 질투하는 걸까?’강도언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오면서 내 눈빛은 여전히 평온했다.“그냥 농담이야.”강도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뭔가 떠올린 듯했다.“네가 말한 그 송건우야? 아직도 연락해?”“응.”옆에 있던 임다혜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송건우가 누군데?”강도언은 대답하지 않고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강도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뒤, 나는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나는 강도언이 갑자기 연락한 만큼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그런데 막상 전화가 연결되자, 송건우는 기다렸다는 듯 불평부터 쏟아 냈다.[너 왜 내 전화를 안 받아?][방금 기다린 그 1분 동안, 난 내가 버림받는 시나리오를 벌써 13번이나 상상했어.][나 지금 엄청 서럽거든. 그러니까 빨리 달래 줘. 맛있는 거 사 주면 풀릴 것 같으니까...][샤부샤부,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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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난 발코니에서 30분쯤 이야기를 나눈 뒤 방으로 돌아왔다.임다혜는 아직도 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강도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나를 보자 강도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설명할 거 없어?”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도언을 바라보았다.“뭘 설명해?”“그 사람을 왜 그런 이름으로 저장했어?”따지는 말투에는 짙은 불만이 배어 있었다.나는 조금 뜻밖이라는 눈으로 강도언을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내가 다른 남자의 저장 이름을 바꾼 것보다, 본인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지겠다는 쪽이 훨씬 심각한 문제 아닌가?’하지만 더 얽힐 마음이 없어서 그저 대충 대꾸했다.“그냥 농담이야.”강도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으면서 이내 명령하듯 말했다.“당장 바꿔.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내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자, 그제야 강도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다혜의 눈에 독기가 스쳤다.강도언이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임다혜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리 이따 같이 나가서 밥 먹어요. 그동안 도와주신 것에 대해서 제대로 감사하고 싶거든요.”나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이 뻔히 보이는 눈빛이었다.사실 뭘 하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 나를 한 번 기분 나쁘게 만들려는 것이었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아직 챙겨야 할 짐이 한가득인데, 질투로 신경전을 벌이는 이런 레퍼토리에 장단을 맞춰 줄 여유도 없었다.하지만 임다혜는 내가 거절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했다.내가 고개를 젓자마자 금세 서러운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언니, 제가 싫으신 거 알아요. 밥을 사겠다고 한 것도 최대한 보답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하아, 됐어요. 제가 잘못했네요. 저 그냥 갈게요.”말을 마친 임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자, 강도언이 급히 임다혜를 막아 세우더니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배포 좀 크게 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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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도언이 그 메시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도언을 차단하고 삭제한 뒤, 나는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공항을 나서자마자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송건우가 한눈에 들어왔다.검은 트렌치코트에 오관이 뚜렷한 얼굴,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쓴 송건우는 예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송건우는 여전히 개성이 강하고 눈에 띄었다.지나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송건우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신이 나서 손을 흔들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그리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두 팔을 벌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꼬붕!”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깜짝 놀라서 급히 송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송건우가 황급히 팔을 풀자 나는 남자를 원망스럽게 흘겨보았다.“야,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 몰라?”“치, 네가 무슨...”예전처럼 반박하려던 송건우는 뭔가 떠올랐는지 말을 멈추더니 혀를 빼꼼 내밀었다.“알았어, 알았어.”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자, 나는 더 따지지 않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아셔?”“당연히 아시지. 난 내 아내 데리러 온 사람인데? 그리고 이런 큰일은 당연히 집에도 알려야지.”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마음속에 계속 걸리던 것을 물었다.“그런데 너는 왜 받아들였어?”“뭘 받아들였다는 거야?”송건우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살짝 붉어진 귓불이 눈에 들어왔다.나는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너, 혹시 나 좋아해?”송건우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붉어졌다.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송건우는 나를 한껏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응. 나 너 좋아해.”그 진지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나는 급히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돌렸고, 송건우는 그런 내가 재밌는지 피식 웃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겁쟁이.”나는 송건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저 피식 웃었다.정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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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결혼식이 다가올 무렵,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와서 전화를 받자 분노를 억누른 강도언의 목소리가 들렸다.[오은서, 너 어디야?][헤어지자는 게 무슨 뜻이야?]나는 시간을 확인했다.‘보름이 훌쩍 지나서야 이제야 연락할 생각이 든 걸까?’‘아니면 이제야 내가 농담을 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아챈 걸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그 번호도 그대로 차단했다.그렇게 난 송건우와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결혼식에서 송건우가 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 주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나를 사랑한 지는 꽤 오래됐고 이날을 기다린 지도 오래됐다고 했다.송건우의 눈물이 채찍처럼 내 마음을 두드렸다.나는 조용히 한 걸음 다가가서 발끝을 세우고 송건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건우야, 남은 평생 잘 부탁해.”“응. 나도 잘 부탁해.”...결혼식이 끝난 뒤 휴대폰을 확인하니, 낯선 번호에서 수십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오은서, 어떻게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해?][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와. 그러면 용서해 줄게!]...[내가 잘못했어. 은서야, 돌아와. 우리 잘살아 보자, 응?][내가 진짜 잘못했어. 은서야, 제발 부탁이야.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지 마.]나는 평온하게 메시지를 끝까지 읽은 뒤,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그 번호를 차단했다.친구들을 통해 강도언의 소식을 들었다.강도언은 여기저기 사람들을 붙잡고 내 행방을 물으면서,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나를 찾아다녔다고 했다.하지만 나는 감동하지 않았고 그저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몇 년을 강도언을 만나왔고, 강도언 한 사람 때문에 고향까지 떠나온 나였다.그런데 정작 강도언은 내가 어디 출신인지조차 깨끗이 잊어버린 것이었다.[임다혜 임신했다더라. 다음 달에 결혼한대.]나는 대충 대꾸한 뒤 전화를 끊었다.이제 강도언과 다시 얽힐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를 통해 청첩장까지 보내올 줄은 몰랐다.내가 펼쳐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자, 송건우가 한 손에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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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런데 강도언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임다혜를 한쪽으로 밀쳐 내더니, 임다혜의 고통스러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상 아래로 뛰어내려서 나를 쫓아왔다.“오은서, 가지 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걸음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속도를 높여서 차에 올라탔다.차가 출발한 뒤, 나는 백미러 너머로 강도언이 꼴사납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강도언의 두 눈은 새빨갛게 충혈된 채 목청이 찢어질 듯 소리쳤다.“은서야,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그러자 송건우가 백미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쯧쯧, 꼴이 너무 비참한데? 가서 좀 달래 주지 그래?”나는 송건우를 흘겨보며 차 문을 열려는 시늉을 했다.“그럼 진짜 다녀올까?”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송건우는 급히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고 액셀을 밟았다. 차는 그대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친구에게서 임다혜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강도언이 결혼식장에서 밀치는 바람에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고 했다.최미숙은 병원에서 난리를 피웠고 임다혜도 줄곧 울고불고했다는 것이다.[아이가 없어졌으니, 그 결혼은 아마 못 할 거야.]나는 강도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토록 원하지 않았나?’‘이제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또 문제를 일으키는 걸까?’‘얻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아서 이리저리 들쑤시는데, 늘 사랑받는 사람이라 겁이 없어 그런 걸까?’그때 나는 강도언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랬기에 강도언을 위해서라면 물불도 가리지 않았다.하지만 강도언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몇 번이고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그래서 나는 마음을 완전히 접고 강도언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고 있었다.‘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걸까?’‘강도언이 어떻게 잘못을 할 수 있겠어.’3개월 뒤, 나는 집 앞에서 강도언과 마주쳤다.강도언은 오랫동안 기다린 듯 두 손은 얼어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나를 보자 서둘러 다가왔다.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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