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서지안.”
도윤의 걸음이 잠깐 흐트러졌다.
“……서지안 이사님이요?”
“어.”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윤세림 씨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영 쪽에서도 긍정적인 분위기라고 하고요.”
“됐고.”서늘한 음성이 말을 끊었다.
태호는 여전히 앞을 향한 채 건조하게 덧붙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예.”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도윤이 빠르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럼 혹시…… 서지안 이사님으로 결정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태호는 슈트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예뻐.”
“……예?”몇 년을 곁에서 지켜봐 온 도윤조차 처음 듣는 말이었다. 태호는 원래 웬만한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제일 예뻐.”
몇 시간 전 마주 앉아 있던 지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맑고 단정한 얼굴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얌전한 낯을 해놓고선 이 맞선에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굴던 앙큼한 태도까지.
제법 흥미로웠다.
도윤은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태호를 바라보다가 이내 태블릿 PC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 서한 쪽에 먼저 연락하고 기사 준비할까요?”
“아니.”태호가 무심히 잘라 말했다.
“그냥 바로 기사 띄워.”
태호의 짙은 눈동자에 미묘한 흥미가 어렸다.
***요란한 벨소리가 고요한 침실을 울렸다.
지안은 이불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끊어질 만하면 다시 울렸다.
“아…… 진짜.”
결국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한참을 더듬은 끝에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어젯밤 과음한 탓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목은 바싹 말라 있었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나 어제 어떻게 들어왔더라.
희미하게 기억을 더듬던 지안은 이내 포기했다.
다신 걔네들이랑 마시나 봐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이사님, 지금 어디십니까?
다급한 목소리가 숙취로 울렁이던 속을 괜히 더 자극했다. 지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이요…… 왜요.”
- 기사 보셨습니까?
“무슨 기사…….”
- 결혼이요! 결혼!
지안이 감고 있던 눈을 겨우 떴다.
“결혼?”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지안이 조금이라도 속이 덜 울렁거리는 자세를 찾으려 몸을 뒤척였다.
“황 실장님 결혼해요?”
잠깐의 정적.
“축하해요…….”
- 아니, 제 결혼 말고요!
버럭 터진 목소리에 지안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슬쩍 떼었다.
“아, 머리야…… 그럼 누구 결혼인데요.”
전화기 너머로 황민준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 이사님 결혼이요!
지안이 이불을 걷어차듯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네? 뭐라고요?”
- 지금 기사 떴습니다. 이사님 결혼하신다고요.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해요?”
- 강태호 부회장님이요!
지안이 그대로 굳었다.
숙취로 흐릿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어젯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별다른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무미건조한 대화만 몇 마디 주고받았던 자리였다.
헤어질 때도 딱히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그게 끝인 줄 알았다.
지안의 입술 사이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미친.”
그런데 결혼이라니.
분명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어제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끝난 자리가, 하룻밤 사이에 결혼 발표로 이어질 리가 없었다.
지안은 울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붙잡고 대충 옷을 걸친 뒤 곧장 회사로 향했다.
이사실로 들어서자마자 먼저 도착해 있던 황민준이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을 닫고 들어오는 지안을 본 그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이사님, 어제 술 드셨어요?”
지안이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티 나요?”
“네. 지금 몰골이…….”말끝을 흐리는 민준을 향해 지안이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어제 진짜 안 마시려고 했거든요. 근데 오하린이 전화가 와가지고…….”
민준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습니다. 일단 연락부터 해보시죠.”
“그래요. 먼저 연락해보는 게 좋겠어요.”두 사람이 멀뚱히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건 민준이었다.
“……누가요?”
지안이 손바닥을 펼쳐 민준 쪽을 가리켰다.
“실장님이 하셔야죠.”
“저요?”민준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는 강태호 부회장님 연락처가 없는데요?”
“…….” “자, 잠깐. 그러니까 이사님도 강태호 부회장님 연락처가 없다는 거죠?”지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없죠. 어제 그냥 밥만 먹고 끝이었다니까요.”
“연락처 교환도 안 하고요?” “네.” “근데 결혼 기사가 떠요?” “제 말이요. 이게 무슨 일이래요?”민준은 어처구니없다는 낯으로 지안을 바라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체념한 듯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태강 쪽 비서실에 연락해보겠습니다.”
***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도로는 여전히 차들로 빽빽했다. 신호에 걸린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고, 유리창 너머 서울의 도심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분주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안은 황민준과 함께 차에 올라 태강그룹 본사로 향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편의점에서 급히 사 온 숙취해소제가 들려 있었다. 지안은 뚜껑을 거칠게 비틀어 열더니 몇 모금 연달아 들이켰다.
숙취도 숙취였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제 결혼 기사가 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당황스러웠다. 아직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안의 걸음이 멎었다. 설마. 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태호가 서 있었다. 딥 네이비 슈트 차림의 태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텔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부회장님?” 태호가 긴 다리로 성큼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갑자기 뒤에서 말하시니까 그렇죠.” 지안은 괜히 휴대전화를 손안에서 고쳐 쥐었다. 하루 종일 문자 하나 때문에 사람 신경 쓰이게 해놓고 정작 답은 없더니. 태호가 지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답장 안 해서 서운했어?” 지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귀신인가. “전혀요? 제가 언제 서운해했다고 그래요.” “표정에 다 써 있는데.” “진짜 아니거든요.” 지안이 바로 받아치자 태호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스쳤다. 태호는 오늘 오후 서한호텔 레스토랑에서 외부 업체와 미팅이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참에 복도 끝에서 지안을 발견했다. 서류를 품에 끼고 직원과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쪼그만 게 제법 열심히도 다니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너 보러.” 지안이 잠시 말을 잃었다.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지. 그러다 태호 뒤쪽에 서 있는 비서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서 미팅하셨어요?” “애기는 눈치도 빠르네.” 지안이 황급히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쉿.”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자꾸 애기래요.” 뒤에는 태호의 비서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지안은 괜히 신경 쓰이는 듯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꾸벅 인사했다. 도윤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서 보니 맑고 단정한 얼굴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유난히 또렷했다. 표정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평소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잘 주지 않던 태호가 왜 지안을 두고 제일 예쁘다고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아침부터 서한그룹 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탕비실에서도, 사내 메신저에서도 온통 같은 이름이 오르내렸다. 서지안. 그리고 강태호. 오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서한그룹은 공식 입장을 냈다. 태강그룹과의 혼담은 사실이며 현재 양가가 구체적인 일정을 조율 중이라는 짧은 내용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확인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던 홍보팀이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꾸자 사내는 더욱 술렁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지안은 놀랄 만큼 태연해 보였다. 쏟아지는 연락은 진작 무음으로 돌려놓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알 것 같았다. 윤준표였다. “너 진짜 강태호랑 결혼해?” 준표가 거의 고함을 지르듯 따져 물었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손짓까지 커진 채 당장이라도 팔짝팔짝 뛸 기세였다. “기사 보셨잖아요.”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고. 네가 어떻게 강태호를 꼬셔?” “그러게요. 어떻게 했을까요.” 지안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아니, 네가 뭐 볼 게 있다고 갑자기 강태호가 너랑 결혼을 해. 설마 잤냐?” 지안의 잇새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침부터 개소리 할 거면 좀 나가요. 내가 좀 피곤해서 오늘은 받아주기 힘들거든요.” “너 진짜 뭐라도 해보려고 이러는 거야? 그렇다고 회장님이 너 봐주기라도 할 것 같아?” 지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기대도 안 하고요. 그 회장님께서 먼저 맞선을 주도하셨네요. 하나뿐인 딸 아주 단물까지 쏙쏙 빼먹으실 생각인가 보죠.” “아니, 회장님은 왜 이런 애를…….” “회장님이랑 연락하시거든 덕분에 좋은 거래 했다고 전해 주세요.” “뭐? 거래? 무슨 거래를 했는데!” 준표가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안은 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책상 한쪽의 내선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날 저녁. 태호를 태운 차가 성북동 주택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높은 담장 너머로 자리 잡은 강덕수의 저택은 오래된 부잣집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넓은 정원과 오래된 소나무, 낮게 깔린 조명까지.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집주인의 위세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린 태호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집안을 맡아보는 중년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아버지는.” “서재에 계십니다. 저녁도 아직 안 드셨습니다.” 태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들어보나 마나 오늘 집안 분위기가 어떨지는 뻔했다. 그대로 서재 쪽으로 향하려는데 거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얘, 태호야.” 태호가 걸음을 늦췄다. 차유경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덕수가 태호의 친모와 이혼한 뒤 재혼한 여자였다. 몸에 달라붙는 화려한 원피스에 큼지막한 보석 목걸이, 손목에는 시계와 팔찌가 번쩍였다. 비싼 것들로만 골라 치장한 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 고급스러운 맛은 조금도 없었다. 유경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너희 아버지 오늘 얼마나 놀라셨는지 아니? 그렇게 갑자기 결혼 기사를 내버리면 어떡하니. 집안끼리 상의라는 것도 있는 건데.” 태호가 무심히 그녀를 일별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십니까.” “뭐?”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아버지 돈이나 펑펑 쓰시면서 얌전히 사시죠.” 유경의 안색이 굳었다. 마치 이 집에서 제 위치가 어디인지 똑똑히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너,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발끈한 목소리와 달리 기세는 이미 한풀 꺾여 있었다. 태호는 더 상대할 생각이 없는 듯 몸을 돌렸다. 유경이 뒤에서 급히 말을 보탰다. “아버지 안에 계셔. 엄청 화나셨더라. 저러다 쓰러지실까 걱정이야.” “퍽이나 쓰러지시겠습니다.” 태호가 비식 웃었다. 강덕수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기세만큼은 웬만한 장정을 눌렀다. 한때 조직의 우두머리로 수많은 사람을 거느렸던 사람답게, 가만
“그러니까 부회장님은 저랑 결혼해서 태강 이미지도 바꾸고, 재단이랑 자연스럽게 엮이겠다는 거네요.” “어.” 태호는 순순히 인정했다. “대신 재단 지원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거야.” 지안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태강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졌다. 지원 규모가 커지는 건 물론이고 그렇게까지 판이 커진 재단을 윤준표가 제멋대로 없애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 인간도 이제 함부로 지랄은 못 하겠네. “지금 규모의 몇 배는 가능할 텐데. 고민할 시간은 줄 테니까—” “좋아요.” 태호의 말이 뚝 끊겼다. 지안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 이번에는 태호가 말이 없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결혼은 절대 못 한다며 버티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태도가 빨랐다. “해요, 결혼.” 태호의 시선이 지안의 얼굴에서 불쑥 내밀어진 손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빠르네.” “좋은 조건은 빨리 잡아야죠.” 조금 전까지 결혼이니 동거니 하며 얼굴을 붉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태호가 지안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잘해보자, 애기.” “……그 애기 소리는 그만하시면 안 돼요?” “싫은데.” 멈칫. 순간, 너무 덥석 좋다고 한 건 아닌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 부회장실을 나선 태호는 도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느긋한 걸음이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윤이 옆에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서 이사님께는 잘 말씀하셨습니까? 아까 보니까 엄청 당황하셨던 것 같던데요.” 태호는 대답 대신 입매를 희미하게 풀었다. 결혼은 절대 못 한다더니 재단 지원 얘기가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손부터 내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셈이 빠른 애였다. 그 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잘했어.” 짧게 답한 태호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오늘 퇴근 후에 바
태호는 잠시 지안을 바라봤다. “왜지?” “저랑 결혼하시는 게 부회장님한테도, 태강그룹에도 오히려 손해일걸요? 부회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저 소문 안 좋은 거.” “소문은 예쁜 여자의 액세서리 같은 거라며.” “…….” 지안의 입이 벌어졌다. 어제 레스토랑에서 제가 내뱉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되돌려준 것이다. “그, 그건 농담이었고요.” “진지하게 들었는데.” 담담한 말씨와 달리 묘하게 사람을 놀리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망했다. 완전히 말려들었다. 당황한 지안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번 꼬이기 시작한 말은 머리를 거칠 새도 없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결혼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부부가 되면 같이 살아야 하고, 또…….” 말끝이 흐려졌다. 태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자 지안은 외려 마음이 급해졌다. “그, 부부끼리는 뭔가…… 그런 것도 있을 거고. 근데 저는 그런 거 안 해봐서 잘 모르기도 하고…….” 말을 뱉고 나서야 지안은 제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미쳤나 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태호의 얼굴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때 태호가 픽 웃고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랑 자려고?” “네?!” 지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건지. 정작 태호의 낯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급하게 변명거리를 찾는데 태호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애기가 감당은 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울렸다. 애기라니. 아무리 열 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스물다섯이나 먹은 사람한테 애기라니. 조금 전 횡설수설했던 제 모습까지 떠오르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잠시 뒤 안쪽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남자가 문을 열어주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쫄지 말자. 짧게 마음을 다잡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집무실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조용했다. 짙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정돈된 공간에는 불필요한 장식 하나 없이 묵직한 분위기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태호가 있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훑고 있던 그가 지안이 들어서자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오늘은 짙은 차콜 컬러의 스리피스 슈트 차림이었다. 베스트까지 흐트러짐 없이 갖춰 입은 모습이 삭막할 만큼 정돈된 집무실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앉아.” 태호가 턱끝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지안은 태연한 척 소파에 앉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숨기지 못한 채 엉덩이만 살짝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제 몰골도 영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화장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머리도 대충 묶은 상태였다. 지금은 술 냄새만 안 나면 다행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책상 너머에서 태호가 잠시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 태도가 지안은 영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결혼 기사가 터졌는데도 조급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서류를 넘기는 손길도, 무심한 낯빛도 지나치게 태연했다. 지금 애가 타는 건 나뿐인가? 지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한가하신 거예요?” 태호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가한 건 네 쪽 같은데.” 태호가 손에 들린 서류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나마 존댓말을 붙이던 사람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말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오보 기사가 났는데, 적어도 사과든 해명이든 먼저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 있기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