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지안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뭔 개소리야, 또.
진짜 딱 한 대만 칠까?
지안은 볼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준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능력이 부족하면 키울 생각을 해야지 왜 애먼 사람 붙잡고 견제부터 하는 건지. 본인이 잘하면 될 일을 꼭 남을 끌어내려 해결하려 드는 것도 참 한결같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안은 준표를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윤 대표님, 적당히 하세요. 서한그룹 확 먹어버리기 전에.”
뒤에서 발끈한 준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씩씩대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지안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내가 무슨 수로 서한그룹을 먹어.
서정욱이 제게 이사 자리를 내어준 건 그저 피붙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딸에게 별다른 관심도, 기대도 없었다.
준표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지안만 보면 제 것을 빼앗길 사람처럼 날을 세웠다.
진짜 지치지도 않나 봐.
지안이 좌우로 고개를 저은 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민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비서이자 회사 내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쟤 오늘따라 왜 저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사실 다음 주 목요일 저녁에 맞선 일정이 잡혔습니다.” “네?”지안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은 난처한 기색으로 안경을 슬며시 밀어 올렸다.
“태강그룹 강태호 부회장님이십니다.”
“……강태호요?”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뜬금없이 무슨 맞선이야.
“저희 아빠가 시킨 거예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지안의 잇새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제 뜻이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지안은 필요할 때 쓰기 좋은 카드에 가까웠으니까.
이젠 하다 하다 딸을 팔아먹으려고 하나 보다.
민준이 지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원하지 않으시면 제가 회장님께 다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됐어요.”말해봤자 달라질 게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 적이 없으니.
“그럼 하나만 알아봐 주세요.”
“말씀하세요.” “나 말고 또 누가 맞선 보는지.” “그건 왜……?”“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이라 하잖아요?”
적어도 상대가 어떤 사람이고, 자신 말고 어떤 여자들이 후보로 올라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빠져나갈 구실이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자리인 만큼 지안은 더더욱 이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준이 요청한 자료를 가져왔다.
지안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고 첫 장을 넘겼다.
한영백화점 윤세림.
윤 회장의 손녀이자 오너가 3세.
대신그룹 최 회장의 셋째 딸.
대신호텔 전략기획실 근무.
그 아래로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집안의 여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한참 자료를 내려다보던 지안이 머쓱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굳이 걱정할 필요가 있었나?
괜히 비장하게 굴었던 자신이 조금 민망해졌다.
“화려하네.”
조건만 놓고 보면 지안 역시 어디 가서 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문제라면 이름 뒤에 따라붙는 소문들이었다.
밤마다 술집을 전전한다더라.
남자가 끊이지 않는다더라.
회사에는 이름만 걸어놓고 출근도 제대로 안 한다더라.
대부분 부풀려졌거나 사실과 다른 이야기였지만 굳이 해명하고 다닌 적은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는 입에 올릴 만한 가십거리가 필요했고 그중 가장 만만한 대상이 자신이었을 뿐이었다.
이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는 이유도 뻔해 보였다.
구색 맞추기.
어쩌면 소문 안 좋은 재벌가 딸 하나쯤 끼워놓아야 나머지 후보들이 상대적으로 더 나아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
저녁이 내려앉은 한강 위로 불빛이 하나둘 번지고 있었다. 강 건너 빌딩의 창마다 켜진 불이 검은 수면 위로 길게 흔들렸다.
지안은 약속 시간보다 이십 분 일찍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딱히 일찍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길에 차가 생각보다 막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딸, 취업 축하해!”
“아빠, 뭘 이렇게까지 해요.” “이런 날 아니면 언제 축하해주니.”지안보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여자가 부모와 함께 앉아 있었다.
흔한 풍경이었다.
다만 제 삶에는 좀처럼 없었던.
생일에도, 졸업식에도 옆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축하한다는 말은 대부분 문자로 왔고 그마저 비서를 통해 전달되곤 했다.
화목해 보이네. 하나도 안 부럽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안의 시선은 한동안 그 테이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6:58.
시간을 확인한 지안은 가디건 소매를 정리했다. 아이보리색 원피스에 얇은 가디건을 걸쳤고 화장도 평소보다 옅었다.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굳이 힘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한 남자가 지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강태호였다.
짙은 남색 슈트가 큰 체격을 따라 군더더기 없이 떨어졌다. 선이 굵은 얼굴은 잘생겼다는 인상보다 위압감이 먼저 다가왔다.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데도 주변 공기가 자연스럽게 가라앉는 듯했다.
말로만 듣던 사람은 소문보다 실물이 훨씬 강렬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기선을 제압하려던 지안은 마음을 순식간에 고쳐먹었다. 그냥 얌전히 있어야겠다.
지안의 걸음이 멎었다. 설마. 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태호가 서 있었다. 딥 네이비 슈트 차림의 태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텔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부회장님?” 태호가 긴 다리로 성큼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갑자기 뒤에서 말하시니까 그렇죠.” 지안은 괜히 휴대전화를 손안에서 고쳐 쥐었다. 하루 종일 문자 하나 때문에 사람 신경 쓰이게 해놓고 정작 답은 없더니. 태호가 지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답장 안 해서 서운했어?” 지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귀신인가. “전혀요? 제가 언제 서운해했다고 그래요.” “표정에 다 써 있는데.” “진짜 아니거든요.” 지안이 바로 받아치자 태호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스쳤다. 태호는 오늘 오후 서한호텔 레스토랑에서 외부 업체와 미팅이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참에 복도 끝에서 지안을 발견했다. 서류를 품에 끼고 직원과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쪼그만 게 제법 열심히도 다니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너 보러.” 지안이 잠시 말을 잃었다.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지. 그러다 태호 뒤쪽에 서 있는 비서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서 미팅하셨어요?” “애기는 눈치도 빠르네.” 지안이 황급히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쉿.”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자꾸 애기래요.” 뒤에는 태호의 비서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지안은 괜히 신경 쓰이는 듯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꾸벅 인사했다. 도윤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서 보니 맑고 단정한 얼굴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유난히 또렷했다. 표정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평소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잘 주지 않던 태호가 왜 지안을 두고 제일 예쁘다고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아침부터 서한그룹 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탕비실에서도, 사내 메신저에서도 온통 같은 이름이 오르내렸다. 서지안. 그리고 강태호. 오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서한그룹은 공식 입장을 냈다. 태강그룹과의 혼담은 사실이며 현재 양가가 구체적인 일정을 조율 중이라는 짧은 내용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확인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던 홍보팀이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꾸자 사내는 더욱 술렁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지안은 놀랄 만큼 태연해 보였다. 쏟아지는 연락은 진작 무음으로 돌려놓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알 것 같았다. 윤준표였다. “너 진짜 강태호랑 결혼해?” 준표가 거의 고함을 지르듯 따져 물었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손짓까지 커진 채 당장이라도 팔짝팔짝 뛸 기세였다. “기사 보셨잖아요.”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고. 네가 어떻게 강태호를 꼬셔?” “그러게요. 어떻게 했을까요.” 지안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아니, 네가 뭐 볼 게 있다고 갑자기 강태호가 너랑 결혼을 해. 설마 잤냐?” 지안의 잇새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침부터 개소리 할 거면 좀 나가요. 내가 좀 피곤해서 오늘은 받아주기 힘들거든요.” “너 진짜 뭐라도 해보려고 이러는 거야? 그렇다고 회장님이 너 봐주기라도 할 것 같아?” 지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기대도 안 하고요. 그 회장님께서 먼저 맞선을 주도하셨네요. 하나뿐인 딸 아주 단물까지 쏙쏙 빼먹으실 생각인가 보죠.” “아니, 회장님은 왜 이런 애를…….” “회장님이랑 연락하시거든 덕분에 좋은 거래 했다고 전해 주세요.” “뭐? 거래? 무슨 거래를 했는데!” 준표가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안은 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책상 한쪽의 내선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날 저녁. 태호를 태운 차가 성북동 주택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높은 담장 너머로 자리 잡은 강덕수의 저택은 오래된 부잣집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넓은 정원과 오래된 소나무, 낮게 깔린 조명까지.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집주인의 위세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린 태호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집안을 맡아보는 중년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아버지는.” “서재에 계십니다. 저녁도 아직 안 드셨습니다.” 태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들어보나 마나 오늘 집안 분위기가 어떨지는 뻔했다. 그대로 서재 쪽으로 향하려는데 거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얘, 태호야.” 태호가 걸음을 늦췄다. 차유경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덕수가 태호의 친모와 이혼한 뒤 재혼한 여자였다. 몸에 달라붙는 화려한 원피스에 큼지막한 보석 목걸이, 손목에는 시계와 팔찌가 번쩍였다. 비싼 것들로만 골라 치장한 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 고급스러운 맛은 조금도 없었다. 유경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너희 아버지 오늘 얼마나 놀라셨는지 아니? 그렇게 갑자기 결혼 기사를 내버리면 어떡하니. 집안끼리 상의라는 것도 있는 건데.” 태호가 무심히 그녀를 일별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십니까.” “뭐?”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아버지 돈이나 펑펑 쓰시면서 얌전히 사시죠.” 유경의 안색이 굳었다. 마치 이 집에서 제 위치가 어디인지 똑똑히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너,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발끈한 목소리와 달리 기세는 이미 한풀 꺾여 있었다. 태호는 더 상대할 생각이 없는 듯 몸을 돌렸다. 유경이 뒤에서 급히 말을 보탰다. “아버지 안에 계셔. 엄청 화나셨더라. 저러다 쓰러지실까 걱정이야.” “퍽이나 쓰러지시겠습니다.” 태호가 비식 웃었다. 강덕수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기세만큼은 웬만한 장정을 눌렀다. 한때 조직의 우두머리로 수많은 사람을 거느렸던 사람답게, 가만
“그러니까 부회장님은 저랑 결혼해서 태강 이미지도 바꾸고, 재단이랑 자연스럽게 엮이겠다는 거네요.” “어.” 태호는 순순히 인정했다. “대신 재단 지원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거야.” 지안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태강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졌다. 지원 규모가 커지는 건 물론이고 그렇게까지 판이 커진 재단을 윤준표가 제멋대로 없애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 인간도 이제 함부로 지랄은 못 하겠네. “지금 규모의 몇 배는 가능할 텐데. 고민할 시간은 줄 테니까—” “좋아요.” 태호의 말이 뚝 끊겼다. 지안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 이번에는 태호가 말이 없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결혼은 절대 못 한다며 버티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태도가 빨랐다. “해요, 결혼.” 태호의 시선이 지안의 얼굴에서 불쑥 내밀어진 손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빠르네.” “좋은 조건은 빨리 잡아야죠.” 조금 전까지 결혼이니 동거니 하며 얼굴을 붉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태호가 지안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잘해보자, 애기.” “……그 애기 소리는 그만하시면 안 돼요?” “싫은데.” 멈칫. 순간, 너무 덥석 좋다고 한 건 아닌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 부회장실을 나선 태호는 도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느긋한 걸음이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윤이 옆에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서 이사님께는 잘 말씀하셨습니까? 아까 보니까 엄청 당황하셨던 것 같던데요.” 태호는 대답 대신 입매를 희미하게 풀었다. 결혼은 절대 못 한다더니 재단 지원 얘기가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손부터 내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셈이 빠른 애였다. 그 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잘했어.” 짧게 답한 태호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오늘 퇴근 후에 바
태호는 잠시 지안을 바라봤다. “왜지?” “저랑 결혼하시는 게 부회장님한테도, 태강그룹에도 오히려 손해일걸요? 부회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저 소문 안 좋은 거.” “소문은 예쁜 여자의 액세서리 같은 거라며.” “…….” 지안의 입이 벌어졌다. 어제 레스토랑에서 제가 내뱉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되돌려준 것이다. “그, 그건 농담이었고요.” “진지하게 들었는데.” 담담한 말씨와 달리 묘하게 사람을 놀리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망했다. 완전히 말려들었다. 당황한 지안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번 꼬이기 시작한 말은 머리를 거칠 새도 없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결혼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부부가 되면 같이 살아야 하고, 또…….” 말끝이 흐려졌다. 태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자 지안은 외려 마음이 급해졌다. “그, 부부끼리는 뭔가…… 그런 것도 있을 거고. 근데 저는 그런 거 안 해봐서 잘 모르기도 하고…….” 말을 뱉고 나서야 지안은 제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미쳤나 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태호의 얼굴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때 태호가 픽 웃고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랑 자려고?” “네?!” 지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건지. 정작 태호의 낯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급하게 변명거리를 찾는데 태호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애기가 감당은 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울렸다. 애기라니. 아무리 열 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스물다섯이나 먹은 사람한테 애기라니. 조금 전 횡설수설했던 제 모습까지 떠오르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잠시 뒤 안쪽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남자가 문을 열어주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쫄지 말자. 짧게 마음을 다잡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집무실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조용했다. 짙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정돈된 공간에는 불필요한 장식 하나 없이 묵직한 분위기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태호가 있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훑고 있던 그가 지안이 들어서자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오늘은 짙은 차콜 컬러의 스리피스 슈트 차림이었다. 베스트까지 흐트러짐 없이 갖춰 입은 모습이 삭막할 만큼 정돈된 집무실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앉아.” 태호가 턱끝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지안은 태연한 척 소파에 앉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숨기지 못한 채 엉덩이만 살짝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제 몰골도 영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화장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머리도 대충 묶은 상태였다. 지금은 술 냄새만 안 나면 다행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책상 너머에서 태호가 잠시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 태도가 지안은 영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결혼 기사가 터졌는데도 조급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서류를 넘기는 손길도, 무심한 낯빛도 지나치게 태연했다. 지금 애가 타는 건 나뿐인가? 지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한가하신 거예요?” 태호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가한 건 네 쪽 같은데.” 태호가 손에 들린 서류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나마 존댓말을 붙이던 사람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말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오보 기사가 났는데, 적어도 사과든 해명이든 먼저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 있기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