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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세 배 더 좋은 조건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8 17:14:00

이영민이 떠난 뒤, 제이는 손에 쥔 명함을 잠깐 내려다봤다.

금박으로 박힌 '대표 이영민'.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의 세 배라니, 지난 생 마흔다섯 살 때도 만져본 적 없는 액수였다.

제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명함을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냉정하게 돌아갔다. 이영민의 회사는 지금 한창 몸집을 불리는 중이지만, 그만큼 자금 구조가 불안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봉 세 배라는 조건 뒤에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기반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회사가 몇 년 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커진다는 것도 제이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불안정함은, 그 성장 앞에 잠깐 거쳐 가는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회사의 앞날은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 자리가, 지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인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좋은 제안이긴 한데, 좋은 자리인지는 또 다른 문제지.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로비는 한산했다. 구두 소리만 대리석 바닥에 외롭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제이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틈 사이로 손 하나가 들어왔다.

준호였다.

늘 여유롭던 얼굴에, 지금은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닫혔다.

둘만 남은 좁은 공간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준호는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고, 제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까 로비에서 이영민과 나란히 서 있던 모습을, 어디선가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봉 세 배라니, 꽤 솔깃한 제안이었겠어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그냥 명함만 받은 거예요."

제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준호는 시선을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제이가 쥐고 있던 명함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듯 가져갔다. 그 순간 손가락이 잠깐 스쳤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모르는 사람 명함은 이렇게 잘 받으면서, 저한테는 왜 그렇게 선을 그어요?"

"준호 씨."

"보내기 싫은데... 다른 데로 가면 매일 얼굴 못 보잖아요."

준호는 명함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제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늘 친절하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까 그 사람, 이영민 대표라고 했죠. 유명하죠, 업계에서."

"...알아요?"

"모를 리가요. 저희 업계 사람인데."

준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한 번 멈췄지만, 아무도 타지 않았다. 문이 다시 닫혔다.

제이는 45년치 인생 경험도 무색하게,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에요. 당장 옮길 생각도 없고요."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끝이 살짝 떨렸다. 준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알아요. 그래서 더 놓치기 싫은 거고... 마음 바뀌지 않았음 해요."

준호가 명함을 제이의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로 손가락을 천천히 맞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도에, 제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대 가지 마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세 배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 내가 줄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준호가 먼저 손을 놓고 물러섰다. 마침 문이 열렸고,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옅게 웃으며 걸어 나갔다.

제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이 다시 닫히고 나서야, 제이는 겨우 숨을 골랐다. 방금 전까지 손바닥에 남아 있던 온기가,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는 동안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모니터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자꾸 신경 쓰였다.

마우스를 쥐자, 아직 식지 않은 손끝에 플라스틱의 차가운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본체가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 사무실 안에 낮게 깔렸다. 방금 전 엘리베이터 안의 온도와, 지금 손에 닿는 이 서늘한 감촉 사이의 간극이 묘하게 낯설었다.

사무실은 이미 퇴근한 사람들로 절반 넘게 비어 있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방금 엘리베이터 안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옆 팀 대리가 야근을 마치고 나가다 제이를 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제이 씨, 아직 안 갔어요? 얼른 들어가요."

"네, 저도 곧 정리하고 갈게요."

제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방금까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있었던 일이, 혹시 누구 눈에라도 띄었을까 싶어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책상 한쪽에는 조희철 과장이 흘리고 간 서류 뭉치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여기는 여전히 회사였고, 조심해야 할 눈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명함, 버렸습니까?]

제이는 화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손에 쥐고 있는데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스스로도 이게 도발이라는 걸 깨달았다.

...뺏으러 다시 갈까요? 아래층인데.

곧바로 날아온 답장에, 제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등을 곧게 세웠다.

책상 위에 놓인 이영민의 명함과, 손바닥에 아직 남은 준호의 온기 사이에서, 제이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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