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26. 오래된 이름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3 11:43:50

폐가 마당, 어둠이 짙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낡은 기와 조각이 발밑에서 서걱거렸다.

백건은 인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늦췄다.

그림자가 백건에게 달려들었다. 팔부터 붙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

백건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상대가 품에서 짧은 검을 뽑아 막아냈다.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켰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규현이 다급히 장부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서다 돌부리에 걸렸다. 몸이 기울며 장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끼워 두었던 낱장 몇 개가 튀어나왔다. 규현이 손을 뻗었지만, 종이들은 이미 수풀 사이로 흩어져 있었다.

백건이 다시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상대가 검을 거두며 외쳤다.

"그만! 나다, 멈춰라!"

백건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재경이냐?"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재경이었다. 소매 한쪽이 길게 찢겨 있었고, 그 아래 팔뚝에서 피가 배어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1. 중전의 선택

    대전 앞뜰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중전의 말이 허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뜰에 모인 누구도 섣불리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대신들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까지 고개를 들었던 자들도 하나둘 시선을 떨궜다.이운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방금 그 한마디로 조정의 분위기가 통째로 뒤집힌 참이었다.그때 뒤쪽에서 걸어 나온 이가 있었다. 진원군이었다. 방금 당도한 듯, 걸음에 서두름이 없었다.대신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오나 마마, 신들은 그저……""더 들을 말은 없습니다."중전의 목소리가 그 말을 끊었다. 대신이 입을 다물었다."중전마마의 말씀, 지당하십니다."진원군이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신들이 공연한 걱정을 입에 담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진원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방금 전 오간 말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중전이 그를 바라봤다."대감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다만 염려라는 것도, 한번 입 밖에 내면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지요.""중전마마께서 이리 나서 주시니, 저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전하의 보령이 염려스러운 때일수록, 왕실이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야지요."말은 더없이 공손했다. 하지만 진원군의 눈빛은 잠시도 중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마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대감의 뜻도 그러하시다니 다행입니다.""저야 늘 중전마마와 저하의 뒤를 든든히 받치고자 할 뿐입니다.""그 뜻, 전하께도 그대로 전해 드리고 싶군요. 지금 가장 듣고 싶어 하실 말씀일 테니."진원군의 입꼬리가 아주 잠깐 멈췄다."그리하지요. 중전마마의 뜻을 전하께 그대로 전해 올리겠습니다."이운은 그 짧은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승복이었지만, 속내까지 그러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중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눈은 웃지 않았다."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진원군이 다시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대신들도 뒤따라 흩어졌다.자리를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0. 위독

    침전 안은 숨소리마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의가 밤새 맥을 짚고 또 짚었다. 손끝에 닿는 맥이 자꾸만 가늘어졌다.어의가 상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맥이 아침보다도 약해지셨습니다."상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말씀은……""오늘 내일을 넘기시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어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 밖에 낸 말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이 일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중전마마께만 먼저 아뢰어라.""예. 다른 이들에게는 전하께서 그저 기력이 쇠하셨다고만 하겠습니다."상선이 황급히 물러났다. 발걸음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그 소식은 그날 오후, 조정에 가장 먼저 닿았다.누군가 먼저 흘린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번지는 데는 한식경이면 충분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던 말이었다.병세가 깊다는 말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오늘 내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었다."전하께서 며칠을 넘기기 어려우시다는 말이 사실입니까.""전하의 환후가 그리 깊으시다니……""국본께서 아직 조정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하신 터에, 이런 때일수록 종친 중 누군가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그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국정에 공백이 생겨서는 아니 됩니다.""종친 중에서도 그만한 그릇을 지니신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누구도 이름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향은 분명했다.전에도, 또 얼마 전에도 똑같은 말이 나왔던 자리였다. 다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름은 하나로 모였고, 그때마다 모든 게 그 이름 쪽으로 기울었다.대전 한쪽에서 백건이 그 소문을 전했다."저하,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알고 있다.""저하, 지금 침전에 드시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상관없다.""종친이라는 말, 결국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아니겠습니까."이운의 얼굴이 굳었다. 백건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9. 패를 쥔 신부

    아침 햇살이 처소 안으로 길게 들어왔다. 서령은 그 빛을 등지고 홀로 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그림자도, 종이에 적혀 있던 날짜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이 되자 몸은 평소처럼 움직였다.겁을 먹을 시간은 없었다. 저쪽이 서령을 지켜보고 있다면, 서령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할 일은 따로 있었다.서령이 문갑을 열어 하객 명단을 꺼냈다. 직접 초대한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몇몇 이름 옆에는 작은 점이 찍혀 있었다. 혼례 명목으로 꾸몄지만, 실은 서령이 고른 사람들이었다. 얼굴만 비출 이름과, 쓸모가 남은 이름을 서령이 직접 가려낸 결과였다.명단을 넘기는 손끝이 익숙했다. 누가 누구에게 신세를 졌는지, 누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서령은 전부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서령의 손가락이 한 이름 위에서 멈췄다.조명환. 호조의 낭관. 몇 해 전 진원군의 도움으로 자리를 지킨 자였다. 그때 받은 도움을 잊지 못해, 서령의 초대에도 두말없이 응한 사람이었다.서령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한식경 뒤, 조명환이 처소 밖에서 기척을 냈다. 걸음을 서둘러 온 기색이 역력했다. 서령이 들라 일렀다."아씨께서 소인을 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앉으세요. 긴 얘기는 아닙니다."조명환이 자리에 앉으면서도 눈치를 살폈다."무슨 일이신지요.""몇 해 전 대감께서 도와주신 일, 기억하고 계시지요."조명환의 얼굴이 굳었다."잊을 리가 있겠습니까.""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대감께 누가 될 일이라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조명환이 눈을 들었다."무슨 말씀이신지……"서령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래 날짜와 수량만 적혀 있고, 받는 이의 이름이 비어 있는 기록이었다."이 거래, 대감의 이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더 커지기 전에, 어느 상단이 맡았는지 조용히 알아봐 주세요."조명환이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봤다."대감 이름이…… 말씀이십니까.""아직은 확실치 않습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8. 갈라진 세 사람

    문이 닫힌 뒤에도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등잔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까지도 언성이 오간 자리였다.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말, 틀린 말은 아니다."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처음부터 내가 잘못 짚었는지도 모르지.""지금 와서 그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재경이가 원하는 대로 당장 쳐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느냐.""그건 아니잖아요. 저하도 아시면서."이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알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더 아프게 들렸다."채원이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금은 쫓아가지 마시라고요.""내버려 두라는 것이냐.""오라버니는 원래 혼자 해온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냥 둬요."이운이 입을 다물었다.내가 잘못한 건가.그 물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채원이 이운의 얼굴을 살폈다."자책하지 마세요. 그때 저하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신 거예요.""전부는 아니었다. 한 사람밖에 살리지 못했어.""그래서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이러시는 거잖아요."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채원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그래도 수사는 계속해야죠. 의금부 도사 쪽, 다른 방법으로라도요."이운이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을 다시 불러라."그 말에 두 사람 다 다시 탁자 앞에 앉았다. 재경이 비운 자리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탁자 위의 문서도 그대로 펼쳐진 채였다.재경은 그 길로 동궁을 나섰다.밤공기가 차가웠다. 걸음은 빨랐지만 방향은 없었다.누구도 뒤쫓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밟혔다.문득 어릴 적 담장이 떠올랐다. 횃불과 비명, 그리고 형님의 마지막 뒷모습. 그 담장 너머의 풍경은 지금도 선명했다.아버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변명조차 하지 않는 그 얼굴이 가장 오래 남았다.그날 살아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그 사실은 지금도 그대로였다.재경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물증을 기다릴 시간, 저는 없습니다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7. 여섯 번째 사람

    동궁 밀실, 탁자 위에 문서 더미가 쌓여 있었다. 어젯밤의 서늘한 공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채였다. 다섯 사람 모두 뜬눈으로 밤을 지샌 얼굴이었다.백건이 마지막 묶음을 내려놓았다."한도겸 사건의 취조 기록입니다.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가져왔습니다."채원이 맨 위의 문서를 펼쳤다. 취조 날짜와 관련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몇몇 진술에는 붉은 먹으로 표시가 남아 있었다. 표시된 자리마다 진술이 중간에 끊겨 있었다.백건의 눈 밑에는 밤새 기록을 찾아낸 피로가 짙게 어려 있었다.규현이 그 옆에 최근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이운과 재경은 탁자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의 손끝을 지켜봤다. 어젯밤의 앙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밤에만 접선했고, 가명을 썼고, 전부 제삼자를 거쳤어요. 지금 수법이랑 똑같네요."재경이 그 말을 듣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제가 쫓던 그 돈줄도, 날짜를 보면 전부 그믐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더 급하게 느껴집니다."채원이 재경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말이 빨랐다. 눈빛도 평소와 달랐다.채원이 옛 기록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잠깐만요. 이 사람, 죽은 뒤에도 물건을 받아 갔다고 되어 있어요."규현이 문서를 받아 들었다."사망한 날짜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습니다."채원이 다음 장을 넘겼다."이런 기록이 또 있습니까?"백건이 다른 문서 묶음을 끌어왔다."찾아보겠습니다."백건이 묶음을 펼쳐 이름과 날짜를 하나씩 맞춰 나갔다.한참 뒤, 백건이 고개를 들었다."같은 수법으로 받아 간 기록이 네 건 더 있습니다. 전부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입니다."규현이 그 수를 세어봤다."그럼 옛 기록에서만 다섯입니다."채원이 숨을 짧게 내쉬었다.채원이 규현이 가져온 현재 장부를 내려다봤다."혹시 이 장부에도 같은 수법이 있을까요?"규현이 장부를 다시 펼쳤다. 군량을 받아 간 자들의 이름과 병적에서 옮겨 적은 기록을 차례로 대조했다.한 줄에서 손이 멈췄다."……여기도 있군요."이운이 고개를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6. 오래된 이름

    폐가 마당, 어둠이 짙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낡은 기와 조각이 발밑에서 서걱거렸다.백건은 인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늦췄다.그림자가 백건에게 달려들었다. 팔부터 붙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백건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상대가 품에서 짧은 검을 뽑아 막아냈다.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켰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규현이 다급히 장부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서다 돌부리에 걸렸다. 몸이 기울며 장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끼워 두었던 낱장 몇 개가 튀어나왔다. 규현이 손을 뻗었지만, 종이들은 이미 수풀 사이로 흩어져 있었다.백건이 다시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상대가 검을 거두며 외쳤다."그만! 나다, 멈춰라!"백건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익숙한 목소리였다."...재경이냐?"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재경이었다. 소매 한쪽이 길게 찢겨 있었고, 그 아래 팔뚝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백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칼을 거두는 손이 떨렸다."다쳤구나.""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재경이 팔을 움켜쥐었다."자네인 줄 몰랐네.""대체 누굴 쫓고 있었던 것이냐?""의금부 도사에게 돈을 나르는 자. 이 담장을 넘기에 뒤따라왔는데 놓쳤어."백건이 담장 너머를 살폈다."그자가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그때 규현이 낮게 욕설을 뱉었다."젠장. 기록이 사라졌네."규현은 수풀을 뒤졌지만 끝내 종이를 찾지 못했다. 달빛만 수풀 위로 희미하게 번졌다."최근 두 달 치일세.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백건의 표정이 굳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이 사라진 이상, 남은 장부만으로는 의혹을 입증하기 어려웠다.재경이 주위를 둘러봤다."여기서 더 지체하면 우리까지 들키겠네. 일단 자리를 뜨세."재경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칼부림이 오간 자리였다. 지체할수록 위험했다. 세 사람은 서둘러 폐가를 빠져나갔다.그날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