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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정체 재의심

작가: 지호
last update 게시일: 2026-10-26 16:53:42

아침부터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문안을 청하러 온 종친과 대신들로 붐볐다.

전하의 환후가 깊어진 뒤로, 그 발길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채원도 전하의 안부를 여쭙기 위해 대전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이 모인 날이었다.

요 며칠 궐 안에 돈 말 때문인지, 다들 채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전으로 드는 길목에 상궁 둘이 서 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동궁 소속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중 하나가 채원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세자빈마마, 송구하오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주변의 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도 고개를 돌렸다. 길 끝에 서 있던 궁녀들까지도 숨을 죽였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채원이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세요."

"마마의 근래 언행이 예전과 사뭇 다르시다는 말이 있사온데, 혹 몸이 불편하신 것은 아니신지 염려되어 여쭙습니다."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못 들은 척하면서도 귀는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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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7. 국상

    대전 문에 흰 천이 걸렸다.전각마다 걸린 색이 하루 만에 바뀌었다. 단청 위로 흰 휘장이 덧씌워졌고, 기와 끝에도 흰 띠가 묶였다.곡성이 궁 전체로 퍼졌다. 처음엔 몇몇 상궁의 울음이었지만, 금세 수백의 목소리가 뒤섞였다.소복으로 갈아입는 궁인들의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졌다.색을 입은 옷은 하루 사이 전부 궤 속으로 들어갔다. 분향 냄새가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번졌다.향이 다 타기도 전에 새 향이 꽂혔다.종이 울렸다. 멀리서 또 다른 종이 그 소리를 받았다.궁 전체가 같은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까지 붉고 푸르던 궁이 하루 만에 흰빛 하나로 가라앉았다.이운은 대전 뒤편 회랑에 홀로 서 있었다.곡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이운의 어깨가 한 번 떨렸다. 그뿐이었다.채원이 다가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운의 옆에 서서,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이운은 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빼지도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곡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돌아나갈 때까지, 둘 중 누구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회랑 끝에서 궁인 몇이 지나갔지만 두 사람 쪽은 보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불어 상복 자락을 흔들었다.조정은 국상 중에도 쉴 틈이 없었다. 상복을 입은 대신들이 하나둘 편전으로 모여들었다.발소리마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공식적인 애도의 시간은 끝났고, 이제는 다음을 정해야 하는 시간이었다.편전 안 공기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다들 흰 상복을 입었지만, 그 밑에 깔린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이운이 상석에 앉자 좌중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모였다가 다시 흩어졌다.진원군이 들어섰다. 역시 상복이었다. 걸음에 흐트러짐이 없었다.자리에 앉기 전, 먼저 예를 갖췄다."전하의 상을 당해 조정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을 줄 압니다."좌중이 고개를 숙였다."하오나 소신이 염려되는 것은 오직 하나, 국상 중 국본의 자리가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말을 잠시 끈 뒤, 다시 이었다."국정의 공백이 길어지면 안 되니, 당분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6. 유언

    이운이 침전까지 내달렸다. 뒤따르던 나인들이 미처 따라붙지 못할 정도였다. 복도를 지나는 내내 궁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길을 비켰다. 밤이 깊어 등롱 몇 개만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밤바람이 소맷자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문 앞에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방 안은 조용했다. 등불 두어 개만 낮게 타고 있었다. 탕약 냄새가 공기 속에 무겁게 배어 있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중전이 이미 왕의 곁에 앉아 있었다.왕의 얼굴은 눈에 익지 않을 만큼 핏기가 없었다. 볼이 움푹 꺼져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힘겹게 들썩였다.중전의 눈 밑도 어두웠다. 밤새 자리를 지킨 듯했다.중전이 이운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잠깐 정신이 돌아오셨다. 길지는 않을 것이다."이운이 무릎을 꿇고 다가앉았다."아버님."왕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을 뜨긴 했지만 시선은 아직 또렷하지 않았다."운....이냐."목소리가 바람 빠진 듯 가늘었다."예, 아버님. 여기 있습니다."왕의 손이 이불 밖으로 힘겹게 나왔다. 이운이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뼈만 남은 손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이렇게 마른 손은 아니었다.이운은 품속에 넣어둔 교서를 떠올렸다.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른 손을 쥔 순간, 준비해 온 말이 나오지 않았다.왕이 한동안 이운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왕이 숨을 몰아쉬었다. 몇 번을 그렇게 가쁘게 몰아쉬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네게...... 못다 한 말이 있다."이운이 몸을 숙였다."말씀하십시오, 아버님.""네 스승...... 그 사람이 죽은 일 말이다."이운의 눈이 흔들렸다. 오래전,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매일 새벽 글을 가르치던 사람, 꾸짖을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병으로 죽었다고만 들었다. 더 캐묻지 않았던 건, 그때는 그럴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왕이 다시 기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5. 교서

    백건의 말이 끝나자 방 안 공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남아있던 온기가 전부 걷혔다.이운이 먼저 일어섰다."자리를 옮기자. 여기서 들을 말은 아니다."세 사람은 동궁 안쪽 깊숙한 밀실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쓰지 않는 방이었다. 창이 작아 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촛불 두 개가 전부였다. 바깥 기척이 전혀 닿지 않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딱 맞는 방이었다.자리에 앉자마자 이운이 말했다."가져오라."백건이 자리를 옮겨 탁자 쪽으로 다가서며 짧게 보고했다."의금부 창고 뒤쪽, 쓰지 않는 서가 틈에 끼워져 있었다 하옵니다. 치우던 서리가 우연히 발견했다 하옵니다."채원도 뒤따라 일어났다. 백건이 품에서 나무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겉면이 거칠었고, 자물쇠 대신 끈으로만 봉해져 있었다. 급하게 숨긴 흔적이었다. 끈 매듭도 평소 관아에서 쓰는 방식과는 달랐다.이운이 끈을 풀고 함을 열었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꺼내 펼치자 종이 질감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결이 곱고 두꺼운, 궐 안에서도 흔히 쓰이지 않는 상급 종이였다."교서 용지네요."채원이 낮게 말했다. 손끝으로 종이 가장자리를 살짝 쓸어봤다. 끝부분이 깔끔하게 재단돼 있었다. 급하게 베껴 쓴 종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마련해둔 종이라는 뜻이었다.이운이 글귀를 눈으로 훑었다. 끝까지 읽은 뒤 미간이 좁아졌다.내용은 간단했다. 보위를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는 한 줄과, 그 뒤를 이을 이름 한 줄.이운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이휘."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채원도 그 이름을 확인했다."진원군 대감의 아드님이요?""그렇다."이운이 문서를 다시 내려다봤다."이휘는 이 자리를 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교서에는 그 이름이 올라 있어."채원의 표정이 가라앉았다."본인 뜻은 상관없다는 거네요. 누군가 이휘 도련님을 얼굴로만 쓴 거예요."이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뒤에서 움직인 사람은 따로 있다는 소리다.""날짜를 보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4. 불안한 승리

    전하의 환후가 깊어진 뒤로, 조정은 하루가 다르게 날카로워지고 있었다.종친들의 발길이 늘었고, 대신들 사이에서도 말이 늘었다. 그 틈에서 채원을 향한 소문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동궁 안은 아침보다 더 조용했다. 조용한 것치고는 이상한 조용함이었다.한낮이 가까운 시각인데도 처소 밖은 한산했다. 며칠째 이어진 불안 탓에, 채원은 간밤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그 기운이 방 안 공기까지 무겁게 가라앉혀 놓은 듯했다.설이가 다과상을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얼굴에는 아직 걱정이 남아 있었다.찻잔을 놓는 손끝도 평소보다 분주했다."대전 앞 일은 벌써 궐 안에 다 퍼졌습니다. 다들 마마께서 그 자리에서 그 둘을 완전히 꺾으셨다고 합니다."그 말이 벌써 처소마다 한 바퀴를 돈 모양이었다."그런데 네 얼굴은 왜 그렇게 안 풀렸느냐.""이겼다고 해서 소문이 꺼지는 건 아니니까요. 증명할 길이 없는 말이라, 오히려 더 오래갈까 걱정입니다."오늘 아침 대전 앞에서 겪은 일 때문인지, 다리에 아직 힘이 덜 풀린 것도 같았다.채원도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상궁과 대신의 기세는 꺾었지만, 정작 소문의 뿌리는 그대로였다.증명할 수 없는 말은, 반박해도 사라지지 않고 그냥 옆으로 비켜서 있을 뿐이었다.게다가 지금은 전하의 환후로 조정 전체가 뒤숭숭한 때였다.이런 때에 도는 소문은 평소보다 훨씬 멀리, 훨씬 빠르게 퍼졌다.누군가 작정하고 키운 말이라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먼저 손을 써야 할 때였다.오늘 아침의 승리는,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설이가 물러간 뒤, 채원은 한참을 창가에 앉아 있었다.바깥은 아직도 조용했다. 상궁들의 눈빛과 대신의 흔들린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운이 들어섰다. 평소라면 서궤 앞에 앉아 보고부터 받았을 시각이었다.걸음에 평소와 다른 급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뒤따르던 상선이 미처 전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3. 정체 재의심

    아침부터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문안을 청하러 온 종친과 대신들로 붐볐다.전하의 환후가 깊어진 뒤로, 그 발길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채원도 전하의 안부를 여쭙기 위해 대전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이 모인 날이었다.요 며칠 궐 안에 돈 말 때문인지, 다들 채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대전으로 드는 길목에 상궁 둘이 서 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동궁 소속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중 하나가 채원을 발견하고 다가왔다."세자빈마마, 송구하오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주변의 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도 고개를 돌렸다. 길 끝에 서 있던 궁녀들까지도 숨을 죽였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채원이 고개를 들었다."말씀하세요.""마마의 근래 언행이 예전과 사뭇 다르시다는 말이 있사온데, 혹 몸이 불편하신 것은 아니신지 염려되어 여쭙습니다."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못 들은 척하면서도 귀는 세우고 있었다.채원이 잠시 상궁을 바라봤다.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상궁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었다.여기서 화를 내거나 매섭게 몰아붙이면, 그 모습부터 다음 소문의 증거가 될 판이었다."내가 변했다면, 그건 겪은 일이 사람을 바꾸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한 일을 겪고도 그대로인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쪽이 더 이상해 보일 겁니다."상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하오나 예전 아기씨께서는 이리 당당히 말씀하시는 성정이 아니셨다 들었습니다."채원의 눈이 상궁을 똑바로 향했다."내가 겪은 일을 알고도, 예전과 똑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씀,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상궁의 얼굴이 굳었다.상궁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소맷자락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런 뜻이 아니옵니다.""그런 뜻이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상궁이 말을 잃자마자,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32. 낯선 눈

    아침 일찍부터 처소 안이 분주했다. 설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채원이 그 여인의 생김새를 일러 둔 참이었다."알아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마마께서 말씀하신 생김새만 듣고도 바로 알았습니다.""누구냐.""분이라고, 윤가에 있을 때 소인과 함께 지냈던 침모입니다. 소인보다 몇 해 위였는데, 어릴 적 마마의 옷도 여러 벌 지었습니다."설이의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에게는 낯익은 얼굴이지만, 채원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낯선 얼굴이었다. 윤서아로서의 기억이 없는 채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은 설이 앞에서 티 내지 않았다."그 집이 그리된 뒤로는 못 봤던 사람이냐.""예. 다들 흩어진 뒤로 소식도 몰랐습니다. 이런 데서 다시 볼 줄은 몰랐습니다.""지금은 어디 소속이냐.""그것까지는 아직 모릅니다. 더 알아보겠습니다.""수고했다."설이가 몸을 낮추고 물러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작았다.채원이 창밖을 내다봤다. 햇살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밝았다. 겉으로는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하지만 분이가 왜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그날 오후, 회랑 한쪽에서 나인들이 모여 있었다. 빨랫감을 나르다 잠시 멈춰 선 자리였다. 설이도 지나던 길에 그 틈에 섞여 있었다. 분이도 그 자리에 섞여 있었다. 손에는 전과 같은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마마는 제가 알던 그 아기씨가 아니신 듯합니다."분이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주변에 다 들릴 만큼은 됐다.나인 하나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쓰러지신 뒤로 많이 달라지셨다고들 하지 않습니까."다른 나인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그야 큰일을 겪으셨으니 그러실 수도 있지요.""그럴 수도 있지요. 다만 제가 아는 아기씨는, 이런 걸음걸이가 아니셨습니다."분이가 짧게 덧붙였다."그냥, 제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분이는 더 묻기도 전에 보퉁이를 고쳐 들고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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