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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강시아
서인경도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저도 왕야와 장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어차피 저를 좋아하지도 않으니, 일단 화리서에 서명하고 폐하께서 운명하신 후에….”

곧바로 이어진 연기준의 냉랭한 시선에 서인경은 결국 하려던 말을 도중에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감히 이 나라의 폐하를 주저하는 말을 입에 담다니. 너 살기 싫다고 네 할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십오황자의 목숨까지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서인경은 뒤늦게야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연기준은 황제의 동생이니, 아무리 죄를 묻는다고 할지라도 절대 그의 목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소문이라도 나면 화를 입는 것은 역시나 서씨 가문이었다.

‘뭐야, 이 인간 설마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설마….’

‘구족을 멸할 대죄를 저지른 상대가 자신의 왕비라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는 거겠지.’

서인경이 말이 없자 연기준은 정색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 성격 좀 죽이고 매사에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가법으로 다스리겠다.”

상왕부의 가법은 장군부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혹독했다.

‘곤장 오십 대면 그냥 나더러 죽으란 소리잖아?’

서인경은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냥 안 하면 될 것을, 뭘 그리 겁을 주십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가려다가, 입구에 도착해서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고작 그런 말에 제가 겁먹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전 끝까지 이혼을 주장할 것입니다.”

연기준은 긴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꿈꾸던 화려한 싱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방으로 돌아온 서인경도 힘이 풀렸다.

‘다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서씨 가문의 입지 또한 현재로서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대대로 쌓아 올린 수많은 공적은 오히려 가문의 족쇄가 되었다. 새로 즉위한 황제가 그들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병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시라고 하는 게 좋겠어.’

‘고모도 십오황자를 위해서 조용히 지내셔야 해. 멍청한 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새 황제가 즉위하기 전에 모든 걸 내려놓고 살아서 빠져나가야 해.’

오만가지 생각이 들자 서인경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침상에 누우려는데 침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베개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하나를 집어 문밖을 지키는 시종에게 건넸다.

“이걸 왕야의 서재로 가져가렴.”

평이가 경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마마, 정말 왕야와 각방을 쓰시려는 겁니까? 그건 아니되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마마!”

서인경은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각방 한번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려워?’

“내가 요즘에 밤잠을 설쳐서 신변에 사람이 있으면 잠들기 힘들어서 그런다. 잠을 못 자면 자꾸 화가 나고 치통도 생겨서 끼니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테고… 그러면 머리카락도 뭉텅이로 빠질 테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평이가 그녀의 손에서 베개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인, 바로 왕야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서인경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평이의 통통한 볼을 꼬집었다.

“이래야 착하지!”

잠시 후, 평이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이제 안심하고 잠드셔도 됩니다, 마마. 아무도 마마의 단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소인이 밤새 문밖을 지키겠습니다.”

“날도 추운데 너도 돌아가서 자렴. 일이 생기면 바로 부를 터이니.”

평이는 뒤돌아서는 서인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마마는 자상한 분이셨어!’

이곳으로 오기 전, 그녀는 왕비가 얼마나 까탈스럽고 성미가 포악한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모두가 그녀가 이곳에 와서 편히 살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 지금 보면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흥 나중에 알고 얼마나 후회하나 보자!’

한편, 서인경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단잠을 잤다.

그녀의 가장 큰 강점이라면 어딜 가든 잘 먹고 잘 잔다는 것이었다.

반면 서재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연기준의 얼굴은 초췌하고 음침해 보였다.

이때 호위 연풍이 안으로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왕야, 서왕부에서 노왕비의 며칠 후에 있게 될 노왕비의 칠순 생신 연회에 왕비와 함께 오시라고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연기준은 뻐근한 목덜미를 마구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관리인에게 서재에 편한 침상을 가져다 놓으라고 해야겠군.’

“관리인에게 창고로 가서 선물을 준비해 놓으라 하거라.”

연풍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준이 물었다.

“왕비는 지금 뭐 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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