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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한마음
다음날, 손기욱은 매화당에서 장창을 한참 휘두르다가 짜증스럽게 창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조태복이 다가와서 아뢰었다.

“송학당에서 나리를 모셔오라고 사람을 보냈네요.”

손기욱은 창을 그의 품으로 던져주며 차갑게 말했다.

“안 가.”

은근슬쩍 혼사를 재촉하던 노부인을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불편한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오래전에 부상을 입은 그의 어깨는 변방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날만 추워지면 말썽이었다. 경성에 돌아온 이후로 침술로 치료를 받았는데도 완치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점점 어깨가 무거워지고 시큰거려서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다 아침에 창을 좀 휘둘렀다고 또 발작할 줄이야.

손기욱은 갑자기 어제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던 하얗고 보들보들한 손이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송학당, 연경은 노부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드리고 있었다.

손기욱이 안 온다고 전갈을 보내면서 그녀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송지운이 회임하기까지 두 달 정도 시간이 남았다. 회임 진단을 받은 날 그녀는 부군의 환심을 사고자 바로 연경을 손유민의 통방으로 보내 버렸다.

연경은 초조했지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그녀의 안마 기술을 극찬했다.

“나이가 드니까 찬바람만 맞아도 머리가 아프네. 내 방 아이들도 안마를 해주지만 너처럼 편안하지는 않더라고.”

“노부인, 저희가 안마를 못한다고 꾸중하시는 것 같네요.”

옆에 있던 어멈들이 웃으며 농을 걸었다.

연경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인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소인이 어찌 어멈들의 솜씨를 따라가겠어요. 작은 마님께서는 혼인하기 전에 노부인께 효도한다고 안마를 배우려 했는데 혼례식 준비를 서두르다 보니 소인이 배운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송지운을 치하하며 비취옥 팔찌를 하사해 주었다.

송학당을 나온 송지운은 기분이 좋았는지 연경의 당직을 취소했고 연경은 드디어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셋째 날, 송학당에 간 송지운 부부는 손기욱과 마주쳤다.

예를 행한 뒤, 연경은 자연스럽게 노부인의 곁으로 가서 머리를 안마해 주기 시작했다.

손유민은 불안한 눈빛으로 손기욱의 눈치를 살피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며칠 전에 술이 좀 많이 취해서 결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분을 잡치게 해드렸다면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손기욱은 무심한듯 그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

옆사람은 몰라도 손유민은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애써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손기욱은 그런 그를 보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갑자기 생긴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로 따지면 그에 비해 고작 열 살이 어렸다. 비록 양육의 수고를 덜긴 했지만 훈육으로 인성을 바꿀 나이도 지난 것 같았다.

그는 그날 밤 가산 뒤편으로 걸어갈 때 걸음걸이가 멀쩡했던 손유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연기는 꽤나 잘하는 모양이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손유민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 그날 밤에 배 시랑의 차남과 술을 좀 마셨는데 아버지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들려서 언쟁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술로 혼내줘야겠다고 마음먹고 내기를 하였는데 녀석이 쓰러질 때까지 마시다 보니….”

송지운도 손유민의 곁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부군께선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주먹다짐은 할 수 없었지만 아버님의 명성을 더럽히는 소문은 용납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노부인은 불쾌한듯 손기욱을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왜 말이 없어? 어서 애들 일어나라고 하지 않고.”

그래도 손기욱이 말이 없자, 노부인은 손유민에게 물었다.

“무슨 소문을 들었길래 평소에 술도 안 좋아하는 녀석이 취할 정도로 마셨니? 어서 아버지께 앞으로는 술내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렴.”

“사람들이 아버지가 말 못할 지병이 있다면서….”

손유민은 조심스레 손기욱의 눈치를 살피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무안 후작가 사람이니 아버지의 명성을 더럽히는 소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얘기로 그날 자신이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린 일을 덮으려는 수작이었다.

손유민이 대놓고 무슨 지병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노부인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노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소문에 대해서는 노부인도 들은 바가 있었다.

어느 입 싼 놈이 그런 소문을 냈는지는 모르나, 이미 귀족가에서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연회를 열어 귀족 여식들을 초대하고 손기욱의 혼사를 정하려 한 것이었다.

손기욱은 피식 웃으며 노부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연경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되었다. 그날 보았던 그의 거친 손길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만들 해. 유민이도 네 체면을 지켜준다고 한 일이 아니니. 효에서 출발한 일이니 그리 각박하게 굴 필요 없어. 둘 다 일어나렴.”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유민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유민은 손기욱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깨가 시큰거린다면서요? 저 아이는 제 방에서 일하는 시종인데 안마 기술이 꽤 괜찮습니다. 저 아이를 시켜 어깨를 주물러드리라고 할까요?”

아부로 들리는 말이지만 손기욱은 말 속에 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경은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이니 뭘 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손기욱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말을 마친 그는 바로 일어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손유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노부인을 바라보았고 노부인은 그런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어깨가 많이 아파서 밤에 잠도 잘 못 잔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

“할머니, 연경이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노부인은 손유민의 효심을 보고 허락해 주었다.

송지운은 매화당까지 따라갈 수 없으니 송학당에 남아 노부인과 담소를 나누었다.

밖으로 나온 손유민은 연경에게 입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연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유민은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그녀의 탐스러운 볼을 보고 있자니 다시 욕구가 치밀었다.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어서 선을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매화당에 도착했다.

손기욱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손유민은 조용히 연경에게 눈짓했다.

연경은 조심스레 손기욱의 곁으로 다가가 예를 행하며 물었다.

“나으리, 소인이 어깨를 주물러드릴까요?”

손기욱이 말이 없자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유민은 그가 거절의 말이 없자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손기욱은 짜증스럽게 손유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안 가고 거기서 뭐 해?”

손유민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기욱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술을 멀리하고 글공부에 힘쓰도록 해.”

손유민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경을 힐끗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밖에는 손기욱과 연경만 남게 되었다.

매화당에는 잡일을 하는 시녀들 외에 손기욱은 신변에 따로 시녀를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차가 차가워졌는데도 아무도 와서 물을 갈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군영에 오래 몸담고 있은 손기욱이기에 그런 일로 시종들을 꾸중하지 않고 식어버린 차를 그대로 들이켰다.

연경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으리, 어깨가 시큰거릴 때는 녹차가 좋지 않습니다. 소인이 다른 차를 우려드리지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숨결이 손기욱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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